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중앙아시아에서 크림반도에 걸쳐 활동했던 스키타이인들을 최초의 등자 발명과 최초의 복합궁을 사용한 민족으로 서술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스키타이와 관련하여 수 많은 연구를 진행해온 러시아의 고고학 연구자료에 의하면 스키타이와 우리민족 특히 신라계와의 연결점이 있다고 합니다. 스키타이가 고비,알타이계의 서방(흑해연안)진출(말이좋아 진출이지 사실은 지역 쟁탈전에서 패배한 부족이 흑해지역으로 쫒겨들어감)로 멸망 당하는 시기가 AD 2세기경이라고 합니다. 등자발명과 복합궁 개발이 서양에서는 스키타이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고비,알타이에 근거한 유목생활을 하는 기마민족에 의해 이루어 졌다고 보고 있는데 이는 고고학적 유물이 말해주고 있지요..고비,알타이 지역의 암각화에 나타난 선사시대의 사냥그림을 보면 고구려 고분벽화속 수렵도그림과 매우 닮아 있으며 우리네 각궁과 같은 형태의 큰 활로 말,큰뿔소를 사냥하는 그림이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답니다. 이들에 의해 말의 가축화가 이루어 졌으리라 짐작해보며 이로인해 기마술,안장,등자의 발명,복합궁의 개발,수레바퀴의 발명등이 이루어 지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론해 볼 수 있답니다.
고비,알타이가 러시아 고고학자나 세계 고고학자들 사이에 가장 관심을 끄는 지역으로 각광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인류문명의 태동지역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서 건너 온 최초의 인류가 풍족한 식량자원속에서 수 만년 찬란하게
꽃을 피워 발전해 온 지역이 고비,알타이 지역이라고 지질학자들에 의해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지요..지진이나 자연재해의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지구상에서 유일한 지역이라고까지 한답니다.
러시아와 몽골 우즈벡키스탄의 국경선에 위치한 천년고원 고비,알타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 지질학,고생물학,초지학 등 다양한 학술연구가 세계적인 관심을 끌며 공동연구로 이루어 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답니다.
생활속의 지혜에서 모든 발명이 이루어져 온 인류의 역사를 반추해 본다면 가능한 추론 일 듯 합니다.
그리고 고고학적 유물이 말해 주고 있지요^^
스키타이인들과 우리민족의 유사점은 다양하고 굉장히 많다고 학자분들께서는 말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곳에서부터 파생된 우리민족의 초기 이동과정과 정착과정,민족국가 형성과정에 대해서 심도(과학적 접근)있게
다루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조선의 역사,고려의 역사책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 보다 수 천년 아니 수 만년 앞선 유목민족으로써의 초기 민족 형성과정을 둘러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방기마민족은 우리가 생각하는 거리,영토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생활을 영위해 왔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생활패턴이 있다는 얘기지요. 문자로써 기록되어 오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들만의 문화나 역사는 거리는 떨어져 있다해도 함께 공유하며 소통해 왔을 것입니다.
말이라는 빠른 이동수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걸어서는 몇 달,몇 년이 걸릴 거리를 말을 타고 간다면 몇 일.몇 주면 도달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로 치면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공유하고 소통하는 것,
오늘날 인터넷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면 예전에는 말이 그 자리를 대신 했을 것이라 생각드네요^^
우리민족을 기마민족의 후예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북방민족의 생활패턴(의,식,주,무속신앙)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중국의 漢族과는 분명 다른 문화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정착 농경민족의 시각(소유개념,피지배자)이 아니라 유목 기마민족의 시각(무소유,공동체의식,지배자)에서
역사를 바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코 앞의 역사만이 진실이 아니며 책으로 전해진 것만이 우리의 본질이 아님을
유목사학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유목사학을 추구하는 분들을 존경하는 이유입니다.
유목민족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고조선의 역사가 보이고 부여의 역사가 보이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가 보일 것 입니다.
첫댓글 서양에서 최古의 복합활 유물은 이집트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스키타이 유물은 훨씬 후대로 알고 있습니다.
본디 우리민족문화의 원류가 스키타이시베리안 계통이라고 하는데 수수께끼를 속시원히 풀어주는 학자가 없네요.
기록문화의 유물이 많은 서양과의 접촉이 많았던 민족이 스키타이였기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나 싶네요.
중국역사에 나타나는 북방민족인 흉노나,선비족처럼 말입니다.
시원한 학자 대령이오 /
스키타이라고 불리우는 고비-알타이 지역은 마고성에서 나온 황궁씨가 거처하던 곳입니다.
부도지 역사를 한번 읽어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평양고구리, 전라도 백제, 갱상도 신라 도그마만 벗어나면 세상이 달라 보여요.
한단고기를 뛰어넘어 낙빈기의 금문을 넘어서서 부도지까지 확장하면 역사를 보는 안목이 광오해 지겠죠.
서양껏들이 모르는 역사! 짱께가 설명해주는 우리역사, 족발이가 주장하는 우리역사가 아닌, 내가 나를 보고 설명하는 우리 역사가 필요한 싯점입니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은 “한국”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올소 ~~~~^^*
현재 한국사는 남이 보는 역사라는 의견에 한표입니다. 주체적 사관이 없죠.
걸핏하면 무엇무엇은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지껄이는 놈들이 많은데 도대체 중국 어느 나라서 들어왔다는 것인지? 바둑도 중국에서 들어왔다, 칠교놀이도 중국서 왔다, 심지어 젓가락도 중국에서 들어왔다. 나참 중국 어느 왕조서 들어왔다는 것인지? 미친놈들 아닙니까?
전상언님 의견에 한표, 저 역시 뿔을 사용한 최초의 복합궁은 이집트의 각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거는 순수한 배움의 견지로 더 알고 싶은 마음에,
한산님께,
제주를 포함한 한반도와 그 조금 윗지의방 주류세력이었던 고인돌 문화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는지 여쭈어봅니다.
이집트의 각궁이 최초의 복합궁이라는 의견에 공감합니다.나일강변에 어느 왕의 무덤안 암각화에 우리네 각궁과 같은 모양의 활이 그려져있는것을 보았는데 그 부분은 설명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더군요,하지만 분명 우리네 각궁과 같은 형태의 활그림이 있었답니다.
그렇다면 제가 알고있는 복합궁의 탄생지역이 고비,알타이가 아니라 이집트일수도 있겠네요^^
인류시원지가 아프리카인 점을 감안하면 그 곳에서 퍼져 나왔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다큐멘터리 등에 나온 이집트 각궁에는 리커브는 없었습니다. 그냥 이런 '<' 모양이더군요.
최초의 복합궁이 어디서 만들었는지가 중요한 일도 아닐것 같지만....제가 알기론 악카드인들이 만들었다고 하던데요...
악카드인은 이집트문명 이후에 형성된 메소포타미아 문명걸로 아는데, 혹 시대를 가늠할 수 있는 유물이 있는지 기대가 되네요?
이집트에서 복합궁을 만든건 히타이트의 영향으로 만들었다고히스토리 채널인지 NGC에선가 봤었는데 히타이트와 전쟁인 카데쉬전투가 람세스2세이니 기원전 1200여년 될것이고 악카드인의 번성은 그보다 천년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악카드인들이 복합궁을 처음만들었다는 정확한 증거가 뭔지는 알지못하지만최소한 이집트가히타이트의영향으로 복합궁을 만든건 사실이겠죠^^
람세스시대 전후의 각궁 유물 이미지를 보았기에 이집트가 최초일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네요.^^
genie 님의 댓글을 보고서야 악카드 복합궁에 각이 들어있었다는 논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이미지가 없어 아쉽지만...)
덕분에 제대로 알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편두의 육손 외계인이 고대역사를 밝혀주면 참 좋을텐데 말입니다^^
최초 복합궁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른다에 500원 걸겠습니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전에 이미 만들어졌었다면 누가 만들었는지 의미가 없죠.
히타이트와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히타이트인이 먼저 복합궁(각궁)을 썼고,
그에 이집트에서 복합궁 개발에 힘썼다합니다.
-히스토리채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