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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의 세계 1위 방정식" 여섯번째 이야기
삼성의 운명을 바꾼 이건희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선언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강연이었다.
부문 직급별로 4회에 걸쳐 모두 100여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93년 6월 13일부터 14일까지 실시한 강연이
프랑크푸르트선언이라고 불리운다.
첫강연은 93년6월13일 프랑크푸르트 에쉬본의
삼성유럽총본부에서부터 시작해 캠핀스키 호텔에서 끝이 난다.
캠핀스키 호텔은 시내 중심에서 2킬로쯤 떨어진
최고급호텔로 마치 전원형 펜션과 같은 분위기이다.
거기서 그는 삼성의 임직원 60여명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다음은 강연요지.
<삼성그룹은 15만명이다.
15만명의 가족이 제각각 움직이면 배는 제자리에서 뱅뱅 돌게 되지만,
한방향으로 나아가면 속도는 15만배 빨라진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뱅뱅 도는 상황이다.
삼성가족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고민하고 고생하지만,
저마다 다 제각각이다보니 악순환이 거듭되고 모두 손해를 본다.
세계에서 일류가 되면 이익이 3-5배까지 늘어난다는 것은
반도체 메모리 분야에서 이미 입증됐다.
전자는 40만평에서 3만4000명이 일하지만 이익은
겨우 400억-5000억원에 불과하다.
반면 반도체는 겨우 10만평에서 1만명이
5000억-6000억원의 순익을 내고 있다.
삼성그룹이 대대적인 변신을 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크푸르트 강연은 최하 여덟시간이었다.
때로 사장단을 대상으로 한 강의와 질의는 무려 14시간이었다.
그는 거기서 담배를 피우면서 물수건에 손을 닦으면서
어눌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강연했다.
삼성그룹은 이 강연내용을 전국사업장에 방영했다.
삼성의 임직원은 누구라도 다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헌데 그 강연내용이 상당히 센세이셔널해서
일간신문은 물론 KBS-TV에까지 방영됐고,
이 내용은 한국의 기업문화를 바꾸는 일대 전환점이 된다.
LA에서부터 출발한 회의는 동경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대장정이
끝났다.
이른바 신경영 대장정이라 불렀던 이건희의 강연은 68일간 계속되었는데
350시간 강의에 1800명의 임직원이 참석했고, 토론시간만도 800시간이나 되었다.
새벽4시까지 강의가 계속되기도 했다.
참석자 전원은 햄버거로 식사를 때우고,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었다.
그만큼 사안이 심각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말이 없고, 조용조용하게 일을 처리해오던 이건희는
이때 삼성의 위상에 대한 솔직한 진단, 경영진에 대한 질타,
자신의 경영에 대한 구상 등을 사원들 앞에서 직접 설파했다.
신경영 대장정 후 삼성의 수뇌부는 신경영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수립에 들어갔다.
그 최종 결론은 ‘배우자’ 였다.
즉 벤치마킹을 통해 삼성의 취약점을 보강하자는 것이었다.
벤치마킹은 삼성의 장점이다.
‘100년전 신사유람단을 해외에 파견했던 심정으로
국내용 관리자를 조속히 해외에 보내
글러벌 전략가를 육성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기업의 기본적 책무이다.’
그렇게 설파했다.
신경영 대장정 이후 삼성이
벤치마킹 대상기업으로 확정한 기업은 다음과 같다.
전자부문-일본의 소니 및 마쓰시다
중공업-일본의
미쓰비시
섬유-일본의 도레이
재고 관리부문-미국의 웨스팅 하우스, 애플 컴퓨터, 페더럴 익스프레스
고객서비스-제록스,
노드스트롬
생산 작업관리-휴렛팩커드, 필립모리스
마케팅-마이크로소프트, 헬렌 커티스, 더 리미티드
신제품 개발-모토로라, 소니,
3M
구매 및 조달-혼다, 제록스, NCR
품질 관리-웨스팅 하우스, 제록스
판매 관리-IBM, P&G
물류-허시,
메리케이코스메틱
당시만 해도 소니, 마쓰시다(파나소닉), 미쓰비시 중공업이나
미국의 가전회사들은 모두 삼성보다 앞서 있었을 때였다.
위의 기업들에 대한 철저한 벤치마킹이 이루어진다
삼성그룹을 발칵 뒤집어 놓은 세탁기 몰카 사건
불면의 계절
이 무렵, 삼성 내부에서는 이상한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다.
한쪽에서는 기술과 경영의 진보를 위해 그룹차원에서 벤치마킹을 하고 있는데
내부적에서는 여전히 과거와 같은 구시대적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건들이 터진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당시 삼성그룹에는 몰래카메라라는 것이 있었다.
한때 공중파 TV에서 몰래카메라라는 것을 많이 했지만,
삼성그룹은 이미 지난 83년부터 몰래카메라로 촬영한 장면들을
그룹내 방송인 SBC를 통해 방송해왔다.
93년 6월의 어느날, 몰래카메라는 삼성전자의 세탁기 생산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거기 담긴 장면은 세탁기 생산라인이었는데, 납품된 세탁기 뚜껑 여닫이 부분의
플라스틱 부품이 규격이 맞지 않자, 현장에서
칼로 2밀리를 깍아내서 조립하는 장면이었다.
주문은 밀려오고 생산대수는 맞추어야 하는데,
납품된 부품의 규격이 맞지않자 고육지책으로
임시변통으로 깍아서 넣고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하려면 아예 뚜껑부문의 플라스틱을 새로 설계해서 금형을 뜬 후
다시 생산을 해야 하지만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생산직 사원들은 플라스틱 부품을 깍아
조립하면서도 거기에 대해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깍아서 넣어도 물건을 쓰는데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불감증이었다.
이 장면이 그룹방송인 SBC를 통해 방송되자,
관계자들은 물론 회사의 경영진까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국에서 물건을 제일 잘 만든다는 삼성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 테이프는 당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하고있던 이건희 회장에게 공수되었다.
<3만명이 만들고 6000명이
불량품을 수리하는 회사가 무슨 경쟁력이 있는가.>
이건희 회장이 당시 ‘세탁기 몰카’를 보고 던진 말이다.
6월19일 프랑크푸르트 현지에서 그는 세탁기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시켰다.
본래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은 그 골자가 국제화와 복합화였다.
그러나 몰카를 지켜본 이건희 회장은 국제화, 복합화보다
우선 품질개선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품질경영’이었다.
삼성전자의 세탁기 생산 라인을 비롯한
가전제품 139개 생산라인에 라인 스톱제가 도입되었다.
불량이 발생하면 즉시 라인을 세워
문제가 완전해결될 때까지 가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탁기 생산라인에서는 261개 항에 달하는 설계입력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했다.
또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일류 세탁기 제품의 세탁방식도 다시 비교연구되었다.
세탁기 몰카 사건으로 삼성은 양적 성장을 중단하고
품질로 거듭날 때까지 새로운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선언한다.
"최악은 아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마당에 쓰러진 어느 날,
그의 처지를
비관한 삼촌이 "사람대접 못 받고 사느니
차라리 함께 죽자."며 어린 그를 철로에 묶었다.
생과 사를 넘나들던 그날의 악몽은 두고두고 소년에게
각인됐다.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된 그는 운 좋게 대형 제과점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걷어 차이고 배곯아 가며 허드렛일부터
시작했지만,
빵을 만들 때면 희한하게 고단함이 사라지고 알 수 없는 행복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스물 살 초입, 군대 소집 명령으로
그동안 쌓은 경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만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내무반에 굴러다니는 책 한 권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막노동을 전전한 작가의 이야기였다.
작가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기찻길로 뛰어들려다가,
순간 '내가 처한 상황이 최악은 아니다.'라는 깨달음으로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읽다 청년은 어린 시절
죽을 뻔한 기억을 떠올렸다.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수모를 겪지 않으리라
다짐한 어린 날의 기억이 나태한 자신을 꾸짖었다.
그가 바로 '빵의 황제' '대한민국 제과제빵 명장 6호'의
칭호에 빛나는 김영모과자점 김영모 대표다.
그때 읽었던 책은 카네기 전집 《행복론》.
그는 책 속에서 발견한 '좌절을 딛고 일어선 공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작가는 그때 얻은 깨달음을 이렇게
정리했어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라. 그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개선하라.
나는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상황이 어렵다면 몇 가지 악조건을 보태
그보다 못한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 자신이 처한 상황이
최악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더할 수 없는 최악이라면
우선 그대로를 인정하고 하나씩 개선하라.
상황은 전보다 나아지게 돼 있다.
"아이디어란"
60여 년전 일본의 아지노모도 조미료회사에서의 일입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은 품으로 주는 조미료 통을 바꿉시다"라고 요..
사장은 어떻게
바꿀거냐.고 물었습니다.
"지금 사은 품으로 주는 조미료 통은 구
멍이 6개 뚫렸습니다.
그 걸 9개로 뚫어 주는 겁니다.
바꿔주는 걸로 하고 말입니다.
만족 할 겁니다." 그 직원이 말하였습니다.
사장은 그 말을 듣고 즉시 시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걸 계기로 그 회사는 세계인의 입 맛을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우스운 아이디어라도 채택하려는 풍토가 조성되었습니다..
혹 여러분이 쓰시는 삼푸를 보시면
남자들은 한 번 쓰기 부담스러운 양이 나오지 않나요..
많은 회사들이 그 아이디어를 사용합니다..
비행기를 타 보면 스튜어디스의 치마가
짧고,
스카프의 길이가 짧고,조종사모자의 챙이 짧은 걸 보셨나요.
레져(비닐로 만든 인조가죽)로 만든 것을 보셨을 겁니다..
이 것이 비행기의 무게를 줄여 연료비를
절감한답니다..
어떤 회사는 서비스로 주는 오렌지를
껍질을 벗겨서 싣고 간다더군요.
점 점 추워 집니다..
난방기를 사용하는 계절입니다...
지구의 온도를 높힐 수 있습니다..
"훗날의 이익을 생각하라"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창설한 파나소닉 전자는
1927년, 거의 모든 자금을 '내셔널 램프'에 생산에 쏟아 부었다.
제품은 가정에서
사용하기 펀리해 출시하기가 무섭게 속속 팔려나갔다.
그런데 곧 불황이 닥치면서 파나소닉이
전 자본을 쏟아 부어 생산한 제품의 판로가 막히게 되었다.
결국 파나소닉은
냉정하게 시장 흐름을 파악한 뒤,
당황하면서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말했다.
"일단 우리 상품의 판로가 열리면 협조해 주신
보답으로
1년 안에 귀사의 건전지 20만 개를 팔아 드리겠습니다. 약속하죠!"
자신만만한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총수는 마침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파나소닉은 램프 1만 개를 무상으로 공급했고,
일단 사용해 본
소비자들은 또다시 '내셔널 램프'를 구매하게 되어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오카다 건전지도 약속보다 두 배 많은 40만 개가 팔렸다.
눈앞의 이익만을
바라보았다면, 램프 1만 개를
무상으로 공급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오카다 건전지 회사 역시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익을 포기했기 때문에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짧은 안목으로 당자의
이익에만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다 보면 먼 훗날의 이익을 놓치고 만다.
"인생의 고난과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 박경리"
경남 통영을 흔히 ‘한국의 나폴리’라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가봐야할 장소가 있습니다.
통영 서포루(西鋪樓)입니다.
여기 서 있으면 앞으로는 한려해상 맑은 바다에 점점이 박힌
통영항의 전경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을뿐 아니라 덤도 있지요.
뒤로는 세병관(洗兵館)과 산복도로의 실루엣을 또렷이 볼 수 있습니다.
서포루에 대해서는 잠시 설명이 필요합니다.
서포루는 1678년 축조된 통영성의 망루였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윤천뢰(尹天賚)가 쌓은 성은 해발 174m, 둘레가 약 3.6㎞입니다.
통영과 통영성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해군 모항(母港)인
진해와 같은 역할을 했기에 붙은 것입니다.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옮겨온 것은 1604년(선조 37년)입니다.
당시 지명은 거제현 두룡포(頭龍浦)였는데
통영성은 일제 때 철저하게 파괴됐지요.
통영성에는 동서남북 4대문과 동서북 3면에 포루가 있습니다.
동문은 신흥문(新興門)에서 춘생문(春生門)으로 이름이 변했으며,
서문은 금숙문(金肅門), 남문은 청남루(淸南樓)라 불렀고, 북
문은 훗날 공북루(拱北樓) 혹은 의두문(依斗門)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3포루는 1694년 통제사 목림기(睦林奇)가 세운 것으로
장수가 여기서 군사들을 지휘하였기에 장대(將臺)라고도 불렸습니다.
북포루는 여황산 정상, 동포루는 동쪽 동피랑 정상에 있어 동장대,
서포루는 서쪽 서피랑 꼭대기에 있어 서장대라고도 했습니다.
서포루에서 세병관이 바라보이는 방면에
달동네 비슷한 마을이 형성돼 있습니다.
길이 좁고 비탈이 심한 이곳에서 1926년 10월28일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가 탄생했지요.
바로 ‘토지’의 작가 고 박경리(朴景利•1926~2008)선생입니다.
당시 이 동네의 지명은 경남 통영군 통영읍 명정리로,
그의 부모는 박수영, 김용수씨였습니다.
맏딸이었던 박경리 선생의 본명은 금이(今伊)로,
어렸을 적부터 유달리 책을 좋아해 교과서 대신
소설책을 숨겨놓고 읽었다는 일화가 아직까지 전해집니다.
이 동네에 가면 박경리 선생이 태어난 곳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담벼락에 타일을 붙인 집으로, 작은 명패가 박 선생의 생가임을 알려주는데
찾기 힘들면 지나가는 행인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아도
친절하게 대답해줍니다. 그만큼 고장의 자랑이라는 얘기겠지요.
박경리 선생의 평생을 취재해보면 그가 행복했던 시기는
진주여고를 졸업했을 때까지가 아니었을까 싶을만큼 불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광복이 되던 해인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통영 우체국에서 잠시 근무하다 김행도씨와 결혼했습니다.
그해 첫딸 김영주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 관장이 태어났습니다.
1948년 남편 김씨가 인천 전매국에 취직하자 박 선생은 남편을 따라
인천 금곡동으로 이사갔고 아들 김철수가 태어났습니다.
박 선생은 지금의 인천 배다리마을에서 헌책방을 열었지요.
아마 그때가 박 선생의 삶에서 가족애를 맛본 절정기가 아니었을까요.
박 선생은 1950년 수도여자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황해도 연안여중 교사로 갔는데
그해 비극적인 6·25가 터졌습니다. 전쟁은 박 선생에게서 남편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남편을 잃고 아이 둘과 함께 고향 통영으로 돌아온 선생은
1954년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한국상업은행에서 근무하며 습작에 힘썼습니다.
1954년 6월엔 은행 사보 ‘천일’에 ‘박금이’란 본명으로
장시(長詩) ‘바다와 하늘’을 발표했습니다.
은행에서 퇴사한 뒤인 1955년 10월에는
‘박경리’라는 필명으로 소설 ‘전생록’을 게재했지요.
이때 선생은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와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그가 김동리(金東里) 선생과 만난 것은 동리 선생 집에
고향친구가 세들어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인연으로 그는 김동리 선생의 지도를 받게됐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단편 ‘불안지대’가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추천됐습니다.
이듬해에는 단편 ‘흑흑백백’이 또다시 추천을 받아
마침내 등단의 꿈을 이룹니다.
잠깐 ‘박경리’라는 필명의 유래를 알아보고 갑니다.
이 필명은 김동리 선생이 지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본명과 필명이 다른 경우는 박경리 선생뿐 아니라 여럿 있습니다.
이문열의 본명은 이열인데 ‘글월 문(文)’자를 넣어 필명을 삼았습니다.
소설가 황석영 역시 본명은 황수영인데 젊은 시절 성명학에 관심있던 그가
‘수영’이라는 이름이 불길하다고 ‘석영’으로 바꿨다지요.
현대문학에 따르면 지금도 황씨는 “비명횡사할 이름이었는데
그나마 이름바꿔 이만큼 산다”고 농담을 한다지요.
매년 노벨문학상 시즌이면 등장하는 시인 고은도
본명은 고은태이며 한때 승려가 돼 ‘일초(一超)’로 불리웠습니다.
시인 신경림은 신응식, 시인 김지하는 김영일, 시인 박노해는 박기평입니다.
김지하와 박경리 선생의 인연은 뒷부분에 나옵니다.
남편과 사별하고 문학가로 발돋움할 즈음 다른 불행이 다가옵니다.
아들이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사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선생은 문학에 매진해 단편 ‘불신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상 신인상을 받고 1958년엔 첫 장편 ‘애가’를 내놓습니다.
1959년에는 장편소설 ‘표류도’로 제3회 내성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잇달아 장편 ‘성녀와 마녀’(1960년) ‘김약국의 딸들’(1962년),
‘파시’(1964년) ‘시장과 전장’(1965년)을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제2회 한국여류문학상을 받지요.
1968년 월간문학 창간호에 발표한 중편 ‘약으로도 못고치는 병’은
훗날 ‘토지’의 모티브가 되는 소설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 중편에 등장하는 강청댁, 용이, 월선이의 삼각관계가
‘토지’에 등장하는 사건들과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박경리 선생은 1969년 9월부터 필생의 역작인
‘토지’ 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집념이 강했던지 1971년 8월 유방암 수술을 받고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해 1부 연재를 무사히 마쳤지요.
‘토지’ 2부는 1972년 문학사상 창간호에 연재됐으며,
이듬해인 1973년 외동딸 김영주 관장이 시인 김지하와 결혼을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2009년 10월 지금의 토지문화관에서 김지하씨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인터뷰 본문을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내용을 보면 제가 인터뷰를 애걸해 이뤄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가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김지하씨는 처음부터 저를 혼내면서
‘기선’을 제압하려 했지만 저도 당시엔 날이 시퍼랬습니다. &nbs p;
시인은 화가 나 있었다.
얼마 전 스웨덴에 간 걸 두고 뒷얘기가 있었다.
노여움에 불을 지른 건 ‘노벨문학상을 노린다’는 해석이었다고 한다.
김지하(金芝河·68)의 스웨덴행(行)은 한·스웨덴 수교 50주년 강연 때문이었다.
“내가 ○나
△같은 졸때기도 아니고, 문학을 상(賞) 타려고 해? 괴로워서 하는 거잖아!
전 이미 옥중(獄中)에서 제3세계의 노벨문학상이라는 로터스 특별상(1975년)을 탔어요.
상(賞)하고의 인연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이야기에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친구 이야긴 묻지도 마. 정치 얘기도 안 할 거고.”
경망(輕妄)의 대표격인 한 인물을 결코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제야 흡족한 듯 그가 ‘숙제’를 냈다.
“잡지에 글을 썼어요. 박경리(朴景利) 선생 평론인데
제목이 ‘흰그늘과 화엄(華嚴)’이야.
200자 원고지 400장짜린데 꽤 어려워. 다 읽고 오세요.
근데 (문기자의) 말투가 조폭(組暴) 같은데, 토건(土建)업자 냄새도 나고?”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토지(土地)문학관은 산속에 있었다.
자궁(子宮) 속 태아(胎兒) 같은 모습이었다. 앞은 황금빛 들판이었다.
내방객은 드물었다. 시인은 약속했던 낮 12시가 훨씬 지난 1시쯤 나타났다.
김지하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흰그늘과 화엄'의 보충자료라며 육필(肉筆) 원고 복사본을 건넸다.
"여기가 남에게 잘 안 보여주는 곳"이라며 방으로 안내했다.
목판 속에 새겨진 박경리가 사위와 기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지하씨는 이후 신명난듯 박경리 선생과의 만남을 설명했는데
이것도 당시 인터뷰 기사를 원문대로 인용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글이 교차하니 주의해서 읽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문학청년 시절 김지하는 서울 정릉 박경리 집에 가끔 갔다고 한다.
한번은 김동리(金東里)의 집에 갔다 허탕친 후 박경리 집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유현종(劉賢鍾), 김국태(金國泰)와 함께 그는 맥주를 얻어먹었다.
1972년 10월 유신(維新) 선포 때도 그곳에 갔다.
“기관원들이 잡으러 올 게 분명하니 며칠만 숨겨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박경리는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딸 김영주는 어머니에게 “매정하다”고 했다.
터덜터덜 뒤돌아 나가는 그에게 김영주가 달려왔다.
“어머니가 혼자 살다 보니 성격이 그렇다. 이해해 달라”며 대신 사과한 것이다.
소설(小說)의 산맥(山脈)과 시의 거봉(巨峯)이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친구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설악산으로 숨기 위해 새벽 골목길을 나서다
친구 집 앞 담벼락에 백묵으로 뭔가를 썼다.
‘민주주의 만세.’ 그 문구가 훗날 절편(絶篇)으로 탄생했다. ‘타는 목마름으로’다.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박경리론’이란 평론이 꽤 어렵더군요.
“제 전공이 미학(美學)이잖아요.
박 선생 문학을 정리하려고 벼르다 이번에 그 글을 썼습니다.”
―장모의 문학을 평하는 게 쉽지는 않지요.
“장모가 돌아가신 후 기념행사가 많았어요.
매번 그런 자리 나가기도 그렇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궁리하다
그분의 기념비(紀念碑)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아시아권에서 상(賞)을 만들 계획도 있고요.”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 ‘토지’ 소설 세 편을 분석했습니다.
'흰그늘의 미학'으로 시작되는데 무슨 뜻입니까.
“게로니모스 하이로미에라는 15세기 이탈리아
시인이
‘흰 눈부심을 거느린 검은 악마들의 시위'라는 시를 썼습니다.
윤리적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땝니다.
종교 지도자의 사생아 30명이 여자를 끼고 거리를 활보할 정도였어요.
정신 질서가 붕괴될 때 나타난 게 옛 희랍 인문학입니다.”
―희랍의 인문학이 흰색, 윤리적 타락은 검은색이라는 건가요.
“검은색을 다 부정할 순 없지요.
죽여 없앨 수도 없고. 어
스름 저녁 물빛을 보면 반짝하고 흰빛이 순간적으로 비쳐요.
융합되는 것, 그게 바로 흰그늘입니다.”
―일전에 칼럼에서는 ‘욕이 많아지는 게
르네상스가 온다는 증거’라고도 했습니다.
“오늘 ‘측천무후(아내)’가 절대 욕하지 말라고 했는데,
피렌체나 베네치아의 귀족,
귀부인들이 당시 쓴 욕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심했어요.
우리도 남자 성기(性器)를 가리키는 말이 PC방 상호(商號)가 될 정도잖아요.
그게 네오(Neo) 르네상스가 올 징조지요.”
―박경리 선생의 ‘시장과 전장’에서 시인은 '경제적 삶의 흙탕물 속에서
끝내 삶의 신조를 버리지 않는 젊은 여인의 하얀 이미지'를 흰그늘이라 했습니다.
“그건
서세동점기(西勢東漸期), 근대문명의 변화와 압력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 서사(敍事)의 압권이지요.
여성이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나갈 것인가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아시안 네오(Neo) 르네상스를 위한 미학’이
바로 흰그늘이란 말에 숨어 있습니다. 박 선생은 대단한 분이었어요.”
―수년 전부터 아시안 네오 르네상스가 온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올까요.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나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미 세계가 다극(多極)체제가 됐다고 선언했습니다.
중국 해남성(海南省)에서 열린 포럼에서도 자본의 중심이
동아시아에 와있다고 했습니다. ‘예수 가는 데 마음 간다’는 말 알죠?”
―무슨 뜻입니까.
“마음이 가치잖아요.
자본 중심이 옮겨왔으면 가치 중심도 동아시아로 오게 됩니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을 읽으면서 새삼 놀라요. 예지자(豫知者)의 면모를 느꼈습니다.”
―그런 소설을 왜 평론가 백낙청은 멜로 드라마적 조작이라고 평했을까요.
“크게 잘못한 거지요.
하버드대에서 엘리어트나 좇던 사람이
6·25를 어떻게 제대로 알겠어요. 깊이 새긴 뒤에 평필(評筆)을 들어야지.”
―박경리 선생이 생전(生前)에 시인의 분석에 동의하던가요.
“사위와 장모가 작품을 놓고 논할 수는
없지요.”
박경리론은 ‘흰그늘’에서 ‘검은 암소(牝牛·빈우)’
‘검은 구멍(玄牛·현우)’과 ‘화엄개벽(華嚴開闢)’으로 확장된다.
검은 암소는 주역(周易)에 등장한다.
모성(母性), 생산력, 포용력, 부드러움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여성의 힘이 되살아날 때 도래할 새 문명사가
불교(佛敎)와 동학(東學) 용어를 합친 화엄개벽이다.
시인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과 ‘토지’에 이 암시가 숨어 있다”며
“표는 안 냈지만 장모는 주역의 대가”라고 했다.
―하필 여자가 ‘검은 암소’나 ‘검은 구멍’입니까.
“복희씨(伏羲氏)가 동굴 속에서 여자,
아이들과 7년을 보냅니다.
거기서 인류 최초의 문자인 ‘결승’을 만들어 가르치지요.
검은 굴 속에서 깨달음의 흰빛이 나오는 거지요. 영화 ‘워낭소리’ 봤어요?”
―못 봤습니다.
“그 영화 세 번 봤는데 사람들이 숨죽여 우는 대목이 있어요.
농부가 아끼는 소가 늙어 병이 드는데 시커먼 우리 속에서 웁니다.
그 눈물이 하얘요. 시커먼 구멍 속에서의 흰빛, 그게 숨은 모성입니다.”
-이 세상의 주도권을 잡는 시대가 온다는 건데.
“이미 왔어요. TV 드라마나 영화에 유독
‘어머니’란 단어가 많이 등장하잖아요.
영화 ‘마더(Mother)’, ‘엄마를 부탁해’,
이미 어머니가 아이콘(icon)이 됐습니다. 아버지의 시대는 간 거지요.”
―시인께서 이런 주장을 하기 전에 페미니스트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다르죠. 3000년 전 세상은
모계(母系)사회였어요.
그 위치가 주(周) 문왕 이후 상실됩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자를 철천지원수,
부르주아 대(對)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처럼 봅니다.
헤겔, 칸트부터 다윈까지 가세한 남성 가부장제 권위라는 반동만 자초했지요.”
―검은 암소, 검은 구멍 다음에 황상(黃裳)이란 말이 나옵니다.
중국 한대(漢代)의 노장(老莊) 학자 왕필(王弼)이 한 말인데요.
“황상은 '여성 왕통(王統)'을
뜻합니다.
여성 임금을 들어올려야 혼돈이 극복되고 개벽기의 전환적 대안이 된다는 거지요.
조건은 있어요. 여성 왕통을 보완해주는 남성 지혜자가 꼭 필요합니다. 지
금의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나 재상총권(宰相總權)이 배합돼야 합니다.
이건 과학적으로도 증명돼요.”
―과학적으로 증명된다고요?
“태양(陽) 위주의 사고체계가 변하고 있어요.
요즘 기후현상을 온난화로만 설명하지만 실제 태양열은 식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태양열이 아닌 태양빛이 더 필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달(陰)은 새롭게 조명됩니다. 미국 NASA의 이탈리아 과학자 에밀리아노 포플러가
달에 물이 존재할 뿐 아니라 아예 물의 벨트가 있다고 했어요.
우주의 변동이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게 경제현상입니다.”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태양열에 대한 버블(Bubble•거품) 현상이 가져온 게
뭡니까, 금
융위기잖아요. 경제뿐 아닙니다.
신종플루나 동남아를 강타한 쓰나미도 우주의 변동과 관련 있습니다.”
―‘황상’이 박근혜(朴槿惠) 한나라당 의원을 연상시키는데요.
“허허, 그렇게 보여?(여기서 시인의
표정이 싹 바뀌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날 죽이려 했지만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두 가지 면에서 인정해.
일본 극우재벌의 돈을 안 썼고 청와대 캐비닛에 달러가 그득했지만
다 남 주고 정작 본인은 막걸리에 북어포만 먹었잖아.”
사단(事端)이 결국 일어났다.
‘시인이 이토록 박경리 문학에 매달리는 게 평생 돈벌이 못하고
장모에게 신세를 졌기 때문이라는데'라는 말을 꺼낸 직후였다.
이후의 상황을 요약하면 이런 식이었다.
“나, 몇살이야?”(시인) “우리 나이로 예순아홉이시죠.”
(기자) “당신은?” “(큰일 날 태세여서 잽싸게 두살 얹어) 오십입니다.(실제로는 당시 마흔여덟)”
“그런데 그리 싸가지 없는 질문을 해?
뭐? 황상에서 박근혜가 연상돼? 천박한 질문 같으니!”
기자는 부글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위층의 김영주 토지문학관장이 황급히 달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20분쯤 뒤 파투의 위기가 지나갔다.
당시의 이야기를 이제야 밝혀봅니다.
제 질문의 요지는 ‘김지하 시인께서 평생 장모에게 얹혀살았기 때문에
사후에 이렇게 열심히 장모를 평가하는 것 아니었느냐’는 것인데
예상대로 그는 크게 화를 냈습니다.
질퍽한 전라도 사투리가 난무했었지요.
이변은 그 직후 일어났습니다.
위에서 남편과 저의 대화를 지켜보던 김영주 관장이 김지하씨를 향해 일갈한 거지요.
“내가 기자와 싸우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지? 그런데 또 싸워?”
저는 김지하씨가 기자들과 평소 많이 다퉜음을 직감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김지하씨의 태도였습니다.
“왜 마누라가 끼어들어?”라고 호통칠줄 알았는데
그야말로 고양이 앞의 쥐처럼 눈빛이 바뀐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놀랐습니다.
“와, 이 집안의 최고 강자는 시인이 아니라 시인의 아내였구나”하고 말이지요.
이 인터뷰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납니다.
“() 북한 서열 22위인 ‘간첩 대장’ 이선실이
“민족의 제단에 김지하를 바치겠다”며 그의 주변에 거액을 뿌렸다.
시인에게 반(反)정부 성명 발표를 종용해 옥사(獄死)를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이 고백에는 함축이 많다.
장모는 사위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그런 박경리를 운동권은 핍박했다.
시인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시스와 고르곤의 틈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장모에게서 ‘어머니’를 본 것이 아닐까.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긴 사연을 듣고 나서야 시인이 말한
‘흰그늘’ ‘검은 암소’ ‘화엄개벽’이 명료해졌다.
그가 박경리라는 큰 품을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인가.
기자에게 시인은 여러 번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게 인터뷰가 잘되려고 그랬던 모양”이라며 웃었다.
격정(激情)마저 없었다면 시인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가슴의 한(恨)을 잠시라도 풀고 후련해질 수 있다면 욕 천 마디가 대수랴.
얼마전 6년만에 ‘문갑식의 기인이사’ 편에
박경리 선생을 쓰기 위해 원주 토지문화관을 다시 들렀을 때
저는 오랜 시간 문화관 앞 벤치에서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습니다.
시인은 문화관에 없었고
김영주 관장은 제 얼굴을 보고도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여하간 남편과 첫 아들을 잃고 사위마저 고초를 겪었으며
그로 인해 딸마저 평탄치못한 삶을 사는 가운데
박경리 선생은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1994년 8월15일 새벽 2시,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탈고했습니다.
집필을 시작한지 26년만의 일입니다.
1996년 선생은 토지문화재단을 만들었으며,
1999년 토지문화관을 개관해 후배 문인들이 창작할 공간을 제공하고
손수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밥상을 차렸다지요.
지금의 토지문화관 바로 옆, 선생이 살던 집은 비었지만
텃밭과 장독들만은 그대로였습니다.
선생의 자취를 더듬고 싶으신 분들은 원주 토지문화관과 바로 옆,
생을 마친 집, 그리고 지금은 박경리 문학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원주의 옛집(1980~1996년까지 살던 집)과
박경리 문학의 집을 둘러보실 것을 권합니다.
더 여유가 있다면 통영으로 가야겠지요.
앞서 말한 서포루 부근 생가를 보고 서포루에 올라
동양의 나폴리라는 통영의 절경을 감상한 뒤
산양리에 위치한 박경리 기념관을 둘러보며
그곳 정원에 설치된 황동상을 매만져보는 것입니다.
참고로 박경리 기념관 역시 조망이 훌륭합니다.
박경리 기념관 뒷편으로 5분쯤 걸어올라가면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지만 이런 코스를 되짚어본다면
현대사에 얽힌 한 여성의 삶과 우리 역사의 거인들과 문학의 향취를
더없이 풍요롭게 느낄 수 있는 여정(旅程)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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