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이 그렇습니다. 경찰은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등장합니다. 또 그럴 수밖에 없지요.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어떻게 알고 대비합니까? 경찰서 수사반장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그 벽에는 미결사건의 목록이 쪽지로 열거되어 있습니다. 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저걸 언제 다 해결하지? 수사 인력이 부족하다는 말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런데 유독 나와 관련된 사건만 빨리 먼저 해결해달라고 부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폴’도 이해하고 아무 말 없이 그냥 발길을 돌립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도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 사건의 당사자들 역시 모두 그런 기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가장 공평한 방법은 사건 순서대로 처리하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단서를 찾아야 하고 현장들을 답사해야 하고 사람들을 찾아다녀야 합니다. 때로는 미로 찾기와도 같습니다. 가능성보다는 헛걸음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미행도 하고 잠복근무도 해야 하고 이것저것 증거물도 찾아야 하고 등등 머리도 복잡하고 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불만을 가질 수 있어도 이러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뭐라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형사가 말해준 대로 그저 조용히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당한 마음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밤잠을 설치게 하고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비슷한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를 통하여 알게 됩니다. 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일이겠지요.
아내는 이미 장사를 지냈고 딸은 아직도 의식불명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병실을 들여다보고 그 옆을 지키고 있다 보면 답답함과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기 힘듭니다. 총기상회에 갑니다. 점원은 허가받는 일이 복잡해도 자기가 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안내하며 자신에게 구입하라고 권합니다. 자칫 신분이 노출될 수 있겠다 싶을 것입니다. 아무튼 방법을 찾으려 합니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범인을 찾아보려고 마음을 먹은 듯합니다. 나아가 이 못돼먹은 사회의 벌레 같은 인간들에 대한 분노가 새겨집니다. 나만 당하는 일이 아니라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여기저기서 약한 사람들이 뜯기고 터지고 죽기도 합니다. 경찰에게 맡기면 부지하세월입니다.
어느 날 병원 응급실로 총상 입은 피해자가 실려 옵니다. 급히 폴이 불려와 피해자를 진단합니다.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순간 피해자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에 눈이 갑니다. 그리 흔한 것도 아닌, 아내가 선물해주었던 바로 자기 시계입니다. 폴은 그가 실려 온 구급차로 달려갑니다. 그의 자리에서 권총을 발견한 그는 급히 자기 옷 속에 숨깁니다. 병실로 돌아온 폴은 그의 손목에서 시계도 벗겨 주머니에 넣습니다. 구입하는데 곤란을 겪었던 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모자가 달린 셔츠를 입고는 으슥한 골목을 거닙니다. 알지도 못하는 불량배들이 시비를 걸어옵니다. 만만해보였지요. 앞뒤 가리지 않고 권총을 쏘아댑니다. 그리고 자리를 뜹니다.
여성에게 못되게 구는 녀석들도 사정없이 총을 쏘아댑니다. 미성년 아이들을 폭행하고 겁주며 갈취하는 폭력배도 찾아가서 그대로 총을 쏩니다. 늘 있어왔지만 근래 일어나는 총기 살인사건들이 좀 수상합니다. 모두 전과자들이고 마약상이며 동네에서 악명이 높아 사람들이 지탄을 받던 자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없어져주기를 바라던 대상들입니다. 법만 따지는 경찰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는데 하나둘 사라지니 시민들은 반깁니다. 천사는 되지 못하더라도 대신 처리해주고 있으니 고맙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악당들이 겁을 먹고 못된 짓들을 삼가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거리를 좀 편하게 다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범죄자도 기본권이 있습니다. 죄는 죄이지만 인간의 권리 또한 권리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구속구금 또는 구타나 고문을 행하면 안 됩니다. 이런저런 것을 따지며 수사하자니 답답할 수 있습니다. 옛날처럼 족쳐서 실토하도록 만들면 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 생사람 잡는 일이 많으니 삼가자는 것입니다. 극한 악당을 살해해도 역시 살인입니다. 그러니 수사를 해야 하고 체포해야 합니다. 폴은 용케 피하면서 복수를 행합니다. 당시 집에 침입해서 아내를 살해하고 딸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고 도망간 불량배들을 스스로 찾아내서 응징합니다. 그러나 수사망이 좁혀옵니다. 가까운 동생도 눈치를 챕니다. 언제까지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는 없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으면 그 충격은 상상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아픔과 슬픔은 평생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아니라 못된 사람들에 의해 살해를 당했다면 그에 더해 분노가 덧대어집니다. 세상역사 속에 복수 이야기가 많은 것은 이에 기인합니다. 참기 어렵지요. 나서서라도 되갚아주어야 합니다. 이야기로 보고 듣는 사람들은 그냥 신나지만 행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불행입니다. 그냥 한 인생을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가장 고상한 해결은 ‘용서’이지만 얼마나 어렵습니까? 신나는 삶보다는 신처럼 살아야 사람의 인생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영화 ‘데스 위시’(Death Wish)를 보았습니다. 2018년 작인데 그보다 오래 전에 이미 나온 것을 재편한 모양입니다. 물론 배우도 바뀌었지요.
첫댓글
감사합니다. 복된 한 주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