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닿아야 느껴지는 낯섦
익숙하면서 낯설었던 것은 처음 알바를 하면서부터 느끼게 되었다.
가장 먼저 낯설었던 것은 ‘최저시급’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최저시급이 올해 8천원 대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다. 나도 그랬다. 그저 8천원대의 시급이구나, 그렇게 받는구나 싶었고, 그 가격이 익숙했다. 매년 초 뉴스에서 최저임금 상승률에 대해 떠들어대니 익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그 금액이 책정되었고, 그정도의 시급이 실제 생활하기에 적절한지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편의점 알바를 시작하고 난 후 익숙해보였던 그 8천원대 최저시급이, 정확히는 8720원 최저시급이 낯설어졌다. 편의점 업무는 생각보다 고되었다. 하루 2시간, 일주일에 5번. 주로 물류를 정리 업무를 담당했는데 2시간동안 한 번을 앉지 못하고 몸을 바쁘게 움직여 물류를 정리해야했다. 물류를 정리하느라 허리를 많이 숙여 허리는 아팠다. 5일간의 온전한 나의 오전은 없었다. 주 5일 알바는 생각보다 내 스케줄에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일을 해도 4대보험 비용 9%를 제외하면 약 30만원을 월급으로 받았다. 하루 세끼 밥값도 충당 못하는 돈이었다. 그때부터 8720원이라는 최저시급이 매우 낯설었다. 내 노동에 비해 너무 적은 돈이었고, 부모님의 금전적인 지원없는 생활은 불가능했다. 또 다시 익숙해보이던 세상이 낯설었다. 졸업 때까지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하루에 2시간. 학업에 크게 지장을 안줄정도로 알바를 하는 것은 생활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 친구도 알바를 한다. 하지만 그 친구는 영어 과외 알바로 월 50만원을 받고 일을 한다. 시급으로 따지면 62500원이었다. 친구는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셔 어렸을 때 유학을 다녀온 케이스였다. 친구는 유학을 통해 학습한 영어로 나보다 훨씬 편하게,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돈이 돈을 부른 것이다. 친하고, 익숙했던 그 친구가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나와 잘맞고, 편한 친구였지만 어쩌면 사회에 나갔을 때 우리는 출발점부터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내 친구는 일주일에 알바를 2개를 뛴다. 주말에는 하루종일 빵집에서 일하고, 주중에는 학원 차량 동승 지도 알바를 한다. 그 친구에겐 온전히 쉬는 날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일해도 그 친구는 월 60만원 가량을 벌었다. 친구는 알바를 해야 용돈벌이가 될정도인데 국가장학금에서 왜 자꾸 분위가 높게 찍히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했다.
이 모든 것들은 20살이 되기 전 내가 전혀 몰랐던 사실들이었다. 이미 누군가는 이러한 불합리를 진작에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시하던 세상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익숙해보이던 것들, 익숙해보이던 법과 제도가 낯설어졌다. 이건 분명 불공평했다. 현재 법과 제도의 혜택을 받는 자들은 현재 그것들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 모른다. 직접 나한테 와닿아야지 낯설다는 그 사실은 사회적 우위를 점한 정치인들은 영원히 모를 수도 있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나한테 와닿아야만 관심을 가졌던 내가 얼마나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살았는가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느꼈던 20대에 느낀 익숙하면서 낯선 것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10대 때를 회상해보았다. 불과 몇 개월 전에 10대였던 나에게도 익숙하면서 낯선 것이 존재했었다.
10대 시절 내가 겪었던 익숙하지만 낯설었던 것은 학생의 개개인의 특성을 살려 진로를 탐색시켜주기보다는 입시 공부를 강요하는 분위기였다. 10대 시절 입시를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진로에 대해 생각할 겨를 없이 미적분을 풀면 됐고, 국어 문법을 달달 외우면 됐고, 영어 지문을 해석하면 됐다. 고등학교 3년의 모든 활동은 입시를 위해 맞추어졌다. 본인의 진로가 정확히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가자마자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자신의 진로에 맞추어 발표를 준비하라고 했을 때였다. 한 번도 진로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본적 없었기에 문과 학교에 진학한 나는 문과 계열의 과 리스트를 뽑아 하나씩 지워나가 결국 남은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하였었다. 학교 수업은 국영수 중심이었고, 그것을 따라가기에도 너무 벅찼기에 내 진로를 탐색할 여유는 없었다. 당장은 어른들에게도, 우리들에게도 수학 문제 하나 더 맞는게, 성적 5점 더 올려 대학에 가는 것이 중요했고, 익숙했다. 문제를 풀면서도 이것을 왜 하는지, 왜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한건지 몰랐다. 또 내가 대학조차도 가고 싶은건지 아닌지도 몰랐다. 좀 더 멀리보면 대학을 졸업하고 뭘해야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낯설어진 입시 공부는 회의감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10대는 힘이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입시 스트레스로 소화 장애가 와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엄마 또래의 의사 선생님과 생활 패턴을 이야기하다 내가 아침 8시까지 등교를 해야해서 아침을 천천히 먹을 시간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며 나때도 그랬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수긍을 했지만 다시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약 30년이었다. 30년간 과학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대한민국 학생의 교육 제도만 제자리라는게 말이 안됐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학생들의 처지는 달라질게 없었다. 이제 어른들도 학생들의 이런 모습이 낯설어져야한다. 모든 부분에서 발전했지만 교육제도만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낯설게 느껴야한다.
10대 시절을 회고하며 낯설었던 것을 쓰면서 느낀 것이 있다. 나 또한 입시가 끝나고 대학교를 다니면서 이러한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아라동에 하교하는 학생들을 보면 그들이 겪고 있을 고통이나 스트레스는 생각하지 않고, 현재 최저시급의 불합리함과 관련 법과 제도의 부당함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20대에겐 투표권이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20대는 느끼는 불합리함을 투표로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10대들은 투표권이 없었고, 익숙하고 당연한 현실이었다. 갑자기 이조차도 낯설어졌다. 왜 10대들은 그들의 의사를 표현할 길이 없고, 본인들의 상황을 본인들이 바꿀 수 있는 길이 없을까? 10대 때 나는 어른들이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맞았다. 어른들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몰랐고, 자신들이 얼마나 힘든지만 생각했다. 결국 당장 자신들이 힘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 교육임을 간과한 것이다. 10대에게 의사 표출권이 없다면 어른인 우리가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옳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당장 자신의 일로 맞닿았을 때만 낯섦을 느낀다. 또한 그 당시 낯섦을 느끼더라도 그 위치에서 벗어나면 까먹고 만다. 나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의 일상 중 당연한게 없음을 인식하고, 낯설게 느끼도록 노력해야한다. 낯섦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그 법의 수혜자이거나 권리를 못찾고 당연시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나를 포함한 다른 위치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하며, 이를 인식하고 투표로 제도와 법을 개선을 주도해나가야한다. 투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무기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8천원대 최저시급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정당한 노동의 대가에 대해서 고민해볼 기회를 놓치게 되겠지요. 과외하는 친구의 시급과 비교해보면 더욱 더 불공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불합리하다는 평가로 그치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위하는 것으로 그치면 세상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과외와 빵집 알바의 노동이 동일한 시급으로 계산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직업으로 하는 분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 정도로 사회체제와 구조가 개선되어야 할 필요는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