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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번째
고성산 봉수대
감문산 봉수대
속문산 봉수대를 복원하여 학생들 교육용으로 홀용 하였으면 합니다.
구미 금오산 봉수대에서 보내온 신호를 감문산 봉수대에서 다시 속문산 봉수대로 보내면
속문산 봉수대는 상주 쪽 봉수대로 보내서 서울로 가게 하였다
2 번째. 현재 백운산 등산로 길을 문무로 오게 연결 했으면 좋겠습니다
백운산 정상의 속문 산성을 거쳐서 해신 방구 아래로
산불 방지용 임도를 만들어 문무리로 오게 하여
고소 산성 까지 연결하면 등산 시간도 2 시간 정도 걸리어
등산로 코스로 좋습니다.
문무리에서 안실 쪽으로 넘어 가는 고개 정상 부근의
옛무덤으로 추정 되는 무덤 2 개도 발굴해 보고
3 번째. 현재 송문으로 가는 버스 종점 송문 에 있는 고인돌로 추정 되는
고인돌 2 점과 문무리에 흩어져 있는 고인 돌들을 현재 개령에 만들어 놓은 감문국 박물관 옆에 옮겨 올 곳
4.번째 국립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국보 98호 갈항 사지 석탑을
똑 같이 복사하여 김천 박물관 옆에 전시 하였으면 합니다.
일제 시대 때 일본으로 가지 못하고
탑 가운데 이두 문자 있는 것은 따로 복제하여 학습용으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이두는 한자로 쓰여졌지만 뜻은 다릅니다.
대양산 옆의 댕모 (금라 못 옆 돌안내석에 남전 2 리 와 대양묘) 와
대양산에서 흘러 내려 외현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도랑 이름을
예전 1960연대만 하더라도 (대양골 도랑을)댕골 도랑이라 불렀으니
댕모와 댕골 도랑은 이두 글자 같아요
갈항사에서 감천 건너 대양산 까지 직선 거리로 약 12 킬로
김천시에 건의 합니다.
속문산성
속문산성은 감문국시대에 축조된 이래
조선시대 말까지 군영과 봉수대로 이용된 석성으로
해발 600m지점부터 능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쌓았다.
정상부에는 군창지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함께
대형 주춧돌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석축의 둘레는 2천455자이고 높이는 일곱 자인데
성내에 우물 두 개와 저수지 두 개, 군창이 있다”라고 수록돼 있다.
‘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도“군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석축의 둘레가 2천540자이고 성안에는 두 개의 샘과 저수지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백제장수 의직(義直)이 속문산성과 고소산성을 공격했다가
김유신에게 패해 혼자 말을 타고 도망갔다는 구전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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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산 봉수대
개령뒷산 감문산 봉수대
감문 병원 옆 남곡리 뒤산 속문산 봉수대 (봉수대 자리에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
무덤 주위에 기와 조각 파편이 많다
김천시에서는 무덤 주인과 상의해서 무덤은 다른 곳으로 이장 시키고
봉수대를 복원 시켜 놓아야 한다
문무리 옆의 고소 산성, 속문산성을 복원 시켜여 한다.
고소 산성은 박팔용 시장 때도 관심을 가진 곳 같다.
문무리 근처는 15년 전인가 2005년 경북대에서 조사하고 '감문국' 보고서도 발간 하였다.
고성산 봉수대, 감문산 봉수대, 속문산 봉수대를 복원해서 만들어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등산로를 만들어 놓으면
신민들 건강 관리에도 좋고
학생들 교육용으로도 좋고
김천시 홍보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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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산성
| 2016년 12월 8일 목요일 주차장에서 문무리가는 버스를 타고 갔다 문무리 종점에 내려서 엄마가 자주 이야기 해 왔던 문무리에서 고갯길로 두원역 까지 가 보기로 했다 아침 8시 20 분 버스로 문무리에 도착하니 9시 가까이 되었다 동네 아지매 한테 물어서 지금은 거의 나무가 자라서 길도 찾기 어려운 곳을 억지로 개울로 해서 올라가기 시작 했다 원래 김천 지도에서 보듯이 높이가 약 200 미터 정도 되는 괘 높은 고갯 길이었다 30 분쯤 올라가니 김천시에서 감문면 문무리에 꽤 잘 다듬어 놓은 길과 만났다 내가 길을 잘못 찾아서 올라간것 같았다 그곳에서 약 20 분 정도 더 올라가니 조그만 나뭇가지에 "고소 산성 가는 길, 감문면 사무소" 이란 10년 정도 지났을까 낡은 등산 리본 묶은 놓은 곳이 몇개 눈에 보였다 그 길로 따라 올라가니 곧 고소산성 돌 흔적이 조금 나왔다 사진 몇장 찍고 고갯 마루로 해서 구례쪽으로 내려 오려다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카메라를 잊어 버렸다 큰애가 7년 전엔가 50 만원 주고 샀다고 했는데 요즈음은 구닥 다리가 되었겠지만 2 시간 가까이 2,3 번 왔던 길을 찾아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낙엽이 많아서 그랬는가 하여튼 아쉽지만 구례쪽으로 내려 오기 시작 하였다 문무리 쪽은 폭 6 미터 가까이 잘되어 있었는데 구려쪽은 별로 이었다 근처에 무덤 몇개 있고 하여튼 두원역 가까이서 김천 오는 버스를 타고 왔다 두원역은 용문산 능치리 가는 입구였다 고소 산성이 있었던 자리는 낙엽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는가 기와 쪼가리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동신 초등학교 옆 직지 냇가 옆에 있는 게이트 볼 연습하는 크기의 약간 넓다란 곳이 있고 고갯 마루 근 처에 물이 고인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그 곳 성안에서 농사도 짓고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흙도 약간 기름져 보였다 속문산 꼭 대기에도 성이 있었다지만 그곳 우물은 정상에서 상당히 아래에 있지만 고소 산성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문무리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산을 넘어서 60년대 이전 까지는 두원역을 통해서 김천으로 상주로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백운산 정상 조금 지나서 상주쪽으로 있는 고갯 길은 1960 년대만 해도 자주 이용하였다 1927년생인 우리 엄마 친정이 안송문인데 지금 이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살아 있다면 100 살 가까이 되는 이모와 외할머니와 우리 엄마 생일이 같은 날이 되어서 1960년대 여름 방학 때 외갓집에 가서 있으면 문무리에 살고 있었던 이종 사촌 형이 백운산 고개를 넘어서 안송문 외갓집으로 오곤 하였다 걸어서 오면 약 1 시간 조금 더 걸렸을까 그 고개 옆에 문무리 쪽으로 "해신 방구"가 있다 엄마가 정신 멀쩡 할 때 시집오기 전에 해신 방구에 가서 놀았던 이야기를 자주 하여서 나도 지난해인가 물어서 가 본 적이 있다 하여튼 바위 여러개가 멋있게 있었다 내가 본 것은 그렇게 큰 바위는 아닌 것 같았는데 엄마 말로는 그 주위에 있는 많은 동네 사람들이 놀러 왔다고 하였다 그러니 대충 지금 부터 70년도 더 된 이야기 이니 아마 1930-40 년대 쯤 하여튼 이런 점 고려하여 등산로라도 잘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이 오가며 알 수 있을 터인데 지금 송문가는 버스 종점 옆에는 "왜터 재"라는 임진 왜란때 일본군이 도망 가던 고개 였다나 아버지 돌아 가기 전에는 '이터재'라고 들은 것 같은데 그 재를 넘어서 상주쪽으로 다닌가 보니다 두원역 가까이도 비닐하우스 만들어 놓고 포도농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다른 농사 보다는 하기 쉬워서 일까 다른 농사를 지으려면 4000 만원 이상하는 터렉터도 있어여 하고 경운기도 있어야 기본인데 포도 농사는 관리기만 있으면 되어서 그럴까 하엿튼 포도 가공을 빨리 연구해서 보급 시켜야 합니다 포도는 나름대로 영양가가 많고 똥 냄새도 향기롭습니다 대양산은 보기에도 뾰족한데 며칠전에 가보니 정상에서 100 미터 가가이 부터 거의 기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낙엽에 발이 미끄러져서 올라갈 수 없어요 나는 60년대 국민학교 다닐 때 동네 형들과 같이 올라갔을 때는 꼭대기에서 황계동 경지정리 한게 보엿고 더 멀리는 남산동 쪽 얼마도 보였지요 며칠 전에는 대양산 능골 이라는 곳이 있다고 김천 동네 소개란에 나오길래 가 보았는데 나무가 우거져서 찾지 못한 것 같아요 남전쪽으로 댕모라는 곳이 있어서 저지난해인가 금라쪽에 있는 도로 팻말에 대양묘 '大陽妙' 가 있길래 내가 묘를 찾아가겠다고 동내 사람들한데 물으니 '대양묘'가 '댕모'라 하더라구요 이것은 아마 한글이 만들오기 전 만들어져서 내래오는 이두 글자 같아요 한자로 만들어 놓은 동내 이름이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글자가 없으니 한자를 빌려서표기한 우리 고유의 발음 경북 김천시 감문면 문무마을의 마을 회관앞에는 현재 여산팔경(余山八景)의 비가 설치되어 있다, 이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옛날 문무국이라는 소국의 나라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현재는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설화가 무시할수 만은 없는것 아닌가 한다. 余山八景 (여산팔경) 連豊畔照 연풍산이 물가에 비치니 灰野蓮桑 잿들 뽕나무는 연이어 풍년이네 鳥岩怪石 세심산 괴석에 새가 나르고 將胄歸雲 장주산으로 구름이 돌아간다 堂山淸風 당산에서 부러오는 맑은 바람에 五幕之情 오모 사람들 정이 넘친다 姑蘇山城 고소산성의 爐岩獨臺 노암은 홀로 서있네 <김천의 마을과 전설에서 발췌> 위의 여산팔경의 싯귀에 등장하는 팔경(연풍산.잿들.세심산.장주산.당산.오모.고소산성.노암)의 지명은 실제로 마을의 주변에 지금까지 그대로 불리워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문무리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여산팔경의 비(碑)의 싯귀는 위의 여산팔경과 약간의 싯귀순서가 바뀌어 있다. 그리고 연풍반조( 連豊畔照 )가 회관앞의 비에는 영풍반조(嶺風畔照)로 차이가 있는데 향후 다시 연구할 숙제로 남아 있다. &&&&&&&& 속문산성 해발 600여m에 흙·돌로 쌓은 산성 향토사학계 “삼한때” 학계 “삼국때” 감문국 멸망 전후로 축조시기 異見 “감문국 4천 인구로는 축성 불가능” 기와 파편 등 유물 ‘신라의 城’무게 향토사학계 “勝者역사에 가려” 반론 ◆ 스토리 브리핑 김천의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의 주요유적 중 하나는 산성(山城)이다. 김천시 개령·감문면 일원에 위치한 속문(俗門)·고소(姑蘇)·감문(甘文)산성이 감문국의 대표적인 산성 유적지다. 김천지역 향토사학계는 산성의 축조시기를 감문국이 존재했던 삼한시대(三韓時代)로 추정한다. 대부분 군사방어용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천시 개령면 일대의 평야로 외부세력의 침입이 있을 때, 주변 산성을 거점으로 대항했다는 것이다. 반면 학계는 산성의 축조시기를 감문국 멸망 이후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가 축조했거나 그 후대에 지어졌다고 추측한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개·보수를 거치며 사용되다 현재의 형태로 남아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축조시기에 대한 이견은 있지만, 이들 산성이 감문국 역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1천년을 훌쩍 넘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특히 기와 파편 등 삼국시대 유물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성벽과 그 부속건물의 흔적은 옛 시대상을 엿보는 자료로 활용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8편은 감문국의 유적으로 알려진 산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속문산성에 관한 내용이다. # 감문국 멸망의 역사와 함께한 산성 속문산성은 김천시 감문면 백운산(白雲山, 해발 618.5m)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백운산은 소나무가 무성해 ‘송문(松門)’이라 불렸으며, ‘속문산(俗門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향토사학계는 ‘감문국 산성의 정확한 축조시기를 알 수 없다’면서도, 속문산성을 감문국의 주요 유적으로 보고 있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감문국과 같은 읍락국가의 존재는 신라와 같은 승자의 역사에 의해 가려졌다. 지방을 근거로 존립했던 소국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그 흔적을 찾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시대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문산성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문헌에는 “석축 주위 2천455척, 고 7척, 내유 2천2지 유군창(石築周圍二千四百五十五尺 高七尺 內有二泉二池 有軍倉)”이라며 속문산성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산성의 규모와 샘, 연못의 수까지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속문산성의 현재 모습도 문헌의 기록과 거의 흡사하다. 속문산성은 백운산 정상부를 기준으로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내려가는 계곡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상당 부분이 무너져내렸지만 산 정상부 능선을 따라 토성과 석성이 혼합된 ‘토석 혼축성’이 이어져 있으며, 옛 문헌에 기록된 샘도 발견할 수 있다. 속문산성이 위치한 백운산의 지명은 감문국 멸망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천지역에는 감문국의 최후와 관련된 구전이 전해지는데, 그 이야기의 배경에 백운산과 속문산성이 있다. 구전에 따르면 서기 231년, 신라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감문국 백성과 군사들은 속문산성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른다. 감문국으로 쳐들어온 신라군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영남지역 소국을 연이어 정복하고, 잦은 전투를 경험한 신라의 전투력은 여타 읍락국가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신라군의 수장은 신라 이사금의 동생이자 정복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석우로 장군이었다. 이미 예견된 전쟁이었지만, 감문국 백성들 역시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 비록 소국의 백성이었지만 죽을 각오로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했다. ‘감문국 군사 80여 명이 백운산 속문산성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묘사한 구전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최후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감문국은 망국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백운산’은 이때부터 불려진 지명이라고 한다. ‘속문산성에서 죽은 감문국 백성들의 영혼이 흰 구름이 되어 산 주변을 떠돌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감문국 멸망에 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는 구전일 뿐이다. 삼국사기를 제외하고는 구체적 기록이 없다. 김천시민들은 감문국 멸망의 역사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평소 백운산을 즐겨 오른다는 김천 백운산악회 총무 조규철씨(64)는 “어린 시절 신라군이 (백운산에서) 감문국 군사를 모조리 다 죽였다고 (어른들에게) 들었다. 감문국이 신라에 병합되지 않고, 하나의 나라로 이어지고 번성했다면 김천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았다. # 신라 방어의 최전선 김천 향토사학계의 주장과는 달리, 학계에서는 속문산성이 감문국 멸망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영남지역 산성을 연구한 조효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속문산성의 축조시기는 5세기 말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6~10세기 신라 기와가 (속문산성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거점 산성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특히 신라와 백제의 경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김천지역 산성들이 축조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조 연구사는 “김천 지역을 둘러싼 양국(신라·백제) 간 갈등은 이른 시기부터 있었기에 신라의 입장에서는 군사목적용 산성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역사는 학계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실제로 신라와 백제는 6세기 들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다. 신라는 진흥왕 15년(554)에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의 목숨을 빼앗고 영남 서북지역을 힘으로 압박했다. 그러나 진지왕 2년(577)에는 백제가 신라 서쪽의 영토를 침략하는 등 백제의 저항도 매우 거셌다. 신라 입장에서 김천지역 산성은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김천 북쪽에는 신라의 제2도성으로 불리던 사벌주(상주)가 있었고, 추풍령은 백제·고구려·가야 세력이 만나는 접점이었다. 신라는 고구려·백제·가야를 견제하기 위해 김천지역이 꼭 필요했고, 부속 산성들은 세력 확장의 최전선이었다. 이 때문에 김천지역 산성은 효율적인 방어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고구려·백제·가야가 연합해 신라로 진격한다면 김천지역은 서라벌(경주)로 향하는 가장 짧은 진격로였기 때문이다. 김천지역 산성만 지켜낸다면 능히 서라벌을 지킬 수 있었다. # 조선시대까지 활용된 산성 김천지역 산성들이 ‘신라의 성’이라는 주장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전문가들은 “감문국과 같은 작은 나라의 규모로는 성을 쌓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삼십인의 대군으로 밤에 감천을 (중략)…’이라는 동사(東史)의 기록을 볼 때 감문국의 인구는 기껏해야 4천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축성에는 대규모 인원 동원이 필요한데 감문국과 같은 읍락국가는 그 소요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 신라 정도의 규모를 갖춰야 산성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역시 ‘신라의 성’이라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속문산성에서 발견된 기와 대다수는 삼국시대 신라의 것으로, 돌로 된 성곽의 축조방식 또한 신라의 양식으로 알려졌다. 특히 전통시대의 기와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관청이나 사찰에서 주로 사용되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서야 널리 사용됐다. 한편, 김천을 비롯한 전국의 산성들은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한반도 대부분의 산성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다시 사용되었는데, 속문산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5년 김천시와 경북대박물관이 발행한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에 따르면 속문산성의 주요 역할은 평상시에는 교통의 거점으로 백성을 감시 관리하는 것이었다. 전시에는 인근 주민의 대피지 내지 방어 거점의 역할을 담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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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김천시 감문면에는
백운산 (속문산(속문)618 미터)
우태산(451 미터)
광덕산(334 미터)
보광산(239 미터)의 4 개의 주위 다른산 좀 높은산이 있다.
구미 금오산은 약 20 킬로 떨어져 있다.
고향 마을 앞 냇가에서 잘 보인다.
저녁에는 정상 비행기장의 불빛이 수십개 반짝 거렸다.
그 당시에는 등 크기가 오강단지 만하다 해서 그렇게 큰게 있는가 했는데
요즈음은 시내에 그런 등들이 많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2011년 금오산 정상에 가보니 그 헬기장 다 철거 되고
시멘트 바닥만 남았다.
그러니 그 불빛도 다 없어졌다.
이 4 개의 산들 중에 보광산( 우리는 네복데이라 부른다)에는
국민학교 3,4 학년 쯤인 1964 년 쯤 동네 형들과 추석에 올라가 보았다.
산 정상 근처는 상당히 까파르다.
그 곳에 올라가면 멀리 김천의 황금동 쪽이 보인다.
그리고 황계동 들녘도 보인다.
그 당시에는 김천 근처에 황계동 들 밖에 경지정리 된곳이 없었다.
멀리서 보아도 싡기했다.
그 이후에 1978 년 쯤 다시 한번 가 보았다.
가는 길에는 나무가 상당히 우거져 있었다.
고향산 중에서 제일 높은 배운산에는
첫번째는 1966년 6 학년 때 가을 소풍으로
학교에서 걸어서 갔다.
곡송국민학교에서 걸어서 3 시간 이상 걸린다.
산 중 턱에 자리 잡은 외가집 동네를 거쳐서 올라갔다.
산 꼭대기에서 보리똥( 열매가 찔레 열매 비슷하다)도 많이 따 먹었다.
두번째는 동생이 염소 먹인다고 외가집 동네에 있어서 2001 년 쯤
다시 혼자 올라가 보았다.
요근래 들으니 우리 엄마는 시집오기 전에 그곳에 소 먹이러 많이 갔다 했다
정상에는 성터가 있는데 성안에 소를 몰아 넣으면 놀기에 편하다 했다.
그 당시 외삼촌들은 일하러 가야하고 또 일본에 가고 없었다고 했다.
세번째는 2012년 8월 16일 목요일
그날 새벽에 비가 내렸던 관계로 포도원에 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백운산에 한 번 가 보고 싶었다.
오전 7시 30분 집을 출발해서 아랫 송문에 액 9시 30분 도착
그 곳에서 길을 물으니 등산로가 있다고 해서
쉽게 생각 했는데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서 등산로 입구 찼는데 30분 정도 허비 했다.
산 정산에 올라 가니
오전 11시 30분.
정상에 산불 감시 초소가 있고
그 옆 바위 옆에 백운산 618.3 미터 라는 2001 년에 세원 표지석이 서 있었다.
나무가 우거 졌지만 주위 '속문산성' 흔적을 훓어 보았다.
도자기 파편 몇개와 기와 파편 1 개를 가지고
여모쪽으로 내려 가려고 했는데 한 참 헤메면서 내려 오니
올라갔던 다른 길로 아랫 송문으로 내려 왔다
체력이 달려 다행이라 생각 했다.
삼봉에 도착하니 2 시 30분
중국집에 가서 우동 곱배기 한그릇 먹고
집에 도착하니 오후 2시 30분
총 7 시간 걸렸다.
네번째는 2012년 9월 4일 화요일 백운산(속문산)에
도시락 싸가지고 8 시쯤 집에서 출발 해서 갔다가 정상에서
가야 시대 도자기 파편 몇개 주웠다.
집에 오후 3 시쯤 도착.
다섯번째는 2014년 4월 8일(호) 속문산에 오르다.
집에서 감문까지 걸어가서 감문서 8 시 30 분 차 타고
아랫 송문에 내려서
안 송문에 9 시 30 분 도착
엄마 고향 친구 영수 어머니와 이야기 좀 나누다가
10 시쯤 출발해서
11 시 쯤 '해신방구' 갔다가
다시 20 분 뒤에 12 시즘 백운산에 오르다.
10 분쯤 있다가 아랫 송문으로 해서 고향 집에 오다.
안 송문 가다가
못 근처에서 바라본 백운산
안송문
해신 방구
해신 방구
해신 방구
백운산 해신방구에서 바라 본 문무리(여모)
속문산성 흔적
속문산성 흔적
속문산성 흔적
백운산(옛날 문헌 속문산) 정상 618 미터
백운산 정상에서 본 아랫 송문
감문국 효소 왕릉이라 추정되는 오송 앞의 묘지
감문국 효소 왕릉이라 추정되는 오송 앞의 묘지
감문국 효소 왕릉이라 추정되는 오송 앞의 묘지
감문국 효소 왕릉이라 추정되는 오송 앞의 묘지
감문국 효소 왕릉이라 추정되는 오송 앞의 묘지
광덕산은 고향 마을에서 맞은 편에 보인다.
산 꼭대기 까지 집에서 가면 1 시간 30 분 정도 걸린다.
그곳에는 1978년 학교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까지 산에 나무 심는 준비 작업 한다고 여러번 갔었다.
꼭대기 까지는 10 번도 가지 않았지만
그 산에는 약 30 일 가까이 갔다.
때로는 지게지고 가서 잔디도 지고 올라갔다.
그 산 꼭대기에 가면 선산도 보인다.
물론 감천도 황계도 근처 부터 선산까지 보이고
우태산( 우리는 계자 뒷산이라 부른다)은 이 때 까지 가보지 못했다가
이번 추석에 고향에 간 김에 가 보았다.
2011년 9월 9일 금요일 오전 8시 30분에 고향에서 출발했다.
산 아래 까지 약 1 시간 가까이 걸렸다.
산아래 계자 동네에 가서 산 입구를 물었다.
산에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서 힘들 거라고 했다
대충 10 시쯤 출발해서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니
11시 30 분 쯤 정상에 도착했다.
20-30 분쯤 옆으로 가다가 내려 올려고 하였다.
그런데 삼봉쪽으로 내려 올려고 했는데 나무에 가려서
1 시간 이상 칠넝쿨 속을 헤메다가 삼봉 근처라 내려 왔는데
산을 넘어서 오성( 중철이 고향 근처 마을)이라는 곳으로 내려 왔다.
거기서 집으로 오니 오후 3 시가 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