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고린도전서1장1~17절
제목 : 온전히 합하라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입니다.
지리적 위치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지점에 놓여 있습니다.
이 도시는 특히 육상 및 해상 무역로가 집중되어 상업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해 경제적으로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에는 다 민족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각 곳에서 모여온 우상도 많았고,
아울러 이곳은 많은 이방 신전들이 있는 우상 숭배의 도시였습니다.
생활은 사치하였으며, 윤리적으로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 때에 바울은 아덴을 떠나 우상숭배도시 고린도에 도착하여
일 년 육 개월을 고린도에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행18:11절).
그 결과 디도 유스도와 회당장 그리스보 가족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면서,
고린도교회가 시작되었고, 많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설립된 고린도교회는 고린도교회가 바울이 없는 사이에 시험이 닥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는 A.D.55년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안고 있는 의문점들에 대해서 신앙적인 답변과 교훈을 주기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1. 문안(1~3절)
1) 발신자는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입니다(1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먼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바울을 찾아와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란 말은 직역하면 “하나님 뜻을 통하여”라고 합니다.
바울이 사도된 것이 하나님 뜻에 합당할 뿐 아니고 하나님 뜻이 간섭함으로 된 일이란 의미입니다(Findlay).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친히 부르셨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 여러 당파들이 있어서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2절;9:1-12).
여기에서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로,
전권을 위임받은 특사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도'라는 직분은 원래 오직 그리스도가 임명을 해서 직접 보낸 열 두 제자만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다가 초대 교회에서는 이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근거로 해서(행9:15) 자신의 사도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된 것임을 명백히 합니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권위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이 본서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신분을 사도라고 밝힌 것은 매우 중요한의미를 지닙니다.
“형제 소스데네” - 소스데네는 고린도의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 이었으며, 유대인들이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송사했을 때 바울 대신에 그들에게 매를 맞은 사람이었습니다(행18:12-17).
*행18: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그가 바울과 함께 본 서신을 집필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나 고린도 교인들이 소스데네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언급했을 것입니다.
2) 수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입니다(2절)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입니다.
(1) “하나님의 교회” - 바울이 고린도라는 지명과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언급한 것은 기독교의 고귀한 이상과 우상 숭배의 허탄함을 극명하게 대조해 주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에게 속한 교회임을 나타내는 이 표현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과 하나님의 교회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는 바울의 겸손함을 잘 드러내 줍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교회를,
헬라 세계의 세속적인 '엑클레시아'와 구별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세속적인 세상의 총회(엑클레시아)는 공공, 이익에 관련되는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도시 국가의 시민들이 모이는 집합체였습니다(행 19:39).
(2)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묘사합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고린도인들을 '성도'와 '거룩하여진' 자들로 칭했다고 해서 고린도 교인들 모두가 참 신자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고린도시가 부패했던 것처럼 교회도 교리와 실천에 있어서 상당히 부패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기독 신자들은 자력(自力)으로
거룩하여질 수 없고 다만 그리스도의 성결과 연합할 뿐입니다.
그들은 이 연합 때문에 성도라는 이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립됩니다.
(3) “또 각처에서...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각처에서'라는 말은 이 서신이 고린도 교회 이외의 다른 교회에서도 읽혀진 것을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본 서신이 비록 고린도 교회에 보내진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교회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배제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바울의 서신은 하나님의 교회의 근본적인 성격을 원리적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이 구절은 전형적인 바울의 인사 형식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 '예수 그리스도'란 말은 본장의 1절부터 9절까지 아홉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바울의 문체의 독특성 중의 하나는 핵심되는 단어를 계속하여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이런 형식의 인사말은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문구입니다(롬 1:7;갈 1:3;엡1:2;빌1:2).
'은혜'(카리스)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값으로 계산 불가한 것을 대가 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은혜의 방편 : 말씀, 성례, 기도)
'평강'(에이레네)은 히브리인들의 일반적인 인사말 '샬롬'('평화')에서 온말로 분쟁과 싸움이 없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축복이 있어서 풍요로운 영적 상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고(고후8:9;엡 2:8,9),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롬 5:1;엡 2:14).
본절에서 바울은 비록 은혜와 평강을 얻는 방편인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믿음을 소유한 모든자들에게는 이 은사가 주어지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요,
그 복을 받도록 하여 주시는 이는 중보자(仲保者)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 다음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따릅니다.
"은혜"란 말이 먼저 나오는 이유는,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은혜를 받은 뒤에야 모든 다른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강"은 영혼의 평안이니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평안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감사와 소망(4~9절)
1)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크게 감사했습니다(4절).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사말에 이어 수신자들을 위한 감사를 드립니다(롬 1:8;빌 1:3-7;골 1:3-8).
(1)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심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엔 크리스토 예수)라는 말은,
바울의 서신에 164회나 나타나며 옥중 서신에 특히 많고,
본서에서도 11회나 쓰였습니다(2,4절;3:1;4:10,15,17;15:18,19,22,31).
바울이 여기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영역 안에서,
특정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곧,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로 간주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니 우리는 그의 지체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란 말뜻입니다.
(2)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은 신자의 높은 덕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바울은 그가 가르쳤던 교회들을 위해 정규적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엡1: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빌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바울은 지속적으로 감사를 생활화 하였습니다.
-감사하는 자는 태양과 같고, 단비와 같고, 향기와 같고, 양약과 같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뜻, 모든 덕행의 근본, 모든 봉사의 근원,
참신앙의 열매,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때에 엔돌핀과 다이돌핀이 나옵니다.
감사하면 몸이 건강하여 집니다.(정신분석학자 뇔르 넬슨과
지니 르메어 칼라바 3년간 연구하여「감사의 힘」이란 책을 출판)
-감사는 양념입니다.
-감사는 행복지수입니다.
-본회퍼는 “우리는 감사를 통해 부자가 된다”
-존 헨리도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이자 해독제이며 방부제다”라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일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일로 인하여서도 감사하면,
감사가 많아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우리는 남이 잘 되기를 원하여야 됩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은, 단체 생활에 있어서 결국은 나 자신이 잘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나를 둘러싼 이웃 사람들이 흉악하여 불행한 자들이라면,
나는 얼마나 그 가운데서 고통을 당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남들이 잘 되기를 바라야 하고,
그들이 잘 될 때에 기뻐하며 감사하여야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잘 될 때에 내가 기뻐한다면,
그만큼 내 기쁨의 이유는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자아(自我)라 하는 작고 좁은 속에 갇히어 살 때에,
언제나 불만과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다른 사람들을 나 자신 같이 생각하며, 그들을 사랑할 때에는 그만큼 나의 생(生)의 무대는 넓어지고,
인생의 사정(事情)을 아는 식견(識見)이 높아져서,
기쁘고 유쾌하고 감사하는 생활이 계속하게 됩니다.
남들을 나 자신과 같이 생각하는 생활은 그 만큼 위대하고, 고상하고, 깊고, 넓고, 밝고, 행복되고, 유력한 것입니다.
2) 바울이 특별히 감사한 이유가 있었습니다(5~7절)
첫째, 고린도 성도들이 모든 언변과 지식이 풍족하였습니다(5절).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고린도 교회에 내려진 하나님 은혜가 각 방면에서 풍족하게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언변”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로고스이니 언변이라고 하는 것보다,
전파된 진리(the truth preached) 곧, 복음의 진리라 함이 적합합니다.
그리고 “지식”은 그 전파된 진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지식'이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8),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곧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실재 위에 기초한 구체적인 지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 증거가 견고했습니다(6절).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증거'란 바울이 4년 전에 고린도에 머무르면서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말합니다.
셋째,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나타나심을 기다림입니다(7절).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은사'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구원(롬5:15),
일반적인 하나님의 선물(롬11:29), 성령의 특별한 능력(12:4)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전체 문맥을 고려해 볼 때 그리스도의 증거가,
고린도 교회에 좋게 받아들여져서 나타난 열매를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믿음, 지식과 같은 내적인 은사뿐 아니라,
이적 행함과 병고침, 방언과 예언 같은 외적인 은사들이 풍성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
곧,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재림 신앙(再臨信仰)을 인하여 감사 합니다.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가능하면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주님께서 재림하시기를바랐습니다(15:51;살전1:9,10;약5:8,9;벧전4:7;요일2:18;계 22:20).
3) 하나님의 거룩한 뜻(8~9절)
(1)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십니다(8절)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여기서 “주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지칭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는 표현은 바울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 '책망할 것이 없는'
아무도 비방할 수 없을 만큼 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흠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증하는 자들을
고소할 만 한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롬8:33).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따라서 본절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2)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십니다(9절).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미쁘시도다'의 헬라어 '피스토스'가 원문에는 문두에 나와서 강조적으로 쓰였습니다. ‘미쁘시도다’는 신실하다, 성실하다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말로써 그의 자신의 근거가 되는 말이고(고전 10:13;살전 5:24),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 사용되는 중요한 용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히3:2;10:23;벧전 4:19;요일 1:9;요삼1:5;계 1:5;3:14).
바울은 본 서신의 첫머리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고 밝혔는데, 본절에서는 모든 신자들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이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제하여,
그들을 거룩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롬 3:29).
*롬3: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여기서 '교제'(코이노니안)란 연합과 교통을 포함하는 말로,
함께 참여함을 의미하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됩니다.
죄 가운데 죽었던 자들을 거듭나게 하여,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교제로 초대하신 하나님은,
미쁘신(신실하신, 성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문제(11~12절)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 분쟁이 일어났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고린도 교회가 파당문제 우상문제, 간음문제, 성도상호 소송문제, 결혼문제, 은사문제, 부활문제 등 많은 문제 소식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요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였던 고린도교회가 바울이 없는 사이에 시험이 닥치게 됩니다.
사탄마귀는 은혜가 충만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했던 아름답던 교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거룩한 성도들, 감사와 감격에 살던 성도들이,
강팍하게 되었고, 서로 불신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은혜로운 교회가, 진리의 말씀에 서있던 수준 높은 교회가,
분쟁이 심한교회, 부도덕한 교회, 살벌한 교회, 세속적인 교회, 무질서한 교회로 병들고 말았습니다.
2) 심지어는 지금은 떠나버린 지도자들의 이름을 가지고 당파를 짖고 모이길 시작 했습니다. ① 바울 파 ② 아볼로 파 ③ 게바 파 ④ 그리스도 파로 나뉘어 져 파벌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3) 바울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했습니다(13~17절)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 세례를 받습니다(13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 이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나뉘어진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아무도 그리스도의 자리에 설수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나 삼위일체 하나님과 견준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14~15절)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보'는 행18:8에 나타나는 '회당장 그리스보'와 동일한 인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본절의 '가이오'라는 이름은 행 19:29에 나오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는 다르지만 롬16:23에 언급된 모든 고린도 교회를 접대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요삼 1:5, 6에 나오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가이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여하튼 바울은 이 두 사람과 스데바나 집 사람(16절)에게만 예외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세례를 베푸는데 있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몇몇 소수의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이 바울 자신이 제자를 만들고 있다는 비방을 막을 수 있어서,
그는 기뻐하였습니다.
(3)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16절)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스데바나'와 그의 가정은 아가야에서 최초의 열매였습니다(16:15).
당시 스데바나는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에베소에서 바울과 같이 있었습니다(16:17).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콘'은 거처 즉 눈에 보이는 건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눅12:39) 본절에서는 가족이나 식구를 구성하는 개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이 말에는 그의 혈육 친척들과 종들 까지도 포함된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므로 바울이 언급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한사람도 빼놓지 않으려 했음을 시사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적이 없음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자신에 대한 오해를 막고 자신을 그릇되게 추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서로 지체됨’을 상징하는 세례마저
자기 자랑과 파당의 도구로 삼으려는 자들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4) 바울은 자기가 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17절).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고린도에서 제한적으로 세례를 배푼 이유는 그의 본질적인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진술합니다(행 26:17, 18).
바울의 관심은 명성이나 추종 세력을 얻는 데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을 온전하게 드러내고 전하는 데 있었습니다.
바울은 늘 자신이 ‘보냄받은 자’임을 잊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현학적 웅변이나 현란한 수사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거나 과장하지 않았습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만 높이고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 보았습니다.
5. 바울의 권면 온전히 합하라(10절)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로 부드럽고 사랑이 가득 담긴 어조입니다.
바울은 종종 중요한 사실을 말하려고 할 때 이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고전 7:29;14:20).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주님의 칭호(稱號)를 모두 다 사용한 것은 그의 호소가 얼마나 진지하고 엄숙한지를 보여 줍니다.
너희를 권하노니 - '권하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로'는 '격려하다', '권고하다'의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좀더 강조해서 '간청하다', '탄원하다'의 어조를 띨 수도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보이며 강한 권면을 하려는 바울의 심정이 엿보입니다.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 12번 나옵니다. 대부분이 바울사도가 사용합니다.
즉, 같은 말씀으로 하나 되는 교회, 같은 마음으로 하나 되는 교회,
같은 뜻으로 하나 되는 교회를 이루워야 합니다.
첫째, 같은 말씀으로 하나 되기 위해서는 예배의 감격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배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만나 대화 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자 공간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나, 가정,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 중심에는 말씀이 서 있어야 합니다. -말씀훈련
둘째, 같은 마음으로 하나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섬김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 감동에 물질적, 육체적, 시간적 섬김과 봉사가 동반 될 때 가능해 집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길때 가능합니다.- 섬김의 훈련
셋째, 같은 뜻/생각으로 하나 되기 위해서는 부흥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되어야 합니다.
부흥은 같은 뜻으로 모아질 때 일어납니다.
갈등과 분열, 반목과 무관심이 있는 곳에는 어떠한 변화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전도의 훈련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첫머리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하노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갖는 갈등과 분열의 어려움 속에서,
그 해결책으로 결코 어떤 인간적인 수단 방법이나 규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어려운 문제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고,
그의 십자가와 사랑에 의한 해결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는 말 속에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권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순종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서 “온전히 합하라”는 말의 의미는, 부러진 뼈를 고치거나,
어긋난 뼈를 바로 맞출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또한 옷의 헤어진 곳을 가리키는 말로,
속살이 드러나 보기가 흉해서 꿰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히 합한다는 말은 뼈를 바로 맞추거나 헤어진 옷을 꿰맨다는 뜻입니다.
어떤 공동체이든, 갈등과 분열, 반목과 무관심은, 마치 몸의 뼈가 어긋났을 때처럼, 옷이 헤진 것처럼, 매우 부자연스럽고, 보기 싫고, 민망스럽고 고통스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건강과 힘을 위해서는, 속히 온전히 고쳐서 합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고집스러움을 내려놓고,
내 입장에만 보고 판단하는 경직된 마음을 내려놓고,
서로 이해하려는 마음, 서로 존중하려는 마음을 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때,
우리는 진정 자유로워지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되려면 먼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되라는 것은 획일적이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받아들이고 연합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연합 혹은 합일의 근저는 바로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가르쳐주신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앞장서기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듣고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문제 해소 방안을 편지로 보냈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공동체나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툼과 허영이 없어야 하고 예배에 참석하여 같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같은 마음(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같은 뜻(하나님의 뜻)으로 온전히 합하여야 합니다. 우리 외지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이루기를 소원하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