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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말메종2 - 샤토 말메종에 도착해서는 나폴레옹과 황후 조세핀을 구경하다!
5월 30일 포르트 드 라 사펠역에서 Metro 4호선 지하철을 타고 10정거장 생 라자르역 에
내려 통로를 걸어서 오베르역 Auber 역에서 수도권 고속 전철인 에르 으 에르
RER A1 를 타고 생제르맹 앙레 Saint Germain en Laye 에 도착해 성(城) 의 고고학
박물관과 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 드뷔시 집 Maison Claude Debussy 을 찾아 구경합니다.
생제르맹 앙레 Saint Germain en Laye 역에서 어렵게 RER 을 타고 뤼에유 말메종
Rueil Malmaison 역에 내려 우여곡절 끝에 27번 버스를 타고는 4정류소째인
“ Chateau 샤토“ 에서 내리는데, 생 제르맹 앙레에서 258번 버스가 뤼에유 말메종
Rueil Malmaison 과 샤토 정류소를 거쳐 파리 서쪽 라데팡스 La Defense 까지 가네요?
골목길을 5분쯤 걸어서 6.5 유로에 티켓을 끊어서 나폴레옹과 조세핀 이
살았던 샤토 말메종 Chateau Malmaison 성으로 들어가니... 여긴
온통 나폴레옹과 그의 부인인 황후 조세핀의 사진과 조각품 들로 가득합니다!
뤼에유 말메종 Rueil Malmaison 은 파리 서쪽 주거지로 메로빙거 왕조 때 왕족의
위락 휴양지 였다가 875년에 프랑스 왕실의 후원을 받는.....
생드니 수도원 영지가 되었고 1630년 리쉬류경이 말메종성을 건축 했다고 합니다.
1799년에 나폴레옹의 황후 조세핀 보나파르트가 구입 하였는데 나폴레옹이
즐겨 머물렀던 곳으로도 알려 졌으나....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후 멀어지다가 1809년에 헤어지는데, 조세핀은 혼자 거주
하다가 1814년에 죽었으며 현재 성은 나폴레옹 박물관 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뤼에유 말메종 Rueil Malmaison 역에서 알베르 프르미에 대로 Ave. Albert 1er 를 직진해
폴두메르 대로 Ave. Paul-Doumer 만나는 교차점에서 우회전하면 관광안내소 Office
du Tourisme 이고 모르파 거리 Rue Maurepas 를 직진해 도보 5분이면 구 시청 및
생 피에르 생폴 교회 (조세핀의 무덤) 이며 도보 5분 말메종 성 Shateau Malmaison 입니다.
여기 말메종성 Shateau Malmaison 은 17세기 성과 정원 등을 조세핀이 32만 프랑
에 구입해 나폴레옹과 주말을 보낸 곳 이라고 하는데.... 근처에 있는
부아프레오성 에 가면 거기에는 나폴레옹 황제의 유품을 전시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밖에 조세핀이 여배우 베르토 를 위해 지었다는 프티트 말메종성 이
있으니... 여긴 이벤트 개최시에만 개방한다고 하며 시간이
있다면 황후 조세핀의 무덤이 있는 생 피에르 생폴 교회 도 볼만 합니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최초의 황비(皇妃) 인 조세핀 Joséphine 은 파리의
사교계에서 미모로 이름을 드날렸는데, 프랑스 대혁명후 들어선 총재 정부 주역
바라스의 정부(情婦) 로 바라스의 소개로 나폴레옹을 알게되어 결혼 하였는데
사치스럽고 낭비 심하며 후사가 없는지라 이혼 당했으며 1814년 5월 29일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1763년 6월 23일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섬 트르와질레에서 프랑스 장교 딸 로 태어
났는데 1779년 16세 때 부유한 청년 장교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자작과 중매결혼해
프랑스로 건너와 두 남매를 낳았으나, 애정이 없던 두 사람은 긴 별거생활 에 들어갔고
이후 보아르네 자작은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 흽쓸려 처형당하고 그녀 마저 투옥 됩니다.
그러나 로베스 피에르의 몰락으로 석방 되어 파리의 사교계에서 미모로 이름을
드날렸으니 총재 정부의 주역 바라스의 정부(情婦) 였던 조세핀은
1795년 바라스의 소개로 파리의 한 파티 석상에서..... 26살의
나폴레옹과 운명적인 만남 이 이루어 지는데 조세핀의 나이 32세 였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이 여인에게 불같은 사랑 을 느끼고 저돌적인 구애 공세 를 편 끝에
1796년 3월 9일 결혼식 을 올렸는데.... 처음 조세핀은 촌놈 나폴레옹 을
냉대하였으나 그의 장대한 미래를 간파하고 청혼을 받아 들였으니 1804년
12월 1일 나폴레옹과 조제핀이 꿈에 그리던 황제 , 황후 즉위식 이 거행되었습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관식 은 3년간에 걸쳐 완성된 다비드의 대작
“나폴레옹 대관식”에 그 화려함이 전해져오고 있으니... 조세핀은
쾌활하고 남에게 호감을 주는 묘한 매력 을 지닌 여인 이었으나,
사치스럽고 낭비가 심할뿐만 아니라 후사가 없었던 탓에 1809년 이혼 당합니다.
나폴레옹은 조세핀과 이혼한 후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합스부르크가의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 공주와 정략 결혼 을 감행하였는데...
조세핀은 이혼 후에도 여기 말메종의 저택 에 살면서 나폴레옹과의
서신 왕래를 계속하였고 때때로 거액의 계산서를 나폴레옹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1804년 12월 황제 대관식 이 거행되었는데 그는 종교의 신성도 정치에 이용 했으니
“그는 종교에 대해 냉소적이라기 보다는 실용적인 견해 를 가지고 있어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할수 있는가 보다는 하느님이 그를 위해 무엇을 해줄수
있는가를 물었다.”라는 문장은 종교를 국가 통치의 한 수단 으로 이용한걸 보여줍니다.
나폴레옹은 말합니다.“한 국가가 종교의 도움 없이 어떻게 잘 통치될수 있겠는가?
사회는 불평등한 재산 을 제외하면 존재할 수 없고, 불평등한 재산은
종교 없이 유지될 수 없다.” “나는 가톨릭 신자 가 됨으로서
방데 지역을 진정시켰다. 유대민족을 통치했다면 솔로몬의 성전을 재건 했으리라.”
“나는 당신들 성직자들 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종교를 재정립 하고자 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 공포정치가 몰락한후 패닉 상태에 빠진 프랑스에 생기 를
불어넣었으니 파리 노트르담 성당을 마굿간 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민중의 원성의
대상이던 교회 에서 다시 종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하자 프랑스는 활기를 되찾게 됩니다.
"나의 영광은 마흔번의 전쟁 승리 가 아니라 내가 만든 법전 이다." 가장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당해 화려한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 세인트헬레나섬 에서
외롭게 머물면서 자신의 영광을 회고 하는 인간 나폴레옹의 모습 을 보게 됩니다.
그는“나의 목표는 단 하나다. 다시 합치고 모두 화해시키고 증오를 잊고 모두를 하나로
모으고 이질적인 요인들을 통합 새로이 하나의 프랑스 와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대혁명의 원칙 과 성문법과 관습법 에서 보존해야 할 부분들을 하나의 법전 으로
만드는데 102번의 법률 회의 에서 나폴레옹은 무려 57번 이상을 참석 했다고 하네요???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 조르주 보드로노브 는 나폴레옹의 법전 을 이렇게
설명하는데“이 법전은 출생, 결혼, 이혼, 분배, 증여, 상속, 사망과
같은 개인과 가족에 관한 모든 사항을 다루고 있다. 법 앞에 평등하고, 양심
의 자유와 국가의 비종교화 를 이루었다는 면에서 이 법전은 가히 ‘혁명적’ 이다.
소유권에 중요성을 부여 했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적’이기도 하며 가족 내 위계
질서를 세워 남편의 권위를 아내의 상위에 둔 민사법 은 오늘날 까지도
통용되며.... 1806년에는 민사소송법, 1807년에는 상법, 1810년에는 형법,
그리고 1814년에는 지방법 을 선포해 국가발전에 금강석 과 같은 초석을 놓았습니다.
이 법전은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다른 국가들의 법률
제정에 절대적인 영향 을 미쳤다고 하는데...... 마치 대한민국의 민법,
상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이 식민지 시대에 조선 총독부에 의해
적용되었던 일본 법률을 해방후 번역해 거의 그대로 사용해 온 것 과도 비슷합니다.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 나폴레옹은 군인
으로서 정권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원대한 목표가 있었으니 법전, 교육, 종교,
국가를 움직이는 장치를 재정비 하고 위대한 프랑스 를 만들기 위해 매진한 것이니
자신이 유럽 어디에 있던 연락이 가능한 커뮤니케이션과 우편제도의 간소화 까지 마렵합니다.
나폴레옹에 대한 연구나 평전, 에세이가 무려 60만종 이 넘는다는건... 나폴레옹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도 밀접하게 연결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데
화무십일홍, 회자정리 라는 한자 성어는 영웅 나폴레옹을 빗겨가지
않았으니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 는 예수의 진언 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1815년 6월 나폴레옹은 12만 5000명 프랑스군을 이끌고 웰링턴이 지휘하는 9만 5000명
의 영국군과 블뤼허가 지휘하는 12만 프로이센 군과 대적하니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 격파하는 전략 을 세우고 서전에서 영국군을
물리친 프랑스군은 이어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 하니 프로이센군은 후퇴 합니다.
나폴레옹은 후퇴한 프로이센군을 섬멸하기 위해 그루시 원수에게 3만 병력을 주어 추격을
시키고 자신은 7만 5천으로 웰링턴을 쫓았는데 후퇴한 웰링턴은 동서 4킬로미터에
이르는 구릉을 따라 포진하니 뒤는 삼림이고 앞에는 라에생트를 비롯한 몇채 농가
인데, 밤중에 농가들을 요새화한 웰링턴은 방어진형 을 만들어 놓고 프랑스군을 기다립니다.
프랑스군은 6월 18일 워털루의 완만한 구릉지대에서 영국군에 대한 총공격 을 개시하는데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기우는 듯했지만... 퇴각했던 블뤼허의 프로이센군 6만명 이
돌아와 후방을 기습해 전세가 역전 되는데, 만약에 독일군이 아닌 우직한 그루시 원수
3만 프랑스군 이 추격을 단념하고 먼저 돌아왔더라면 나폴레옹이 승리 했을 것으로 봅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 영국군의 공세에 처참하게 패배 했으며
프랑스군의 전사자는 4만명 에 이르렀고 영국군 전사자는 1만 5000명, 프로이센군은
7000명 가량이었다는데 나폴레옹은 6월 22일 영국 군함 벨레로폰호 에 실려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돼 울분의 나날을 보내다 1821년 5월 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폴레옹 재집권은 백일천하로 끝났고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간의
23년에 걸친 전쟁도 끝이나고 프랑스는 루이 18세 부르봉 왕가 왕정으로 돌아갔으며
혁명을 피해 외국으로 도피하였던 망명 귀족들이 다시 돌아와 잃었던 특권을 회복
했으며 각국의 절대왕정 은 프랑스혁명 으로 확산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억압 합니다.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어 조세핀과 이혼 했지만 연인이었던 조세핀과 함께 한 말메종성
에서의 생활은 인간 나폴레옹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한 시절' 이었으니, 조세핀은
아름다운 육체와 열정을 지닌 여인으로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애증을 느끼게 했으니
심지어 나폴레옹 은 그녀가 너무 야한 옷을 입는다고 옷을 찢어버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때 조세핀 은 옷장에 걸려 있는 무수히 많은 다른 야한 옷을 고르고 있었다는데
한 여인 에 대한 사랑과 질투의 감정에 충실했던 나폴레옹의
이러한 면은 연애와 사랑에 헤매고 상처받는 현대인들의 모습 을 미리 보여 줍니다.
나폴레옹은 세계를 제패한 영웅 이었으나... 아내 조세핀의 마음은 정복하지 못해 고통스러워
했으며 그 스스로 자신을 지배한 진정한 정복자는 조세핀 뿐 이라고 고백하기도
하였는데..... 조세핀은 나폴레옹이 연합군에 패해엘바섬에 유배된 직후 사망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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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믿고 사랑하는 것이고
나에게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가치있는 인생을 살면서
사랑을 하는것이 최고의 행복 입니다.
오늘도 최고의 삶과 행복을 누리는 멋진 하루길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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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깊이 빠져
물불 안가리고 대시했던
여인이 바로 조세핀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