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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남장소설ㄲt페boy 원문보기 글쓴이: 신경쓰지마#
닉네임 - 지조쪼아
메일 - hahe_v@hanmail.net
출처 - http://cafe.daum.net/humornara
[남장] 절 세 미 남(絶世美男)
絶 世 美 男(절세미남)
세상에 비길것이 없을 만큼 빼어난 *미남.
하오는 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손목 시계를 바라 보았다.
채이는 갑작스럽게 표정이 변한 하오를 보고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어제도 그렇고, 비윤은 역시 하오가 이상하다고 생각 되었다.
지령이 채이에게 어깨 동무를 하며 하오에게 물었다.
"마음이 왜? 시계 때문에 마음이 아파?"-지령
지령의 물음에 하오는 시계를 찬 왼쪽 팔을 뒤로 감추며 말했다.
"그런게 있으삼!"-하오
"뭐.. 뭐야!"-채이
"왜? 나 때문에 놀랐으삼?"-하오
"안 놀랐어!"-채이
"쳇. 안 먹히다니, 쪼금 아깝다."-하오
하오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비윤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대화에 집중 했다.
"내가 원래 아무 여자하고나 말하는 남자가 아닌데."-하오
"예쁜 여자면 다좋아 하면서.히히."-지령
"아니야, 난 지조 있는 멋진 남자삼."-하오
"또 우긴다!"-지령
"지렁아 내 말에 토달지마."-하오
하오는 지령의 머리를 헝클이고 채이에게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한뒤 교실을 나갔다.
하오가 잠시 초록색 손목시계를 슬픈 듯이 쳐다 보았다고 느낀 건 비윤만의 착각 이였을까?
지령과 채이가 비윤에게 다가 왔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채이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채이야. 이제 지령이 좋아할거야?"-비윤
"내가 왜 우지령을 좋아해!"-채이
"아니야. 아까 좋아한다고 했잖아."-지령
"내가 언제!"-채이
"채이는 거짓말 쟁이~"-지령
채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비윤에게 한 없이 도도해 보였던 채이는 지령의 앞에선 순한 양이 되어 버렸다.
비윤은 두 사람 때문에 처음 만난 상대와도 사랑에 빠질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은 누구나 할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할수 있다.
그 사람과 눈을 마주쳤던 짧은 순간에도 사랑의 감정을 느낄수 있다는 것이 신비로웠다.
"나랑 채이랑 사귀지롱!"-지령
누구보다 로민이 꽤나 놀란 눈치 였다.
아무리 예쁜 여자가 와서 사귀어 달라고 애원해도 마다하던 지령이였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사랑에 빠져 버릴 줄은 몰랐다.
채이와 엄마가 닮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사귈 지령도 아니였다.(사랑에 빠진 지령이.)
"진도 빠른데?"-원
창가에 기대어 가만히 책을 읽고 있던 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채이도 그제서야 원을 발견 했다.
"낙원 이지? 우와, 오늘 운 좋다. 로민 패거리 멤버들을 한번에 보고 말이야."-채이
"내가 제일 멋지지?"-지령
"억울 하지만 내 눈엔 그래.(빙긋)"-채이
비윤은 행복해 보이는 두사람의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한가지 걱정 되는것은 남자를 좋아하는 채이가 우지령이라는 한 남자에게만 정착할수 있을지 였다.
채이를 못 믿는 것이 아니라 견딜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채이는 궁금해 하며 혼자말을 했다.
그 혼자말은 모두에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절세미남은 도데체 어디 있는 거야."-채이
"절세미남 이라니?"-지령
"아, 로민 패거리에 절세미남 있다고 소문 나 있잖아. 절세미남이 안보여서. 학교 안 왔어?"-채이
비윤은 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듣지 못했다.
자신을 칭하는 말이였지만 눈치가 없는 비윤이 알리가 없었다.
지령이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채이에게 말했다.
"에이. 비윤이 말하는 거잖아."-지령
"은비윤?"-채이
채이의 시선이 비윤에게로 향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여자보다 더 예쁜 비윤이 마음에 들었지만
설마 유명한 절세미남 당사자 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채이는 비윤이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하지만 비윤이 정말 모른 다는 표정을 하고 있자 화를 낼수 조차 없었다.
"그때 알아 봤어야 하는 건데, 유명인사한테 차이니까 더 부끄럽네."-채이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는 비윤. 비윤은 다시 채이를 만나게 되어 기쁠 따름 이였다.
채이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정말 즐겁게 느껴졌다.
이유인 즉, 채이가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여자이기 때문 이였다.
비윤은 남장을 하지 않은 여자의 모습이면 채이와 더욱 친해 질것 같았다.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 속에서 로민의 화가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닥쳐, 병신들아. 라는 말이 나왔을 테지만 너무나 조용했다.
로민은 삼삼 오오 떠드는 소리도 듣지 못한채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비윤은 로민의 자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보였다.
채이와 지령 처럼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로민은 비윤을 남자로 알고 있기에 그것은 비윤의 상상 속에서만 이루워 질수 있는 것이 였다.
비윤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참, 내일이 방학식이 라며?"-채이
"응. 방학식이래."-비윤
"이 학교로 전학 오길 잘했다니까. 훗."-채이
채이는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 도도하게 웃고 있었다.
지령과 꼬옥 잡고 있는 채이의 손을 보다가 비윤이 원을 향해 물었다.
"원이는 집에 갈꺼야?"-비윤
"도아랑 동이랑, 나머지 동생들 때문에 가야 돼."-원
"맞아! 도아랑 동이 나중에 만나러 가도 되지?"-비윤
"물론. 동생들이 좋아 할거야."-원
"신난다!!(싱긋)"-비윤
"나도 갈래! 비윤이가 가면 나도 갈래!"-지령
"지령이가 간다면야, 나도 가겠어."-채이
아직 확정된 일도 아닌데 자신들도 가겠다고 우기는 지령과 채이를 보며 원도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언벨런스한 커플이 될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지령에게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것을 모르는 채이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지령아, 넌 집에 갈거야?"-채이
지령은 장난끼 있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기숙사에 남아 있게?"-채이
"갈곳이 없으니까."-지령
채이도 뭔가를 눈치챘는지 지령에게 더이상 묻지 않았다.
비윤은 마음과 같아선 지령에게 자신의 집에 함께 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령이 싫다고 할 것이 분명 했기에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별안간 로민이 벌떡 일어 났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한 뒤 교실을 나갔다.
"저녁 먹을 시간이다."-로민
로민패거리와 채이는 키득 키득 웃으며 식당으로 내려 갔다.
채이의 소문이 빠르게 퍼져서 식당에 들어서는 채이의 모습에 남학생들은 황홀 한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그 순간 지령이 채이의 어깨에 손을 떠억 하고 올렸다.
모두에게 채이는 우지령의 여자친구다 라는 것을 보여 주려 했던 것이다.
두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채이가 지령의 여자친구 라는 것을 짐작한 남학생들은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반면에 여학생들은 부럽다는 눈길로 채이를 죽일 듯이 쏘아 보았다.
하지만 기죽을 채이도 아니였다.
채이의 당당하고 도도한 모습에 여학생들도 꼬리를 내려 버렸다.
로민과 하오는 먼저 식사를 하고 있었다.(로민패거리는 밥에 민감하다.)
채이 때문에 떨어져 앉은 하오와 지령을 보고 원이 평소와 다른 장난끼 있는 말투로 말했다.
"이채이 때문에 바보 브라더스 해체 되는 건가?"-원
"해체 아니다 뭐! 그치 하오야!"-지령
"혼자 여친 사귄 지렁이 새끼는 조용히 닥치삼."-하오
"하오는 위대해서 다 이해 할거야."-지령
"내가 위대하긴 하지. 큭큭."-하오
하오는 귀가 얇아서 화를 내다가도 지령의 아부 한마디면 화가 곧잘 풀리곤 한다.
하오의 장점이자 단점인 이 성격은 지령을 비롯한 전교생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로민의 눈에 나물에 들어 있는 양파를 한쪽으로 치워 놓는 비윤의 행동이 목격 되었다.
"너 왜 양파는 안 먹어."-로민
"비윤이는 양파 싫어해."-비윤
"야채를 안 먹으니까 키가 작았던 거군."-로민
"그래도 양파는 맛 없는걸.."-비윤
로민이 피식 하고 웃었다. 비윤은 그런 로민의 멋있다고 느끼며 멍하게 로민을 바라 보았다.
로민의 손가락으로 비윤의 이마를 콕 찔렀다.
"아야.."-비윤
"밥 먹다가 딴 생각하는 녀석은 너밖에 없을 거다.(피식)"-로민
"이마에서 피 나는 것 같아.(울먹)"-비윤
"병신."-로민
로민은 어리버리한 비윤을 자꾸만 괴롭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제야 하오가 왜 비윤을 괴롭히는지 알것 같았다.
비윤의 반응이 재미있기도 하고, 비윤과 있으면 심심하지 않았다.
로민패거리와 채이는 식사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 왔다.
**
"이채이, 니가 왜 남자 기숙사에 들어 온 거삼."-하오
"남자 기숙사라고 여자는 못 들어오는 법 있니?"-채이
"너 솔직히 말해봐. 지렁이 보다 내가 좋은 거지?"-하오
"웃기셔! 내가 미쳤어?"-채이
"약간 그런것 같다. 큭큭."-하오
"채이는 안 미쳤어!"-지령
"헉, 벌써 부터 감싸 도는 거냐?!!!"-하오
로민이 주먹으로 벽을 세게 쳤다.
원은 책장을 넘기려다 깜짝 놀라서 그대로 멈췄고, 하오는 지령을 때리는 포즈에서,
지령은 하오를 막으려는 포즈에서 굳었다. 채이는 바보 브라더스를 말리기는 커녕
흥미로운 눈길로 보다 눈이 커졌다. 로민의 바로 옆에 있던 비윤이 가장 놀라서 로민을 바라 보았다.
"미쳤고 안 미쳤고 간에 싸우려면 너희들 방에 가서 싸워."-로민
로민은 짜증 나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비윤 또한 걱정스러운 눈길로 로민을 흘깃 흘깃 쳐다 보았다.
"소문대로 유로민 한 성질 하네~"-채이
"로민이는 박력쟁이야."-지령
"저런 남자가 의외로 매력이 있더라."-채이
"나도 박력 있어."-지령
지령이 채이에게 팔에 있는 알통을 자랑해 보였다.
방금 까지 로민이 화를 냈다는 사실도 무시하고 그들은 장난을 치며 놀았다.
로민이 다시 화를 내려는 찰나,
"우리 오랜만에 학교 탈출 하자."-하오
딱 한 사람, 로민을 빼면 모두 하오의 갑작 스런 제안에 동의 했다.
하오와 지령이 가기 싫다는 로민의 양팔을 잡고 끌고 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기숙사 뒤쪽에 있는 철조망 이였다.
"나보고 여기로 들어 가라는 소리냐?"-로민
"당연하지~ 나랑 하오는 여기 자주 애용하는 걸. 그치 하오야!"-지령
"당빠삼."-하오
하오와 지령이 손으로 가리킨 자리는 사람 한명이 지나 갈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있었다.
일년 전 바보 브라더스가 힘들게 뚫어 놓은 개 구 멍 이였다.
원도 이렇게 나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 였다.
"고등학교때 이런 추억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는거야. 나 먼저 나간다."-하오
로민은 철조망 위로 넘어 가면 넘어 갔지 밑으로 기어 가고 싶지는 않았다.
로민이 미간을 좁히고 밤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을 동안 하오와 지령, 그리고 채이가 반대 편에 서있었다.
하오가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자 원이 한숨을 푹 쉬고 구멍을 통해 철조망 사이를 빠져 나갔다.
결국 로민은 혼자서 교문으로 당당하게 학교를 나왔다.
"유로민 징하다. 정말."-하오
"병신."-로민
누가 뭐라고 비윤은 그런 로민이 마냥 좋기만 했다.
어떤 행동을 하던 멋있어 보였다.
하오와 다투고 있는 지령을 버래 두고, 채이가 비윤의 옆에 다가와서 작게 중얼 거렸다.
"난 왜 나왔는지 몰라. 팩 해야 하는데."-채이
채이의 귀여운 투정에 비윤은 미소 지었다.
다투던 바보 브라더스의 외침이 반짝이는 네온사인을 배경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
"나이트 가자!!!!!"-하오,지령
[032]
絶 世 美 男(절세미남)
세상에 비길것이 없을 만큼 빼어난 *미남.
"싫어."-원
"아, 왜!!"-하오
"시끄러우면 책 못 읽어."-원
"오늘 같은 날 책 따위는 던져 버릴수 없는 거냐?~"-하오
"어."-원
"나이트에 가지 않는다는 건 단체 생활에서 빠지겠다는 거야!"-하오
"내 성격 잘 알면서 이러는 이유는 또 뭔데."-원
"그게 아니라, 요새 통 못갔잖냐. 그래서 오랜만에 가자는 거지!"-하오
원이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이 행동은 안간다고 우기는 원의 독특한 버릇이였다.
말을 다시 수정 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의 뜻 대로 해주지 않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가만히 서있는 것이다.
비윤은 원의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 새롭게 느껴질 따름 이였다.
로민 패거리는 원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지금도 다른 곳에 가지 않으면
원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 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원이 왼쪽 옆구리에 있던 책을 펼치고 셔츠 주머니에 걸려 있는 무테 안경을 쓰고는
가로등 불빛을 조명 삼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동 없이 눈동자만 움직이는 원을 보며
하오가 어쩔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고 원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졌다. 낙원 졸라 질긴건 알아 주네."-하오
원은 하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걸어 갔다.
비윤과 채이는 원의 엉뚱한 모습에 서로를 바라보고 베시시 웃었다.
하오가 원의 뒤를 쫒아가서 말했다.
"나이트 못가게 했으니까 이제 우리가 어디에 갈지 니가 정하삼."-하오
원이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면서도 하오는 빨리 말하라며 재촉 했다.
원은 무테 안경을 다시 벗고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로 로민패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독서실 가자."-원
"공부는 싫어!!!"-지령
"낙원 혹시 너.. 공부 중독자야?"-채이
"싫으면 말고."-원
역시나 원의 유머 였지만 지령과 채이는 진담이라고 생각 했나 보다.
채이는 몰라도 지령이 원과 친구가 된 지도 3년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원의 농담과 진담을 구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오는 배를 잡고 눈물까지 흘리며 시원스럽게 웃고 있었다.
비윤은 원도 유머러스한 면이 있다는 것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자상하고, 잘 웃기도 하지만 항상 공부만 하는 원이 내심 걱정 이였는데 이제야 안심이 되었다.
로민은 시시 각각 변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다 짧게 읊조렸다.
"바보 집단이군."-로민
갈곳이 없었던 로민 패거리는 어쩔수 없이 얼마전 부터 자주 찾는 paradise로 향했다.
시내에 들어선 그들이 모두의 시선을 받는 건 당연했다.
꾸미지 않은 편안한 차림이 였지만 로민 패거리의 미모는 빛이 났다.
한명이 아닌 여섯명 씩이나 되지 않은가.
다섯명의 잘생긴 남자들에게 둘러 쌓인 채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도 했다.
채이는 로민 패거리 사이의 정 중앙에 위치 했다.
그 모습은 마치 호위라도 받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여자라면 누구든 채이의 자리가 탐이 났을 것이다.
특히 비윤과 지령에게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에 여자들은 찢어 질듯한 눈으로 채이를 바라 본다.
채이는 로민 패거리 같은 멋진 남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아니, 모두의 부러운 시선을 받는 것 보다 지령과 함께 있기에 좋은 것이 였다.
#paradise.
늦은 시각 인데도 교복 입은 학생들이 와글 와글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로민 패거리가 들어서자 금새 술렁이기 시작 했다.
그렇다고 로민 패거리가 거기에 신경 쓸 사람이 아니였다.
paradise는 요새 매출이 눈에 띄게 오르고 있었다. 모두 로민 패거리 덕분 이였다.
로민 패거리가 paradise를 자주 찾는 다는 정보가 흐르고 흘러서 많은 여학생들이
날마다 이곳에 죽치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로민 패거리를 보는 건 하늘에서 별따기 일 정도 였지만 그래도 그들을 좋아했다.
로민 패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얼마나 먹을지, 무엇을 먹을지 고민 하고 있었다.
로민은 문득 소윤과 노린 때문에 아파하며 술을 마시던 비윤의 모습이 생각 났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었던 비윤이 너무나 고마웠다.
말을 꺼내기 조차 힘들 었을 텐데 그런 비윤이 대견 했다.
로민의 옆에 앉으려는 하오를 살짝 밀어 내고 비윤이 로민의 옆자리에 앉았다.
옆에 있기만 해도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방학 내내 보지 못한 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 왔다.
로민도 마찬가지 였다.
이상하게 비윤이 보이지 않으면 보고 싶고, 그립고, 불안하고, 이대로 자신의 곁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런 느낌이 단순히 친구라는 감정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로민도 생각 했다.
하지만 도데체 이런 증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로민은 사랑 받고 자라지 못했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는 데에도 그만큼 시간이 걸리고 만다.
언젠가는 비윤이 그 감정을 알수 있게 도와 줄거라고 믿는 수 밖에 없다.
로민과 비윤은 그렇게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생각에 잠겨 있는 로민, 비윤 방해하는 하오의 큰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건배 건배하자!"-하오
하오는 술잔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우스꽝 스러운 표정을 한채 모두에게 건배를 하자고 협박하기 시작 했다.
로민 패거리는 협박아닌 협박에 못이기는 척 하오의 뜻대로 해 주었다.
하오는 싱글 벙글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원샷이삼. 큭큭."-하오
비윤은 이번 만큼은 절대로 과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했다.
지금 까지 술을 먹었을 때 취하지 않았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취했던 것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정말로 큰 문제는 필름이 끊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통 기억이 안난다는 것이 였다.
행여 하오가 빨리 마시라는 소리를 할까봐 비윤은 조금씩 술을 들이켰다.
반면에 채이는 물 만난 고기처럼 지령의 옆에서 예쁘게 웃으며 술을 마시다,
지령의 입에 안주를 집어 넣어 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원도 이번 만큼은 책을 내려 놓고 웃으며 모처럼 만에 즐거워 했다.
"너희들 우지령이랑 나랑 둘 중에서 누구 머리가 더 좋은지 알아?"-하오
"당연히 지령이지!"-채이
"맞아, 내가 더 똑똑해. 히히."-지령
"닭살 커플은 꺼지시고, 낙원 니가 말해봐!"-하오
"바보 브라더스 중 누가 더 똑똑한지 구별 하라니.. 정말 어려운 문제다."-원
"죽을래?!!"-하오
하오가 미간을 좁히고 원을 보다 비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하오라고 말해. 말해. 말해.'라는 무서운 표정 이였다.
하지만 눈치 없는 비윤은 언제나 처럼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이 말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지령이가 더 좋은거 같아.(싱긋)"-비윤
"은비까비 너 까지 그럴래? 정년 진하오님을 지지하는 자는 없단 말이삼!!!!!"-하오
"진하오가 훨씬 낫지."-로민
그 말에 하오는 과일 안주로 나온 포도를 먹고 있던 로민의 손을 덥썩 잡았다.
"너 밖에 없다. 유로민! 로민아!"-하오
"잔머리 쪽에서 말이야.(피식)"-로민
"잔머리 굴리는 것도 머리가 좋아야 하는거삼!"-하오
분위기가 침체 된 것도 아닌데 오늘 따라 하오는 오바까지 하면서
분위기를 UP 시키기 위해 노력 하고 있었다.
취한건 하오 뿐이였다. 온갖 우스꽝 스러운 이야기를 하면서 한잔 들이키고,
또 한잔 들이키고 하니 취할수 밖에 없었다.
새벽 1시가 넘었다는 것을 깨닫고 원과 지령이 양쪽에서 하오를 부축하여 paradise를 빠져 나왔다.
낮보다 더 밝은 시내에는 열대야 현상으로 아직도 잠 못든 사람들이 나와 거리를 활보 하고 있었다.
드문 드문 가출 청소년들이 담배를 피우며 뿌연 연기 속에서 차가운 눈을 하고 있는 것도 보았다.
비윤은 술기운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아픈 머리를 매만 졌다.
비틀 거리는 하오를 단단히 붙잡고 가는데, 하오가 별안간 피식 피식 웃기 시작했다.
"오늘 기분 째진다."-하오
"하오야, 말하지 말고, 제대로 걸어봐."-지령
"몰라 지렁이 새꺄. 하오님은 지금 이 기분을 깨고 싶지 않다."-하오
"무슨 소리야. 그만 좀 말해. 비틀 거리니까 무거워!"-지령
"갑자기 지렁이 먹고 싶어 졌어."-하오
"지렁이를 어떻게 먹어! 이런 식인종!!!!"-지령
지령은 투덜 거리면서도 하오의 말에 대꾸를 해주고 있었다.(지령이는 착해요~)
**
반 마다 일렬로 운동장에 서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듣기 보다는 주로 방학이 되어 집에 가면 뭘 할까 라는 고민을 하며 떠들고 있기에 바빴다.
비윤도 마찬가지로 채이와 함께 떠들고 있었다.
채이와 비윤은 마치 동성 친구라도 되는 듯 수다를 떨었다.
채이는 기숙사에 남아 지령과 함께 사랑을 속삭이는 것,
비윤은 동생 소윤과 집에 가서 무엇을 하고 놀것 인지가 대화의 내용 이였다.
로민을 못본 다는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날것 같아서 기숙사에 남으려고 했지만
오랜만에 소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보고 싶어도 참기로 한 것이다.
하오는 어제 먹은 술의 영향을 받아서 아직까지
기숙사에 남아 잠을 자고 있었기에 운동장에 나오지 않았다.
방학식이 끝나자 아이들은 각자 짐을 챙기려고 재빨리 기숙사로 달려 갔다.
원은 선생님의 호출로 교무실에 갔고, 지령과 채이는 금새 어디론가 사라졌다.
비윤은 로민과 함께 기숙사로 향했다. 아무 말 없이 걷던 로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집에 잘 갔다 와라."-로민
"응. 로민이도 잘 지내."-비윤
"은소윤도 가는 거지?"-로민
"소윤이? 당연히 가지. 헤헤."-비윤
"은소윤 부럽다."-로민
로민은 자신이 내 뱉은 말에 놀라워 하고 있었다.
비윤이 무슨 말이 냐고 물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자체가 이상했다. 비윤이 여자도 아닌데,
왜 소윤이 부러운지 자신도 알수 없었다.
기숙사에 도착한 비윤은 집에 갈 준비를 했다.
로민은 복잡한 생각을 하기 싫어서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비윤을 지켜 보았다.
그때 옆방에서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아악!!!"-하오
그 목소리는 분명 하오 였다. 비윤도 로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하오 목소리 맞지?"-로민
"응!"-비윤
로민과 비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하오의 방으로 달려 갔다.
방문을 활짝 열어 재켰을 땐 너무나 끔찍한 상황에 놀랄수 밖에 없었다.
바닥에 흥건히 고인 붉은 핏방울, 깨진 물건 들과 함께 멀리 내팽겨쳐진 칼..
그리고 피로 붉게 물든 하오의 초록색 시계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하오는 피가 흐르는 왼쪽 손목을 잡으며 소리쳤다.
"나가. 나가. 나가. 나가!!!!!!!!"-하오
하오의 눈은 예전의 눈이 아니였다. 한없이 차갑고 초점 또한 없었다.
하지만 놀라서 가만히 있기엔 하오가 흘린 피의 양이 너무나 많았다.
로민이 하오에게 다가 갔다.
"오지마. 오지마!! 오면 죽어 버릴거야."-하오
비윤은 눈물이 앞을 가려 앞에 보이지 않았다.
도데체 하오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스스로 자해까지 했는지... 비윤은 눈물만 흘렀다.
하오의 외침에도 로민은 멈추지 않고 하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하오는 고개를 저으며 연신 '살고 싶지 않아.' 라는 말만 반복 했다.
깨진 유리 조각을 밟은 로민의 발에서도 피가 났다.
하오의 시선이 멀리 떨어져 있는 칼로 향했다.
하오가 다시 칼을 집어 들기 전에 로민이 하오의 얼굴로 주먹을 날려 기절 시켰다.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법 이였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황급히 지혈을 했다.
병원에 도착한 하오는 곧장 수술실로 들어 갔다.
몇 시간 뒤, 새하얀 침대 위에 새하얀 병원 복을 입고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하오.
하오의 왼쪽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로민 패거리는 그런 하오의 모습을 멍하게 바라 보았다.
"진하오 나쁜 놈아!!!! 죽으려고 했다고?"-지령
하오의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는 지령의 목소리가 병실안을 가득 매웠다.
그 누구도 지령을 말리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하오는 수술 후 몇시간째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나쁜 놈아, 너 위대 하다며! 맨날 위대하신 진하오님이라고 광고하고 다녔잖아.
위대하면 살아야지, 왜 죽을 생각을 해!!!"-지령
모두 하오가 죽을 생각까지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에 미안해 했다.
하오의 속마음 조차 몰랐다는 생각에 미안해 미칠 지경 이였다.
"진짜 로민이 말대로 병신... 진하오 병신!!"-지령
지령의 마지막 외침에 하오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감고 있는 눈이 파르르 떨려 왔다. 하오는 눈을 뜰 용기가 없었다.
친구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제 더이상 이러지 않기로 했는데, 친구들 앞에서 이런 꼴을 보여 버렸다.
지령이 하오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앞으로 자살 같은건 하지 못하게 내가 옆에 붙어 있을 거야."-지령
"그만해 지령아."-원
"하오가 왜 그랬는지 이유도 다 들을 거고, 저리 가라고 해도 거머리처럼 달라 붙을 거란 말이야."-지령
비윤은 더이상 이 모습을 지켜 볼수가 없어서 병실을 나왔다.
지금 제일 아픈건 하오 일텐데 이상하게도 비윤의 마음이 찢어지게 아파 왔다.
한참동안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비윤의 앞에 누군가 멈춰 섰다.
"비켜 주시겠습니까."-도현
비윤이 고개를 들어 올려 누구인지 확인 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도현 이였다.
"도현.. 오빠?"-비윤
"비윤씨가 여긴 어떻게.."-도현
[033]
냉철해 보이기만 하던 도현도 이번 만큼은 꽤나 놀란 눈치 였다.
이삼일이 지나고 나면 비윤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병원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비윤이 벌떡 일어나서 도현이 입은 하얀색 가운과 손에 들고 있는 차트를 빤히 주시 한다.
도현은 비윤의 눈이 빨갛게 충혈 된 것으로 보아 비윤이 울었다는 것을 알았다.
"도현 오빠 의사에요?"-비윤
"네. 이번에 이 병원으로 발령나서 한국에 들어 온겁니다."-도현
누가 보아도 도현이 입고 있는 하얀 가운은 도현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비윤은 꼭 로민이 의사가 되어 있는 기분이 들어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잠깐 비켜 주시겠습니까. 제가 보호자 분을 만나러 왔거든요."-도현
비윤을 만나는 것도 중요했지만 먼저 일을 끝내야 했다.
그래야 비윤이 이곳에 왜 왔는지도 물어 볼수가 있다. 도현은 공과 사는 구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보호자를 만나야 한다는 소리에 비윤의 동공이 커졌다. 별안간 도현의 손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요? 무슨 일 인데요?"-비윤
도현은 비윤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방금 수술을 끝내고 입원한 학생과 비윤이 친구라는 것을 눈치 챘다.
비윤의 눈은 평온을 찾지 못하고 계속 안절 부절 한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 때 병실에서 로민이 나왔다. 크게 들려오는 비윤의 목소리 때문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나온 것이다.
로민의 시선이 비윤이 잡고 있는 도현의 손으로 향했다.
도현이 그 시선을 느끼고 부드럽게 웃으며 비윤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알았다. 비윤이 말한 로민이라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잘생긴 남자라는 것을 말이다.
비윤은 도현이 말을 꺼내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하오씨 보호자 분들은 따라 오시죠."-도현
비윤과 로민은 도현의 진료실로 향했다.
진료실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깔끔하고 도현 스러운 방이였다.
"앉으세요."-도현
비윤과 로민이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것을 확인하고 도현은 잠깐 동안 차트를 훑어 보았다.
비윤은 행여 하오에게 큰 문제라도 있을 까봐 걱정 하고 있었다. 로민도 마찬 가지였다.
만약 그렇다면 병원을 뒤집어 놓아서라도 하오를 고쳐 내라고 할 작정 이였다.
그들의 마음을 읽은 걸까? 도현이 깍지 낀 손을 책상위에 올려 놓고 비윤이 표정을 풀수 있도록 말했다.
"걱정마세요. 큰 문제는 없습니다."-도현
비윤은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도현이 안심하고 있는 비윤을 흘깃 보고는 무표정인 로민을 응시 했다.
로민도 도현의 눈을 피하지 않고 주시 했다. 일종의 기선 제압 이였다.
로민은 노린 때와 마찬가지로 왠지 도현이 싫었다. 그래서 눈을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동시에 눈을 피하는 것으로 끝나 버렸다. 도현이 헛기침 한번을 하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진하오씨가 자해를 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 더군요."-도현
"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면..."-비윤
"세 개의 흉터가 더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세번다 자해를 한 것 같네요."-도현
로민은 친구면서 하오가 자해를 한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무척이나 미안했다.
혼자 울었을 하오의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아파왔다.
친구들의 아픔은 생각하지 못하고 항상 자신만 아프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지난 날들이 후회 스러웠다.
비윤은 이제야 하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시계가 없으면 난 못살지도 몰라."
하오의 초록색 시계는 자해 한 흔적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였단 것을 그땐 왜 몰랐는지..
몇 일전 하오에게 들었던 말들도 그냥 넘어가 버렸다는 사실에 비윤은 하오의 자해가
모두 자신의 탓인 것 처럼 느껴 졌다. 로민은 주먹을 꽉지며 입술을 깨물었고,
비윤은 손가락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도현이 비윤과 로민을 잠시 지켜 보다 말을 꺼냈다.
"모르셨나 보군요. 보호자 분들도 충격이 크시겠지만 무엇보다도 당사자의 충격이 더욱 클 겁니다.
깨어 나면 자해를 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그 모습을 보여 주어서 더욱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도현
비윤은 아무 미동 없이 도현이 말하기만을 기다 렸다.
"깨어 나면 왜 그랬는지 이유는 묻지 마세요. 스스로 말 해 주기를 기다리시란 말입니다."-도현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비윤
"저로써는 진하오씨가 안정을 찾을수 있도록 요양 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은데."-도현
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가서 요양하면 하오도 이제 죽고 싶다는 마음 같은 건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 했다. 이 세상이 죽기 싫을 만큼 살기 좋고 행복한지 가리켜 주고 싶었다.
진료실을 나가려는 비윤과 로민의 귀에 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있는 것 보다 친구들이 함께 있다면 더욱 좋은 성과를 가져 올지도 모릅니다.
진하오씨는 혼자 있는 걸 두려워 하니까요."-도현
부드러운 어조의 도현의 말은 충고라기 보다는 조언과도 같았다.
비윤이 빙긋 웃고는 고맙다는 입모양을 보여 주었다.
도현은 나가버린 비윤을 보다 비윤이 앉았던 자리를 응시하며 중얼 거렸다.
"나도 혼자 있는거 두려 운데.. 비윤씨가 내 옆에 있어 줄래요..?"-도현
병실로 향하던 로민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머릿속이 복잡한지 미간을 좀혔다.
"요양이라.. 요양원으로 가야하나."-로민
비윤은 로민의 말을 듣지도 못하고 진료실을 나온 순간부터 말이 없어 졌다.
병실을 가려면 코너를 돌아야 하는데 그것도 보지 못한채 그냥 걸어가 버리기 일쑤였다.
그럴때 마다 로민은 피식 하고 웃다가 비윤을 돌려 세워 병실 쪽으로 가도록 했다.
별안간 비윤이 로민을 보고 소리쳤다.
"우리 별장으로 가자!"-비윤
"별장?"-로민
"응! 우리 별장은 비윤이도 한번 밖에 못 가봤는데, 기억으로는 하오에겐 딱 인거 같아. 헤헤."-비윤
"너도 괜찮은 생각 할때가 있구나. 쿡쿡."-로민
비윤은 로민에게 칭찬 받았다는 것에 기뻐서 얼굴이 약간 붉어 졌다.
"우리 다같이 가는거야. 하오가 좋아 질수 있도록."-비윤
"하오한테는 요양이라는 소리 하지마. 그 성격에 그딴건 안한다고 할게 분명하니까."-로민
"응!"-비윤
비윤과 로민은 한시름 놓았다고 느끼자 맥이 풀렸다.
그들이 병실 안에 들어 섰을땐 하오가 깨어나 있었다.
하오는 반쯤 일어나 앉아서 창밖을 응시하고, 지령은 그 옆에 서서 팔짱을 낀채 하오를 찢어질 듯한 눈으로
쳐다 보고 있었다. 원이 로민과 비윤을 맨 처음 발견한 했다.
"어디 갔다와?"-원
"담당 의사 선생님 만나고 왔어.헤헤."-비윤
"뭐라고 해?"-원
"아무 이상 없데.(싱긋)"-비윤
"후.. 걱정했는데 다행이다."-원
아무 이상 없다는 말에 하오가 고개를 돌려 비윤을 보다가 다시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로민이 지령의 행동을 살펴보자 채이가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아까 부터 둘다 저 상태야. 지령이는 하오가 왜 그랬는지 듣고 싶다는 거지. 근데 하오가 입을 열지 않네."-채이
지령이 이런 행동을 할 만도 했다. 항상 웃으면서 자신을 놀렸던 하오는 걱정 따위는 하지도 않았고,
고민을 말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할 정도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친구인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는게 실망 스러웠다. 그래서 계속 그 이유를 묻고 있었다.
"빨리 말해봐. 왜 그런 짓을 한거야?"-지령
지령이 억양 없이 말 하자 로민이 지령의 손목을 잡았다.
"우지령 그만해."-로민
"....응."-지령
원과 채이가 말렸을땐 꼼짝도 하지 않았던 지령이 로민의 한마디에 꼬리를 내린다.
그만큼 지령은 어렸을 때 부터 같이 지내온 로민을 의지 하고 있었다.
지령에게 로민은 따뜻한 부모님... 그리고 친구 였다.
지령이 고개를 푹 숙이고 채이에게 다가 갔다. 채이는 빙그레 웃으며 지령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령의 눈에서 괴로움과 미안함의 눈물이 한방울 떨어진다.
하오는 자신 때문에 아파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볼수가 없었다. 죽으려 한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 까지 걱정 해주는지 고마워서 눈을 마주치기가 싫었다. 눈을 마주치면 서러움과 미칠 듯한 고통에
지령처럼 눈물이 흐를것만 같았다.
"진하오."-로민
하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로민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너 병원에 있는거 싫지?"-로민
하오가 오른 손으로 바지를 움켜 쥐었다. 싫은게 아니라 어서 빨리 지긋 지긋한 병원을 나가 버리고 싶었다.
병원 특유의 냄새는 하오를 소름 돋게 만들기 충분 했다.
병원 이라는 곳 자체가 하오에겐 절망 적인 곳이다. 죽었으면 죽었지 병원에 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한시간만 기다려."-로민
로민은 지령을 다독여 주고 있던 채이를 데리고 병실을 나가버렸다.
비윤과 원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 보았다.
정확히 한시간 뒤 로민과 채이는 양손에 짐을 한가득 들고 병실로 들어 왔다.
채이는 짐을 내 팽겨 치고 카랑카랑 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손 빨게 진것 봐. 나한테 이런 걸 시키다니. 흥."-채이
채이는 단단히 골이나 있었다. 그럴 만도 한것이 채이는 남자도 들기 힘들 만한 짐들을 들고 왔다.
"내가 여자인 네 짐까지 챙길수는 없잖아."-로민
할 말이 없어진 채이는 연신 아프다는 말만 내뱉었다.
비윤을 뺀 모두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로민을 바라 보고 있었다.
"우리 놀러 갈거야. 은비윤네 별장으로."-로민
"놀러 가다니. 지금 이 상황에서 놀러 간다는게 말이 돼?"-지령
"좋아. 가보자."-원
"원아! 너까지 이럴 거야?"-지령
원은 미소만 지었다. 로민이 생각 없는 아이가 아니란 것을 알기에 원은 로민의 말대로 따르기로 했다.
원이 입이 삐쭉 나와 있는 지령을 채이에게로 보냈다.
마음에 안들어 하던 지령은 채이가 머리를 쓰다 듬어 주자 다시 평온을 되 찾았다.
"너희들 짐은 내가 대충 챙겨 왔다. 불만 없지?"-로민
불만이 있을리가 없었다. 로민은 하오에게 옷을 던져 주었다.
"우리들 나가 있을 테니까 옷갈아 입고 나와."-로민
하오는 로민이 던져준 옷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슬픈 미소를 지었다.
하오를 기다리던 비윤이 로민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비윤이는 별장에 한번 밖에 못 가봐서 가는 길 잘 모르는데 어떡하지?"-비윤
"걱정마. 은소윤한테 부탁해 놨으니까."-로민
소윤에게 무엇을 부탁 했는지 물으려는데 하오가 병실에서 나왔다.
피를 많이 흘려서 얼굴이 하얗다 못해 핏기가 없어 보였기에 모두를 걱정 시켰다.
하오는 여전히 모두의 시선을 피하며 맨 앞에 서서 걸어 갔다. 병원을 나온 뒤 로민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채이와 지령이 지쳐서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을 쯤 검은색 벤츠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삐까뻔쩍한 차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앞 좌석의 창문이 열리면서 매우 익숙한 얼굴이 장난스레 웃고 있었다.
"형들 타."-소윤
"소윤아!!"-비윤
"빨리 안타면 그냥 가버린다~"-소윤
벤츠는 여덟명 가량이 탈수 있을 만큼 컸다.
로민 패거리는 짐을 싣고 차에 올라 탔다.
로민과 비윤은 운전 석에 앉아 있는 또 한 사람을 보고 놀랄수 밖에 없었다.
"의사?"-로민
"도현 오.. 형?"-비윤
"이런. 또 만나게 되네요."-도현
로민은 비윤이 도현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모습에 두 사람이 원래 부터 알던 사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윤과 로민을 뺀 나머지는 무슨 영문 인지 몰라 멀뚱 멀뚱 도현을 보기만 할 뿐이였다.
소윤이 친절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내가 재활 치료 할때 알게된 도현이 형이야. 직업은 의사고, 너무 멋진 사람이라 얼마 전 비윤이 형한테
소개 시켜 줬어. 하오형의 담당 의사기도 하지.
아, 여기 있는 이유는 내가 운전 할수는 없으니까 대신 해주는 거야."-소윤
모두가 고개를 끄덕 였다.
일 년전 소윤을 만났을 당시, 도현은 의사가 아니였다.
의사가 되기 위한 준비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자신 보다 어린 소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일년 이 지난 지금 아버지의 병원으로 와서 일을 돕기로 한 것이다.
물론 병원을 물려 받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도현의 첫 환자는 바로 하오 였다.
도현의 바로 뒤에 앉은 채이가 빠질수는 없었다. 남자친구가 있어도 남자를 좋아하는 건 어쩔수 없나 보다.
"우와, 잘생겼다~ 몇 살이에요?"-채이
"스물 한 살 입니다."-도현
"고등학생 으로 밖에 안보이는데요?"-채이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도현
"얼굴도 잘생기고, 직업도 그 만하면 완벽한데 저한테 오실래요?"-채이
채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도현은 빙긋 웃었지만 지령은 볼이 뾰루퉁 해져서 채이의 볼을 꼬집었다.
"아야. 너 뭐하는 거야!"-채이
"이채이 나빠. 내가 저 형보다 더 멋있다 뭐."-지령
"질투하니?~"-채이
"아니야!!"-지령
채이는 그런 지령이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예쁘게 웃었다.
창밖을 보다가 잠이든 하오는 자연스럽게 원의 어깨로 기대었다. 차 안은 비교적 평화 로웠다.
도현은 소윤에게서 비윤의 친구들은 비윤이 남자인줄 알고 있다고 들었다.
조심해야 게다는 생각을 하며 백미러를 보는데 함께 앉아 있는 로민과 비윤의 모습이 도현의 눈에 들어 왔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두분은 정말 친 구 인가요?"-도현
[034]
"네! 로민이랑 저는 진짜~ 진짜 친한 친구에요."-비윤
정확히 친구라는 단어에 로민의 가슴이 왜 이렇게 따갑고 아파 오는지 알수가 없었다.
도현은 확실히 하고 싶었다. 비윤이 정말 로민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친구로서 좋아하는건지를..
하지만 지금 비윤의 대답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비윤이 로민을 사랑한다고 해도 로민이 옆에 있는 이 자리에서 사랑한다고
말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도현은 비윤의 대답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리석게 이런 질문을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로민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의사 양반 한테는 우리가 연인 사이처럼 보이나 보지?"-로민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냥 궁금했거 든요. 비윤씨와 그쪽이 얼마나 친한지."-도현
"난 그쪽이 아니라 유로민이야."-로민
"저도 의사 양반이 아니라 지도현 입니다."-도현
로민과 도현의 눈에서 백만 볼트의 전기가 흘렀다. 비윤은 아무것도 모르고 벌써 두 사람이 친해 졌다고 생각 했다.
운전 때문에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린 도현은 로민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느꼈다.
자신보다 2살이나 어린 로민이 반말을 하는 데도 기분이 나쁘기는 커녕 철없는 어린 아이로 보이기만 했다.
가만히 있던 소윤이 도현과 로민의 눈치를 보았다. 의미모를 미소를 짓는 소윤에게는
'유로민''지도현' 이 두사람의 이름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직 한시간도 달리지 않았는데 하오의 소식에 충격을 받았던 로민 패거리는 곤히 자고 있었다.
깨어 있는건 도현과 로민 뿐이였다. 소윤은 깨어 있었지만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과연 이 두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눌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로민은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끄덕 이며 자고 있는 비윤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 위로 기댈수 있게 했다.
로민의 심장은 기분 좋게 뛰고 있었다. 도현이 차가 신호에 걸려 서있는 틈을 타 로민에게 말했다.
"로민씨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보죠?"-도현
"딱히 마음에 든다고 할수는 없어."-로민
"경어를 써주길 바랬는데 로민씨한테는 그게 무리인가 보군요."-도현
"난 그럴 가치 없는 사람에게 경어를 쓰지 않아."-로민
신호가 바뀌자 차가 다시 출발 했다. 도현의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해 있었다.
"제가 그럴 가치가 없다니, 조금은 아쉽네요."-도현
로민은 무표정으로 도현의 뒷모습을 응시 했다. 한없이 차가운 눈이였다.
도현도 로민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운전까지 내팽겨 치고 같이 마주보고 눈을 마주 칠 수는 없었다.
그 뒤로 침묵이 흘렀다. 도현은 운전에 집중해 있었고, 로민은 창밖을 보며 공상에 빠져 있었다.
그런 침묵을 깨버린건 도현이였다.
"저는 비윤씨를 좋아합니다."-도현
"남자를 좋아하다니 취향이 특이하네."-로민
"내가 동생으로서 비윤씨를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생각 하십니까?"-도현
"사람마다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 그걸 꼭 말해야 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로민
도현은 알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로민에게 보이진 않지만 말이다.
"한 사람을 좋아하거나 사랑할땐 상대방의 성별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거니까요."-도현
도현의 한마디가 로민의 가슴속 깊이 와 닿았다. 도현이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한 지 모르겠지만
로민은 도현이 비윤을 좋아한다고 확신 했다. 비윤에겐 묘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로민도 인정했다.
차는 어느새 산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비포장 도로를 10분쯤 달리자 별장이라기엔 너무 큰
집 앞에 멈춰 섰다. 로민패거리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이내 커다란 별장을 보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 졌다. 통나무 집처럼 보이는 별장은 보기만 해도 탄성이 절로 났다.
"우와, 여기가 비윤이네 별장이야?"-지령
"응. 헤헤."-비윤
"너~ 무 좋다. 꺄~ 나 이런데 와보는거 소원이였어."-채이
"채이가 좋으면 나도 좋아."-지령
지령과 채이는 얼싸 안고 어린 아이처럼 뛰고 있었다. 하오는 원에게 부축을 받아 차에서 내렸다.
맑은 공기때문에 머리까지 맑아 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햇빛이 비춰서
별장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 다웠다.
"공기 정말 좋다."-원
원에 잡혀 있던 팔을 뿌리치고 하오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비윤이 그런 하오에게 다가갔다.
"하오야, 기분 좋지?"-비윤
끄덕끄덕.
하오는 고개를 끄덕 이기만 할 뿐이였다. 아직 누구와도 말 하고 싶지 않았다.
될수만 있다면 손목에 난 상처를 가려버리고 싶었다. 흉터까지 영원히 없애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비윤은 잘 된 일이라고 생각 했다. 손목에 있는 상처는 치료를 해도 흉터가 영원이 남아 있겠지만
하오의 마음 속 상처는 꼭 치료해 줄거라고 다짐 했다.
별장에 짐을 옮긴뒤 모두 별장 안을 둘러 보기 시작했다. 나무로 만든 집이라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시원 했다.
각자 방을 정하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 입고 나와서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하오만이 흔들 의자에 앉아 밖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지령은 하오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하오가 스스로 말해 주길 기다 렸다. 부엌을 둘러보고 나온 비윤이 무척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모두들. 먹을게 하나도 없어.(울먹)"-비윤
평소 같았으면 하오가 큰 목소리로 빨리 먹을 것을 사와라고 비윤을 구박 했겠지만
지금의 하오는 익숙하지 못할 만큼 어색 했다. 모두 하오의 예전 모습을 그리워 하고 있다.
"시내에 나가서 사오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도현
도현의 말에 소윤이 재빨리 한손에는 도현의 팔목을 다른 한손에는 비윤의 팔목을 붙잡고
문 쪽을 향해 이끌었다.
"운전할수 있는 건 도현이 형 밖에 없으니까 비윤이 형이 같이 따라가면 좋겠다! 모두 불만 없지?"-소윤
"불만 없어. 아까 부터 물어 보고 싶었는데 저 남자 애는 누구야?"-채이
채이가 소윤을 가리키며 지령에게 말하자 소윤도 이제서야 채이를 발견했는지 놀란 눈치였다.
"어? 저 여자 누구야?"-소윤
"이 쪽은 이채이야. 지령이 여자친구고, 이쪽은 은소윤. 비윤이 동생이야."-원
원의 확실한 설명에 소윤과 채이는 이해를 한듯 서로를 훑어 보기에 바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도현
"헤헤, 갔다 올게."-비윤
도현의 뒤를 강아지처럼 쫓아가는 비윤을 보며 로민은 가지 못하게 막고 싶었으나
이곳 까지 와서 소동을 부리고 싶지 않았기에 꾹 참고 있었다. 도현을 따르는 비윤을 보니 화가 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윤이 마음 한구석에 그 누구보다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별안간 로민이 주먹으로 벽을 세개 쳤다. 모두 놀라서 로민을 바라 보았지만 유독 소윤만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로민을 응시했다.
"로민아, 왜그래?"-지령
"휴.. 아니야. 신경꺼."-로민
"뭔가 화나는 일이라도 있나봐?"-소윤
소윤이 작게 말하는 소리에 로민이 방으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추 었다.
소윤은 장난 스럽게 웃고 있었다.
"화나는 일 없어."-로민
"아님 말구.킥킥."-소윤
로민은 이때다 싶어 소윤이 했던 말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로 했다.
"누나 있다고 했지?"-로민
"응. 아주 예쁜 누나 있어."-소윤
"은비윤은 누나가 없다고 하던데, 도데체 무슨 소리 한 거냐."-로민
소윤은 로민이 자신이 한 말 때문에 고민 했을 거란 생각에 키득 키득 웃기 시작했다.
그런 소윤의 행동에 로민은 기분이 나빠졌다.
"그거? 비밀이야. 그래야 긴장감이 돌거든."-소윤
당최 로민이 알아 들을수 없는 말만 한 소윤은 산책을 한다며 밖으로 나갔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소윤은 로민에게 비윤을 주고 싶지 않았다. 로민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기에 그 감정은 비윤을 아프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래서 도현을 선택한 것이다. 도현이라면 비윤을 아프게 하지 않고 비윤을 사랑해 줄것만 같았다.
자신은 노린과 아픈 사랑을 했으니까 비윤은 아픈 사랑을 하지 않길 바랬다.
이루어 지지 못한 사랑은 애초부터 시작하지 않는게 좋다.
그시간 비윤과 로민은 산속을 벗어나 시내에 도착했다.
삐까뻔쩍한 벤츠에서 내린 도현과 비윤의 모습에 시내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주목 되었다.
비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다르지 않은 시내 모습에 신기해 하고 있었다.
정장 차림의 도현과 캐주얼한 옷차림의 비윤은 선남 선녀 커플로 보일수 밖에 없었다.
그것보다 그들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마트를 찾아헤매고 있는 그들에게 교복을 입은 중학생 무리가 달려 왔다.
"연예인 인가봐~"
"너무 잘생겼다!!!"
"이 언니는 인형 같아!!!"
"왠일이니, 눈 크기봐!"
이곳에서 멋지고, 예쁜 얼굴을 가진 도현과 비윤이 연예인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비윤에 비해 도현은 놀라하지도 않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도현이 비윤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하나, 둘, 셋. 하면 뛰어요."-도현
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중생 들은 도현과 비윤의 얼굴을 만져보려고 발악을 하고 있었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에 귀가 아파왔다.
"하나, 둘, 셋!!"-도현
도현이 비윤의 손을 잡고 뛰었다. 도현은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숨이 차오를대로 차올라서야 멈춰섰다. 비윤은 숨을 고르고 있는데 도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하하하."-도현
"후.. 후.. 왜 웃어요?"-비윤
"이렇게 뛰는게 얼마만 인지 몰라요. 비윤씨랑 있으니까 즐겁기도 하구요."-도현
도현이 이렇게 시원스럽게 웃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였다.
도현 스스로도 놀라워 하고 있었다. 정말 은비윤이란 여자와 함께 있으면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도현을 즐겁게 해준다. 도현은 은비윤이라는 여자를 가지고 싶었다. 애매모호 하던 감정이 이제 확실해 졌다.
은비윤을 사랑하고 있고, 은비윤을 가지고 싶다. 누가 뭐라고 해도 비윤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기로 했다.
혼자하는 사랑은 가슴아프기에, 비윤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기로 했다.
그 사람이 유로민이여도 상관 없었다. 비윤은 도현이 소윤에게서 들었던 모습 그대로 이다.
순수하고, 유리같아서 도저히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
이것이 비윤만이 가진 그녀의 매력이다. 도현은 지금 잡고 있는 비윤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손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가버릴 것만 같아서.. 유로민에게 가버릴 것만 같아서..
혼자가 될까봐 두려워서... 놓고 싶지 않았다.
도현은 모르고 있었다. 도현이 비윤을 사랑한다고 느낀 이순간도 비윤은 로민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비윤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도현이 웃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하지만 도현을 보고 있어도 로민이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로민과 함께 왔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 되었다. 그렇다고 도현과 있는 것이 싫다는 게 아니였다.
도현이 오빠 같이 편한 사람이라면 로민은 보기만 해도 비윤의 심장을 뛰게 하는 그런 달콤한 사람이였다.
도현이 웃는 것을 멈추고 비윤에게 말했다.
"...앞으로 자주 뛰어야 겠어요. 기분이 너무 좋아요."-도현
비윤이 싱긋 하고 웃었다. 매혹적인 비윤의 미소에 로민 뿐만 아니라 도현도 빠져 든것이다.
"도현 오빠가 좋으면 나도 좋아요. 헤헤."-비윤
'비윤씨가 늘 옆에 있어주면 안될까요..?'
도현이 마음 속으로 외쳤다. 비윤에게 들리지 않겠지만 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우여 곡절 끝에 마트를 찾아낸 비윤과 도현은 이것 저것을 골라서 카트에 담았다.
시식용 고기도 서로에게 먹여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비윤에게 예쁜 티셔츠가 눈의 띄었다. 로민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카트에 집어 넣으려 했지만
도현이 잡아 끄는 바람에 아쉬움만 남긴채 그곳을 벗어 났다.
먹거리와 그 이외의 것들이 한가득 담긴 봉지를 차에 넣었다.
"애들이 배고파 하겠어요. 빨리가요. 오빠."-비윤
"잠깐만 기다리세요."-도현
"어어!"-비윤
도현은 무언가를 보고 비윤을 뒤로 한채 어디론가 달려 갔다.
몇분 뒤 나타난 도현은 가만히 서있는 비윤의 가까이로 다가온다.
"어디 갔다 오는 거에요?"-비윤
"손 펴봐요."-도현
비윤은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대뜸 손을 내밀어 보라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내밀었다.
도현이 비윤에게 준 것은,
"머리 핀?"-비윤
도현은 말없이 앞 좌석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비윤은 도현이 부끄러워 한다는 것을 느끼고 말했다.
"고마워요. 오빠. 헤헤."-비윤
**
도현과 비윤이 별장에 다시 도착 했을 때는 로민이 문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로민아~!"-비윤
비윤이 소리치자 로민은 인상을 쓰고 별장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왜그러지? 화난거 있나?"-비윤
비윤은 무거운 봉지를 들고 낑낑 대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도현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질투 인가.."-도현
[035]
도현의 예상대로 로민의 완벽한 질투 였다.(새침떼기 로민.)
사실 비윤이 없는 내내 초조하고 불안해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도현과 비윤이 같이
있는 생각만 하면 머리가 미친듯이 아파왔다. 그런 자신의 마음도 모른채 도현의 차에서 싱글
벙글 웃으며 내리는 비윤을 보자니 화가 나고, 속이 뒤집힐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
가슴 한가운데가 시리고 따끔 따끔 아렸다. 한편으로는 비윤이 반가웠지만 속 마음 과는 달리
겉으로는 비윤을 쏘아 보고 들어가 버렸다. 비윤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 주길 바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비윤은 로민이 별장 안으로 들어가자 그 뒤를 재빨리 쫓아 갔다.
두 사람의 반응을 지켜 보고 있던 도현이 공기를 들이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붉은 노을
빛이 마치 비윤을 연상케 했다. 사랑에 빠지면 모든지 그 사람처럼 보인다고 말 했던 것을 이제야
알수 있었다. 비윤을 사랑한다고 느낀 순간부터 모든 것이 비윤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도현 주변의
여자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비윤은 도현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그래서 도현이 비윤을 사랑하게
된 것일 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공상에 잠겨 있던 도현이 이내 별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윤과 도현이 양손에 커다란 봉지를 한가득 들고서 별장안으로 들어서자 지령이 봉지를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아침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배가 고픈 것은 당연했다. 아마 지금까지 참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미안해, 지령아. 너무 늦게 왔지."-비윤
"응! 나 배고파서 은하수까지 갈뻔 했어."-지령
지령은 찡그리고 있던 표정을 풀더니 무언가를 집어 올렸다.
"어?! 햄 먹지마, 익혀서 먹어야돼!!"-비윤
비윤이 말리기도 전에 배고픔에 굶주려 있던 지령의 손에 커다란 햄이 들려 있었다.
햄이 지령의 입으로 들어 가려는 순간, 채이가 빠르게 햄을 낚아 챘다.
"나 배고파 죽을거 같아.(울먹)"-지령
"내가 만들어 줄테니까 따라와."-채이
"마이 달링, 채이가 최고야! 히히."-지령
지령은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 마냥 채이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부엌으로 향했다. 한바탕 소동 후
그제서야 비윤도 별장 안을 찬찬히 둘러 보았다. 지금은 막혀 있는 벽난로 앞에서 하오가 아까의
포즈 그대로 흔들의자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원은 그 옆에서 원 특유의 무테 안경을 끼고는
언제나처럼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도현은 모처럼 편하게 쉴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옷을 갈아 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소윤과 로민이 안보였기에 비윤이 그들의 행방을 원에게 물었다.
"소윤이랑 로민이는 어디있어?"-비윤
비윤의 물음에도 원의 시선은 여전히 책에 꽃혀 있었다. 하오가 슬쩍 비윤을 바라 보았다.
하오와 눈이 마주친 비윤이 베시시 하고 웃었다. 비윤의 시선을 애써 피하는 하오.
비윤은 하오의 왼쪽 팔목에 감겨 있는 하얀 붕대가 싫었다. 비윤도 고개를 푹 숙였다.
원이 책에 시선을 두고 비윤에게 말했다.
"소윤이는 산책 나갔고, 로민이는 무슨 일인지 화내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어."-원
"아.. 로민이가 비윤이한테 화난게 있나봐..."-비윤
비윤은 골똘히 생각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했는지 알아야 로민에게 사과를 할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비윤이 로민에게 잘못 한 것은 없다. 오히려 로민이 혼자 질투를 느낀 것 뿐이였다.
원이 두장 정도 남은 페이지를 다 읽고 나서야 책을 덮고 말했다.
"내가 볼때도 비윤이 니가 로민이를 화나게 했어."-원
"정말? 나 때문에 화난거 맞네.(울먹)"-비윤
"아니다. 너 때문에 화난게 아니라 너의 행동 때문에 화가 난 걸거야."-원
"그게 무슨 소리야?"-비윤
"행동을 조심해."-원
"행동을..?"-비윤
원이 말을 잇지 않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스스로 알아 가길 바랬다.
로민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서로의 사랑을 어서 확인 하길...
로민에게 다시 한번 상처를 주지 않길... 비윤이 세상에 등지고 살아 가려는 로민을 바로 잡아 주길..
로민의 차갑고도 슬픈 눈을 비윤, 자신의 눈처럼 만들어 주길... 원은 간절히 원했다.
(원은 예리하며 눈치 또한 빠르다.)
비윤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원이 원망 스러웠다. 로민이 화가 난 이유를 알기 위해 원에게
온갖 애교를 부리고 있는데 문을 열고 소윤이 들어 왔다. 항상 밝았지만 소윤은 오늘 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형 왔네. 킥킥."-소윤
"응. 방금 왔어. 배고프지?"-비윤
"맑은 공기 마셔서 벌써 부터 포만감이 드는걸."-소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있지만 소윤이 노린 때문에 괴로워 하고 있을 거란 것을 알기에 비윤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슬펐던 지난 날의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살아 갔으면 했다.
하오에게도.. 소윤에게도 살아야 한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소윤이 주위를 둘러 보다 아무도 모르게
씨익 웃고는 비윤에게 말했다.
"로민이 형은?"-소윤
"비윤이한테 화나서 방에 들어갔어."-비윤
"화났다라.. 재밌네. 킥킥."-소윤
소윤은 뭐가 재미있는지 킥킥 거리며 웃고 있었다. 소윤 역시 로민이 질투라는 감정을 알아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비윤이 왜 웃냐고 물어 보려던 찰나, 편한 옷으로 갈아 입은 도현이
방에서 나왔다. 검은색 바지에 티셔츠 하나를 입었을 뿐인데 다른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옷이였는데
가운을 입었을 때와 같은 지적인 느낌을 주었다. 도현을 발견한 소윤의 표정이 더욱 밝아 졌다.
"피곤해 보여."-소윤
"은소윤 눈치 빠르네."-도현
"귀국 하고 나서 바로 병원 들어갔다고 들었잖아, 이 참에 비윤 형이랑 산책 좀 하고와.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야."-소윤
"그럴까?"-도현
"당연히 그래야돼."-소윤
비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소윤은 비윤과 도현의 팔을 붙잡고 문 쪽으로 이끌 었다. 소윤은 손수
문까지 열어주었다. 원이 그런 소윤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 본다.
소윤에게 쫓겨나다 싶이 밖으로 나온 비윤은 도현과 나란히 서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노을 빛이 더욱 붉어져서 그림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말 없이 걷던 그들은
가끔 하늘도 올려다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별안간 도현이 예쁜 꽃을 꺾어서 비윤에게 건네 주었다.
비윤도 여자였다. 꽃 한송이를 받아 들고서 너무나 좋아했다.
꽃과 꽃(비윤)의 아름 다운 조화라고 해야 할까, 그야말로 절세미인. 꽃보다 비윤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도현이 사랑에 빠졌음을 알게 해 준다. 꽃을 든 비윤이 예쁘게 웃으며 저만치 달려 간다.
비록 짧은 머리지만 뒷 모습만 보아도 비윤이 여자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한눈에 봐도 연약해 보이는 비윤을 남자로 알고 있는 로민 패거리가 한심 하게 느껴지는 도현이다.
비윤이 빙글 돌아서 도현을 보며 뒤로 걸었다.
"여기 진짜 좋죠.(싱긋)"-비윤
"네. 저도 이런 곳에 별장 하나 짓고 싶네요."-도현
"우와, 그럼 나중에 비윤이도 초대해 주세요."-비윤
"물론 입니다."-도현
도현은 꽃 내음에 코가 즐거 웠고, 비윤의 흥얼거림에 귀가 즐거 웠다.
"이제 말 놓으셔도 돼요."-비윤
"죄송하지만 전 이게 더 편합니다."-도현
"에이! 소윤이한테는 안 그러잖아요."-비윤
"소윤이랑 비윤씨는 틀립니다."-도현
"비윤이는 소윤이 누난데..."-비윤
비윤이 울쌍이 되어 꽃만 만지작 거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큰 눈망울이 도현을 향했다.
비윤과 눈이 마주치자 도현은 비윤을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조급해 하지 않기로 했다.
좀더 여유를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역시나 도현답게 욕구와 충동을 억제하였다.
도현은 그런 남자였다. 자신의 감정을 절제 할줄 아는 멋진 남자....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있는 도현에게 삐쳐서 비윤의 표정이 뾰루퉁 해졌다.
"제가 왜 그러는지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도현
"치.. 이유가 뭔데요?"-비윤
"비윤씨와 편해지면 내 마음도 마음데로 하지 못하고 더 깊이..."-도현
그때 새 한마리가 크게 울며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그 바람에 도현이 한 말을 자세히 듣지 못 했다.
"...하게 될까봐, 두려워서요."-도현
"못 들었어요. 다시 말해 주세요."-비윤
"비밀 입니다."-도현
도현은 큰 손으로 비윤의 머리를 툭툭 치고 저만치 걸어 갔다. 머리를 긁적이고 벌써 멀어진
도현을 따라잡기 위해 비윤이 달려 갔다.
"같이 가요!"-비윤
'우리.. 언젠가는 같은 곳을 바라 볼수 있을 까요..?'-도현
**
"이제 오면 어떡해. 하도 안와서 먼저 먹었잖아."-채이
식탁에 남겨진 음식을 보며 채이가 미안한 듯 괜히 젓가락을 식탁위에 내려 놓는다.
"우리가 늦게 왔는걸. 헤헤."-비윤
"알긴 아네."-로민
로민이 가운데에 팔짱을 끼고 앉아서 차가운 눈으로 비윤과 도현을 번갈아 보았다. 로민의 말투에
비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빨리 사과 하고 싶은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원과 소윤,
도현을 뺀 나머지 로민 패거리는 로민이 왜 이러는지, 무슨 영문인지 몰라하는 눈치 였다.
비윤이 나타난 뒤로 많은 것이 변했다고 느꼈는데 갑자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단 것이 이상했다.
비윤이 멀뚱 멀뚱한 눈으로 로민을 바라 보았다. 하오는 채이의 협박 아닌 협박으로 야채 죽을 먹고 있었다.
주위 상황에는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죽에만 시선을 두었다. 로민이 벌떡 일어나 부엌을 나가버리자
비윤도 따라나가려는데 도현이 비윤의 팔을 잡았다. 비윤이 놓아 달라는 포즈를 취했다.
"하루 종일 굶은 걸로 충분 해요.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몸이 안 좋아 질겁니다."-도현
도현의 딱 부러지는 말에 비윤이 의자에 앉았다. 밥을 먹어도 먹는게 아니였다. 신경은 온통
로민에게로 향해 있어서 밥이 코로 넘어 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정도 였다. 지켜보기만
하던 소윤이 휠체어를 조종해서 비윤의 곁으로 다가 왓다.
"형!!"-소윤
"어?왜, 왜?"-비윤
"무슨 생각 하길래 옆에서 말하는 것도 못 들어?"-소윤
"미안.."-비윤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비윤은 로민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윤이 턱을 괸채 비윤에게 말했다.
"그거 모르지. 형은 진짜 멋져."-소윤
도현은 옆에서 살짝 미소 지었고, 소윤의 말을 들은 지령이 식탁을 탕 치며 검지 손가락을 좌우로 움직였다.
"노노! 비윤이는 멋진게 아니라 예뻐! 그치 도현이형!!!"-지령(언제부터 반말을,,)
"네. 남자치고는 무척 예쁘죠."-도현
"다 이러기야?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딱 한명 있는데 그것도 아주 가까이 있는데, 난 신경도 안써?"-채이
채이가 골이나서 모두를 쏘아 보았다. 도현과 하오를 빼고 모두 킥킥 웃기 시작했다. 남자인
비윤이 자신보다 예쁜 것도 기분 나쁜데 비윤에게 지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화가 났다.
남자에게 질투를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 이였다. 채이는 화를 내며 지령을 데리고 부엌을 나갔다.
식사를 마친 비윤이 로민을 찾아 헤매였다. 로민은 별장 밖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비윤이 옆에 앉는 기척을 느껴도 비윤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로민아, 나한테 화 많이 났어?"-비윤
"너한테 화난 거 없어."-로민
"비윤이가 잘못 한거 있으면 말해. 다 고칠게."-비윤
"후.. 넌 착한거냐, 착해서 무식 한거냐."-로민
로민의 화는 이미 풀어진지 오래 였다. 다만 비윤을 보니 심술이나서 놀려주고 싶었다.
로민은 일어나서 불빛 하나 없는 달 빛만 은은하게 비치는 어두운 숲속 사이로 걸어 갔다.
비윤도 로민을 뒤 따라 갔다. 어떻게 해서든 로민의 화를 풀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윤은 화를 풀어라는 소리만 하고, 로민은 비윤을 무시하며 걸었다. 비윤이 간간히 돌맹이에
걸려 넘어 질뻔 했지만 그때마다 무신경이던 로민이 잡아주어 위기를 모면 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로민아, 달 좀 봐. 무지 예뻐."-비윤
로민이 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밝은 초승달 옆에는 많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서울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기분이 좋았지만 비윤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로민은 처음으로 기도 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번에도 기도 했다.
모두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기를 기도 하는게 아니라,
은비윤이... 은비윤이란 녀석만이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길 기도했다.
로민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듯 비윤도 기도 했다. 주위의 모든 이들이 행복해 지기를...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를 기도 했다. 로민과 비윤이 달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무언가 생각 났는지 로민이 비윤을 향해 말했다.
"별장은.. 어디로 가야 하는거냐."-로민
[036]
"별장? 우리가 저쪽에서 왔으니까.. 음..."-비윤
"...큰 일 이다."-로민
로민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무작정 걷긴 했지만 별장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은은한 달 빛으로는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데다 이미 별장과는 많이 멀어진 듯 했다.
그렇다고 이 곳에 한 번 와본 비윤이 길을 알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로민은 무책임한
자신의 행동이 후회되고,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직도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비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이곳 저곳을 둘러 보고 있다.
"은비윤, 내 뒤에서 바짝 따라와."-로민
"응!"-비윤
기억을 더듬으며 왔던 길을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로민. 그런 로민의 행동을 보고 비윤이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로민에게 물었다.
"우리 길 잃은 거야?"-비윤
"어."-로민
"애들이 걱정 할 텐데...(울먹)"-비윤
비윤이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여기 앉아. 헤헤."-비윤
"뭐하는 거냐."-로민
"여기에 있다가 아침이 되면 별장으로 돌아가자."-비윤
"이 곳은 위험해."-로민
"무작정 걷는 것 보다 이게 더 안전 할 지도 몰라."-비윤
로민은 확고한 비윤의 말에 어쩔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두 사람 뿐이였다.
로민의 심장도, 비윤의 심장도 쉴새 없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로민에게만 반응하는 비윤의 심장은
평온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반면 로민은 자신의 심장이 왜 뛰고 있는지도 모른채 커다란 돌에 몸을
기대었다. 로민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을 알게 되었는데 로민이 자신이 아닌 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 비윤은 시무룩 해졌다. 혼자서 사랑하기로 했지만 혼자 하는
사랑은 비윤의 생각보다 무척 힘들었다.
"로민아, 로민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비윤
"없어."-로민
"그럼 사랑하는 사람도 없어?"-비윤
"없어."-로민
로민은 문득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의문이 생겼다. 모두가 사랑에 빠져 웃고, 우는데 자신은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소윤과 노린의 아픈 사랑을 보며 사랑이 이런거라면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 했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는데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로민은 꽤나 심각해 졌다. 도데체 사랑이 무엇이길래 사람을 웃게 만들고, 울게 만드는지 궁금했다.
로민을 버린 그 여자는 항상 입버릇 처럼 로민에게 말했다. '로민아, 엄마가 사랑하는거 알지?'
사랑하는데 돌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로민은 엄마를 잊기 위해 엄마가 입버릇 처럼 말하던 사랑이란
단어도 잊어 버린것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일깨워 주는 역할은..
바로 비윤의 몫이다.
"그럼 지령이랑 하오랑 원이랑...다른 친구들은 사랑하지 않아?"-비윤
"친구들을 사랑하냐고?"-로민
"응! 비윤이는 모두를 사랑하는데. 헤헤."-비윤
로민이 마음을 열어준 것은 친구들 뿐이다. 그런데 친구들을 향한 이 마음이 사랑이라니,
로민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랑이 뭔데."-로민
"이론적으로는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심장이 쿵쾅 쿵쾅 뛰고, 왠지 얼굴도 빨개지는 것 같고,
없으면 그리워서 미칠 것 같은게 사랑이야."-비윤
"그게 사랑이라는 거냐."-로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말해."-비윤
로민은 비윤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런 증상은 요즘 들어 로민에게 자주 나타나고 있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비윤이 옆에 있으면 심장이 멋대로 뛰고, 괜히 얼굴까지 붉어 진다.
무엇보다도 아까처럼 비윤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립고 보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았다. 사랑..
로민은 비윤을 사랑한다고 생각 하지 않았다. 비윤은 자신과 같은 남자다.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있을수도 없는 일이였다. 갑자기 도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현은 남자인 비윤을 사랑하고 있었다.
로민의 머리가 혼란 스러웠다. 이 감정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너무나 복잡하고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 왔다. 로민이 괴로워 하며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자 비윤이 놀라서 물었다.
"왜그래?! 어디 아파?"-비윤
"으.. 됐어. 신경 꺼."-로민
"어떻게 신경을 안써. 어디가 아픈데? 응?"-비윤
"씨발, 나 좀 가만히 놔둬!!!"-로민
미칠듯한 고통에 로민이 소리를 질렀다. 비윤은 그대로 굳어서 로민을 바라본다. 별안간 로민이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 갔다. 비윤도 따라가려고 하는데,
"따라오면 죽는다."-로민
그 어느때보다도 차가운 얼굴, 차가운 눈빛, 차가운 말투가 비윤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한번도 본적없는 모습에 비윤의 가슴이 아팠다. 누군가가 찌르는 것도 아닌데 따끔 따끔 아팠다.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에, 로민이 화를 냈다는 사실에 울컥 눈물이 났다. 노린 때문에 힘들었어도
소윤이 다친 1년전 그 날 이후 한번도 울지 않은 비윤이였다. 하지만 로민의 한마디에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건 그만큼 비윤이 로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로민이 원망 스러울 뿐이였다. 앞으로 이렇게 혼자서 울어야 할 날이
많아 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비윤이 혼자 아파그게 사랑하는 것은 언젠가는 로민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 줄거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 했다. 비윤은 눈물을 소매로 닦고 힘차게 일어 났다.
잠깐 울었을 뿐인데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로민을 찾기 위해 로민이 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달려 가지 않으면 로민을 놓치게 되어 평생 로민을 보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앗!!"-비윤
비윤이 발을 삐끗 하고 넘어 졌다. 비윤의 몸이 비탈길로 기울었다. 몇 바퀴를 구르고 굴렀는지 모른다.
커다란 나무에 세게 부딪히고 나서야 비탈길로 내려가던 몸이 멈췄다. 몸 군데 군데에 큰 상처가 났고
피가 흘렀다. 오른쪽 발목이 아파서 움직일수가 없었다. 그냥 로민의 이름과 얼굴만 생각 났다.
"로민아. 로민아.."-비윤
힘겨운 비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모든것이 흐리 멍텅하게 보이고 곧이어 눈이 감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세상이 깜깜했다. 비윤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온 로민은 놀랄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이 곳에
앉아서 자신을 기다려야 할 비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자신을 찾으러 간것이 틀림 없었다.
로민은 두려 웠다. 행여 비윤이 다치기라도 했을 까봐 걱정이 되고 식은땀이 흘렀다. 머리가
아픈 것도 잊어 버릴 만큼 다급했다.
"은비윤!!! 은비윤!!!!"-로민
로민의 숨소리가 거칠어 졌다. 머리와 얼굴은 금새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비윤은 보이지 않았다. 비윤을 이대로 찾지 못한 다면 자신도 이 세상에 없는 것과 같았다.
아니, 비윤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로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머릿속의
혼란이 싹 사라졌다. 비윤이 남자이건 여자이건 상관이 없다. 이제 한 곳만 바라보기로 했다.
로민은 지금까지 비윤을 살아하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부정 하고 있던 것이다. 비윤을 처음
보았던 순간부터 순수한 그 모습에 이미 사랑에 빠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멀어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일 것이다. 성별에 얽매이지 않겠다.
은비윤을 사랑한다. 은비윤이란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 소윤처럼 가슴 아픈 사랑이 될지도 모른다.
평생 이루워 지지 못 할것이다. 하지만 유로민 19년 인생 처음으로 지금부터 무모한 사랑이란 것을 시작해 보려 한다.
그래서 비윤을 꼭 찾아야 한다. 늦게 나마 깨달은 감정을 이대로 멈출순 없다. 비윤을 찾아서
아프더라도 사랑을 해보고 싶다. 로민은 그 여자 처럼 되고 싶지 않다. 사랑이란 말을 거짓으로 한
여자처럼 살고 싶지 않다. 그 여자의 혈연 인것은 인정하지 않을수 없지만 그 여자와는 다르게
믿음과 사랑을 비윤에게 줄 것이다.
언젠가는 비윤에게 당당히 '사랑해' 라는 말도 해주고 싶었다. 비윤의 웃는 얼굴이 로민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빨리 찾아 달라는 듯 웃기만 하고 있었다. 로민이 작게 읊조렸다.
"병신.. 어디있냐."-로민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로민은 혹시 비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 갔다.
아래를 본 로민이 놀라서 비탈길을 내려 갔다. 분명 쓰러져 있는 사람은 비윤이였다.
로민도 몇바퀴를 구르고 나서야 비윤에게 다가 갈수 있었다. 로민의 몸에난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비윤이 많이 다친건 아니였지만 흐르는 피 때문에 꼭 피에 물들어 있는 것 같았다. 비윤의 손이
오른쪽 발목을 부여 잡고 있었다. 로민은 이대로 둬선 안된다는 생각에 비윤을 들쳐 맸다.
비윤의 작은 숨소리가 로민을 아프게 했다. 차라리 자신이 대신 아프고 싶었다. 아파하는 비윤을
보는 로민의 가슴이 찢어 질듯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쳤다는 것 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이제 비윤의 곁에서 비윤을 지켜줄 것이라고 다짐 했다. 소윤같은 사랑은 하지 않기로 다짐 한 것은
이미 잊어 버렸다. 로민은 힘들었지만 걷고 또 걸었다. 제발 비윤이 무사 하길 바라면서..
날이 밝아 져서야 로민은 별장을 찾을 수 있었다. 모두가 자지 않고 안절 부절 못한채 별장 앞에
서 있다가 로민과 비윤을 발견 했다. 도현이 가장 먼저 달려 왔다. 모두가 자초지종을 들어 볼
새도 없이 비윤과 로민의 다친 모습을 보고 빨리 별장 안으로 들어 갔다. 하오 때문에 약 상자를
가져온 도현이 비윤을 치료 하기 시작했다. 비윤을 치료 하는 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로민의 눈이 치료 받고 있는 비윤의 얼굴로만 향해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치료를 마친 도현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몸은 가벼운 타박상이고, 발목에 금이 갔습니다."-도현
"그래도 다행이다. 많이 안다쳐서.."-채이
도현이 긴 한숨을 쉬는 로민에게 주먹을 날렸다. 무방비 상태 였던 로민의 얼굴이 그대로 돌아 갔다.
"비윤씨를 다치게 한 죄값 입니다."-도현
말을 마친 도현은 방으로 들어 갔다. 비윤이 다친것이 로민 자신 때문 인 것은 알고 있지만 도현에게
맞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도현이 비윤을 좋아하던 사랑하던 로민이 상관 할 바가 아니였다.
화가 난 로민이 도현이 들어간 방으로 들어 가려 하는데 소윤이 입을 열었다.
"가지마. 비윤 형 없어졌다고 밤새 찾으러 다녔던 건 도현 형이니까."-소윤
"그래. 도현이 형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어쩔줄 몰라 하는데 친구인 우리 보다 더 걱정 하더라."-지령
비윤이 없어졌다는 소리에.. 로민과 함께 없어졌다는 것에 웃고 있던 도현의 표정이 굳어 졌었다.
비윤을 찾아 나섰지만 비윤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두려웠다. 그런데 사람을 걱정 시키게 해놓고
나타나선 비윤이 다쳐서 돌아오게 하다니 화가 나는 건 당연했다. 지금 까지 한번도 다른 사람을
때린 적이 없지만 로민의 얼굴은 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민이 도현의 방으로 들어 왔다. 로민의 뺨이 부어 올라 있었다. 도현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나가 주시죠."-도현
"나도 여기 들어 오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한마디만 하고 가지."-로민
도현의 여전히 로민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당신 은비윤 좋아 한다고 했지? 나는 사랑해. 이제 알았거든. 그러니까 한번 해보자고."-로민
쾅. 로민은 문이 부숴질 정도로 세개 닫고 나가 버렸다. 도현은 웃음만 나왔다.
"하.. 사랑한다구요? 드디어 깨달 았군요. 나도 기대 됩니다. 비윤씨가 누굴 선택할지..."-도현
도현과 로민, 두 사람은 비윤을 사랑한다. 도현은 비윤이 여자임을 알고 있고, 로민은 비윤을
여자임을 모른다. 로민이 남자인 비윤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랐다. 비윤이 남자던 여자던
상관 없다는 아까의 말은 그냥 해본 말이 였을 뿐인데, 로민의 힘든 결심이 도현을 놀라게 했다.
도현은 앞으로 일이 재밌어 질 거 같은 느낌을 받고 눈을 감았다.
"나도 밥 먹고 싶어!!!"-비윤
"안돼!"-채이
"그래~ 우리 달링 말 들어. 도현이 형이 안된다고 했잖아. 그리고 달링이 만든 죽은 진짜 맛있어."-지령
채이는 지령이 예쁘다는 듯 지령의 머리를 쓰다 듬어 주었다. 반면에 비윤은 상에 올려진 죽을
보며 울쌍을 지었다. 붕대가 감겨 있는 발목 때문에 걷는 것도 무척 힘이 들었다.
"안 먹을 거냐?"-로민
방금 씻고 나온 로민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비윤에게 물었다. 비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먹을래. 헤헤."-비윤
로민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비윤이 너무나 귀여워 보였다. 그 모습을 포착한 소윤과 원. 소윤은
비윤과 로민이 더 친해 졌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원은 하루 빨리 로민과 비윤이 행복해 지길 원했다.
그 날 오후,
모두가 별장 근처에 있는 계곡으로 놀러가고 비윤 혼자서 별장에 남아 있었다. 가기 싫다고 하는
하오와 로민까지 억지로 끌고 가버렸다. 비윤은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남은 것이다.
비윤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로민은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지령과 소윤의 힘은 이길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혼자 있을 시간이 생긴 비윤이 목욕을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 갔다. 기숙사에서는 항상
마음을 조리며 했기 때문에 개운하게 하지 못했었다. 로민패거리가 물놀이를 갔으니까 오래 있다
들어 올거란 생각에 마음 놓고 목욕을 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누군가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채이였다. 계곡에는 화장실이 없었고, 그렇다고 물 속에서 볼 일을 볼수 없었기에
별장까지 왔던 것이다. 급한 마음에 안에 비윤이 있는 지도 모르고 문을 열어 버렸다.
채이도 놀라고 비윤도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이내 채이가
"미안해!"-채이
라고 말한 뒤 문을 닫았다. 비윤은 채이가 제발 아무것도 보지 못했 길 바랬다.
채이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비윤을 자세히 보았다.
"은비윤.. 너!!!! ... 여자?"-채이
[037]
채이의 눈길이 다시 비윤의 몸으로 향하자 비윤이 얼른 몸을 가렸다.
자신이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여 확인 해보기 위해 문을 열었던 채이. 여자의 직감이란 실로 대단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문을 열수 있었던 채이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만약 비윤이 정말 남자 였다면
화가 풀릴때까지 사과할 작정 이였다. 하지만 사과 할 새도 없이 비윤이 여자라는 사실에 놀라서 굳어 있을 뿐이였다.
비윤이 수건을 몸에 걸치고 채이에게 다가갔다. 채이는 자신에게 다가 올수록 더욱 확연이 드러나는 비윤의
바디라인을 보고 여자가 아님을 부정 할 수 없었다. 남자라고 인식되었던 비윤은 채이보다도 훨씬
예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상이였다. 비윤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비윤이 옷을 입고 난 뒤 채이와 마주 보고 앉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하나 눈치를 보다
이내 채이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건지 말해 보시죠?"-채이
"그게.."-비윤
비윤은 채이에게 남장을 하게 된 이유를 말해야 할지 고민 되었다. 그렇다고 로민처럼 최면으로
순간의 기억을 지우고 싶진 않았다. 채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빨리 말해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채이도 머리가 복잡했다. 비윤은 분명 자신이 사귀자고 했다가 거절 당한 사람이다.(앞 내용에 나와 있습니다.)
잠깐이지만 한눈에 반했던 사람이 남장을 한 여자라면 누구라도 혼란 스러울 것이다. 비윤은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문득 로민이 자신을 믿어 주었던 그 날이 떠올랐다. 모두가 보이는 것을
진실로 가정하고 비윤을 손가락질 할때 로민만이 아무것도 듣지 않고 비윤을 믿어 주었다.
로민에게서 믿음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 로민처럼 채이를 믿어 보려 한다. 채이는 친구니까
믿어 보기로 했다. 그때의 로민처럼 말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비윤이 고개를 들고 채이와 눈을 마주쳤다.
비윤의 입에서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든 것을 들은 채이가 안그래도 큰 눈이 더 커져서 입이 떠억 하고 벌어졌다.
"그..그럼.. 재산을 물려 받기 위해 남장을 하는 거란 말이야?"-채이
"응. 헤헤."-비윤
"와~ 멋지다!"-채이
"멋져? 하나도 안 멋져.(울먹)"-비윤
채이가 비윤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남자인 널 질투한게 부끄러워. 그래도 같은 여자라서 다행이야."-채이
드디어 비윤에게 이채이라는 진정한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이다. 자신을 남자로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수다도 떨수 있는 같은 성을 지닌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이다. 놀이동산 이후로 가지고 싶었던 친구가
생겨서 비윤은 너무나 기뻤다. 채이도 마찬가지 였다. 전학온 뒤 친구라고는 예쁜 비윤과 무뚝뚝한
로민패거리 뿐이여서 울적 했었다. 하지만 비윤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앞으로의 학교 생활이
즐거울 것 같고 비윤과 많이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비윤이 새끼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비밀 꼭 지켜 줘야돼."-비윤
그 말에 채이가 비윤의 머리를 살짝 밀고는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채이와 비윤의 자그마한 새끼 손가락이 얽혔다.
"당연하지! 내 입이 얼마나 무거 운데~"-채이
"고마워."-비윤
"그 대신! 우리 지령이 여보 넘보면 죽어!"-채이
"에에? 지령이는 친구일 뿐이야.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 다면.. 다면.."-비윤
비윤이 말을 더듬으며 얼버무리려 하자 채이가 비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 보았다.
"뭐야?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좋아하는 사람 있어?"-채이
"비.. 비윤이 화장실 갈래."-비윤
한쪽 발이 불편한 비윤을 채이가 놓칠리 없었다. 일어나려는 비윤을 다시 자신의 앞으로 앉힌다.
"빨리 말해!"-채이
"아무것도 아니야. 비윤이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울먹)"-비윤
"말 안하면 여자인거 확 불어 버린다?"-채이
"채이 너!"-비윤
"풋. 장난이야. 그러니까 말 해봐."-채이
비윤이 손을 꼼지락 거리면서 뜸을 들였다. 로민을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다. 사랑에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혼자하는 사랑이 바보 같아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채이는 비윤의 등을 손바닥으로 세개 때렸다.
찰싹.
"아야. 아파 채이야."-비윤
"으이구, 넌 곱게 자라기만 해서 친구도 없었나 보다. 친구끼리는 서로의 비밀을 터 놓고 말하는거야.
여자들은 이런걸 좋아하거든."-채이
비윤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에 홍조를 띄며 말했다.
"실은 비윤이가 로민이를 좋아해."-비윤
"유로민을 좋아한다고? 사랑해?"-채이
끄덕 끄덕.
"암~ 그렇고 말고. 유로민 매력 덩어리지. 안 좋아하면 그게 사람인가. 나도 이해해.
그게 뭐가 부끄럽다고 쩔쩔매니~"-채이
예상치 못한 채이의 발언에 비윤은 조금이나마 속이 후련했다. 마음에만 담고 있던 말을 누군가에게
했다는 것이 이렇게 편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자 보는 눈이 높은 채이가 남자를 칭찬하는 것은
꽤나 보기 드문 일이였다. 그만큼 로민은 모든 여자를 사로잡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채이가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유로민은 널 남자로 알고 있잖아."-채이
비윤의 정곡을 찔러버렸다. 채이는 비윤의 표정을 잠깐 살피다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실망 할거 없어. 남자 인 널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채이
"남자인... 나를?"-비윤
"내가 도와 줄테니까 걱정 하지마."-채이
"난.. 그냥 혼자서만 사랑할래."-비윤
소윤이 아파하던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루워 지지 못할 사랑은 하기 싫었다. 채이는 그런
비윤을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본다.
"바보야.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는게 어디있어? 이채이 98전 98승 0패 사전에 포기란 없어."-채이
"99전 98승 1패잖아."-비윤
"넌 여자니까 제외야!"-채이
장난치며 말 했지만 비윤은 채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힘이 되었다. 혼자 고민 할 때 보다 더욱
용기가 났다.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는건 있을수 없는 일이다. 지령과 채이처럼 둘만의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비윤이 채이의 손을 잡았다.
"정말 고마워 채이야.(싱긋)"-비윤
채이가 비윤의 얼굴을 넋놓고 바라 보았다.
"아무리 니가 여자라도, 그 미소는 지령이 보다 멋있어.."-채이
비윤이 더 예쁘게 미소짓자 채이도 환하게 웃었다. 서로를 보고 웃던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일어나서 로민패거리가 있는 계곡으로 향했다. 채이의 부축을 받아 걸어도 발목이 아파올 만도 한데
비윤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걸었다.
비윤과 채이가 계곡에 도착 했을 땐,
소윤이 휠체어에 앉아 도현이 잡은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었고, 도현은 혼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지령은 윗 옷을 벗은 채 정말 바보처럼 폭포 물줄기를 맞으며 두 손 모아 수양을 쌓고 있었고
멀리서 하오가 아직도 무표정인 상태로 그 모습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로민은 기숙사 방 만큼 커다란 돌 위에서 누워서 비윤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중 이였다.
원은 그런 로민의 얼굴을 책으로 덮어 주고 있었다. 당연히 비윤의 눈에 제일 먼저 띈 사람은 로민이였다.
"로민아~ 뭐해?"-비윤
비윤의 목소리가 들리자 로민이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 났다. 로민이 비윤에게 마음데로 반응하는 자신의
몸을 탓하고 있는데 도현이 비윤이 있는 쪽으로 다가 갔다. 로민의 시선이 도현에게 꽃혔다.
채이는 이미 지령에게로 달려가 버린지 오래였다.
"움직이지 말고 있어야 뼈가 잘 붙는데 나오시면 어떡해요."-도현
"그래도 나오고 싶은 걸요. 헤헤."-비윤
"어쩔수 없군요. 오늘만 허락하겠습니다."-도현
"고마워요.(싱긋)"-비윤
언제 돌 위에서 내려 왔는지 로민이 도현에게 웃어보이는 비윤의 손목을 잡아 끌고 갔다.
도현은 그런 로민을 주의 깊게 바라 보았다.
'게임 시작이군요.'
비윤이 도현을 향해 웃지 않았으면 했다. 로민은 아무에게나 베시시 웃는 비윤을 보면 이유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이 자신의 질투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말이다.
"로, 로민아. 나 다..다리."-비윤
비윤을 끌고 가던 로민이 아차 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비윤을 쳐다보았다.
"괜찮아."-비윤
말과 다르게 비윤의 표정은 말이 아니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파하는 비윤을 보자니 로민은 속이 상했다.
로민이 비윤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비윤은 로민의 등을 보기만 할 뿐 미동 없이 서있었다.
"엎히라고."-로민
"어?"-비윤
"엎혀. 다리 아프잖아."-로민
로민의 협박 아닌 협박에 비윤이 로민의 등에 엎혔다. 남자가 남자의 등에 엎힌다는 것.
평범한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이였다.
로민에게 뛰고 있는 비윤의 심장이 느껴졌다. 로민과 마찬가지로 비윤의 심장도 살아있는 것 처럼
뛰고 있었다. 로민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한번 마음 먹은 일은 죽는 한이 있어도 바꾸지 않는
성격의 로민인지라 비윤을 사랑하고 있는 지금 비윤의 성별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남자를 사랑해서
겪게 되는 고통 따위는 이겨 낼 수 있었다. 다만 로민이 알고 싶은 것은 자신을 향한 비윤의
마음이였다. 로민은 친구들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어디 가는 거야?"-비윤
"말 하지마. 무거워."-로민
로민의 차가운 말투가 비윤에게는 장난스러운 말로 들리기만 했다. 5분 정도 걸어서 로민이 멈춰서자
비윤이 탄성을 질렀다.
"우와... 예쁘다."-비윤
그곳은 하얀 조약돌로 가득해서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 이였다. 비윤이 조약돌 하나를
주워 만지작 거렸다. 너무 하얗고 예뻐서 만지면 깨져버릴 것 같았다. 로민은 비윤이 좋아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 보았다.
"여기 어떻게 알았어?"-비윤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 했어."-로민
"이따 다 같이 또 오자."-비윤
"싫어."-로민
"왜?"-비윤
로민이 비윤을 외면했다. 이 곳은 비윤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장소로 기억 하고 싶었다.
어쩌면 로민은 보기와는 다른 로맨틱한 남자가 아닐까? 비윤이 자꾸 이유를 묻자 로민은 귀가
울리는 것을 느끼고 비윤을 엎었다.
**
돌맹이를 던지며 지루해 하던 소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비윤을 향해 말했다.
"둘이서만 어디 갔다와? 또 길 잃어 버리면 어쩌려고."-소윤
소윤은 비윤과 로민이 자꾸 붙어있지 않길 원했다. 빨리 도현과의 사랑이 싹트길 바랄 뿐이였다.
어제 일도 그렇고 붙어있으면 정이 들어서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을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비윤, 로민이 서로를 사랑하다는 것을 알면 소윤도 더이상 신경쓰지 못할 것이다.
비윤은 별장으로 돌아가서 로민이 자신에게 멋진 곳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을 채이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렇게 밝은데 길을 왜 잃어 버려. 나 진짜 좋은데 갔다 왔어."-비윤
"동생은 버리고 친구만 찾는다 이거지?"-소윤
소윤이 삐친척 하고는 휠체어를 조종하여 비윤에게서 멀어지면 비윤은 소윤을 달래주기 위해 소윤을
따라 달려 간다. 다정한 형제의 모습에 부러움을 느낀 로민은 멍하니 앉아 있는 하오에게 다가 갔다.
폭포수를 맞으면 피부가 좋아진다는 지령의 거짓말을 믿고 지령과 함께 폭포수를 맞는 채이.
지령과 채이를 보고 있던 하오가 로민의 기척을 느끼고 잠깐 로민에게 시선을 두다가 이내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
"아직도 이러고 있냐?"-로민
하오가 입술을 깨물었다.
"혼자 이겨 낼수 있었다면 벌써 이겨 냈겠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 볼 생각은 없다.
내가 은비윤한테 말 했던거 기억나?"-로민
그제서야 하오가 로민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로민의 눈과 하오의 눈이 마주쳤다.
하오는 눈을 피하지 않고 모르겠다는 듯이 로민이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
"미칠듯이 괴로울땐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었는데."-로민
[038]
잠시 뿐이였지만 하오의 동공이 커졌다. 지금까지 혼자서 괴로워했지 누군가에게 기대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 놓고 모두를 걱정하게 만든 자신이, 너무나 바보 같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은 말 할
용기가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인것이 부끄러운 데다, 창피하고, 무엇보다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아무 반응 없는 하오를 보며 로민이 미소 지어 보였다. 친구들에게만 가끔 보이는
로민의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하오 역시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 짐을
느끼고 다시 지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로민은 보채지 않기로 했다. 이번엔 정말 하오가 스스로 말
해 줄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하오가 작은 돌맹이를 집어서 물속으로 던진다. 붕대가 감긴 왼쪽 손목은 주머니에 깊숙히 넣어 버렸다.
웃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팔목이 아려왔다. 아프지 않게 약도 발랐는데 멀리서 즐겁게 놀고
있는 소윤과 비윤, 지령과 채이를 보고 있자니 손목이 아렸다. 씁쓸하게 웃을수 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너무나 그리운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보여서 아직까지도 자신의 머릿속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서 잊으려고 해도 결코 잊을수 없어서 울컥하는 마음에 돌맹이를 더 멀리 던졌다.
"그거 모르지."-로민
로민의 물음에도 하오의 대답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럴줄 알았다는 듯 로민은 하오가 듣고 있는지
확인하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한번도 말 한 적 없는거 같은데, 너희들 있어서 난 하루 하루를 즐겁게 살고 있다."-로민
로민은 처음으로 하오에게 자신의 속 마음을 말해 주었다. 친구라는 틀 안에서 항상 함께 다녔지만 서로의
속마음 같은건 잘 알고 있진 않았다. 비윤으로 인해 변해가는 로민. 이제 하오는 로민에게 소중한 사람들
중 한명이 되어 버렸다. 하오는 로민의 말에 귀 기울였다. 로민이 구름한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넌 왜 살아?"-로민
돌맹이를 집으려던 하오의 손이 멈칫했다.
"동아리방에서 니가 나한테 처음으로 건넨 말이 이거 였잖아."-로민
끄덕끄덕.
로민이 갑자기 옛 일에 대한 기억을 꺼냈는지 하오는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로민은 항상 속 마음을
읽을수 없는 표정만 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어떻게 대답 했는지도 기억나냐?"-로민
하오가 다시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던 로민이 별안간 뒤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왔다. 더운 바람이 아니라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따뜻한 바람이 로민과 하오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근데 난 내가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나. 쿡쿡. 나도 내가 병신같은 거 아는데.
지금은 그때와,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로민
로민은 차가운 표정과 차가운 말투로 장난끼 있는 얼굴의 하오에게 이렇게 대답했었다.
'죽기 위해 살아.'
아직까지 생생히 기억나는 로민의 모습을 하오는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자신보다 더 슬픈 눈을 하고
있었기에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 나왔었다. 살곳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던 하오에게 로민은 새로웠다.
어딘가 모르게 공통점이 있을 것 같아서 친구가 되었다. 물론 하오 혼자 열심히 쫓아 다닌거지만 말이다.
3년 사이 많은 것이 변한 로민이 지금은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 했다. 로민은 더러운 이 세상을
왜 살고 있는 것일까?
"별거 없어. 그냥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겨서 죽고 싶지 않은 것 뿐이다."-로민
로민이 소리 내어 웃었다. 순간적으로 비윤의 얼굴이 떠올라서 웃음이 났다. 꼭 해보고 싶은일은
바로 비윤을 사랑하는 것이였다. 하늘에 비윤의 얼굴 수십개가 둥실 둥실 떠다녔다. 손을 뻗고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가 않았다. 그럴때마다 비윤의 얼굴은 사라지기 일쑤 였다. 기분좋게 웃는 로민과 달리
아무것도 모르는 하오가 로민이 꼭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을 쯤 원이 다가 왔다.
"나 빼고 둘이서만 비밀 얘기 하는거야?"-원
"그럴리가. 쿡쿡."-로민
원이 부드럽게 웃고는 로민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경은 쓰지 않았지만 여전히 원의 옆구리엔 두꺼운 책
한권이 끼어 있었다. 누가 가을을 천고마비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는가. 원에게 있어서 독서의 계절을
꼽을수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쉬지 않고 책만 읽어서 일년동안 읽은 책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오늘도 책과 사랑에 빠지셨군."-로민
"내가 책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책이 날 사랑하는거야."-원
원의 말에 로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원이 콧노래가 자장가 처럼 들려 왔다.
하오를 빼면 모두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 이거 안해!!"-지령
"가끔은 패배를 인정할 줄도 알아야돼."-원
"그래도 난 이런거 하기 싫단 말이야!"-지령
지령이 고무장갑을 바닥에 내팽겨 쳤다. 도현이 잡은 물고기로 해물탕을 해먹고 난뒤 설거지 할
사람을 정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했다. 모두가 주먹을 냈을때 당당하게 가위를 낸 지령만이 설거지를 해야했다.
"나는 손에 물 묻히는거 싫어!"-지령
"고무장갑 끼고 하는데 손에 물이 묻을리 없잖아."-원
"원이, 너어!!"-지령
지령은 원을 쏘아보더니 바닥에 있는 고무장갑을 주워서 손에 꼈다. 거기다 앞치마를 두른 지령의 모습이란
말로 표현 할 수 없이 너무나 귀여웠다. 지령이 인상을 쓰며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낭군이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도 채이는 도현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채이의 웃음 소리가 크게 들려
올 수록 지령의 손놀림도 빨라져 갔다. 설거지가 다 끝나갈 무렵 채이가 부엌으로 들어 왔다.
"지령이 여보는 살림도 잘해서 채이 고생 안시키겠다. 호호."-채이
"됐어. 나 삐쳤어."-지령
"왜? 내가 뭐 잘못 했어?"-채이
"응. 많이 잘못했어. 도현이 형이랑 사귀어 버려! 흥."-지령
"도현 오빠랑 얘기 했다고 삐친거야?"-채이
지령이 채이의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났나 보다. 채이가 지령에게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렸다. 하지만 지령의 화는 좀처럼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채이는 지령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시끄러운 닭살 커플이 사라지고 나니 별장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도현이 약상자를 가져와서 하오의 상처와 비윤의 발목을 살펴 보았다. 로민은 도현이 비윤을 터치할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서 미칠지경이였다. 소윤과 원은 퍼즐 가로 세로를 채우기 위해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오늘 같이 재미있게 놀아 본 적은 없었던것 같아요."-도현
"저두요. 헤헤."-비윤
"쪼개지마. 은비윤."-로민
로민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비윤이 어색하게 웃었다. 도현은 자신과 비윤이 옆에 있기만 해도 질투의
눈빛을 보이는 로민이 점점 흥미로웠다. 로민이 질투를 하면 할수록 도현도 비윤을 더욱 가지고 싶어 졌다.
"아, 이거 하나를 모르겠네."-소윤
"그러게. 이것만 풀면 다 채우는건데."-원
원과 소윤이 못 채운 가로세로 퍼즐을 들고 안타까워 했다. 비윤 몰래 서로 눈싸움을 하고 있던
도현, 로민은 그들을 신경쓸 틈이 없었다. 말이 눈 싸움이지 일종의 기선 제압이였다. 비윤이 다리를
절뚝이며 소윤에게 다가 갔다.
"문제가 뭔데?"-비윤
"원이 형도 못 푼건데 형이 풀수 있겠어?"-소윤
"응응! 풀수 있어!"-비윤
소윤이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문제를 읽었다.
"언제나 사람의 슬픔과 고통, 괴로움이 섞여 나오는 것은?"-소윤(과연 누가 낸 문제일까.)
비윤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크게 외쳤다.
"눈물!"-비윤
비윤의 대답에 하오가 놀란 눈으로 비윤을 바라 보았다.
"하하하하. 틀렸어~ 이건 '수' 로 시작하는 단어야."-소윤
"이거 눈물 맞는데.(울먹)"-비윤
"형은 바보래요. 킥킥."-소윤
"비윤이 바보 아니야!"-비윤
소윤은 비윤을 놀리는 것에 재미를 붙였는지 쉴새 없이 놀리기 시작했다. 비윤이 그런 소윤을 혼내주려고
아픈 발목을 잡으며 일어나려는데 하오가 비윤에게 다가오며 중얼거렸다.
"여진아... 여진아. 여진아."-하오
"하오야? 왜, 왜그래?"-비윤
모두의 시선이 하오에게로 향했다. 하오는 비윤의 얼굴을 자신의 두손으로 감싸쥐고 한참을 바라보다
이내 비윤을 자신의 품안에 안았다. 숨을 죽이고 하오의 행동을 지켜 보았다. 비윤은 하오에게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쳤지만 하오는 놓아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하오는 비윤을 꽈악 안고 있었다.
하오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눈물 방울이 떨어 질듯 말듯 속눈썹에 대롱 대롱 매달려 있었다.
"여진아. 여진아..."-하오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자 눈물 한방울이 투욱 하고 비윤의 어깨 위로 떨어 졌다. 30분은 훨씬 넘은 것 같다.
하오의 눈물로 비윤의 어깨는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뭔가가 스스르 빠져나간 것 처럼 하오는 비윤을 품에
안은채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들어?"-비윤
처음엔 흐릿하게 보이던 물체가 점점 선명해 지면서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비윤이란 것을 깨달았다.
하오는 머리가 아파옴을 느끼고는 손으로 아픈 머리를 매만지며 반쯤 일어나 앉았다.
비윤의 뒤에는 친구들과 도현이 하오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비윤을 안고서 정신을 잃었었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벌써 아침이 된 모양이였다. 하오는 닮지는 않았지만 비윤과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여서 너무나 괴로웠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죽을만큼..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어."-하오
하오의 시선이 비윤의 얼굴로 향했다. 순수함이 비윤과 너무나도 닮아서 마치 그 사람과 있는 것 같았다.
모두 하오가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
[하오야, 나 사랑해?]
[내가 널 왜 사랑해.]
[얼만큼 사랑하는데? 얼마나 사랑하는데?]
[아니라니까. 사랑은 무슨.. 오빠라고 불러.]
[나는 하오를 사랑한단 말이야.]
[피식, 바보.]
[에이, 나 삐친다. 그거 말구. 내가 정말 듣고 싶은 말 알잖아. 빨리 말해봐~]
[..후... 니가 날 사랑하는 만큼... 나도 널 사랑해. 됐어?]
[히~ 나도 하오 오빠 사랑해요~]
우린 아직 어린데.. 우리 사랑은 이루어 지지 못할 것 같은데..
[하오야, 하오 오빠야. 우리 그냥 이대로 떠나 버릴래?]
- 하오 번외
"안녕? 내 이름은 진여진이야."-여진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케 하는 일자 앞머리와 그에 어울리게 허리까지 닿은 검은 생머리.
해맑게 웃고 있는 소녀가 하오에게 손을 내민다. 하오는 도도해 보이기도 하고, 귀여워 보이기도 한
여진의 등장에 놀라서 굳어 있었다. 여린은 같은 아버지 다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하오의 여동생이다.
그때 그들의 나이 고작 16살이였다. 하오가 생일이 더 빨랐기에 여린은 하오의 동생이 되어 버렸다.
틈만 나면 여자를 바꿔치기 했던 하오의 아버지 진우현은 젊은 시절부터 알아주는 바람둥이였다.
하지만 16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아니 자신이 버렸던 수많은 여자 중 한 여자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우진의 다리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제발 우리 여진이를 맡아줘요. 당신 딸이니까 맡아줘요. 나... 이제 곧 죽을 몸이니까요."
그녀는 암이였다. 길어야 한달이라는 시간이 남았다고 말하는 여자.
아직도 여자를 하루 걸러 바꾸는건 여전 했지만 사랑하지 않았던 여자는 없다. 이 여자 역시 사랑했던 여자였다.
우현은 어쩔수 없이 여진을 받아 주었다.
"인사해라."
".. 진.. 하오다."-하오
"너 진짜 잘생겼다. 아, 오빠였지."-여진
여진은 깜빡 잊었다는 듯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아직까지 내밀고 있던 자신의 다른 손을 빤히 보았다.
"무안해 지려고 하는데, 계속 이렇게 있어야 돼?"-여진
"큭큭."-하오
하오가 여진의 가느다랗고 예쁜 손을 잡았다. 그제서야 여진이 미소지었다.
"오빠, 나 진짜 진짜 착한 동생 할게."-여진
갑자기 생겨버린 동생 때문에 몇일이 지나도 하오는 모든것이 어색했지만 여진은 새로운 환경에
너무나도 빨리 적응해 버렸다. 새 교복이 마음에 드는지 여진은 학교에 가는 내내 빙글 빙글 돌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오빠랑 같은반 됐으면 좋겠다. 그치?"-여진
"내가 왜 오빠야. 나이도 같은데. 편하게 불러."-하오
"하지만 아빠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는걸."-여진
"무시해."-하오
하오가 빠르게 걸어가자 여진이 하오의 뒤를 쫓아 간다.
"학교 진짜 크다."-여진
서울에서 꽤나 유명한 명문 중학교 였기 때문에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완벽이라는
두 글자를 추구했다. 교문을 지나치는 하오를 부르는 목소리 하나.
"진하오 이 자식 복장 불량에 이름표도 없고, 신발은 그게 뭐야. 아직도 머리 색 안 풀었어?
검정색으로 염색하라고 했잖아! 어쭈, 피어싱 까지 하셨네?"
명문 중학교였지만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돈을 좋아하는 속물이였다.
학주는 들고 있던 막대기로 하오의 머리를 툭툭 건들였다. 하오는 반항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학주를 노려 보았다.
아니, 말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였다. 자신도 쓰레기일 뿐이면서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설교 하는 모습이란
정말 구역질이 났다.
"어디서 고개를 빳빳히 들고 있어! 눈 안깔아? 니가 이러고 다니는게 우리 학교 먹칠 하는거야!"
"왜 우리 오빠한테 그래요!"-여진
학주의 시선이 여진에게로 향했다. 하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답답한 마음에 여진이 나선것이다.
"이건 또 뭐야."
"오빠 때리지 마세요. 자꾸 때리면 경찰에 신고할 거에요!"-여진
학주는 기가 차다는 눈빛으로 여진을 바라 보았다.
"허, 그 오빠에 그 동생이군. 어디서 이런 것들이 학교에 들어와선. 쯧쯧."
여진의 표정이 굳어 졌다. 그와 동시에 하오가 학주의 넥타이를 잡아 당겼다.
학주의 얼굴과 하오의 얼굴이 가까워 졌다.
"내 욕 하는건 참겠는데, 내 동생 욕하는 건 못참아. 또 다시 내 동생 욕하면
내가 퇴학을 당하던 니가 사표를 쓰던 둘 중 하나는 학교에서 나가게 될거야."-하오
"뭐.. 뭐야? 이녀석 너 거기 안서?!!"
하오는 여진의 손을 잡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뭐가 그리 좋은지 여진은 쉴새 없이 웃고 있었다.
"왜 웃어?"-하오
"그냥 오빠랑 있는게 좋아서."-여진
수줍게 말하는 여진의 볼이 약간 붉어 졌다. 하오는 그런 여진의 머리를 헝클였다.
"뭐야, 머리 망가졌잖아. 치."-여진
여린이 화를 내자 하오가 재미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여진의 머리를 헝클이고 뒤 돌아 걸어 갔다.
그리고 여진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무실 갔다와라. 참고로 난 2반이다."-하오
결국 하오와 여진은 같은 반이 되었다. 여진에게 하오는 무뚝뚝 하지만 속은 다른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하오가 더 좋은지도 모른다. 또한 하오에게 여진은 엄마같은 사람이였다. 바람둥이 아버지는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중 가장 사랑했던 여자의 아이인 하오를 아들로 받아 들였다. 물론 하오의 어머니라고
버려지지 않을수 없었다. 하오가 태어나고 몇 년 뒤 그 어떤 누구보다 처참하게 버려졌다. 아버지는 여자를
좋아했기에 여자 버리는 것 쯤은 매일 밥을 먹는 것처럼 쉬운 일이였다. 아버지 같은 삶은 절대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여자를 물건 취급하는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자라온 세월이 벌써 16년이다. 그런 하오에게 나타난 여진은 어머니 같이 포근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맑고, 순수함이 있어서 좋았다. 처음에 동생으로 받아들 이는 것 조차 힘겨웠지만
이제 여진은 하오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어머니였다.
화창한 여름의 어느날,
하오의 집에선 한 남자의 커다란 목소리만이 들려온다.
"너 뭐하는 녀석이야! 선생을 때렸다니 말이 돼?!!"
아버지 우현이 크게 소리치자 무릎을 꿇고 바닥만 보고 있던 하오가 고개를 들고 우현을 응시 했다.
"선생이 여진이를 욕 했어."-하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많은 여자들이 날 뭘로 보겠어!!! 자식 놈 하나 제대로 못키운 홀애비로 볼거 아니야?!!"
자신의 딸의 일인데도 이 상황에서까지 여자를 신경쓴다는 것에 하오는 화가 나서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지금까지 속으로만 참아 왔다. 이런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는데도 꿋꿋히 참아왔다.
그래도 아버지니까, 자신을 태어날수 있게 해준 아버지니까 참을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이기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하오가 생각한 그 이상으로 이기적이고, 선생들과 마찬가지로
구역질 나는 존재 였다. 쉬지 않고 주먹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우현은 그대로 쇼파에 앉아 한손으로 관자돌이만 누르고 있었다. 하오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한숨만 쉬기에 바빴다.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여진이 하오에게 달려와 하오를 말렸다.
"오빠 그만해! 피 나잖아!"-여진
"놔."-하오
"그만해!!"-여진
하오가 여진을 뿌리치고 우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우현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아들이 아버지의 멱살을 잡았다는 것에 화가 나지도 않는지 우현은 한심하단 눈빛으로 하오를 바라본다.
"당신이 내 아버지 라는게 부끄럽고 너무 부끄러워서 차라리 죽고 싶다."-하오
"그럼 죽어."
단호한 우현의 한마디.
그 한마디에 하오의 눈빛이 차가워 졌다. 아버지 진우현, 그는 여자를 좋아하는 더러운 늑대에 불과 했다.
"안 그래도 죽으러 가려던 참이 였어. 오늘로 우리 인연은 끝입니다. 안녕히계세요 아.버.지."-하오
잡고 있던 멱살을 거칠게 놓아준 뒤, 어깨를 툭 치고 지나치는 하오에게 우현이 말했다.
"엄마가 보고 싶을텐데. 한번도 보고싶단 말을 하지 않더구나."
"나한텐 당신의 하룻밤 상대인 여자들이 모두 엄마 아닌가."-하오
우현은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르게 정리하고 말을 이어갔다.
"엄마가 보고 싶다면 가봐. 어디있는지 가리켜 줄테니."
우현은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하오에게 쥐어준다. 우현이 건네준 종이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당신 엄마가 어디 있는 줄 알면서도 모른척 한거야? 하, 정말 최악이다."-하오
하오의 손에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 져서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하오가 집을 나가려는데 또다시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난 처음부터 이렇게 살아와서 이젠... 멈출수가 없는 거다."
"그건 구차한 변명일 뿐이야. 난 당신과 틀려."-하오
"...넌... 나 진우현의 아들이니까 .."
우현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하오는 집을 나가 버렸다.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우현이 중얼 거렸다.
"나처럼.. 살지 마라."
두 사람을 지켜 보고 있기만 한 여진이 얼른 하오를 따라 나갔다. 벌써 저만치 멀어진 하오를 간신히
따라잡았다. 하오는 여진에게 시선 조차 주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여진은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하오의 눈치만 보았다. 하오와 여진이 향한 곳은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커다란 병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종이에 쓰여진 508호 라는 병실에 다다를수록 하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노크 할 필요도 없었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간 병실에는 중년의 여성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산소 호흡기에 의존한채 눈도 뜨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박해윤. 그녀의 이름이다.
보기만 해도 하오와 닮았다는 것이 눈에 확연히 들어 왔다. 의사에게 가보지 않아도 알수 있다.
하오가 16년 만에 만난 반가운 어머니는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우현에게 버림 받고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해윤은 자살을 하기 위해 도로로 뛰어 들었다. 하지만 해윤에게 죽음은 찾아 오지 않았다.
그대신 더 괴로운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다.
16년동안 우현은 해윤에 대한 모든 병원비를 대주고 간병인까지 붙여서 해윤을 돌보아 왔다. 식물인간이 되었지만
우현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는 여자가 될순 있었다. 우현은 해윤을 정말 사랑했던 것이다.
하오가 병실을 뛰쳐 나왔다. 여진이 하오를 쫓아 갔을 땐 하오는 슬프게 웃고 있었다. 눈에서 눈물이
나는데 입은 웃었다. 엄마를 보는게 좋아서 웃었고, 엄마를 보는게 슬퍼서 울었다.
여진이 하오를 안아 주었다. 괴로워 하는 하오보다 여진의 가슴이 더 아팠다. 차라리 하오 대신
아프고 싶었다. 하오를 지켜주고 싶었다.
"사랑해, 오빠."-여진
**
"오빠 괜찮아?"-여진
"어."-하오
"남자가 울긴 왜 울어. 솔직히 말해봐. 지금 창피해서 죽을 것 같지?"-여진
"어. 창피해."-하오
여진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예쁘게 웃었다. 하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슬픔과 고통, 괴로움이 섞여 나오는 게 뭔지 알아?"-여진
"몰라."-하오
"눈물이야. 눈물에선 슬픔과 고통, 괴로움이 모두 섞여서 나와. 오빠의 슬픔이 눈물을 타고 나왔잖아."-여진
"억지로 끼워 맞추긴.."-하오
하오와 나란히 앉아 있던 여진이 벌떡 일어나서 하오의 뒤로 갔다. 그리고 하오를 안아주었다.
"뭐하는 짓이야."-하오
"히~ 나 오빠 사랑하나봐. 아니, 사랑해."-여진
"장난 하지마."-하오
"장난 아니야~ 진짜 사랑해. 오빠로써가 아닌, 남자 진하오를 사랑한단 말이야."-여진
하오가 여진을 자신의 옆에 앉혔다.
"잘들어. 우린 남매고, 넌 날 사랑하지 않아."-하오
"남매인게 무슨 상관이야. 사랑하면 되는거지."-여진
"후.. 너 정말!"-하오
하오와 여진의 입술이 맞닿았다. 몇 초후 입술이 떼어지면 하오는 말 없이 여진을 응시한다.
여진이 부끄러운듯 머리를 긁적인다.
"헤헤. 나 첫 키스야."-여진
화를 내야 했다. 이러지 말라고, 우리들은 피가 섞였기에 이러면 안되는 거라고 화를 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냥 심장만 두근 거릴 뿐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심장이 뛰면 그게 사랑이지 별거 있어? 우리가 사랑하면 어때서? 아니다. 나 혼자 사랑하는거지."-여진
그런 여진이 싫지만은 않았다. 여진에 대한 감정이 연민인지 동정인지 사랑인지 구분 할수가 없다.
하오는 생각했다. 아마도 여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다고 ... 말이다.
언젠가부터 여진은 하오에게 오빠가 아닌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오빠라고 불러."-하오
"싫어. 오빠라고 부르면 왠지 진짜 동생같아서 싫어."-여진
"동생 맞잖아."-하오
"아니지요. 우린 사랑하는 사이에요~"-여진
하오가 피식하고 웃었다. 여진이 하오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말했다.
"나 보고 싶은거 있어."-여진
"뭔데?"-하오
"오빠의 장난끼 있는 모습!!"-여진
"됐어."-하오
"에이~ 맨날 차갑게 쳐다보는거 싫어. 보여주라 응? 내 소원이야!"-여진
"그런거 싫어."-하오
여진은 날마다 하오에게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그때마다 하오는 거절하기에 바빴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들의 사랑은 더욱 커져만 갔다. 어린 나이 일지라도 어른보다 더 어른 스러운
그들에게 사랑만이 살아갈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서로에게 줄 선물을 샀다. 그리고 카페 안에 들어가 몸을 녹이기로 했다.
뜨거운 핫초코를 마시던 여진이 궁금하다는 듯이 하오에게 물었다.
"하오야, 우리가 나중에 결혼 한다고 하면 어른들이 뭐라고 할까?"-여진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주위 사람들의 반응. 무조건 반대 할 것이다. 남매가 결혼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함께 하면 늘 불행할 여진이 걱정 되었다.
더 좋은 사람이 있는데 굳이 하오여야만 했는지. 하오는 자신이 없었다. 여진을 지켜줄 자신도 없었고,
애초부터 우현에게서 모든 것을 보아왔다. 이 더러운 세상의 실체를 말이다.
"여진아, 우리 사랑하지 말자."-하오
"..어?"-여진
여진의 눈이 커져서 하오를 보았다. 여진을 사랑하지만 이 세상을 이겨낼 자신이 없다.
이런 나약한 남자로써는 여진을 지켜줄수 없어서 사랑해도 먼저 보내기로 했다.
"나한텐 하오 너 밖에 없는거 알잖아. 근데 왜그래? 대... 대답해봐!"-여진
"남매가 사랑한다는거 있을수 없는 일 이라서."-하오
"이러지마, 하오야."-여진
"이미 결정했어."-하오
".. 너도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아. 날 사랑한다고 했는데 버리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려진 난 또 혼자가 되네."-여진
집으로 돌아 오는 내내 여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충격이 너무 커서, 배신감이 들어서 말을
할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죽고 싶었다. 남매라고 해도 하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다.
이세상에 이제 자신을 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 했다. 집에 도착한 여진은 부엌으로 향했다.
하오는 이상하다는 생각에 여진을 따라 들어 갔다.
"너랑 사랑해서 즐거 웠는데."-여진
여진은 하오가 말릴새도 없이 칼을 집어 들고 그 자리에서 손목을 그었다.
"여진아!!!!!"-하오
여진의 하얀 손목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양이 너무 많아서 바닥은 금새 피바다가 되었다.
여진은 숨을 쉬지 않았다. 하지만 하오는 여진을 등에 엎고 달렸다.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맞으며 병원으로 달려 갔다. 하지만 병원에서 여진은 하얀 천을 덮었다. 얼굴까지 덮어 버렸다.
하오는 오열했다.
"사랑하는데.. 사랑하는데... 넌.. 그 한마디에 죽어 버린거야..?"-하오
하오의 눈에서 눈물이 멈출줄 몰랐다. 사랑하지 않는 다는 말에 혼자가 되는 것이 무서워서 하늘로
가버린 여진을 보며 죄책감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서 그렇게 죽어버린 그녀는,
하오의 어머니이자 여동생이자 연인이였다.
여진이 생각 날때마다 머릿속에서 여진이 해맑게 웃을때 마다 여진에게 가려고 자해를 했다.
여진처럼 같은 아픔을 느끼지 않으면 더 큰 죄책감이 느껴졌다. 여진과 만난다는 생각에기뻐하며 일어
났을 땐 언제나 굳어버린 피와 함께 살아 있었다. 하오는 여진을 만나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손목을 긋는다.
그리고 여진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여진과 같은 곳으로 가게 될때까지 하오의 자해는 계속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지막 소원대로 살아가기로 했다. 그녀가 그렇게 원하던 자신의 장난끼 있는 모습.
아마도 살아 있는 한 하오는 예전의 무뚝뚝한 하오가 아닌 장난끼 있는 모습의 하오로 살아갈 것이다.
그녀를 위해... 사랑했던 진여진 그녀를 위해..
가슴아픈 하오의 사랑 굿바이.
굿바이 진여진.
[039]
말을 마친 하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오의 눈물에는 여진에 대한 죄책감과 슬픔, 괴로움 모두가 섞여 나오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느꼈다.
비윤이 눈물이라고 답 했을때 하오가 여진을 떠올렸던 것도 당연 했다. 비윤의 주변 사람들은 아픈
사랑만 한다. 그래서 비윤의 마음이 가슴이 속이 쓰려 왔다.
자해 흔적이 여진에게로 가기 위한 수단 이였다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말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말하는 내내 힘겨워 했으면서 끝까지 모든 것을 말해준 하오의 용기에 모두가 감동했다. 지령이 훌쩍이며 하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바보야, 진하오 이 바보야."-지령
"미안하다.."-하오
"우리가 누구야. 유명한 로민패거리잖아."-지령
"그래. 위대한 로민 패거리지."-하오
"우린 친구니까 앞으로 비밀 같은거 없어."-지령
"응.. 비밀 따위는 없어."-하오
지령의 훌쩍임은 어느새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은 하오인데 오히려 하오가 지령을
품에 안아 다독여 주었다.
"병신. 동생이 널 원망 했다면 넌 벌써 죽었어. 동생한테 감사하며 살아."-로민
"하하하. 로민아, 역시 너다. 하하하하."-하오
하오는 울면서 웃었다. 엄마를 처음 보았을때 처럼 울면서 웃었다. 친구들에게 미안해서 울었고,
친구들이 고마워서 웃었다.
"고맙다.. 고마워 얘들아."-하오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들과 함께 하는 이 세상은 너무나 즐거웠다. 그래서 살아보련다. 더러운 세상이 아닌,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에서 수명이 다하는 데까지 살고 싶다. 꿈속에서 여진을 만나면 말 해줄 것이다.
너를 혼자 놔두어서 미안하다고, 조금만 기다려 주면 우리 언젠가는 만날수 있고, 다음 생에서는 영원히
사랑하자고 말이다.
오늘은 목놓아 울었다. 하지만 다음날 하오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로민패거리를 웃게 만들었다.
"우리 이제 서울로 돌아가는 거야?"-비윤
아침 식사를 하다 비윤의 물음에 모두가 경직되어 비윤을 보았다.
"그렇네. 정말 가야 되는거야?"-지령
하오가 원래대로 돌아오면 돌아가기로 했었는데, 막상 가려고 하니 왠지 섭섭했다.
별안간 숟가락으로 식탁을 치는 하오.
"안돼! 난 놀지도 못했잖아!!!"-하오
침묵이 흘렀다. 하오가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도현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오늘 중으로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환자들이 많이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도현
"쳇. 난 정말 운 없는 멋진 남자야."-하오
"멋진이 아니라 바보같은 이겠지."-지령
"지렁이 새꺄. 감히 내 말에 리플다는 거삼?"-하오
하오의 말투가 그리웠었다. 하오 특유의 목소리로 말하는 그 모습을 다시 볼수 있어서 비윤은 너무 기뻤다.
"너 그 말투 쓰지 마! 재미 하나도 없어!"-지령
"새끼~ 좋으면서 왜 그러삼. 큭큭."-하오
하오가 지령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헤드락에 걸린 지령은 빠져 나오려고 바둥거리다 숟가락을 떨어 뜨리고
부엌은 금새 난장판이 되었다. 역시 하오는 분위기 메이커 였다.(모두 하오가 무뚝뚝 했었다는 걸 생각하면 왠지 웃음이 났다.)
짐을 챙기고 차에 올라타기전 모두 별장과 그 주변을 한번 둘러 보았다.
몇일 동안 머물렀던 별장에서 하오는 그동안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털어 버릴수 있었고, 로민과 도현은
비윤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을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도 바보 브라더스의 싸움은 계속 되었다. 시끄러운 걸 시러하는 로민도 이번만은 말리지 않았다.
모처럼의 하오니까, 오늘은 모두가 봐주기로 했다. 지령이 하오와 싸우고 있는 틈을 타 채이는 도현과 대화를 나눴고,
로민은 의자에 기대서 눈을 감은채 공상에 빠져 있었다.
원은 전보다 약간 얇은 책을 읽으며 피식, 피식 웃었다.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진동 소리의 주인인 비윤이 발신 번호를 보고 표정이 밝아져선 전화를 받았다. 한참을 통하하던 비윤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 졌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숨을 쉬고 도현에게 말했다.
"저하고 소윤이는 집으로 데려다 주세요."-비윤
"어? 너 기숙사 안가?"-하오
"원래 갈 생각이였지만 그냥 기숙사에 남아 있으려고 했는데, 아빠가 부르셔서.(울먹)"-비윤
"은비까비 없으니까 지렁이만 데리고 놀아야 겠네."-하오
"지렁이라고 하지마!"-지령
하오는 지령의 말을 무시하고 비윤에게 집에 가지마라는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비윤은 그때마다 베시시
웃으며 하오를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눈을 감고서 모든 것을 듣고 있던 로민은 상당히 우울 했다.
방학동안 계속 집에가 있는 다면 비윤을 한 달 가량 보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한 달동안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고, 그리워 하기만 해야 된다는 사실에 로민의 가슴이 답답하고 아팠다. 사랑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이제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비윤도 로민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싫었고, 아빠가 원망 스러웠다.
물론 집에 가는 것이 싫은게 아니다. 로민에 대한 그리움을 참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몰래 로민의 표정을
살핀 소윤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한달 동안 떨어져 있으면 서로 사랑 같은 감정을 느낄 시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로민이 비윤을 사랑한다고 장담하지는 않지만 느낌이 그랬다. 로민과 비윤이 같이
다니는 걸 보면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될것 같아서 비윤이 상처 받을까봐 두려 웠다.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소윤이기에 소윤이 할수 있는 일은 이것 뿐이였다.
시작조차 불가능 하게 만드는 일.
도현의 검은색 벤츠는 미끄러지듯 학교 앞에 멈춰 섰다. 로민 패거리와 채이는 무척 아쉽다는 표정으로
비윤을 바라 보았다.
"은비윤 잘가라."-로민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는데 로민의 말에 모두 예쁘게 웃었다.
"응. 로민이도 잘 있어. 다음에 봐. 헤헤."-비윤
웃으며 말했지만 비윤은 지금 울고 싶었다. 로민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비윤이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채이가 비윤의 귀에 속삭였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구, 유로민은 내가 잘 감시할게."-채이
채이 때문에 비윤의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하지만 지령은 또 질투가 난 모양이다.
"채이 너 뭐야아~ 왜 비윤이한테 귓속말 해?!"-지령
"지령이 여보야 삐치지마. 난 여보 뿐이라니까."-채이
"웩. 닭살 커플 꺼지삼."-하오
로민도 그립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는 이 분위기가 더 그리울 것 같았다. 로민패거리와 채이는 도현의
차가 보이지 않을때 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달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 할것만은 분명하다. 함께 울고 웃었기에 그들은 떨어져 있는 시간동안 서로가 그리울
것이다. 기숙사에는 집이 멀어서 가지 않은 학생들 몇 명만이 남아 있었다. 휴게실을 지나던 로민의 눈에
사진이 보였다. 놀이 동산에 갔을 때 찍었던 사진은 아직도 그대로 휴게실 중앙에 걸려 있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비윤과 달리 로민은 무표정이였다. 후회가 되었다. 그때 웃었더라면 미소라도 지었다면 지금 사진을
보는 순간이 더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고싶을 때마다 이 사진을 볼것이다.
어쩌면 로민은 하루종일 비윤을 그리워 하며 휴게실에 있을 지도 모른다. 로민에게 비윤은...
이루워 지지 못 할 사랑이였다.
#비윤의 집.
"안하면 안돼요?"-비윤
"하기 싫어도 해야돼. 한달 동안 집에서 공부도 하고, 날 따라다니면서 회사가 무엇인지 배우도록 해."
"경영 수업이란 소리네."-소윤
"그래. 비윤이가 20살이 되면 재산과 함께 회사를 물려줄 생각이다."
소윤의 표정이 씁쓸해 졌다. 재산이 탐난다거나 회사가 탐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격려의 말
한마디라도 해주었으면 했다. 소윤이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이후 아버지의 관심은 비윤에게로만 향했다.
소윤이 있는 외국에 잠깐동안 있다 간 적은 있지만 소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일 이야기만 했다.
"경영 수업 받는 동안은 남장을 풀도록 해라."
아버지의 말을 어길 수는 없었다. 인자하시지만 일에 관해선 그 누구보다 철처하신 분이였다. 경영 수업을
받는 동안은 외출도 안될 것이고, 마음데로 친구를 만날수 없을 것이다. 비윤을 감시하기 위해 사람을 붙일
거란 것도 알고 있다. 그만큼 사생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방으로 올라온 비윤이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천장에 로민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눈을 감아도 깜깜한 밤 속에서 로민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눈을 뜨나 감으나 로민의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였다. 비윤이 다시 벌떡 일어 났다.
차마 챙겨 오지 못한 짐들이 생각 났다. 짐을 가져다 달라는 빌미로 채이를 불러야 겠다고 생각했다.
채이에게 고민 상담도 할겸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채이를 만날수 없다는 것이다. 비윤의 기분이 다시
다운 되었다. 비윤이 고민에 빠져있는데 문을 열고 소윤이 들어 왔다.
"우리들이 같이 집에 있는거 오랜만이다. 그치?"-소윤
"응. 진짜 오랜만이야."-비윤
"누나, 도현이 형 어때??"-소윤
"저번에도 말했잖아. 좋은 오빠야. 헤헤."-비윤
"그런거 말고. 남자로써는 어때?"-소윤
소윤의 물음에 비윤이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남자로써도 좋아. 자상하고, 매너 있고, 비윤이를 즐겁게 해줘."-비윤
소윤이 비윤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나 진짜 바보인가봐."-소윤
"소윤이가 왜 바보야?"-비윤
"그냥. 난 바보야."-소윤
"바보 아니야.(싱긋)"-비윤
"누나가 싫어 할지도 몰라. 근데 나는 꼭 할거야."-소윤
소윤은 의미심장한 소리를 하더니 비윤에게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비윤의 일과는 늘 똑같았다. 공부하고 아픈 다리로 아버지를 따라다니기에 바빴다. 언어에 능통하기 위해
일본어와 영어는 기본 이고, 불어에서 부터 독일어까지 배우지 않은게 없었다. 비윤의 시간이란 존재
하지 않았다. 그중에서 꼽는 다면 화장실에 가는 시간과 식사를 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만이 비윤의
유일한 휴식이였다.
오늘은 발목 상태를 보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집으로 의사를 부른 다는 것을 거부하고 조르고 졸라서
병원에 가는 것이였다. 발목 상태도 보고 도현도 보는 겸사 겸사 해서 도현이 있는 병원에 가기로 했다.
도현과 비윤을 밀어주기 위한 꿍꿍이가 있는 소윤도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하오의 일 때문에 왔던 병원이라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꾸물거리는 비윤을 소윤이 이끌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병원냄새는 비윤을 기분 나쁘게 만든다. 도현의 진찰실에 들어서자 도현이 비윤을
발견하고 반갑게 맞이했다.
"오셨군요."-도현
"형, 나는 안보여?"-소윤
소윤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도현은 소윤의 어깨를 다독였다. 도현도 로민 못지않게 비윤이 보고 싶었다.
비윤이 이 곳으로 올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도현의 기분이 좋아졌다.
"경영 수업 받고 계신다고 소윤이한테 들었습니다."-도현
"헤헤. 하기 싫어도 해야돼요."-비윤
"그럼 오늘도 시간이 없으십니까?"-도현
"한 시간 정도는 여기 있을수 있어요."-비윤
그 말에 도현의 표정이 한층 밝아 졌다.
"그 한시간을 저에게 주세요."-도현
"네?"-비윤
비윤은 도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듣지 못했다. 소윤이 도현의 손을 덥썩 잡았다.
"형. 나 친구들 만나야 하니까 우리 누나랑 놀아줘. 먼저 간다!"-소윤
"어어, 소윤아!"-비윤
소윤은 비윤의 부름을 무시하고 재빨리 그곳을 빠져 나갔다. 도현의 마음을 읽은 소윤이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가버렸네."-비윤
비윤은 소윤이 나간 자리를 보다 도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흰 가운과 도현의 흰 얼굴이 무척 잘 어울렸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지적인 사람은 도현 밖에 없었다. 도현은 요즘 여자들이 선호하는 남자였다.
의사라는 직업과 잘생긴 외모때문에 여자들이 많이 꼬이기는 하지만 모두 도현의 겉모습과 배경만 좋아하는
속물들이다. 도현은 이제 그런 여자들에게 지쳐 있었다. 그런 여자들과 다른 비윤은 혼자서만 소유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이 넘쳤다. 도현이 비윤에게 우유 한잔을 건네 주었다.
비윤을 바라보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제 친구가 한 여자를 좋아하는데, 그 여자가 누굴 좋아하는지 그 여자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수가 없데요. 그래서 고백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중이랍니다. 비윤씨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도현
"전 그냥 부딪혀 볼거 같아요. 받아 줄때까지 고백 하는거에요. 헤헤."-비윤
말 그대로 비윤이 남장을 하지 않은 여자였다면 로민에게 고백 했을 것이다.
지금은 로민에게로 한발짝 한발짝 다가가고 있는 시기였다.
"끝까지 받아 주지 않으면 어떡하죠?"-도현
"그래도 언젠가는 받아 줄거에요. 포기하지 않으면.(싱긋)"-비윤
도현이 컵을 내려 놓고 비윤을 응시했다. 비윤의 눈동자에 도현이 비쳐서 그대로 보였다.
"비윤씨 말대로 라면... 비윤씨는 언젠가 저의 여자가 되겠군요."-도현
[040]
"무슨 말을..?"-비윤
"비윤씨를 사랑해요."-도현
"오빠, 장난치지 마세요."-비윤
장난이라기엔 도현의 표정은 진지 했지만 비윤은 애써 부정하려 했다.
"장난 아닙니다. 제 감정을 가지고 장난 칠 정도로 못난놈은 아니거든요."-도현
"왜, 왜그래요."-비윤
비윤이 도현의 시선을 피하고 얼굴을 돌렸다. 도현은 속이 편안해 짐을 느꼈다. 앞으로 자신의 마음을
마음껏 표현 할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언젠가는 비윤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비윤씨가 누구를 좋아하던 상관 없습니다. 전 제 감정에 솔직해 지기로 했습니다. 이제 더 자주 볼거구요."-도현
"우리 알게 된지도 얼마 안됐고.. 또.."-비윤
"언제 만났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함께 했던 시간이 중요한겁니다."-도현
도현은 계속 여유로운 눈길로 비윤을 응시했다. 비윤의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자신은 로민을 사랑하는데,
도현은 자신을 좋아하다니.. 엇갈려도 너무 엇갈렸다. 도현에게 미안하지만 이대로 놔둘순 없었다.
"전.. 로민이를 사랑해요."-비윤
순간 도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원래의 페이스를 되찾고 말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근데.. 직접 들으니까 조금은 충격 받았습니다."-도현
"저 좋아지 마세요. 도현 오빠만 상처 받을 거에요."-비윤
"지금까지 상처란 상처는 많이 받아와서 이제 왠만한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도현
도현의 얼굴은 침착했으나 속은 매우 불안정 했다. 비윤이 로민을 사랑한다. 로민도 비윤을 사랑한다.
하지만 둘 다 서로의 마음을 모른다. 서로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기만 하면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워
질 것이다. 그러면 도현은 비윤을 가질수 없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나 도현을 혼란 스럽게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로민에게는 미안하지만 비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사실은 혼자서 알기로 했다. 도현에게 있어서 어렵게 내린 결정이였다. 그만큼 도현은 비윤을 사랑한다.
비윤이 자리에서 일어 났다. 다리를 절뚝이며 문쪽으로 향했다.
"비윤씨가 로민씨를 사랑하는 것처럼 저도 비윤씨를 사랑합니다. 그 마음 잘 아실거라 믿어요.
포기 못합니다."-도현
".. 비윤이는 오빠를 오빠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비윤
".... 그래도.. 기회는 있습니다.. "-도현
비윤은 고개를 푹 숙인채 한마디를 하고 나갔다.
"..아니요. 기회가 없을 지도 몰라요."-비윤
혼자 남은 도현이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의자에 기대어 미친듯이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기회가 없다라...재미있군요. 역시 당신은 매력있는 여자에요."-도현
병원을 나온 비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끙끙 대고 있었다. 핸드폰도 없고, 돈도 없고, 길도 몰랐기에
울쌍이 되어 있었다. 겨우 지나가던 행인에게 500원을 빌려서 공중 전화로 향했다. 손은 자연스럽게
로민의 번호를 눌렀지만 이내 다시 채이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남장을 풀고 있는 상태라 로민을
만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채이에게 이 곳이 어딘지 자세히 설명해 주고 40분쯤 지났을까,
예쁘게 차려입은 채이가 남자들의 많은 시선을 받으며 비윤에게 달려왔다.
"채이야!"-비윤
"많이 기다렸지? 미안. 지령이가 자꾸 따라 오려고 해서."-채이
"괜찮아.(싱긋)"-비윤
채이가 비윤의 차림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비윤은 무릎까지 오는 예쁜 치마를 입고 있었다.
"와~ 너 남장 풀었구나? 진짜 예뻐!"-채이
"채이가 더 예뻐. 헤헤."-비윤
비윤과 채이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 충분했다. 아름다운 여자 두명이 시내를 활보하는데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보이쉬한 비윤과 여성스러운 채이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발목을 다친
비윤을 배려하여 채이가 느리게 걸어 주었다. 비윤은 집에 가야 할 시간이 훨씬 넘었지만 오늘만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기로 했다. 채이에게 할 말들이 너무 많았다.
paradise는 비윤을 아는 얼굴이 많아서 H G T 라는 카페 안으로 들어 섰다.( Have a Good Time )
"겨우 일주일 만에 보는건데 한 일년 못본거 같아."-채이
채이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비윤은 미소지었다. 채이가 비윤의 이마를 툭 쳤다.
"빨리 말해봐."-채이
"..뭘?"-비윤
"고민 있잖아. 지금 니 이마에 '나 고민 있어요.' 라고 써진거 다 보여."-채이
비윤이 쑥쓰러운듯 웃더니 휴지를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비윤이는 로민이를 사랑하는데.. 도현오빠가 비윤이를 사랑한데."-비윤
"도현 오빠가.. 널 사랑한다고?"-채이
"응.."-비윤
채이는 꽤나 놀란듯 했다. 믿기지가 않는지 손을 귀에다 대고 비윤에게 물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채이
"도현 오빠가 나를 사랑한데."-비윤
"그.. 그래서 뭐라고 했어?"-채이
"비윤이는 로민이를 사랑한다고 말했어."-비윤
"말도 안돼. 확실하게 꼬였다."-채이
채이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무리 연애박사 채이라고 해도 어떻게 답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에게 털어 놓았다는 것이 비윤은 후련 할 뿐이였다.
"그냥 니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채이
"마음?"-비윤
"응. 니 마음이 원하는대로.. 머리 말고, 마음. 내가 해줄수 있는 말은 이거 뿐이야."-채이
채이의 말이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장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로민..이는?"-비윤
"그 얘기 왜 안나오나 했네.(빙긋) 아주 잘 지내고 있어."-채이
"다행이야. 헤헤."-비윤
"근데 이상한건. 휴게실에서 움직일 생각을 안해. 밥 먹을때, 잠잘때 화장실 갈때 빼고는
무슨 일이 있던 휴게실에만 있어."-채이
갑자기 로민이 걱정 되기 시작한 비윤. 비윤의 마음을 알아 챈듯 채이가 말했다.
"걱정하지마. 그냥 그거 뿐이야. 평소하고 똑같아."-채이
"응."-비윤
"유로민 보고싶지?"-채이
끄덕 끄덕.
시간은 계속 흘러 가는데 한달은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지 비윤은 애가 탔다.
한달 ? 금방 지날거라고 생각 했다. 하지만 로민이 더 보고 싶어 질수록 시계 바늘은 더욱 느리게 돌아 갔다.
"로민 패거리 모두가 널 보고 싶어해. 여자인 내가 질투 날 정도로."-채이
"친구잖아.(싱긋)"-비윤
"나도 남장이나 해볼까."-채이
채이의 말에 비윤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채이가 인상을 쓰며 비윤을 쳐다 보았다.
"웃지마. 난 진지해."-채이
하지만 비윤의 웃음은 멈출줄 몰랐다. 이내 채이도 비윤과 함께 웃기 시작했다.
채이의 웃음은 다른 여자들처럼 가식이 없었다. 오히려 더 통쾌 하게 웃었다. 정말 편한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타나는 이채이 그녀만의 버릇이다. H G T의 문이 딸랑 하고 열리면 낯익은 얼굴의 두 사람이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 선다.
신노린. 은소윤.
오랜만에 보는 노린은 많이 아파 보였다. 허리까지 닿았던 그녀의 머리는 짧아져서 이제 어깨에 살짝 닿았다.
소윤도 노린도 비윤을 발견하지 못한 채 비윤과 조금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 앉는다. 휠체어에 탄 소윤이
사람들의 안 좋은 시선을 받긴 했지만 소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 소윤의 눈은 노린에게로 향해
있었다. 비윤을 보던 채이의 시선도 그들에게로 향했다.
"어? 니 동생 은소윤 아니야?"-채이
"맞아.."-비윤
"저 여자는 누구야? 예쁘긴 한데 나이가 많아 보여."-채이
비윤은 채이의 말이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신노린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소윤과 노린이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 소리가 비윤에게까지 들리지 않았다.
몇 마디를 주고 받다가 노린이 눈물을 흘렸다. 비윤은 이 상황을 이해 할수 없었다. 소윤이 노린을 잊지
못한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소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 같던 노린이 왜 소윤과 함께 있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이 일어나 실타래처럼 엉켜 버린다.
엉킬 때보다 그것을 풀때가 더 오래 걸린 다는 것을 알기에 비윤은 점점 지쳐갔다.
"비윤아, 은비윤!"-채이
"미안,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비윤
"아는척 안할거야?"-채이
"불편해 할것 같아서. 헤헤."-비윤
그렇게 그들을 남겨둔채 비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채이와 H G T를 빠져 나왔다. 비윤의 인생은 왜 이렇게
순탄치 못한 것일까. 행복해 지기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일까..
채이에게 돈을 빌린 비윤이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 졌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비윤에게 일주일 동안 외출금지라는 벌을 내렸다. 외출금지가 내려진 일주일은 더없이 느리게 지나 갔다.
소윤은 날마다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었다. 비윤에게 무엇 하나라도 귀뜸 해주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속상했다. 노린을 만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외출금지가 풀리던 그날 저녁. 비윤은 아버지와 함께 재벌이란 재벌은 모두 모이는 파티에 참석했다.
연분홍 색의 드레스를 입은 비윤의 아름다움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비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비윤의 그룹은 요즘 최고로 잘 나가는
그룹이였기에 모두가 비윤 앞에서 굽신 거리기에 바빴다. 비윤은 즐겁지 않아서 웃지도 았았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은회장 아니야?"
"반갑네. 지회장."
"요즘 아주 잘 나가던데. 비결이 뭔가?"
"하하하하. 그런게 어디있나."
지회장의 시선이 비윤에게로 향했다.
"아, 내 딸이네. 인사해라."
"은비윤 입니다."-비윤
"아주 예쁜 따님을 뒀구만."
"자네도 아들이 있다고 했던거 같은데."
"저기 오는군."
비윤은 놀랄수 밖에 없었다. 지 회장이란 사람의 아들은 바로 도현이였기 때문이다.
도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은회장에게 말했다.
"은회장님 이시죠? 지도현 입니다."-도현
"듣던데로 훤칠하군. 의사라고?"
"네. 이제 곧 병원을 물려 받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도현
"은회장, 우리 아들도 이만하면 괜찮을 테고, 이참에 결혼이나 시켜보세."
"이 사람도 참. 껄껄껄."
"너희들끼리 이야기좀 하고 있거라."
은회장과 지회장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자리를 이동했다.
만나지 않으려 했던 도현을 이런 곳에서 만난 것이 비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현은 와인을 한모금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여전이 아름다워요."-도현
"... .."-비윤
"설마 은회장님 따님일 줄은 몰랐는데, 조금은 놀랐습니다."-도현
".. 가볼게요."-비윤
도현을 피하려는 비윤에게 익숙한 사람의 이름이 들려왔다.
"오늘 유로민씨 만났는데... 이래도 가실 건가요?"-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