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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 그리움이 너를 부를 때 원문보기 글쓴이: 은수기
거리의 변호사 1
지은이: 존 그리샴
1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가 내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처음에는 그를 보지 않았다. 하
지만 냄새는 맡았다. 담배와 싸구려 포도주 냄새, 거기에 오랫동안 비누칠이라고는 해 본 일
이 없는 노숙자의 냄새가 뒤섞여 몹시 고약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우리 둘뿐이
었다. 마침내 내가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먼저 눈에 띈 것은 장화였다. 검은색의 더러
운 장화는 너무 커 보였다. 닳고 해진 트렌치 코트는 무릎을 덮고 있었다. 코트 속의 더러운
옷들이 허리께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그는 땅땅해 보였다. 비만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
다. 그러나 잘 먹어 살이 찐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겨울이면 워싱턴의 노숙자들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전부 몸에 걸치는 것 같았다.
그는 흑인 중늙은이였다. 턱수염과 머리는 반쯤 셌는데, 몇 년 동안 깍지도 감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두꺼운 색안경을 쓰고 똑바로 앞만 보며 나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는 머쓱해졌다. 왜 내가 저런 자를 훔쳐보는 거지?
그는 이곳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의 건물이 아니었고, 그의 엘리베이터가 아니었다.
이곳은 그의 경제 형편으로 어슬렁거릴 수 있는 곡이 아니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변호사
들은 여덟 개의 층을 차지하고 시간당으로 요금을 청구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7
년을 보낸 나조차도 지금까지 그 엄청난 요금에는 영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는 추위를 피해 들어온 거리의 부랑자에 불과했다. 워싱턴 시내에서는 늘 있는 일이었
다. 하지만 이런 쓰레기를 처리하라고 경비원을 두는 건데.
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멎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그가 단추를 누르지 않았다는 사실, 즉
층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드레이크
& 스위니 법률 회사의 화려한 대리석 로비에 내려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가 엘리베이터
안에 서서 여전히 나를 무시한 채 앞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의 매우 쾌활한 안내원들 가운데 하나인 마담 드비어가 그녀 특유의 거드름 피우는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내가 말했다.
"엘리베이터 주의해요."
"왜요?"
"부랑자예요. 경비원을 부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사람들은 정말."
그녀는 짐짓 프랑스 액센트를 흉내냈다.
"그리고 소독약도 좀 준비하고."
나는 외투에서 팔을 빼며 걸어갔다. 벌써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잊고 있었다. 오후 내내
쉬지도 못하고 회의를 해야 했다. 중요한 사람들과 중요한 일을 협의해야 했다. 모퉁이를 돌
며 내 비서 폴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첫 총소리가 났다.
마담 드비어는 책상 뒤에서 일어서서,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부랑자가 들고 있는 끔찍
하게 긴 권총의 총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마담 드비어 곁에 처음 나타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나를 향해 정중하게 총을 겨누었고, 나 역시 그녀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고 말
았다.
"쏘지 말아요."
나는 말하며 두 손을 쳐들었다. 영화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조용히 해."
그가 중얼거렸다. 대단히 차분한 태도였다.
내 뒤의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가 소리를 질렀다.
"총을 갖고 있어!"
이어 웅성거림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소리가 희미해지면서 동료들은 뒷문으로 사라
졌다. 저러다 아예 창 밖으로 뛰어내리려 할지도 모르겠군.
내 바로 왼쪽에는 묵직한 나무문이 있었다. 그 너머는 커다란 회의실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곳에는 소송부 소속 여덟 명의 변호사가 모여 있었다. 사람을 씹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이 일인지라, 두려움이라고는 모르는 고집 센 변호사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억센 사
람이 래프터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어뢰 같은 싸움꾼이었다. 다름 아닌 그가 회의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더니 말했다.
"왜 이리 시끄러워?"
총신이 나에게서 그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바로 그가 원하던 것
을 손에 넣은 셈이었다.
"총 내려놔."
래프터가 문간에서 명령했다. 거의 그와 동시에 또 한번의 총성이 대기실에 울려퍼졌다.
총알은 래프터의 머리에서 한참 위에 있는 천장 어딘가를 뚫었지만, 그것으로 래프터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인간임이 확인되었다.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총을 다시 나에게 돌리
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순순히 래프터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내가 바깥에서 마지
막으로 본 것은 공포에 사로잡혀 책상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마담 드비어, 그녀의 목에
걸린 헤드폰 수화기, 쓰레기통 옆에 단정하게 놓인 그녀의 하이힐이었다.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문을 쾅 닫더니 총을 공중에 휘저어, 여덟 명의 소송 변호사들이
그것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효과를 발휘한 것 같았다.
모두들 총의 소유자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보다는 총이 발사되고 난 뒤에 풍기는 화약 냄새
에 더 민감한 것 같았으니까.
방 중앙에는 긴 탁자가 있고, 그 위에는 조금 전까지도 몹시 중요하게 여겨졌던 서류와
문서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벽에 일렬로 늘어선 창문들은 주차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복도
로 통하는 문은 두 개였다.
"모두 벽에 붙어."
총이 좋은 지휘봉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두들 얼른 벽으로 향했다. 이어 그는 총을 내 머
리 가까이에 들이대고 말했다.
"문 잠가."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벽을 향해 서둘러 움직이는 여덟 명의 소송 변호사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얼른 문을 잠그고, 확인을 바라는 아이처럼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를
보았다.
어쩐 일인지 우체국에서 일어났다. 그 끔찍한 총기 난사 사건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불만을 품은 우체국 직원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무기를 들고 들어와 동료 직원 15명을 쓸어
버린 사건 말이다. 이어 놀이터 대학살 사건도 떠올랐고, 패스트푸드점 살육 사건도 떠올랐
다.
그런 사건의 피해자는 무고한 아이들이나 품위 있는 시민들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안 그
래도 미운 털이 박힌 한 무더기의 변호사들 아니냐!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총으로 밀치기도 하면서 여덟 명의 소
송 변호사들을 벽에 세웠다. 이윽고 그들의 위치가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나에게로 주의를
옮겼다. 이 자가 월 원하는 걸까? 질문이라도 하려는 걸까? 그렇다면 염병할, 어떤 답이라도
다 얻어낼 수 있겠지. 나는 색안경 때문에 그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 눈을
볼 수 있었다. 총구는 여덟 명의 소송 변호사들을 향하고 있었다.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더러운 트렌치 코트를 벗더니, 마치 새 것이라도 되는 양 잘 개
어서 탁자 중앙에 놓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괴롭혔던 냄새가 다시 코를 자극했다. 그러
나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탁자 끝에 서서 다음 옷을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큼직한 회색 카디건이었다.
카디건이 큼직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밑에는 붉은 막대들이 한 줄로 그의 허리에 묶
여 있었다. 경험 없는 내 눈에는 그것이 다이너마이트로 보였다. 막대의 위와 아래로부터는
색깔을 칠한 스파게티 같은 전선들이 뻗어나와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은색 도관용 테이프가
막대들을 한데 묶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문으로 돌진하고 싶었다. 그리고 운에
맡기는 것이다. 자물쇠를 향해 손을 뻗을 때 한 발이 빗나가고, 문을 열고 복도로 몸을 던질
때 또 한 발이 빗나가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릎이 흔들거리고 소리와 탄식 소
리가 새어나왔다. 우리를 포로로 잡은 남자는 그 소리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조용히 해요."
그는 참을성 있는 교수와 같은 말투로 말했다. 나는 그의 침착한 태도에 기가 죽었다. 그
는 허리께의 스파게티 같은 전선 몇 가닥을 만지작거리더니, 이어 커다란 바지의 호주머니
에서 노란 나일론 끈 한 다발과 접는 칼 하나를 꺼냈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겁에 질린 얼굴들을 향해 총을 한참 휘두르더니 말했다.
"난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아."
듣기에는 좋은 말이었지만, 진담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세어 보니 빨간 막대는 12개
였다. 순식간에 고통 없이 가기에는 충분한 양이군. 그것 하나는 틀림없었다.
순간 총이 다시 나를 향했다.
"네가 저 사람들을 묶어."
래프터는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약간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보시오, 당신이 원하는 게 대체 뭐요?"
세 번째 총알이 래프터의 머리 위로 날아가더니 누구에게도 해를 주지 않고 천장에 처박
혔다. 그러나 소리는 대포소리 같았다. 어떤 여자가 로비에서 비명을 질렀다. 마담 드비어일
까? 래프터는 허리를 굽혔다.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데, 엄스테드의 두툼한 팔꿈치가 그
의 가슴 한가운데를 쿡 찔러 벽에 기댄 자세로 되돌려 놓았다.
"입 다물고 있어요."
엄스테드가 이를 악문 채 내뱉었다.
"당신이라고 하지 마."
장화를 신은 남자가 말했다. 즉시 당신이라는 말은 사라졌다.
"그럼 뭐라고 부르면 좋겠습니다?"
내가 물었다. 내가 인질들의 지도자가 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예의
를 갖추어 그 말을 했다. 장화를 신은 남자도 나의 예의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
"그냥 형씨라고 해."
그러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형씨가 아주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순간적으로 그가 전화기를 총으로 쏴 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러나 그는 전화기를 향해 손짓을 했다. 나는 전화기를 그의 바로 앞에 갖다 놓았다. 그는 왼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오른손으로는 여전히 권총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권총은 여전
히 래프터를 향하고 있었다.
만이리 우리 아홉 명에게 투표권이 있다면, 래프터가 첫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8대 1
로.
"여보세요."
형씨가 말했다. 그는 잠깐 듣더니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로 물러
나, 탁자 끝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끈을 들어."
그가 나에게 말했다.
그는 여덟 명 모두의 손목을 묶어 서로 연결시키라고 했다. 나는 끈을 자르고 매듭을 묶
었다. 동료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입장이 된 몸이라,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
다. 나는 등에 권총을 느끼고 있었다. 형씨는 단단히 묶으라고 했다. 나는 피를 짜낼 것 같
은 시늉을 하면서도, 사실은 최대한 느슨하게 해 주려고 애를 썼다.
래프터가 나지막하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따귀를 갈겨 주고 싶었다. 엄스테드는
손목을 움직였기 때문에, 그를 다 묶었을 때는 끈이 밑으로 흘러내릴 것 같았다. 맬러머드는
땀을 흘리며 가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방 안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으며, 또 유일한 파
트너(회사의 주식을 갖고 있는 변호사. 어소시에이트는 회사의 주식을 갖고 있지 않음: 편집
자)였다. 그리고 2년 전에 심장마비를 겪은 일이 있었다.
방 안에서 하나뿐인 친구 배리 누조의 얼굴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서른둘로 나
이가 같았고, 같은 해에 입사했다. 그는 프린스턴 법대 출신이었고, 나는 예일 법대 출신이
었다. 아내들은 다 프로비던스 출신이었다. 그는 제대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4년째인
데, 자식이 셋이었다. 내 결혼 생활은 긴 악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둘 다 그의 아이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자식이 없어 다
행이다 싶었다.
앞으로 많이 듣게 될 사이렌 소리 가운데 첫 번째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형씨는 다섯
개의 커다란 창문에 블라인드를 치라고 나에게 명령했다. 나는 천천히 꼼꼼하게 그 일을 하
면서, 아래 주차장을 훑어보았다. 누구라도 눈에 띄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을 것처럼. 주차
장에는 경찰차 한 대가 전조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찰관들은 이미
건물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가, 아홉 명의 백인과 형씨가 있었다.
최근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드레이크 & 스위니는 세계 전역의 지사에 8백 명의 변호사
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반이 워싱턴에, 즉 형씨가 테러를 감행한 건물에 있었다. 형
씨는 나에게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무장을 하고 있고, 12개의 다이너마이트를 몸에
차고 있다고 알리라고 말했다. 나는 내 부서인 반트러스트 담당부의 경영 담당 파트너 루돌
프에게 전화를 걸어, 형씨의 말을 전했다.
"자네 괜찮나, 마이크?"
루돌프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는 스피커폰의 음량을 최대로 키워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
었다.
"잘 있죠, 어쨌든 시키는 대로 하세요."
"그자가 뭘 원한대?"
"아직 모르겠어요."
형씨가 총을 휘둘렀고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나는 권총의 신호에 따라 회의 탁자 옆의 자리에 가서 섰다. 형씨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
진 곳이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가슴 근처의 전선을 만지작거리곤 했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여긴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는 아래를 흘끗 보더니, 빨간 전선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여기 이거 빨간 거 말이야, 내가 이걸 잡아당기면 그걸로 다 끝나는 거야."
그가 경고를 끝냈을 때, 색안경은 내 쪽을 향해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
았다.
"왜 그걸 잡아당깁니까?"
내가 물었다. 어찌 되었든 대화를 트고 싶어서 한 소리였다.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안 될 건 또 뭐야?"
나는 그의 어법에 약간 놀랐다. 말은 느렸다. 서둘지 않고 리듬을 꼼꼼히 살리고 있었다.
음절을 건너뛰는 법이 없었다. 지금은 노숙자이지만, 과거에는 훨씬 나은 지위에 있었던 사
람임에 틀림없었다.
"왜 우리를 죽이고 싶어하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너하고 논쟁하고 싶지 않아."
어이쿠,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재판장님.
나는 변호사로서 시계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계속 손목시계를 보았다.
마치 이 자리에서 살아나면 일어난 일을 모두 꼼꼼히 기록해 두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1시
20분이었다. 형씨는 조양한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는 14분 동안 침묵의 시간을 견디어
야 했다. 신경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지는 느낌이었다.
죽는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우리를 죽일 어떤 동기도, 어떤 이유도 없는 것 같았
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전에 그를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아까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던 일을 기억했다. 그에게는 특별한 목적지가 없는 것 같았다. 따
라서 그는 인질을 찾고 있던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불행하게도
우리를 죽이는 것이 그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 될 수 있었다.
24시간 동안 톱뉴스 자리를 차지하면서 사람들의 고개를 설레설레 젓게 만드는 그런 의미
없는 학살이 될 것 같았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죽은 변호사와 관련된 농담이 시작되겠
지.
신문 머릿기사들이 눈에 보이고, 기자들이 보도를 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러면서도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로비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밖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복도 어딘가에서
경찰의 무전기가 삑삑거렸다.
"점심으로 뭘 먹었지?"
형씨가 나에게 물었다. 오랜 침묵을 깨는 소리였다. 너무 놀라 거짓말을 생각할 수도 없었
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구운 닭고기를 먹었는데요."
"혼자?"
"아뇨,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법대 친구로 필라델피아 출신이었다.
"값이 얼마던가? 둘이 먹는 데 말이야."
"30달러였습니다."
형씨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30달러라."
형씨는 되풀이하더니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먹는 데 말이지."
그는 고개를 젓더니 여덟 명의 소송 변호사들을 보았다. 나는 형씨가 그들에게 여론 조사
를 할 경우에 그들이 거짓말을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위가 꽤
나 고급이어서, 30달러 가지고는 애피타이저 값도 못 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뭘 먹었는지 알아?"
형씨가 나에게 물었다.
"아뇨."
"난 수프를 먹었어. 합숙소에서 수프와 크래커를 먹었지. 공짜였는데, 그걸 먹을 수 있어
서 기분이 좋았지. 30달러면 내 친구들 백명이 밥을 먹을 수 있어. 그걸 아나?"
나는 갑자기 내 죄의 무게를 깨달았다는 듯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갑, 돈, 손목시계, 보석을 다 걷어."
그는 다시 총을 흔들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아니."
나는 내 지갑, 손목시계, 현금을 탁자에 내려놓고, 내 동료 인질들의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줄 거야."
형씨가 말했다. 우리 모두 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에게 약탈물을 서류가방에 넣고, 가방을 잠그고, 다시 '상사'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
다. 루돌프는 벨이 한 번 울리자 전화를 받았다. 스와트(SWAT, 특수 공격대:옮긴이) 대장
이 그의 사무실에 진을 치고 있는 광경에 눈에 보이는 듯했다.
"루돌프, 다시 나예요, 마이크. 스피커폰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 마이크, 괜찮나?"
"괜찮습니다. 보세요, 여기 이분이 나더러 대기실에서 가장 가까운 문을 열고, 복도에 검
은 서류가방을 내놓으래요, 그리고 나서 문을 닫고 잠그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래."
총은 내 뒤통수에 닿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문을 열고 가방을 복도에 던졌다. 사람은 그
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대형 법률 회사의 변호사가 시간당 청구서를 쓰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막을 만
한 일은 거의 없다. 잠이 그 하나인데, 사실 우리 대부분은 잠을 적게 잔다. 먹는 것이야 청
구서를 쓰는 일을 붇돋아 줄 뿐이다. 특히 의뢰인이 식사비 계산서를 집어들 경우에는. 인질
범이 시간을 오래 끌게 되자, 나도 모르게 궁금해졌다. 건물에 있는 다른 4백 명의 변호사들
은 인질 위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청구서 쓰는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 주차장
에 피신해 있는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부분은 추위를 피해 차 안에 들어가 있
었는데, 휴대 전화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 역시 청구서가 날아가는 일이었
다. 이 회사는 잠시도 쉴 줄을 모르는군,
밑에 있는 악당들 가운데 일부는 이 인질극이 어떻게 끝나는가에 관심이 없을 게 틀림없
었다. 어떻게든 그저 빨리 끝나 주기만을 바랄 것이다.
형씨는 잠시 조는 것 같았다. 턱이 아래로 떨어지고, 숨이 깊어졌다. 래프터가 내 주의를
끌기 위해 소리를 냈다. 내가 그쪽을 보자 머리를 한쪽으로 휙 젖혔다. 나더러 움직여 보라
는 것 같았다. 문제는 형씨가 여전히 오른손에 권총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설사 그
가 잠이 들었다. 해도, 그의 왼손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붉은 전선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그런데도 래프터는 내가 영웅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가 회사에서 가장 비열하고 동
시에 가장 능력 있는 소송 변호사일지는 몰라도, 아직 파트너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내
부서 소속도 아니었으니, 우리는 부대가 다른 셈이었다. 따라서 그는 나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작년에 얼마 벌었지?"
형씨가 나에게 물었다. 전혀 자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목소리는 매우 맑았다.
나는 다시 깜짝 놀랐다.
"난, 어, 이런, 어디 보자..."
"거짓말은 하지 마."
"12만입니다."
형씨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나 기부했지?"
"기부했냐고요?"
"그래. 자선단체에."
"아! 어,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청구서 같은 것들은 집사람이 관리하거든요."
여덟 명의 소송 변호사 모두가 동시에 몸의 무게중심을 바꾸는 것 같았다.
형씨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답변 거부를 용인하고 싶지 않은 것 같
았다.
"세금 양식 같은 건 누가 쓰는데?"
"국세청에 내는 것 말입니까?"
"그래, 그거."
"그건 2층에 있는 우리 세금 부서에서 처리합니다."
"여기 이 건물에서 한단 말이야?"
"네."
"그럼 가져와. 여기 있는 사람 모두의 세금 기록을 가져오란 말이야."
나는 변호사들의 얼굴을 보았다. 두어 사람은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그래.' 하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내가 너무 오래 망설였나보다.
"어서!"
형씨는 소리를 질렀다. 더불어 총까지 휘둘렀다.
나는 루돌프에게 전화를 했다. 그 역시 망설였고, 그래서 나도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서 팩스로 보내라니까요. 작년 것만이요."
우리는 15분 동안 구성에 있는 팩시밀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소득 신고서
가 빨리 오지 않는다고 형씨가 우리를 처형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면서.
첫댓글 헐... 시간 내서 읽어 볼께요 ^^ 감사합니다.
인질범 관련 소설인것 같은데 어떻게 전개되는지 궁금하네요.
헐... 부의 재분배에 따른 정의가 도입 부분에서 전개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