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4일 대림 제2 주일
-류해욱 신부
대림 2주일
몇 년 전 글을 떠올립니다. 그때 저는 휴식을 취하고자 제주에 갔었습니다. 저는 지금 잠시 쉼의 시간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래라는 마을에서 나무들이 아주 많은 어느 집을 빌려 쉼, 휴식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잠시 일을 놓고 저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이지요. 제주의 어느 지인이 저에게 제대로 된 쉼을 가지라고 그 집을 빌려 주었지요. 거의 아무 시설도 없는 작은 집인데, 저는 아주 마음에 듭니다.
한자어, 휴식(休息)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누군가의 뜻풀이를 보면서 아,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구나. 휴식(休息)이 바로 피정과 같은 의미로구나. 하는 감탄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피정은 영어로 retreat라고 하지요. retreat의 원래의 의미는 후퇴이지요. 그러니 피정은 일상 삶에서 조금 후퇴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휴식이라는 한자어에는 영어 retreat, 피정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네요.
휴식(休息). 쉴 휴자에, 숨 쉴 식자입니다. 그런데 글자를 가만히 바라보면 거기 깊은 의미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휴(休)는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어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식(息)은 쉼쉴 식자인데, 바로 마음(心)위에 자신(自)을 가만히 오려 놓은 모습입니다. 그러니 휴식(休息)이란 말의 뜻은 우리가 바라보는 그 모양새를 그대로 읽으면 되네요. 휴식은 나무에 기대어, 혹은 나무 옆에 앉거나 서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저는 휴식의 식자가 쉼쉴 식라는 것에 어떤 느낌이 왔고, 거기 마음이 와 닿아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식(息)에서 스스로 자(自)는 원래 코를 나타내는 상형문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코로 쉼을 쉬니까 코에 생명이 있다고 본 것이지요. 가만히 쉼을 쉬면 거기 휴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만히 숨을 쉬면 숨을 쉬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니까요.
사고방식이 어쩌면 이렇게 같을 수도 있는지요? 구약성경, 창세기를 보면 히브리 사람들도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자 생명이 태동하고 사람이 되었다고 본 것이지요. 우리가 숨을 쉴 때, 스스로 존재하는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십시오! 모두 자기의 이름을 찬미하라고 외칩니다. 자기만이 진짜라고 외치지만 외침은 다만 허무한 절규입니다. 가짜가 아닌 진짜를 만나고 싶습니다. 오늘 대림 제 2 주를 맞아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대해 듣습니다. 그는 가짜가 아닌, 진짜입니다. 그는 그 시대의 진정한 예언자였습니다. 그 시대에 세례자 요한과 같은 진정한 예언자가 필요하듯이 오늘날도 진정한 예언자, 가짜 구루가 아닌, 진짜 구루, 진정한 스승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너무나 허허로운 것은 경쟁과 대결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 가짜가 아닌 진짜 구루, 영적 스승,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를 찾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합니다.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저는 요한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며, 우선 저 자신부터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심이 필요하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 물론 가짜가 아닌 진짜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위대한 인물일까요? 당시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많은 제자가 그를 추종했고 그가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기대를 걸었고 그를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요한 복음서를 보면,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복음에서 듣는 이 말씀의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어린양은 속죄의 제물로 바치던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실 구세주께서 오신다는 외침이었습니다. 자기는 구세주가 아니라고. 자기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분이라고.
요한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다만 약함을 지닌 인간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노라고. 그래서 제자들을 시켜 묻게 했지요.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 메시아이십니까?” 이제 그는 알았고, 알았기에 증언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 증언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찬미입니다. 요한의 증언은 바로 ‘하느님, 당신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고 다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깨닫고 그것을 증언할 수 있는 열려있는 마음을 지녔던 위대한 인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인물 중에 세례자 요한만큼 위대한 인물은 없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 나아가서 그의 고백을 들으며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열려있는 마음, 겸손한 마음, 깨어있는 의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며 스승으로 삼고 추종했지만 자기보다 더 앞서신 분,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다만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낮출 수 있었던 그 겸손입니다. 그것은 실상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쉽게 착각합니다. 자기가 잘나서 사람들이 자기를 대단하게 생각한다고. 자기가 정말 위대하다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불었을 때였지요.
“왜 나를 선하다고 합니까?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위대하신 분은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그분이 바로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이 우리가 요한에게 듣는 증언입니다.
[예수회 영성. 피정 지도 신부님/류해욱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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