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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한 전설의 무용가 최승희
《신여성》 1924년 4월호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생
18명 사진화보와 진로 소개. 가정에서 생활하겠다는 여학생 4명,
보통학교 교사 5명, 사범과 진학 3명이었고, 일본 유학이 6명이다.
불과 15년 전만 해도 여학교 학생모집이 쉽지 않았는데,
이젠 처녀가 외국 대학유학을 허락하는 가정이 생긴 것.
‘신식’ 교육을 받은 여자들을 ‘신여성’이라 부르기 시작.
신여성들은 옷과 머리 모양에서부터 ‘구식’ 여성과 구별.
여학교 교복이 변화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886년 근대의 여학교에서는 교복을 입게 했는데,
그 시작은 붉은색 치마저고리 교복이었던., 이화학당.
숙명은 자주색 양장교복이 반발이 심해 한복으로 바꿨다.
이후 이화학당 학생들이 붉은색 교복을 싫어하자
학교에서는 저고리 길이가 길고 치마 길이가 좀 짧은
개량 한복을 교복으로 삼았고, 1920년대에 양장이 등장.
그전에는 개량 한복이 여학교 교복의 한 형태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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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우리나라 여자들이 긴 머리를 자르기 시작.
여자의 단발에 대한 찬반론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신여성> 1925년 8월호는 ‘여자의 단발’ 제목.,특집기사.
조동식 동덕여고 교장, 김윤경 배화여고 학감,
일본인 숙명여고 교무주임과 진명여고 부교장은
‘반대는 안 한다’는 소극적인 찬성 의사를 밝혔다.
오랜 세월 이어져온 옷과 머리 모양이 바뀌는데는
이처럼 어느 정도의 사회적 동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당시 여학교 학사 책임자들이
이런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힘에 따라
단발을 하고 긴 저고리에 짧은 통치마를 입은
신여성들이 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세상에서는
그들을 ‘단발 미인’ ‘모단(毛短) 걸’ ‘모던걸’이라 불렀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양장과 단발 모던걸이 가끔 등장.
북촌(계동, 가회동, 삼청동, 효자동, 통의동)일대가 아니라,
충무로, 을지로, 명동 일대.,다방과 카페, 백화점 거리., ‘남촌’.
근대화가 김주경이 일본유학 중 여름방학 때
서울에 다니러 왔다가 양장을 하고 양산을 쓴
신여성이 시청 쪽을 향해 걷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소공동 부근으로 남촌의 입구.
이 부근에 조선인이 운영한 최초의 카페
'낙랑파라(樂浪parlour)'가 1931년에 오픈.
거기서 시인 이상과 소설가 구보 박태원이 만나
시간을 보냈으며, 이상은 모던걸 변동림과 연애했다.
1930년대 모던 걸들의 최대 관심사는.,자유연애였다.
당시 자유연애는 신분과 계급의 차이는 물론 죽음마저
불사하는 사랑이었고, 당시 신랑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하던
풍습에 대한 반발이자,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일환.
모던걸의 자유연애는 가히 한 시대를 풍미.
1930년대 사회주의 운동가들 사이에
동지애적인 사랑에 입각한.,‘붉은 연애.’
비밀 아지트에서 ‘부부’ 행세를 하다가
가짜가 진짜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졸업한 문학소녀
변동림(卞東琳, 1916~2004)도 모던 걸이었다.
변동림(1916년 ~ 2004년 2월 29일)은
여성 수필가, 미술평론가 겸 서양화가.
......................변동림......................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성부 출생이다.
시인 겸 소설가 이상과 결혼하기도 했었지만,
이상의 죽음으로 결혼생활은 4개월 만에 끝났다.
이후 1944년 화가 김환기와 재혼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를 중퇴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 및 에콜 드 루브르에서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 주로 파리를 소재로,
김향안(金鄕岸)이란 필명으로 글을 쓴 수필가였다.
1964년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단.
2004. 2. 29, 미국 뉴욕 주 뉴욕 시티
자택에서 향년 89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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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李箱)과
뜨거운 연애를 했던., 한때 이상의 여인.
그녀는 이상의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이모.
구본웅(1906~1953)은 어릴 때 사고로 척추장애인.
경신고보 시절부터 미술반 활동을 했으며 매주 토요일
YMCA에서 여는 고려화회(高麗畵會)에 나가 우리나라 최초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에게 그림을, 김복진에게 조각을 배웠다.
구본웅은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조각
<얼굴 습작>으로 특선한 뒤, 1928년 일본으로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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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와 니혼(日本) 대학 미술과에서
기초 수업을 마친 후,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 본과 입학.
1934년 졸업하며 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여러 단체전에 참가했다.
구본웅의 친척 중앙대학교 구광모 교수가 쓴
《우인상(友人像)과 여인상(女人像)》에 따르면,
이상과 구본웅은 어릴 때부터 경복궁 서쪽 동네 이웃.
신명초등학교 동기동창이며 구본웅은 이상보다
네 살이 많았지만, 장애인인데다 몸까지 약해서
제대로 진급을 못하고 이상과 같은 반이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척추장애가 있는 구본웅을
‘꼽추’라 놀리며 따돌렸지만, 이상은 그를 따랐다.
당시 이상은 ‘김해경’이라는 본명을 사용할 때였다.
이런 우정은 구본웅이
일본 미술 유학으로부터
돌아온 후에도 계속되었다.
구본웅은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 해인 1935년,
이상의 얼굴을 캔버스에 그렸다.
이상이 단편소설 '날개' 발표 한해 전.
구본웅이 이 〈친구의 초상〉을 그릴 때
이상은 이미 결핵 3기라서 각혈이 심했다.
그런데도 이상은 그당시 계속 담배를 피웠다.
자신에게서 도망치려는 기생 금홍을 붙잡아두려고
차린 다방 ‘제비’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을 상황에 처했다.
구본웅은 그런 이상이 식민지 청년의
상징적인 모습이라 생각하며 그린 초상화.
그래서, 주인공 얼굴에는 어둠이 드리워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 야수파 화가
'모리스 드 블라맹크' 1900년 작
<파이프를 문 남자>와 1911년 작
<자화상>에서 붉은색 입술, 파이프,
담배연기, 배경 등을 모방한 것인듯.,
시인 고은은 《이상 평전》에서
“꼽추 구본웅은 그의 문학적 취향과 함께
파리 물랭루주 난쟁이 화가를 방불케 하고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에 비유되기도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구본웅을 묘사했다.
키가 큰 이상과 작은 구본웅이 함께 걸어가면
어린아이들이 놀렸고, 나이든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곡마단패가 들어왔나 보네” “활동사진 변사 일행이야?”
구본웅의 친구 삽화가 행인(杏仁) 이승만(1903~1975)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삽화가 전한다.
초상화가 완성된 얼마후 이상은 제비다방의 문을 닫았다.
하지만, 이상은 그후에도 ‘물장사’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카페 ‘츠루(鶴)’, 다방 ‘무기(麥)’ 등을 개업했으나 경영 실패.
큰아버지 유산을 이렇게 탕진했고, 폐결핵이 점점 더 심해졌다.
구본웅은 친모가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후 계모의 손에 자랐다.
계모 변동숙은 구본웅을 정성껏 키웠다.
그런데 변동숙의 아버지가 훗날 새장가를 들어
자신과 26살 차이가 나는 이복여동생을 낳았다.
변동숙에게는 딸 같은 '이복 자매' 변동림이었다.
그 이복여동생 변동림이 '연상의 조카' 구본웅의 친구
이상과 커피를 마시고 데이트를 하면서 문학을 논하다가
사랑에 빠져 살날이 얼마 안 남은 이상과 결혼하겠다고 고집.
이상이 폐병을 앓고 있음을 아는 변동숙은.,결사 반대.
그러나, 변동림은 1936년 6월 이상과 결혼을 강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에
이상의 호적에 변동림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과 변동림 부부에게 신혼의 즐거움은 잠시뿐.
이상의 폐결핵은 점점 심해졌고,
구본웅은 천재이자 연하의 이모부인
이상이 그렇게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도록
놔둘 수 없다며, 일본 요양하라며 돈을 건넸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액수는 아니었기에
결혼 4개월 만인 1936년 9월에 이상 혼자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 요양하던 이상은 1937년 2월 공원을 산책하다
‘불령선인(명령을 듣지 않는 조선인) 죄목으로 경찰에 체포.
옷차림이 허름하거나 용모 단정치 못한 조선인은
무조건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되었던 시절이었다.
이상은 니시칸다 경찰서에 34일간 구금되었는데,
이때 건강이 다시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얼마 후 변동림은 도쿄에 거주하는 이상의 친구에게
빨리 일본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
이상이 매우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변동림이 병원에 도착하고 며칠 후인 1937년 4월 17일,
이상은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변동림은 수필 '월하의 마음'에서 이상의 운명을 이렇게 회상.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짓는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우리 근대문학사의 천재는 이렇게 박제가 되었다.
21세에 청상(靑孀)이 된 변동림은 이상의 유골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묘소는 유실되었다.
훗날 변동림은 이상의 죽음에 대해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라고 회상했다.
1929년 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이미 졸업한 건축학도였다.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며,
훗날 화신백화점과 성북동 간송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에게 설계를 배웠다.
이상은 21세에 김해경(본명)은 각혈을 하기 시작했다.
각혈을 진정시키려 황해도 배천(白川)온천을 찾아갔다.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1932년쯤(23세때)으로 추정.
배천온천은 500년 명소로, 북한 천연기념물.
라듐 함유량 높은 알칼리성 온천으로 규폐증,
기관지염 환자들이 질병치료를 위해 많이 이용.
거기서, 20세쯤 되는 술집여자 금홍을 만난 것.
23세 나이의 이상은 벌써 '죽음'을 앓고 있었고,
금홍은 17세 때부터 작부, 19세 때 딸을 낳은 여자.
1933년 각혈이 시작되면서 총독부를 그만둔 그는
황해도 배천 온천에 요양 갔다가 돌아온 뒤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했다.
건축가 이상이 배천의 금홍을 부른 것은
1933년 경 요양을 갔다온 뒤 1년쯤 뒤다.
그해 이상은 백부의 양자로 들어갔으나
보름을 못견디고 집안을 뛰쳐 나왔고
백부의 유산으로 청진동 건물의 1층을
전세 내서 다방 '제비(燕)'를 차린 것.
그리고 금홍을 마담으로 앉혔다.
두 사람은 동거를 그렇게 시작한다.
그당시 이상은 24살이고, 금홍은 21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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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부였던 큰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이 많아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었다. 제비에는 이태준 ·
박태원 · 김기림 등 당대의 문인들이 드나들었고,
이상은 1934년 그들이 주도하는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면서 글쓰기 시작, '오감도'가 바로 이때 작품.
1934년 7월 24일, 조선중앙일보 독자들은
학예면에 실린 ‘오감도(烏瞰圖)―시 제1호’라는
제목의 시를 읽으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십삼인(十三人)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適當)하오.]
제1(第一)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2(第二)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3(第三)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형태의 시였다.
어떤 독자는 ‘막다른 골목길’이 식민지 시대의 암울함을,
무서워하는 아해는 조선 민중을 상징한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어떤 독자는 이게 무슨 시냐며 혀를 찼다.
다음 날인 7월 27일에는 심산 노수현의 네 칸 만화와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의 시와 생애를 소개하는
기사 사이에 〈오감도〉 ‘제2호’와 ‘제3호’가 실렸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
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
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
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
전날 고개를 끄덕였던 독자는 숨은 뜻을 찾기 위해
신문을 뚫어지게 바라봤고, 혀를 찼던 독자는
신문을 집어던졌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시를 모독하는 말장난”이라는 비난이 이어졌고,
이때부터 연재를 중단하라는 독자들과 30회까지
연재하겠다는 학예부의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연재는 결국 8월 8일자에
15회를 싣고 중단되었다.
그만큼이라도 연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학예부장 상허 이태준의 뚝심 덕분이었다.
변동림은 당시 자유연애라는 명목으로 ‘첩살이’를 하던
대부분의 모던걸들과는 달리, 이상의 ‘본처’였다.
그러나 이상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7년 후,
자녀가 셋이나 있는 화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살림을 차렸다.
모던걸에게는 본처살이나
첩살이 같은 명분보다는
‘불타는 사랑’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변동림이 김환기와 동거를 시작하자
이복언니 변동숙은, 부인이 있는 김환기의
첩살이를 하는 건 결국 본부인을 내쫓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며 결사반대했다.
이에 변동림은
변씨 가문과 아예 인연을 끊겠다며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바꿨고,
얼마 후 김환기는 본부인과 이혼했다.
근대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현대미술사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화가 김환기는
이렇게 이상에 이어 구본웅의 이모부가 되었다.
김향안과 김환기는
근원 김용준이 살던 성북동 ‘노시산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후 집 이름을 ‘수향산방
(수화 김환기와 향안이 사는 집)’으로 바꿨다.
김향안은 1955년 김환기와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미술평론을 공부했고,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1978)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알리는 데 힘썼다.
경성보통학교 시절.,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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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시인' 이상.
.......................
천재시인 이상(1910∼1937)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 기념.
저고리에 치마를 입고 있는.,이상.
경성거리
일제강점기 경성거리 & 백화점
이상 집터
친구는 나의 자화상.
구본웅 & 이상.
화가 구본웅
금홍 초상
제비 다방.
이상이 그린., 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