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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화 이론으로서의 과정 신빙주의
: Goldman을 중심으로
한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은 그 믿음과 근거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맺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이 연결은 논리적인 연결로만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믿음과 근거 사이의 연결은 논리적인 측면 이외에 인과적인 연결과 합리적인 연결로 나눌 수 있다. 이 연결들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할 경우 ‘인식적 우연성’이 발생한다. 필자는 올바른 정당화 이론이기 위해서는 이 우연성을 배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Goldman은 정당화에 대한 올바른 입장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그 믿음의 근거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Goldman은 과정 신빙주의를 제시한다. 과정 신빙주의에 따르면, ‘한 믿음은 그 믿음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산출된 것일 때에만 정당화된다’.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런 비판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 이론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을 가하는 대표적인 입장으로 ‘증거주의’가 있다. 다른 하나는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 이론으로서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을 제기하는 입장을 ‘내재주의’라 부를 수 있다.
증거주의의 비판은 ‘신빙성의 문제’와 ‘일반성의 문제’, 즉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의 결정 문제에 근거해 있다. 필자는 신빙성의 문제를 신빙성을 성향으로 해석할 것을 제안함으로써 해결했다.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의 결정 문제는, 즉 일반성 문제는 단일 경우의 문제와 비구분의 문제로 나뉜다. 필자는 이 문제들에 대해 믿음형성과정의 결정은 인지심리학의 객관적인 탐구 성과에 근거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은 입력조건과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의 작동조건에 상대적이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답했다. 이런 논의를 통해 필자는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이론으로서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에 대한 이론으로서 충분하지는 않다는 내재주의의 비판이 있다. 내재주의는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에 대한 합리성의 조건을 제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인식적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합리성의 조건으로 내재주의가 제시하는 것은 ‘인식적 책임의 조건’인데, 이는 메타정당화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필자는 ‘메타정당화 조건’을 반직관적인 결론을 피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하였다. 이렇게 제시된 메타정당화의 조건을 과정 신빙주의의 주된 개념인 신빙성과 믿음형성과정이라는 개념으로 제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문에서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에 대한 적합한 이론이라는 점을 보여주었으며, 나아가 충분한 이론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주요어 : 과정 신빙주의(process reliabilism), 신빙성(reliability), 믿음형성과정(belief-forming process), 인식적 우연성(epistemic accident), 일반성의 문제(generality problem), 인식적 책임(epistemic responsibility)
< 차 례 >
국문 초록ⅰ
1. 서론1
2. Goldman의 과정 신빙주의 6
2. 1. 인식적 정당화6
2. 1. 1. 인식적 정당화의 목표6
2. 1. 2. 인식적 우연성8
2. 2. Goldman의 정식화14
2. 2. 1. 정당화 이론의 필수 요건14
2. 2. 2. Goldman의 인식적 우연성에 대한 진단15
2. 2. 3. Goldman의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정식화17
3. 과정 신빙주의의 세련화27
3. 1. 신빙주의에 대한 반론 Ⅰ27
3. 1. 1. 증거주의27
3. 1. 2.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증거주의의 반론30
3. 1. 3. 증거주의에 대한 비판37
3. 2. 과정 신빙주의의 재정식화41
3. 2. 1. 신빙성 개념에 대한 검토47
3. 2. 2. 일반성 문제에 대한 검토49
4. 내재주의와 외재주의63
4. 1. 신빙주의에 대한 반론 Ⅱ63
4. 1. 1. BonJour의 반례63
4. 1. 2. 인식적 우연성에 대한 재고찰68
4. 1. 3. 내재주의71
4. 2. 과정 신빙주의의 대응79
4. 2. 1. 메타정당화 조건에 대한 검토88
4. 2. 2. 과정 신빙주의의 가능한 대응85
5. 결론90
참고 문헌 92
ABSTRACT97
1̥ 서론
전통적으로 지식(knowledge)은 ‘정당화된 참인 믿음(justified true belief)’으로 정의되어 왔다. 지식의 정의에 ‘정당화(justification)’가 들어가는 이유는 지식과 단순히 참인 믿음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별다른 이유 없이, 혹은 강한 바람 때문에 갖게 된 믿음들이 실제로 참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 믿음들을 지식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이 믿음들이 참인 것을 매우 우연적인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지식을 한 믿음과 그 믿음의 참 사이의 연결이 우연적이지 않은 경우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지식의 정의에 들어있는 정당화 조건은 믿음과 믿음의 참 사이의 우연적 연결, 우연성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전통적인 지식의 정의에 들어있는 정당화 조건은 믿음과 믿음의 참 사이의 연관을 완벽하게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Gettier가 쓴 짧은 논문은 정당화 조건만으로 믿음과 그 믿음의 참 사이의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통적인 기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논문에서 Gettier는 전통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지만, 직관적으로 볼 때는 지식이라고 여길 수 없는 사례들을 들고 있다.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지만, 그 믿음이 참인 것이 우연적인 경우를 제시하였다. 이후 여기에 대한 많은 논문들과 저작들이 쏟아졌다. 어떤 이들은 정당화의 조건을 더욱 강화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정당화의 조건을 포기하고 다른 조건으로 정당화 조건을 대체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철학자들은 정당화가 믿음과 참 사이의 우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지식의 제4의 조건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지식의 제4의 조건을 찾고자 노력했던 인식론자들은 대체로 전통적인 정당화 개념이 일상적인 의미와 매우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전통적인 지식의 정의는 정당화 조건이 믿음과 참 사이의 우연성을 완벽하게 배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는 ‘정당화된 거짓 믿음(justified false belief)’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많은 인식론자들은, 일상적인 의미의 정당화 개념은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할 수 있는 제4의 조건을 찾자고 주장한다. 결국 정당화 조건이 믿음과 참 사이의 우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면 정당화 조건을 무리하게 강화시킬 필요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지식 개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정당화 개념만을 탐구하는 정당화 이론이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정당화 조건은 믿음과 그 믿음의 근거 사이의 연결(connection)에 관한 조건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정당화 이론은 믿음과 참 사이의 연결이 아니라, 믿음과 근거 사이의 연결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 인식론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정당화 이론은 다양하다. 이 글에서는 정당화 이론으로서의 ‘과정 신빙주의(process reliabilism)’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과정 신빙주의의 정당화에 대한 기본 입장은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거짓인 믿음보다 참인 믿음을 더 많이 산출하는,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belief-forming process)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가장 세련된 과정 신빙주의를 제시한 것으로 인정되는 Goldman의 입장을 중심으로 정당화이론으로서의 과정 신빙주의를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반론들을 검토할 것이다. 이런 논의를 거쳐 보다 세련된 과정 신빙주의를 제시할 것이다.
물론 많은 인식론자들이 아직 지식의 조건으로서의 정당화 조건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정당화 이론이 지식 이론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지식이론으로서의 과정 신빙주의 역시 가능한 입장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정당화에 관해서는 과정 신빙주의를, 제4의 조건에 관해서는 인과적 입장이나 기계론적 입장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정당화 이론으로서의 과정 신빙주의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논의된 것은 약간의 수정을 거친다면, 지식 이론으로서의 과정 신빙주의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Sosa는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비판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정당화 이론으로서 과정 신빙주의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과정 신빙주의가 이 비판들이 제기하는 세 가지 문제점들을 극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세 가지 문제란 일반성의 문제(generality problem), 악마의 세계 문제(evil-demon problem), 메타부정합성 문제(meta-incoherence problem)이다. 그래서 Sosa는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답하면서 과정 신빙주의를 옹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는 Sosa의 견해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정당화에 관한 이론이라면 반드시 고려해야할 점이 있다. Gettier의 반례들은 믿음과 참 사이의 연결에서 우연성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믿음과 근거 사이의 연결에서도 우연성이 발생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우연성을 믿음과 참 사이의 우연성과 구분하여, 특별히 ‘인식적 우연성(epistemic accidentality)’이라 부르겠다. 그래서 필자는 정당화 이론으로서 적합한 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인식적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식적 우연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믿음과 근거 사이의 연결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과 근거가 합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하고, 또한 인과적으로 적절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합리적으로 연결되었다 하더라도 인과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면 인식적 우연성이 발생한다. 또 인과적으로 적절하게 연결되었다 하더라도 합리적이지 못하면 역시 인식적 우연성이 발생한다.
과정 신빙주의는 인과적인 연결에 중점을 두고 정당화 조건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합리적인 연결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대한 비판이 바로 Sosa가 말하는 메타부정합성 문제에 근거한 비판이다. 그리고 과정 신빙주의는 인과적인 연결에 중점을 두고 제안된 입장이라지만, 인과적인 연결을 충분히 고려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점을 들어 비판하는 입장이 있다. 이 비판이 근거하고 있는 것이 일반성 문제이다. 필자는 Sosa가 분류한 악마의 세계 문제는 이 두 비판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과정 신빙주의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이 두 문제에 과정 신빙주의가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할 것이다.
과정 신빙주의가 대처해야 할 첫 번째 반론은 과정 신빙주의의 입장은 정당화의 인과적 조건을 고려하는 데 부적절하다는 주장이다. 이 반론은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reliability)은 정당화의 조건에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반론하는 대표적인 입장이 증거주의이다. 이 반론은 인과적인 연결이 믿음의 정당화 여부와 무관하다는 생각에 근거해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인과적인 연결이 믿음의 정당화 여부와 유관하다고 하더라도, 신빙성 개념과 믿음형성과정이라는 개념의 모호성으로 인해 과정 신빙주의는 정당화에 관한 적절한 이론이 될 수 없다는 형태를 띌 수도 있다. 이는 굳이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에 근거한 과정 신빙주의를 주장하지 않더라도 합리적인 연결에 약간의 논리적 장치를 가미한 조건만으로도 적절한 인과적인 연결의 조건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해 있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인과적인 연결이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와 유관하다는 점을 보일 것이다. 또한 인과적인 연결에 대한 조건은 증거주의보다 과정 신빙주의에 의해 더 잘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을 보일 것이다. 나아가 과정 신빙주의가 인과적인 연결에 적합한 정당화 이론이 될 수 있도록 신빙성과 믿음형성과정이라는 개념들을 보다 명료화할 것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 필자는 보다 세련된 과정 신빙주의를 제시할 것이다.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두 번째 반론은 정당화 여부가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 여부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는 과정 신빙주의가 인과적인 연결에 대한 올바른 이론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지만, 정당화에 대한 충분한 이론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는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 이외에도 인식 주체의 믿음 체계까지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논쟁은 정당화에 관한 외재주의(externalism)와 내재주의(internalism)의 논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논쟁은 정당화 여부의 판단에 인식 주체의 합리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다. 내재주의자들은 과정 신빙주의와 같은 외재주의는 원리적으로 인식 주체의 합리성을 고려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외재주의는 인식적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내재주의의 입장은 바람직한 형태로 제시된 경우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 필자는 BonJour의 입장을 중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내재주의의 입장이 주장하는 바를 명확히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식 주체의 합리성이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와 유관하다는 내재주의의 주장을 가장 설득력 있는 형태로 정식화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정식화된 내재주의에 근거해서, 필자는 내재주의가 비판하는 것과는 달리 외재주의가 인식 주체의 합리성을 정당화 여부의 결정에서 상당 부분 수용할 수 있다는 점을 보일 것이다.
2̥ Goldman의 과정 신빙주의
2̥ 1̥ 인식적 정당화
2̥ 1̥ 1̥ 인식적 정당화의 목표
한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은 여러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정당화라는 말은 평가적 용어(evaluative term)이다. 어떤 것을 평가할 때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런데 평가의 기준은 다양할 수 있다. 그래서 다양한 평가 기준들에 따라 동일한 대상이 다양하게 평가될 수 있다.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당화를 판단하는 기준 또한 다양하다. 한 믿음은 인식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고, 실용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으며,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정치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다. 한 믿음이 이렇게 다양한 기준들에 근거해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은 ‘한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화된다’는 말을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모든 정당화 개념들이 인식적 정당화(epistemic justification) 개념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굳이 인식적 정당화를 따로 떼어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인식론 중심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커다란 오해에 근거해 있다.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어떤 저명한 과학자가 있다. 그 과학자는 매우 젊으며, 학자로서 한창의 나이다. 실제로 그 과학자는 매우 많은 연구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런 연구의 대부분이 인류의 과학에 큰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과학자는 과로로 인해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정밀 진단 결과 그 과학자는 간암을 앓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 과학자의 완치를 위해 이 사실을 당사자에게 알리지 않았다. 단지 간염이 조금 심각한 상태라고 그 과학자에게 말했으며 그 과학자는 그렇게 믿었다. 이 경우 그 과학자의 믿음은 정당화되는 것인가? 당연히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다. 과학자가 자신이 간염을 앓고 있다고 믿는 것이 병을 치료하는데 보다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식적 측면에서 본다면 어떤가? 인식적 측면에서 볼 때, 그 과학자의 믿음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식적 정당화 개념은 다른 정당화 개념들과는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한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은 무엇에 근거하여 판단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식적 정당화의 목표를 살펴보아야 한다. 대다수의 인식론자들은 인식적 정당화의 목표를 ‘참인 믿음의 획득’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말 역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우선 ‘참인 믿음의 획득’을 ‘가장 많은 수의 참인 믿음의 획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믿음들이, 우리가 그 믿음들을 믿는 동시에 그 믿음들의 부정들까지 믿기만 하면, 인식적으로 정당화된다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귀결을 낳게 된다. ‘참인 믿음의 획득’을 ‘가장 많은 수의 참인 믿음의 획득’으로 해석하는 것은 실제로 가장 많은 수의 참인 믿음을 획득할 수 있게 해 주지만, 그만큼의 거짓 믿음 또한 갖게 하는 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최소한의 거짓 믿음 획득’을 인식적 정당화의 목표로 간주하고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어떠한 믿음도 갖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이것 역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실수를 할 수 있으며, 또 참인 믿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인식적 정당화가 중요한 것이다.
인식적 정당화의 목표는 바로 우리의 이런 상황에 근거해서 파악해야 한다.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참인 믿음과 거짓 믿음을 모두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참인 믿음을 거짓 믿음보다 더 많이 갖기를 바란다. 이런 바램에서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 인식적 정당화의 의도일 것이다. 따라서 인식적 정당화는 ‘가능한한 많은 수의 참인 믿음을 획득하고 가능한한 적은 수의 거짓 믿음을 가짐’을 목표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참의 최대화, 거짓의 최소화(maximizing truth, minimizing falsity)’가 인식적 정당화의 목표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인식적 정당화는 다른 정당화들과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2̥ 1̥ 2̥ 인식적 우연성
인식적 정당화의 목표는 ‘참인 믿음의 최대화와 거짓 믿음의 최소화’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판단할 때는 이 목표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즉 한 믿음이 정당화되었다고 판단할 때, 우리는 인식 주체가 문제의 믿음을 참을 최대화하고 거짓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가지는지 여부에 근거해야 한다.
정당화 여부를 판단할 믿음이 선험적인 것에 관한 믿음이라면, 논리적 추론 규칙을 주의 깊게 따르는 것만으로도 인식적 정당화의 목표를 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논리적 추론 규칙은 참을 보장해 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논리적 추론 관계에 근거해서 판단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갖는 대다수의 믿음들은 외부세계에 대한 경험적인 것들이기에, 이 믿음들의 정당화 여부를 이 믿음들이 전제들과 논리적 추론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논리적 재구성만을 통해 판단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논리적 추론 관계는 추론의 전제가 참일 경우에만 결론의 참을 보장한다. 그래서 논리적 재구성을 통해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험적인 믿음들의 전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전제가 참인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외부세계에 대한 경험적인 믿음의 경우 논리적 추론의 전제가 무엇인지 결정하기 힘들다. 경험적인 믿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감각 자료(sense deta)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그래서 감각 자료를 논리적 추론의 전제로 간주하면 간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감각 자료가 믿음과 논리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해하기 힘들어 보인다. 논리적 추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명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래서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감각 자료를 명제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뚜렷한 성공 사례를 찾기 힘들다.
또한 비록 감각 자료가 어떤 식으로든지 명제화되어 믿음과 논리적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더라도, 전제가 되는 감각 자료의 참이 보장되기 힘들다는 문제가 남아있다. 우리의 감각은 항상 잘못될 위험이 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된 사실이다. 그래서 기존의 전통적 철학자들은, 특히 토대주의자들은, 감각 자료들 중 특정한 것만을 선택해 ‘오류불가능성(infallibility)’, ‘의심의 여지가 없음(indubitability)’ 등의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여기에 근거해 경험적인 믿음의 정당화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는 Descartes 이후의 오랜 전통으로 보인다. Descartes는 명석하고(clear) 판명한(distinct)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오류불가능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명석하고 판명한 것에 기초해서 다른 믿음들의 정당화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많은 철학자들은 오류불가능성이나 의심의 여지가 없음 등의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정신 상태(mental state)를 들고 있다. 여기서의 정신상태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성향적 상태(dispositional state)로 믿음, 욕망 등을 포함한다. 다른 하나는 현상적 상태(phenomenal state)로 감각 자료, 느낌 등을 포함한다. 그런데 성향적 상태에 오류불가능성이나 의심의 여지없음 등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현대 심리학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조차 어떤 믿음이나 욕망을 은폐하고, 왜곡된 믿음이나 욕망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 나아가 현상적 상태 역시 오류불가능성이나 의심의 여지가 없음이라는 지위를 부여받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우리는 무한히 다양한 감각 자료를 모조리 이용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감각 자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이나 인지 모듈(module)이 처리할 수 있는 것들로 한정된다. 그런데 감각 자료를 해석하는 개념들이나 인지 모듈들이 오류가능하다. 그러므로 현상적 상태 역시 오류가능하고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명석판명함만으로 그것의 오류불가능성을 주장할 수는 없으며, 결국 현상적 상태 역시 오류가능성과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 세계에 대한 경험적인 믿음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데에는 위에서 살펴본 전제에 관한 문제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Descartes 이후 논리 실증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식론자들은 경험적 믿음의 정당화를 연역 논리를 빌어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는 연역 논리를 통한 논리적 재구성이 가능한지에 근거해서 판단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외부세계에 대한 믿음은 귀납을 통해서도 역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인식론자들이 연역 논리를 고집한 이유는 정당화가 믿음과 참 사이의 연관을 확실히 보장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연역 논리적인 추론 관계에 대한 논리적 재구성의 측면에서만 파악하고자는 입장은 경험적인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제대로 다루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에, 정당화에 대한 올바른 입장이라고 보기 힘들다. 비록 이런 입장이 인식적 목표에 가장 잘 부합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라 하더라도, 이 입장은 경험적인 믿음들을 정당화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파악하거나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게 되어, 결국 참인 믿음의 최대화라는 인식적 목표의 한 부분과 어긋나게 된다.
그렇다면 인식적 목표에 잘 부합하는 정당화에 대한 입장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한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중립적인 대답은 ‘그 믿음이 적절한 근거와 연결되어 있다(to be based on an adequate ground)’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답 역시 많은 해석의 여지가 있다. 근거란 무엇이고, 또 적절한 근거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이 있을 것이고, 이 대답에 따라 정당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이 물음들에 대한 논의는 생략할 것이다. 단지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 별다른 무리없이 받아들여지는 대답을 전제할 것이다. 선험적인 믿음뿐만 아니라 외부세계에 대한 경험적인 믿음까지 고려하기 위해, 적절한 근거로 많은 철학자들은 믿음뿐만 아니라 지각된 것(sense data)까지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필자 역시 이 견해를 받아들이고 논의를 전개해 나갈 것이다.
정당화에 대한 중립적 대답 중에서 본 논문이 집중적으로 검토할 것은 ‘연결되어 있다(be based on)’라는 말이다. ‘한 믿음이 적절한 근거와 연결되어 있다’라는 것은 전통적으로는 ‘한 믿음이 적절한 근거와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라고 이해되어 왔다. 물론 여기서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매우 폭넓게 이해되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경험적인 믿음까지 고려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꼭 연역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 다고 보아야 한다. 귀납 논리적 연결 역시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 나아가 토대주의만을 염두에 두고 사용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정합적 연결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인식 주체가 한 믿음을 믿었을 경우 그 믿음이 인식 주체가 가진 그 믿음의 근거들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그 믿음은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 예 1 >
철수는 p를 믿고 있다. 또한 p → q도 믿고 있다. 그리고 철수는 지금 q를 믿었다. 그런데 철수는, q를 믿을 때, p에 대한 믿음과 p → q에 대한 믿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단지 철수는 q를 읽을 때 들리는 소리가 좋아서 q를 믿었던 것이다.
이 경우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은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되는가? 정당화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해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된다고 답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은 철수의 p에 대한 믿음, p → q에 대한 믿음과 전건 긍정의 법칙(Modus Ponens)이라는 논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직관적으로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예가 보여주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예에 대한 대응 역시 그만큼 다양할 것이다. 이 예에 대한 대응 중의 하나가 Goldman의 과정 신빙주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 대응들 중 어떤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를 판단하기에 앞서, 위의 예가 정당화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위의 예가 보여주는 바는 적절한 근거와 믿음 사이의 연결에 관한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는 믿음과 근거 사이의 연결에 대해 논리적인 관계면 충분하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위의 예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믿음과 그 믿음의 근거들 사이에 논리적인 관계가 성립하더라도 그 믿음이 정당화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위의 예에서 철수가 q를 믿은 것은 그의 p와 p → q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인식적으로 매우 부적절한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이 철수의 p와 p → q에 대한 믿음과 논리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매우 우연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우연성 때문에 우리는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되지 않은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가 제시하는 정당화의 조건인 믿음과 근거 사이의 논리적인 연결만으로는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예 1>에서 나타난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하지 못한다면 올바른 정당화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평가하는 올바른 기준은 인식 주체가 그 믿음을 인식적 목표에 부합하도록 가지는지에 근거해야 한다. 철수는 q에 대한 믿음을 인식적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지기 때문에,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이 그 믿음의 근거와 논리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우연적인 일이다. 그래서 정당화에 대한 올바른 입장은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당화에 대한 올바른 입장이라면 <예 1>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은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할 수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 2̥ Goldman의 정식화
2̥ 2̥ 1̥ 정당화 이론의 필수 요건
Goldman은 그의 논문 “What Is Justified Belief?”에서 올바른 정당화 이론이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이 두 가지 조건 중에서 올바른 정당화 이론이 되기 위한 첫째 조건은 실질적(substantive)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올바른 정당화 이론이라면, 한 믿음이 정당화되는 실질적인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Goldman이 이런 조건을 제시하는 이유는 매우 당연해 보인다. ‘정당화’라는 용어는 인식적 용어(epistemic term)이다. 그런데 정당화라는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인식적 용어를 사용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또 다른 인식적 용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한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을 그 믿음이 ‘보장된다’(warranted), 그 믿음이 ‘좋은 근거를 갖고 있다’(have good grounds) 등으로 설명한다고 가정해 보자. ‘보장된다’ 혹은 ‘좋은 근거를 가지고 있다’ 등은 인식적 용어로서 설명이 필요한 용어이다. 따라서 정당화 개념을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보장된다’, ‘좋은 근거를 가지고 있다’ 등의 인식적 용어를 충분히 설명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인식적 용어의 설명을 위해 역시 다른 인식적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정당화에 대한 설명은 무한히 길어지거나 순환에 빠질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인식적 용어를 비인식적 용어(non-epistemic term)만 가지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당화라는 인식적 용어를 비인식적 용어로 설명해야 한다는 Goldman의 제안은 매우 당연해 보인다.
Goldman이 올바른 정당화 이론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제시한 두 번째 조건은 그 이론이 설명적(explanatory)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은 한 믿음이 정당화되는 필요충분조건, 혹은 필요조건, 충분조건만을 단순히 기술한 정당화 이론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시간 t에 S가 빨간 것을 보았고 그때 S가 빨간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시간 t에 S가 갖는 ‘나는 빨간 것을 보고 있다’라는 믿음은 정당화된다”라고 제안하는 정당화 이론을 고려해 보자. 이 정당화 이론은 S가 갖는 ‘나는 빨간 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이 정당화되는 필요조건만을 단순히 서술하고 있다. 비록 이 기술이 정확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주장을 하는 정당화 이론은 S의 믿음이 왜 정당화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왜 S의 믿음이 정당화되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는 앞서 살펴본 인식적 우연성에서 찾을 수 있다. 앞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올바른 정당화 이론이라면 인식적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식적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식적 우연성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인식적 우연성의 원인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정당화된 믿음이 왜 정당화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단순히 정당화에 대한 필요충분조건만을 정확히 기술하는 것이 아닌, 한 믿음이 왜 정당화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정당화 이론만이 올바르다고 볼 수 있다.
2̥ 2̥ 2̥ Goldman의 인식적 우연성에 대한 진단
<예 1>을 다시 생각해 보자. 철수는 p와 p → q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믿음들에 근거하지 않고 q의 소리가 좋아서 q를 믿었다. 여기에서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이 철수의 p와 p → q에 대한 믿음과 논리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이 매우 우연적이었기 때문에 논리적인 관계에 근거한 정당화의 설명은 결함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결론을 피하기 위해서는 인식적 우연성을 배제할 수 있는, 설명적이고 실질적인 정당화 이론이 필요하다는 점 역시 살펴보았다.
Goldman은 전통적 견해가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정당화를 논리적인 관계로만 파악하려는 전통적 견해의 암묵적 전제에서 찾고 있다. Goldman은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당화의 조건에 인과적인 요소를 덧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은 p와 p → q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q의 소리가 좋다는 것에 의해 야기된 것이다. 그래서 q에 대한 철수의 믿음은 적절하지 않은 인과적인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직관적으로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논리적인 관계에 근거해서 정당화를 파악하려는 전통적 견해는 믿음의 형성과정이라는 인과적 요소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논리적 분석이 인과적 과정을 고려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데 그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전통적인 정당화 개념은 믿음의 인과적 형성과정에 관해 아무런 제약도 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 1>에서와 같은 우연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식적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할 수 있기 위해서는, 믿음의 인과적 형성과정에 대해 제약을 가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한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은 그 믿음이 ‘적절한 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의 ‘연결되어 있다’라는 표현이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과 그 믿음의 근거 사이의 연결로 논리적인 연결만으로는 부족하며, 인과적인 연결 역시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믿음과 근거 사이의 두 가지 관계 중 인과적인 관계를 무시할 경우 인식적 우연성이 생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정당화에 관한 전통적인 견해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정당화 조건에 인과적 요소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2̥ 2̥ 3̥ Goldman의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정식화
한 믿음이 정당화되는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인과적으로 적절하게 형성되었는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이 주장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당연히 다음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한 믿음이 인과적으로 적절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과적으로 적절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만 한다.
<예 1>에서 q에 대한 철수의 믿음은 인과적으로 적절하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q에 대한 철수의 믿음이 형성되게 된 인과적 과정은 있다. q의 소리가 좋다는 느낌으로부터 q에 대한 철수의 믿음이 인과적으로 야기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철수의 믿음이 적절하게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믿음을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인과적으로 적절하게 형성된다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인과적 과정의 적절성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위해서 우리는 인식적 정당화의 목표를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2. 1. 1. 절에서 인식적 정당화의 목표를 참인 믿음을 최대화하고 거짓인 믿음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우리는 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이 목표에 부합할 때 그 믿음을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 믿음이 정당화될 경우, 그 믿음은 인식적 목표에 부합하도록 인과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믿음이 바로 인과적으로 적절하게 형성된 것이다.
한 믿음이 참을 최대화하고 거짓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인과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해 보자. ‘인과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그 믿음을 산출한 인과적 과정이 있다’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지금부터 믿음을 산출한 인과적 과정을 ‘믿음형성과정(belief-forming process)’이라고 부르자. 그러면 ‘한 믿음이 참을 최대화하고 거짓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인과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참을 최대화하고 거짓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되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참을 최대화하고 거짓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참인 믿음을 거짓인 믿음보다 (충분한 정도로) 더 많이 산출한다’라고 달리 표현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한 믿음이 인과적으로 적절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은 ‘그 믿음이 참인 믿음을 거짓인 믿음보다 더 많이 산출하는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Goldman은 참인 믿음을 거짓인 믿음보다 더 많이 산출하는 경향을 ‘신빙성(reliability)’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Goldman에 따르면,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는 그 믿음을 산출한 믿음형성과정이 갖는 신빙성의 함수’가 된다. 그래서 정당화에 대한 이런 입장을 ‘과정 신빙주의(Process Reliabilism)’라고 부른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여 정당화에 대한 과정 신빙주의의 입장을 정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만약 시간 t에 S가 p를 믿는 것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되었다면,
시간 t의 p에 대한 S의 믿음은 정당화된다.
이 정식화에 사용된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란 용어는 참과 거짓의 비율, 인과적 과정 등과 같은 비인식적 용어로 설명되는 것이기에, 정식화 (1)은 믿음의 정당화에 관한 실질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인식적 우연성을 설명할 수 있고, 인식적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당화의 조건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설명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정식화 (1)은 Goldman이 제시한 정당화 이론의 필수요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식화 (1)에는 몇 가지 보충 설명이 필요한 문제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얼마나 높은 비율로 참인 믿음을 거짓인 믿음보다 더 많이 산출해야만 정당화에 충분한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Goldman은 명확한 비율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정확한 비율의 결정은 보다 전문화된 연구를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인다. 또한 우리는 정당화를 정도의 문제로 여긴다. ‘조금 더 정당화되었다’거나 ‘조금 덜 정당화되었다’ 등의 표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정확한 비율을 결정하지 않는 것이 정당화 개념의 일상적 용법에 보다 잘 어울린다고 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다만 ‘충분히 높은 신빙성’만을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또 다른 문제를 살펴보자. 정식화 (1)에서 신빙성은 믿음형성과정의 속성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신빙성은 통계적 속성이다. 엄밀히 말해서 통계적 속성은 유형(type)에만 부여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구체적인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는, 정식화 (1)에 따르면, 유형의 신빙성에 근거해서 판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제까지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을, 인과적으로 해석해서,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 그 믿음을 야기했다는 식으로 사용해 왔다. 따라서 정식화 (1)은 유형이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납득하기 힘든 주장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Goldman은 여기에 대해 믿음형성과정을 ‘기능적 처리과정(functional operation)’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기능적 처리과정은 특정한 입력(input)을 받아 특정한 출력(output)을 낳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형성과정을 특정한 입력을 받아 특정한 믿음을 산출하는 기능적 처리과정으로 이해할 경우, 유형이 원인이라는 전제를 사용하지 않고도 정식화 (1)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믿음형성과정을 이렇게 이해하면, 구체적인 믿음의 원인은 한 유형의 믿음형성과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입력이 된다.
이전까지의 문제들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믿음형성과정’의 범위를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 1>에서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의 원인을 q의 소리가 좋다는 철수의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철수가 q를 믿게 된 원인을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철수가 q를 믿게 된 인과적 과정을 “q를 읽을 때 어떤 소리가 났고, 그 소리를 철수가 들었고, 이 소리를 듣기 좋다고 철수가 느꼈고, 그래서 철수가 q를 믿었다”와 같이 보다 넓게 파악할 수도 있다. 인과 과정을 이렇게 넓게 파악할 경우,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의 원인은 q를 읽을 때 나는 소리가 된다.
인과 과정을 넓게 해석하는 입장은 믿음의 원인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파악한다. 그래서 한 믿음이 신빙성 있는 인과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는 것은 믿음의 내용을 이루는 객관적 사실과 그 믿음이 신빙성 있는 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을 표명하는 인식론자들은 믿음과 사실, 세계간의 신빙성 있는 인과 관계를 기압계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기압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경우, 실제 기압의 변화를 잘 나타내 준다. 기압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기압계가 1000mb를 가리킨다면, 실제 기압은 1000mb일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다. 그래서 정상적인 작동을 하는 기압계의 눈금은, 실제 기압과 기압계의 눈금 사이에 신빙성 있는 인과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기압에 대한 신빙성 있는 지표(reliable indicator)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믿음형성과정을 세계와 믿음 사이의 인과 과정으로 보고,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과 세계, 사실 사이에 신빙성 있는 인과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지표 신빙주의(Indicator Reliabilism)’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믿음형성과정을 세계로부터 우리의 믿음까지로 이루어진 인과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은 정당화에 대한 분석에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지표 신빙주의가 구체적인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되는지, 그리고 그 판단이 정당화에 대해 우리가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일상적인 생각과 잘 부합하는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다음의 예를 생각해 보자.
<예 2>
영우는 탁 트인 시골길을 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날씨는 맑았고 햇볕도 따뜻했다. 영우는 시력이 좋았고 몸 상태도 아주 좋았다. 길에는 차들이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경치를 감상하며 달리고 있었다. 길옆으로는 논이 펼쳐져 있었고, 그 가운데 초가집들이 몇 채 있었다. 영우는 처음 만난 초가집을 보고 ‘저것은 초가집이다’(p)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그 집은 초가집이었다. 그러나 그 구역에 있는 다른 모든 초가집처럼 보이는 것들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조품들이었다. 그래서 길에서 볼 때, 그것들은 예외없이 진짜 초가집처럼 보이게 서 있었고, 이 구역에 모조 초가집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모조 초가집들을 어김없이 진짜 초가집들이라 믿었다. 그리고 영우는 이 구역에 모조 초가집이 대부분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예에서 우리는 영우의 p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된 것이라고 간주해야 하는가? 영우의 p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시각을 통해 가지게 된 모든 믿음들을 정당화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영우의 시각은 매우 양호한 상태였고, 시각에 매우 적합한 상황에서 믿음을 형성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시각을 통해 형성된 믿음을 매우 잘 정당화된 믿음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예 2>에서의 영우가 가진 p에 대한 믿음은 정당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면 지표 신빙주의의 입장을 따른다면 어떻게 되는 지 살펴보자. 영우의 시각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우의 시각을 통해 획득된 믿음은 초가집에 대한 신빙성 있는 지표라고 보기 힘들다. 우연히 처음 본 초가집이 진짜 초가집이었을 뿐, 다른 모조 초가집들을 보았다 하더라도 철수는 이것들 역시 진짜 초가집이라고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p에 대한 영우의 믿음을 산출한 믿음형성과정을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지표 신빙주의는 영우의 p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매우 반직관적이다. 따라서, 지표 신빙주의를 정당화에 관한 이론으로 여긴다면, 지표 신빙주의는 너무 강한 정당화의 조건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지표 신빙주의가 정당화에 대해 매우 강한 주장을 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 이론을 전적으로 쓸모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성급하다. 이 이론은, Schmitt가 지적했듯이, 정당화에 대한 이론이라기 보다는 지식에 대한 이론으로 파악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리고 Goldman 역시 정당화의 조건에 대한 이론으로서라기 보다는 지식에 관한 이론으로서 지표 신빙주의적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지표 신빙주의는 정당화의 조건을 제시한다기 보다는 지식의 제4의 조건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이상의 논의에 근거해 볼 때, 정당화 이론으로서의 과정 신빙주의에 적합한 믿음형성과정의 범위는 세계에서부터 믿음까지로 이루어진 인과 과정보다는 좁게 설정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Goldman은 믿음형성과정의 범위를 인지적 사건들(cognitive events)로 한정하고자 한다. 이는 믿음형성과정의 범위를 감각기관의 자극으로부터 믿음까지로 보는 것이다. 물론 이 범위는 지각을 통한 믿음에 매우 잘 적용된다. 하지만 모든 믿음형성과정이 꼭 감각기관의 자극에서 시작될 필요는 없다. 논리적 추론이나 기억과 같은 믿음형성과정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날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 인간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인과 과정만을 적절한 믿음형성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제한된 믿음형성과정을 특별히 ‘인지적 믿음형성과정(cognitive belief-forming process)’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믿음형성과정을 인지적 믿음형성과정이라고 제한한다면, <예 2>의 영우가 가진 p에 대한 믿음은 정당화된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영우의 시각에 들어온 자극은 진짜 초가집이든 모조 초가집이든 관계없이, 두 경우 모두 ‘영우에게는’ 똑같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영우는 두 경우 모두 p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이다. 그래서 두 경우는 같은 인지적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시각을 통한 인지적 믿음형성과정은 신빙성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과정 신빙주의는 두 믿음을 모두 정당화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믿음형성과정의 범위 외에도, 정식화 (1)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또 있다. 앞의 논의에서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그 믿음형성과정이 거짓인 믿음보다 참인 믿음을 더 많이 산출한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논리적 추론과정을 생각해 보자. 일상적으로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과정은 매우 신빙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타당한 논리적 추론과정이라 하더라도 전제가 참이 아닐 경우 참인 믿음을 산출할 수 없다. 따라서 논리적 추론과정과 같은 인지적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이 있기 위해서는 전제가 참이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부가될 필요가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Goldman은 ‘조건부 신빙성(conditional reliability)’ 개념을 도입한다. 이 조건부 신빙성이란 믿음형성의 원인이 되는 것들 중에 믿음이 포함되어 있을 경우, 그 믿음이 참이어야만 그 믿음형성과정은 신빙성 있게 작동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개념이다. 믿음형성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믿음형성과정의 입력(input)이라 본다면, 논리적 추론이나 기억과 같은 인지적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은 입력믿음(input-belief)의 참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한 믿음형성과정의 입력에 믿음이 포함되어 있어 그 믿음의 참․거짓 여부에 따라 신빙성이 큰 영향을 받는 인지적 믿음형성과정을 ‘믿음의존적인(belief-independent) 믿음형성과정’이라고 부르고, 그렇지 않은 경우를 ‘믿음독립적인(belief-dependent) 믿음형성과정’이라고 부르자. 그러면 조건부 신빙성은 믿음의존적인 인지과정에, 단순한 신빙성은 믿음독립적인 인지과정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논의를 종합하여 정당화 이론으로서의 과정 신빙주의를 정식화해 보자.
(2) 만약 시간 t에 S가 p를 믿는 것이 신빙성 있는 인지적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면,
시간 t에 S가 가진 p에 대한 믿음은 정당화된다
(2a) 만약 시간 t에 S가 p를 믿는 것이 신빙성 있는 믿음독립적인 인지적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면,
시간 t에 S가 가진 p에 대한 믿음은 정당화된다
(2b) 만약 시간 t에 S가 p를 믿는 것이 조건부 신빙성을 가진 믿음의존적인 인지적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면, 그리고 이 인지적 믿음형성과정의 입력믿음들이 정당화된 것이라면,
시간 t에 S가 가진 p에 대한 믿음은 정당화된다
앞의 논의에서 믿음형성과정을 인지적 믿음형성과정에 한정하는 입장을 과정 신빙주의라고 하고, 믿음형성과정의 범위를 세계로부터 믿음까지로 넓게 해석하는 입장을 지표 신빙주의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과정 신빙주의를 고려할 때, 굳이 믿음형성과정을 인지적 믿음형성과정이라고 특별히 구분해서 부를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믿음의존적인 믿음형성과정과 믿음독립적인 믿음형성과정의 구분 역시 무시할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 이후의 논의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래서 이후 논의에서는 정식화 (2)보다는 정식화 (1)을 과정 신빙주의의 대표적 정식화로 간주할 것이다. 또한 이렇게 하는 데는 이후에 전개되는 논의들이 정식화 (1) 뿐만 아니라 정식화 (2), (2a), (2b) 모두에 적용되기 때문에 논의를 단순화하자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
3̥ 과정 신빙주의의 세련화
3̥ 1̥ 신빙주의에 대한 반론 Ⅰ
3̥ 1̥ 1̥ 증거주의
필자는 앞의 논의에서 과정 신빙주의를 정당화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이 인식적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하지 못한다는 점에 착안한 입장이라고 파악했다. 정당화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만을 충실히 견지할 경우, 직관적으로는 정당화된 것으로 볼 수 없는 믿음을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긴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예 1>에서 보았듯이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되는 것은 매우 우연적인 일이었다. 이런 인식적 우연성을 배제할 수 있어야만 올바른 정당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Goldman은 인식적 우연성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판단할 때, 믿음의 인과적 형성과정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Goldman은 정당화에 적절한 인과적인 연결을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에 근거해서 설명하고자 했고, 그 결과 과정 신빙주의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과정 신빙주의가 탄생하게 된 모태라고도 할 수 있는 인식적 우연성에 대해 Goldman의 입장과는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인식적 우연성에 대한 과정 신빙주의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이 성립하게 되면, 과정 신빙주의가 제안한 입장은 설득력을 크게 잃게 될 수 있다. 실제로 인식적 우연성에 대해 과정 신빙주의와는 상이한 해석을 내리는 입장이 존재한다. 특히 이 입장은 정당화를 믿음과 근거 사이의 논리적인 관계에 근거한 재구성만을 통해 파악하려는 전통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기에 특히 중요하다.
비록 인식적 우연성과 논리적인 연결의 불충분성을 인정하면서도 과정 신빙주의와는 다른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는 과정 신빙주의에 큰 타격을 주지는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입장은 인식적 우연성의 배제가 정당화 이론의 매우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인정하는 입장일 것이고, 그래서 정당화 조건에 믿음과 근거 사이의 논리적 관계 외에 다른 조건을 더 부과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인식적 우연성을 배제하기 위한 조건이 정당화 조건에 덧붙여져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은 전통적인 정당화 이론의 불충분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 점에서 과정 신빙주의와는 같은 길을 걷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화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입장은 인식적 우연성의 배제가 정당화 이론의 중심적인 과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입장에 따르면, 인식적 우연성을 배제하기 위한 조건을 정당화의 조건에 덧붙이고자 하는 시도는 억지라는 것이다. 만약 이 입장이 맞다면, 과정 신빙주의는 완전히 길을 잘못 든 것이며 헛된 망상의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인식적 우연성의 배제는 정당화 이론의 과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입장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해 보는 것이 매우 절실해 보인다.
과정 신빙주의를 뿌리째 흔들어 버릴 수도 있을 이런 입장의 대표적인 예로는 ‘증거주의(evidentialism)’가 있다. 증거주의는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는 그 믿음형성과정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는 전적으로 그 믿음과 인식 주체가 가진 다른 믿음들과의 ‘증거적 관계(evidential relation)’에 의해서만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증거주의의 정당화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EJ) 만약 시간 t에 S의 p에 대한 믿음이 그때 S가 가진 증거들과 잘 어울린다면(fit)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시간 t에 S의 p에 대한 믿음은 정당화된다.
이렇게 제안된 증거주의의 입장은 앞서 살펴본 전통적인 생각과는 다소 다르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EJ)에 나타난 증거주의는 논리 실증주의의 입장보다는 매우 유연한 모습을 띄고 있다. 우선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믿음뿐만 아니라 감각자료까지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EJ)에 나타난 ‘증거’는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사용한 근거라는 용어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 또, 정당화에 필요한 믿음과 증거 사이의 관계를 ‘잘 어울림(fitness)’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정당화에 필요한 믿음과 근거 사이의 논리적인 연결 속에 연역논리적인 추론관계뿐만 아니라 귀납논리적인 관계, 정합적 관계, 가설 연역적 관계 등을 포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관계를 총괄해서 ‘증거적 관계(evidential relation)’라 부르기로 하자.
그러나 (EJ)는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전통적 견해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는 앞에서 믿음과 근거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2. 2. 2. 절에서 정당화에 필요한 믿음과 근거 사이의 연결은 믿음과 근거 사이의 논리적인 연결과 믿음과 근거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로 구분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믿음과 근거 사이의 논리적인 연결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전통적인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위의 (EJ)에서는 정당화에 필요한 믿음과 근거 사이의 연결을 ‘잘 어울림’의 관계, 즉 증거적 관계라는 논리적인 연결만으로 한정시키고 있다. 이는 (EJ)가 정당화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으로 제시고 있다는 점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증거주의는 여전히 전통적 입장의 연장선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증거주의는, 전통적 입장보다는 다소 유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믿음과 근거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이 정당화에 필요한 연결이라는 점은 여전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3̥ 1̥ 2̥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증거주의의 반론
증거주의가 한 믿음의 정당화는 그 믿음과 근거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과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예 1>의 q에 대한 철수의 믿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제까지 <예 1>의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은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해 왔다. 그런데 증거주의는 q에 대한 철수의 믿음을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한다. 증거주의가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EJ)로부터 당연히 귀결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 1>에서 철수는 p에 대한 믿음과 p → q에 대한 믿음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은 철수가 가지고 있는 증거들과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된 것이라는 증거주의의 주장은 우리의 직관과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q에 대한 철수의 믿음이 정당화되지 않는 것이라 여긴다. 직관과 증거주의의 판단이 다르다면 증거주의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증거주의는 여기에 대해 직관에 근거한 우리의 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은 그가 가진 증거들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정당화된다고 보아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에 어떤 결함이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즉 인과적인 과정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다. 이 결함 때문에 우리는 q에 대한 철수의 믿음을 정당화되지 않는 것이라 판단하고 싶어하는데, 이 결함은 정당화 여부와 무관하다는 것이 증거주의의 입장이다. 대신에 증거주의는 우리가 철수의 q에 대한 믿음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잘 형성됨(well-foundedness)’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증거주의는 믿음과 근거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을 정당화에 필요한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잘 형성됨’이라는 개념의 필요조건으로서 간주하고자 하는 것이다.
Feldman과 Conee가 제시하는 ‘잘 형성됨’의 필요충분조건은 다음과 같다.
(EW) 시간 t에 S의 p에 대한 믿음은 잘 형성되어 있다 iff
(1) S의 p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된다
(2) S는 p에 대한 믿음을 다음 세 조건들을 만족하는 증거들의 집합 e에 근거해서 가진다
(a) S는 시간 t에 e를 증거로서 가진다
(b) p에 대한 믿음은 e와 잘 어울린다
(c) p에 대한 믿음이 잘 어울리지 않는, 더 포괄적인 증거들의 집합 e'을 S가 시간 t에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잘 형성됨’의 조건들은 증거, 잘 어울림 등과 같은 증거적 관계의 개념만을 이용해서 제시되어 있다.
이제까지 제시한 증거주의의 입장에 따르자면, 과정 신빙주의는 정당화에 관한 이론으로 볼 수 없다. 증거주의에 따르면, 정당화는 인과적인 과정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증거주의의 ‘정당화’와 ‘잘 형성됨’의 구분에 근거하면, 과정 신빙주의는 정당화에 관한 이론이라기 보다는 ‘잘 형성됨’에 관한 이론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그런데 증거주의의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증거주의는 과정 신비주의가 ‘잘 형성됨’에 관한 이론으로서도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과정 신빙주의는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라는 개념에 근거해 있다. 그런데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모호한 개념이며, 임의적일 가능성이 농후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증거주의의 이런 비판은 두 가지 논거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논거는 어떤 사람이 하나의 믿음을 형성했을 때, 그 믿음을 형성한 믿음형성과정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믿음이 잘 형성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 A가 하늘에 무지개가 걸린 것을 보고, 그것이 빛의 굴절에 의해 생긴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괜히 ‘저것은 천국으로 가는 다리다’라고 믿었다고 해 보자. 이 경우 A가 가진 믿음은 잘 형성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A의 믿음을 야기한 믿음형성과정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A의 믿음을 야기한 믿음형성과정을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으로 볼 경우,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은 신빙성 있는 것이므로, 과정 신빙주의는 A의 믿음은 잘 형성된 것이라 간주해야 한다. 그러나 A의 믿음을 야기한 믿음형성과정을 신빙성이 없는 ‘어거지로 믿는 믿음형성과정’으로 본다면, A의 믿음은 잘 형성되지 못한 것이 된다. 따라서 과정 신빙주의가 ‘잘 형성됨’에 대한 이론으로서라도 성립하기 위해서는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에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의 결정을 임의적이지 않게 객관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증거주의는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이 있다’는 말 역시 매우 이해하기 힘들다는 데 근거해서 과정 신빙주의를 비판한다. 앞에서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이 있다는 것은 그 믿음형성과정이 참인 믿음을 거짓인 믿음보다 더 많이 산출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어떤 믿음형성과정이 현실 세계에서는 신빙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형성과정은 Descartes가 데려온 악의적인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참인 믿음보다 거짓인 믿음을 훨씬 더 많이 산출할 것이다. 그래서 그 믿음형성과정을 악마의 세계에서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직관은, 악마의 세계이기 때문에 거짓인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믿음들은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하고 싶어하고, 나아가 잘 형성된 것으로 간주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과정 신빙주의는 신빙성 개념에 대한 보다 정교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증거주의는, 과정 신빙주의가 이 두 문제점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와 유관한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을, 증거주의의 입장에 따라, ‘증거에 잘 어울리는 믿음을 갖게 만드는 믿음형성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 방법을 따르면, 과정 신빙주의는 A가 가진 믿음은 증거에 잘 어울리는 믿음을 갖게 만드는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과정 신빙주의는 A의 믿음을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된 것이 아니기에 잘 형성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마의 세계의 경우, 증거에 잘 어울리는 믿음을 갖게 만드는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된 믿음은, 증거와 잘 어울리기에 정당화된 것으로, 그리고 잘 형성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직관에 잘 부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증거주의는 이상의 논의를 통해 과정 신빙주의가 ‘잘 형성됨’에 대한 적절한 이론이 되기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증거주의는 방금 제시된 과정 신빙주의의 문제점들은 (EW)에 근거할 경우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위에서 제시한, 과정 신빙주의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을 ‘증거에 잘 어울리는 믿음을 믿게 하는 믿음형성과정’으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믿음형성과정을 증거주의의 입장에 따라 규정하는 것이 과정 신빙주의에게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근거해서 증거주의는 (EW)가 과정 신빙주의보다 더 나은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증거주의의 주장대로 믿음과 근거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은 정당화와 무관한 것인가? 여기에 대해 다수의 인식론자들은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증거주의는 <예 1>의 철수가 q에 대해 가진 믿음을 정당화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우리의 직관이 q에 대한 철수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이유는 정당화와 ‘잘 형성됨’을 혼동하고 있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증거주의는 정당화와 ‘잘 형성됨’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증거주의가 주장한 정당화와 ‘잘 형성됨’의 구분은 오해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인식론자들은 ‘정당화됨(justifiedness)’과 ‘정당화 가능함(justifiability)’을 구분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정당화 이론의 주된 관심사는 ‘정당화 가능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당화됨’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당화 이론은 ‘어떤 사람이 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믿음이 정당화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그 사람이 그 믿음을 믿는다면 정당화될 것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당화 이론은 ‘정당화 가능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당화됨’에 관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래서 증거주의의 정당화 조건에 관한 정식화 (EJ)는 ‘정당화 가능함’에 관한 것이지, ‘정당화됨’에 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증거주의는 정당화 개념을 부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정당화 이론은 ‘정당화됨’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과 근거 사이의 인과적 관계에 관한 조건을 반드시 포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증거주의가 정당화 개념을 부적절하게 사용했다고 해서 증거주의의 정당화 이론이 곧바로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증거주의가 제시한 정당화에 대한 정식화 (EJ)가 ‘정당화 가능함’만을 고려한 것으로 정당화에 관한 정식화로는 부적절하다고 해도, ‘잘 형성됨’에 관한 정식화 (EW)를 ‘정당화됨’에 관한 정식화로, 인과적인 연결에 대한 조건을 고려한 정식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거주의는 정당화 이론으로서 정식화 (EJ)와 (EW)를 결합한 입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증거주의가 정당화 개념을 오해했다고 하더라도 증거주의가 과정 신빙주의에게 제기한 두 가지 문제점들은 여전히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증거주의가 제기한 두 가지 문제점들은 과정 신비주의가 믿음과 근거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을 잘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증거주의가 정당화에 대한 이론으로 탈바꿈할 수 있기 때문에,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에 필요한 인과적인 연결을 설명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증거주의의 입장을 따르는 것이라는 비판 역시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과정 신빙주의를 설득력 있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증거주의가 제기한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비판을 심도 있게 고찰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증거주의가 제기한 비판의 요점을 간추려 정리해 보자.
<증거주의의 반론>
[1] 과정 신빙주의는 정당화의 인과적 요소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a) 신빙성 개념에 문제가 있고
(b)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의 선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2] 만약 과정 신빙주의가 인과적 요소를 적절히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증거주의가 더 나은 입장이다
왜냐하면 (a) 과정 신빙주의가 인과적 요소를 적절히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증거주의적 입장을 따라 문제점들을 해결해야만 한다
(b) 그런데, 증거주의는 과정 신빙주의보다 명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3] 과정 신빙주의는 정당화 이론으로서 적절하지 않다
위의 정식화에 따르면, 과정 신빙주의가 증거주의의 반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결론 [3]을 도출할 수 있게 해 주는 [2]-(a)를 거부해야만 한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2]-(a)에 담겨있는 증거주의의 주장은 과정 신빙주의가 [1]의 (a)와 (b)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근거해 있다. 그러므로 [1]의 (a)와 (b)에서 제기된 문제점들을 과정 신빙주의가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만 [2]-(a)를 거부할 수 있다. 왜냐하면, [1]의 (a)와 (b)의 문제점들을 독자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란 ‘증거에 잘 어울리는 믿음을 갖게 하는 믿음형성과정’과 동의어가 될 가능성 높아지며, 그래서 [2]-(b)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3. 1. 3. 절에서는 우선 [2]-(b)에 나와 있는 증거주의의 주장을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3. 2.에서는 [1]에 나와있는 두 가지 문제점을 차례로 검토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앞서 제시한 과정 신빙주의의 정식화 (1)을 보다 세련화시켜 [2]-(a)를 거부할 수 있는 새로운 정식화를 제시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증거주의의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반론을 극복할 것이다.
3̥ 1̥ 3̥ 증거주의에 대한 비판
앞절에서 증거주의의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비판을 정리해 보았다. 이 절에서는 앞절에 있는 <증거주의의 반론> 중 [2]-(b)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이는 증거주의의 반론을 극복하기 위한 예비적 고찰의 성격을 띈다.
[2]-(b)는 증거주의가 과정 신빙주의보다 정당화의 인과적인 요소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EW)가 과정 신빙주의의 정식화인 (1)보다 더 명확하다는 데 근거해 있다. 물론 이 주장 역시 [1]-(a), (b)에 나타난 과정 신빙주의의 문제점과 이에 따른 [2]-(a)에 근거한 주장이다. 즉 과정 신빙주의가 사용하는 중심 개념들은 이해하기 힘든 개념들이어서, 과정 신빙주의는 증거주의적 입장에 따라 이해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근거한 주장이다. 그리고 증거주의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명확한 것들이라는 생각에 근거한 주장이다. 그러나 [1]-(a), (b)에 대한 증거주의의 분석이 올바르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증거주의가 과정 신빙주의보다 더 명확하게 인과적인 연결의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증거주의가 사용하는 개념이 과정 신빙주의가 사용하는 개념보다 더 명확한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증거주의가 정당화 조건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한 중심 개념으로는 ‘잘 어울림’과 ‘잘 형성됨’을 들 수 있다. 한 믿음이 근거들과 잘 어울린다는 것은 그 믿음과 그 믿음의 근거들이 증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고, 한 믿음이 잘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인식 주체가 적절한 방식으로 그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잘 형성됨’의 개념부터 살펴보자. 이 개념은 (EW)에서 잘 정식화되어 있다. 한 믿음이 잘 형성되었다는 것은 인식 주체가 적절한 방식으로 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적절한 방식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증거에 잘 어울리는 방식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EW)의 (2)-(c)에 나와있는 조건에 따르면, 그런 적절한 방식이 인식 주체가 가진 증거들의 집합에 상대화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c)는 p에 대한 믿음이 어울리지 않는, e보다 더 포괄적인 증거들의 집합 e'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p에 대한 믿음은 인식 주체가 가진 그 믿음에 대한 최대의 증거들의 집합과 잘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식 주체가 가진 그 믿음에 대한 최대의 증거들의 집합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이다. ‘최대의 증거들의 집합’이란 표현은 우선 인식 주체가 문제의 믿음을 믿을 때 가지고 있던 모든 믿음들과 감각 자료들을 포함하는 집합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대의 증거들의 집합’을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당장 난점에 부딪히게 된다. 우리 인간은 일반적으로 모순된 믿음들이나 모순을 도출하는 믿음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많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믿음들 역시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갖게되는 믿음들은 항상 우리가 갖는 최대의 증거들의 집합과 잘 어울리지 않을 매우 높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최대의 증거들의 집합을 ‘인식 주체가 문제의 믿음을 믿을 때 가지고 있던 모든 증거들의 집합’으로 간주할 경우, 우리가 일상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믿음들이, (EW)에 따르면 (2)-(c)의 조건 때문에,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야만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믿음들이 매우 많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각각의 믿음들이 p에 대한 믿음과 잘 어울리는지의 여부를 일일이 검사할 수는 없다. 또한 증거들의 집합을 무턱대고 최대의 집합이 아니라 이보다 축소시킨다고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어떤 믿음이든지 그 믿음이 어울리는 증거들의 집합이란 손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증거주의는 ‘p에 대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와 유관한 최대의 증거들의 집합’만을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약화된 입장 역시 나아진 것이 별로 없다. 약화된 입장은 p에 대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와 유관한 최대의 증거들의 집합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를 설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믿음의 정당화 여부와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의 결정 문제가 과정 신빙주의의 약점이라면, 증거주의 역시 동일한 맥락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증거주의가 ‘최대의 증거들의 집합’에 관한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결국 ‘믿음의 정당화 여부에 유관함’이란 말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측면에서 유관한지를 결정할 수 있는가?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증거들과 잘 어울려야 한다는 증거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잘 어울림’에서 찾고자 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증거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필자는 증거주의가 중점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잘 어울림’, ‘증거적 관계’ 등의 용어를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그리고 Feldman과 Conee 역시 이 용어들이 별 문제없이 이해될 수 있다고 여기는지, 이 용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 용어들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면, 이 용어들에 근거해서 자신의 입장을 정식화하고 있는 증거주의는 모호한 입장이 될 것이다.
그러면 ‘잘 어울림’이란 용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증거주의는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는 오로지 그 믿음과 증거 사이의 증거적 관계에 근거해서 판단되어야 한다고 (EJ)에서 주장한다. 물론 앞절에서 살펴본 바대로,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는 그 믿음과 근거 사이의 논리적인 연결과 인과적인 연결을 모두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증거주의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잘 형성됨’의 개념에 근거한 (EW)로 정당화를 설명할 때에만 그렇다. ‘잘 어울림’이란 용어는 인과적인 연결을 고려하지 않는 (EJ)에서 나타난 용어이기 때문에, 이 용어는 인과적 관계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증거주의가 내세우는 ‘증거적 관계’는 인과적인 연결과 무관한 것으로, 논리적인 연결에 근거해서만 설명해야 하는 개념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증거주의가 논리적인 연결을 연역논리적인 관계에만 한정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증거적 관계는 연역논리적 관계, 귀납논리적 관계, 최상의 설명적 관계(relation of best explanation)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외에 우리는 정합적 관계 역시 포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관계들 외에 우리는 직관적으로 한 믿음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관계로 여기는 많은 관계들 역시 증거적 관계에 포함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증거적 관계 속에 포함되어야 하는 관계들 중에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귀납 논리나 최상의 설명적 관계 등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아직 없는 것으로 보이며, 정합적 관계 역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증거주의가 의존하고 있는 ‘잘 어울림’이란 개념 역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확하지 않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증거주의가 정당화에 대해 사용하는 중심 개념인 ‘잘 어울림’과 ‘잘 형성됨’이 그렇게 명확한 개념은 아니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증거주의 역시 명확한 입장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 글에서 제시된 증거주의의 입장보다 더 세련된 증거주의의 입장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증거주의 역시 과정 신빙주의만큼이나 불명확한 입장이며 보다 세련화되어야 할 입장으로 보인다. 따라서 증거주의가 과정 신빙주의보다 인과적 연결에 대한 더 명확한 입장이라는 [2]-(b)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3̥ 2̥ 과정 신빙주의의 재정식화
3̥ 2̥ 1̥ 신빙성 개념에 대한 검토
3. 1. 2. 절에서 정식화한 증거주의의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반론, <증거주의의 반론> 중 [2]-(b)는 문제있는 주장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증거주의 역시 과정 신빙주의만큼이나 손쉽게 명확히 제시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고찰만으로 증거주의의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반론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다. <증거주의의 반론>에서 핵심을 이루는 주장은 [2]-(a)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a)에 나타나 있는, 과정 신빙주의는 중심 개념들이 문제가 많아서 인과적인 연결의 분석에 적합한 이론이 아니며,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증거주의의 입장을 따라야만 한다는 증거주의의 주장은 [1]-(a), (b)에 근거해 있다. 따라서 [2]-(a)의 주장이 타당한 것인지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1]-(a), (b)에서 증거주의가 제시하는 문제점들을 과정 신빙주의가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증거주의의 반론>의 [1]-(a)에서 증거주의가 지적하는 문제점은 신빙성 개념에 대한 것이다. 또 [1]-(b)에서 지적하는 문제점은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의 결정에 관한 것이다. 이 두 문제점들에 대해 과정 신빙주의가, 증거주의가 주장하는 ‘증거에 잘 어울리는 믿음을 믿게 하는 믿음형성과정’과는 다른, 독자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면 증거주의의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반론의 핵심 근거인 [2]-(a)를 거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선 [1]-(a)에 나타난 문제점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과정 신빙주의는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란 ‘거짓인 믿음보다 참인 믿음을 더 많이 산출하는 믿음형성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한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가장 쉽게 떠오를 수 있는 대답은 ‘현실 세계에서 그 믿음형성과정이 실제로 산출한 믿음들 중 참인 믿음들과 거짓인 믿음들의 비율로 결정하자’라는 대답일 것이다. 그런데 신빙성을 현실 세계에서의 실제 빈도(actual frequency)로 해석하자는 이런 대답은 심각한 난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가능세계에서의 빈도까지 포함해 해석하자는 제안 역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증거주의는 이와 같은 신빙성 해석의 문제점에 근거해 과정 신빙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므로 과정 신빙주의가 [1]-(a)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신빙성 해석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신빙성을 현실 세계의 실제 빈도로 해석하는데 따르는 문제점을 살펴보자. 신빙성을 현실 세계의 실제 빈도로 해석한다는 것은 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 여부를 그 믿음형성과정이 현실 세계에서 산출한 믿음들에 근거해서 판단하자는 주장이다. 그런데 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 여부를 현실 세계에서의 실제 빈도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그 믿음형성과정이 산출한 믿음들이 충분히 많아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충분히 많은 믿음들을 산출하지 않은 믿음형성과정이 낳은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에 관한 올바른 이론이기 위해서는 이런 믿음들의 정당화 여부 역시 타당하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빙성을 현실 세계에서의 실제 빈도로 해석할 경우, 과정 신빙주의는 이런 믿음들에 대한 정당화 여부의 판단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이는 적절한 정당화 이론이고자 하는 과정 신빙주의에게는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현실 세계에서는 소수의 믿음만을 산출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까지 판단하기 위해 가능세계(possible world) 개념을 끌어들여 보자. 현실 세계에서 소수의 믿음만을 산출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을 결정하는 데의 문제점은 신빙성 여부를 타당하게 판단할 수 있는 자료들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 여부를 현실 세계의 실제 빈도뿐만 아니라 가능세계에서의 빈도까지 고려해서 판단하자고 주장할 수 있다. 가능세계에서의 빈도까지 고려한다면, 문제의 믿음형성과정이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리 적은 양의 믿음들을 산출했다 하더라도, 그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 여부를 타당하게 판단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빙성을 가능세계에서의 빈도까지 고려해서 해석하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신빙성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가능세계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이 힘들다. 신빙성 여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가능세계의 범위를 모든 가능세계로 설정할 경우,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기껏해야 ‘연역논리적인 추론을 통한 믿음형성과정’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연역논리적인 추론을 통한 믿음형성과정마저도 신빙성이 없는 가능세계가 있을 수 있다. 악의적인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우리의 모든 믿음형성과정들이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가능세계의 범위를 모든 가능세계로 설정한다면, 과정 신빙주의는 우리가 갖는 많은 정당화된 믿음을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직관적인 귀결을 피하기 위해서는 신빙성 해석에 필요한 가능세계의 범위를 축소시킬 필요가 있다. 가능세계의 범위를 축소시키는 데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법은 ‘현실 세계와 가장 유사한 가능세계(closest possible world)’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정 신빙주의도 신빙성을 현실 세계와 가장 유사한 가능세계에서의 빈도로 해석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해석 역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을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이 참인 믿음을 산출할 빈도가 매우 낮은, 현실 세계와 가장 유사한 가능세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실 세계와 매우 유사한 가능세계 중의 하나인 인식 주체가 눈병에 걸린 세계를 상상해 보자. 이 눈병에 걸린 인식 주체가 시각을 통해 형성한 믿음들은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그래서 이 가능세계에서는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이 없을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이 없는, 현실 세계와 가장 유사한 가능세계가 존재할 경우, 우리는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을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이 물음은 가능세계 개념에 근거한 신빙성 해석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한 믿음형성과정이 가능세계에서 신빙성이 있다는 말 자체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는 문제점이 있다. 어떤 믿음형성과정이든지 그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이 있는 가능세계들과 신빙성이 없는 가능세계들이 함께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가능세계에서의 빈도를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가? 즉 고려의 대상이 되는 가능세계들 중 그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이 있는 가능세계들의 수와 그렇지 않은 가능세계의 수를 비교해서 결정할 것인가, 아니면 가능세계들 모두에서 그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될 믿음들의 개수를 바탕으로 참인 믿음들과 거짓인 믿음들의 수를 비교해서 결정할 것인가? 후자의 방법은 불가능해 보인다. 가능세계에서 한 믿음형성과정이 산출할 믿음들을 셀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기 힘든 말이다. 전자의 방법은 이런 점에서 조금 나아 보인다. 그러나 가능세계들의 수를 비교한다는 말 역시 이해하기 힘든 말임에는 틀림없다.
Goldman은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 여부를 ‘정상 세계들(normal worlds)’에 근거해서 판단하자고 제안한다. Goldman이 제안한 정상 세계들이란 ‘현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믿음들(general belief)과 일관적인(consistent) 세계들’이다. Goldman이 제안한 ‘정상 세계들’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정상 세계들’이란 것이 현실 세계는 아니기에, 가능세계의 일종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우리가 현실 세계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믿음들과 일관적인 세계들이란 분명 모든 가능 세계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현실 세계와 가장 유사한 가능세계들에 근거한 신빙성 해석의 문제점은 정상 세계들에 근거한 신빙성 해석에도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정상 세계들에 근거해서 신빙성을 해석하자는 Goldman의 제안 역시 가능 세계에 근거해서 신빙성을 해석하는 데 따르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가능 세계나 현실 세계에서의 빈도에 근거해서 신빙성을 해석하는 것은 해결하기 힘든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정 신빙주의는 이론으로서 성립되기조차 힘든 입장인 것인가? 신빙성 개념을 적절히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신빙성을 빈도로 해석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해서 신빙성을 적절히 해석할 방법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신빙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찾기 위해서는, 신빙성 해석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들이 모두 신빙성을 빈도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신빙성을 꼭 빈도로만 해석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Goldman 역시 신빙성을 꼭 빈도로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Goldman은 신빙성을 ‘실제 빈도’나 ‘성향(propensity)’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떤 것이 신빙성 개념에 더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단지 일상적인 정당화 개념이 이 점에 대해 모호하기 때문에 모호한 채로 남겨 두어도 좋다고 말한다.
Goldman은 이 문제를 모호한 채로 남겨 두고자 하지만, 신빙성에 대한 빈도 해석이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과정 신빙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해석이 신빙성 해석에 가장 적합한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내려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과정 신빙주의의 입장에 적합한 신빙성 해석은 신빙성을 성향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본다. 신빙성이란 기본적으로 참인 믿음과 거짓인 믿음의 비율이다. 이 비율은 확률이다. 그래서 신빙성을 믿음형성과정의 성향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신빙성을 확률의 성향 해석(propensity interpretation of probability)에 따라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확률에 대한 성향 해석은 Popper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다. Popper는 한 사건이 일어날 확률을 계산할 준거 집합의 구성원들이 제한된 소수(小數)인 경우, 그 사건의 확률을 설명하는 데 빈도 해석이 타당하지 않다고 보고, 이를 위해 성향 해석을 제안했다. 그래서 신빙성을 빈도로 해석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인 현실 세계에서 소수의 믿음만을 산출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 결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가능세계 개념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믿음형성과정의 속성인 신빙성을 믿음형성과정이 산출한 믿음들의 참일 빈도로 해석하기보다는, 그 믿음형성과정이 가지고 있는 참인 믿음을 산출할 경향성(tendency)을 성향해석으로 파악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런데 경향성이라는 것은 주위 상황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남을 잘 도와주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항상 자나깨나 남을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혼자 있을 때, 혹은 잠잘 때,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을 때는 도와줄 남이 없고, 이때는 남을 도와주는 경향성이 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성향이라도 그 경향성이 발현될 상황이 형성되어야만 그 성향이 발현하게 된다.
남을 잘 도와주는 경향성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도와줄 남이 있어야만 하듯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 역시 상황이 갖추어져야 신빙성 있게 작동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은 ‘적절한 입력조건(adequate input-condition)’ 하에서만 신빙성 있게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빙성 개념은 입력조건에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을 생각해 보자. 통상적으로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믿음형성과정이 항상 신빙성 있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인식 주체의 건강 상에 문제가 있거나, 시야가 가려져 있거나, 빛의 밝기가 충분하지 않거나, 대상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시각을 통해 형성된 믿음이 참일 가능성이 낮아진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은 적절한 조건이 형성되어야 신빙성 있게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빙성은 입력조건에 상대적인 것이기에,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R) 믿음형성과정 P는 신빙성이 있다
=df 믿음형성과정 P는 ‘적절한 입력조건 I’ 하에서 거짓인 믿음보다 참인 믿음을 더 많이 산출하는 경향성을 나타낸다
와 같이 정의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적절한 입력조건’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믿음형성과정 P가 일단 작동하는 데는 무한한 입력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이 무한한 입력조건들 중에서 믿음형성과정 P가 신빙성 있게 작동하는 데 필수적인 입력조건들만을 간추려서 ‘적절한 입력조건’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믿음형성과정 P가 일단 작동하는 경우의 모든 입력조건을 A라고 해 보자. A속에는 많은 세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 세부 요소들 중의 한 요소가 믿음형성과정 P가 신빙성 있게 작동하는데 영향을 미친다면, 그 요소는 적절한 입력조건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세부 요소들 중의 어떤 한 요소가 믿음형성과정 P가 신빙성 있게 작동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지의 여부는 그 요소를 제외한 입력조건 하에서 믿음형성과정 P가 작동했을 때와 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입력조건 하에서 작동했을 때의 신빙성의 변화를 조사해 봄으로써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사과정을 통해 우리는 믿음형성과정 P의 신빙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이렇게 찾아낸 요소들로 적절한 입력조건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빙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의 최대 집합을 ‘적절한 입력조건 I’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믿음형성과정의 적절한 입력조건이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는지에 대한 탐구는 인지 심리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적절한 입력조건을 신빙성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의 최대 집합으로 본다면, 구성요소들이 엄청나게 많을 수 있기 때문에,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 적절한 입력조건 하에서 작동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적절한 입력조건 하에서 신빙성 있게 작동한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획득된, 정당화되는 믿음들을 거의 갖지 못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적절한 입력조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엄청나게 많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시각의 경우를 고려해 보자.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요소들이란 눈의 망막에 맺히는 자극들 중 우리 인간이 처리할 수 있는 것들로 한정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망막에 맺히는 자극을 처리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모듈 수는 엄청나게 많지는 않아 보인다. 더구나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에 미세한 변화만을 일으키는 요소들은 ‘관용의 원리(The Principle of Charity)’를 빌어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2̥ 2̥ 일반성 문제에 대한 검토
앞절에서 과정 신빙주의를 신빙성 개념의 문제점에 근거해 비판하는 입장을 고려해 보았다. 신빙성을 빈도로 해석하지 않고 성향으로 해석하면, 이런 비판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살펴보았다. 그래서 과정 신빙주의는 3. 1. 2. 절에 있는 <증거주의의 반론>의 [1]-(a)에 대해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증거주의의 반론>의 핵심인 [2]-(a), 과정 신빙주의가 인과적인 연결을 적절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증거주의의 입장을 따라야만 한다는 주장을 완전히 거부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2]-(a)는 [1]-(a)뿐만 아니라 [1]-(b)에도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앞절에서는 [1]-(a), 즉 신빙성 개념의 문제점에 근거한 비판에 대해서만 검토해 보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았을 뿐이다. 따라서 [1]-(b),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극복할 수 있어야 <증거주의의 반론>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증거주의의 반론 [1]-(b)를 검토해 보자. 이 반론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다음의 예를 보자.
<예 3>
영희는 해가 방금 져서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는 저녁, 그녀의 방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밖의 정원에는 그녀의 아이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영희는 정원 너머의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흰색의 원반 모양의 물체가 공중을 지나갔다. 그녀는 자신이 아이들에게 며칠 전 흰색의 원반놀이기구를 사주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하고 있다는 생각에 매력을 느껴 그 물체가 U.F.O라고 믿었다.
이 예에서 영희의 믿음은 정당화되는가? 이 물음에 과정 신빙주의는 어떻게 답하는가? 과정 신빙주의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영희의 믿음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면 <예 3>에서 영희의 믿음을 산출한 믿음형성과정은 무엇인가? 영희의 믿음을 산출한 믿음형성과정을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이라 해 보자. 우리는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을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과정 신빙주의는 영희의 믿음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산출된 것이므로 정당화된다고 간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직관적으로 영희의 믿음을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반직관적인 결론을 피하기 위해 과정 신빙주의는 <예 3>의 영희의 믿음을 형성한 믿음형성과정을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보다 좁게 구체적으로 설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얼마만큼 구체적으로 설정해야 하는가? 또 어떤 기준에 따라 설정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타당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과정 신빙주의는 정당화 이론으로서 적합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그 믿음의 정당화에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결정하는 것이 매우 자의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정 신빙주의가 문제의 믿음이 정당화되는지의 여부를 구체적이지만 자의적이지는 않은 방식으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의 정당화에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결정할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매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Feldman은 이 문제를 ‘일반성의 문제(The Generality Problem)’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다시 두 가지의 세부 문제들로 나뉜다.
<예 3>에서 영희의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결정하는데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반직관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해 매우 좁고 구체적으로 결정하자고 제안해 보자. 너무 구체적으로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결정할 경우, 그 믿음에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은 단 하나뿐일 것이다. 이 경우 그 믿음형성과정이 산출한 단 하나의 믿음이 참일 경우, 그 믿음형성과정은 무조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일 것이고, 그래서 그 믿음은 정당화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참인 믿음들이 정당화될 것이다. 이렇게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너무 좁게 설정할 경우, 모든 참인 믿음은 정당화된다는 이상한 결론을 낳게 된다. 이와 같은 문제를 Feldman은 ‘단일 경우의 문제(The Single Case Problem)’라고 부른다.
이 문제 외에 또 다른 일반성 문제는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너무 넓게 결정했을 때 생긴다. <예 3>에서 영희의 믿음을 산출한 믿음형성과정을 다소 넓게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이라고 간주한다면, 영희의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반직관적인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은 일반적으로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으로 간주되기에, 과정 신빙주의는 이 믿음형성과정을 거쳐 산출된 영희의 믿음을 정당화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반직관적인 결론을 인정할 수 없다면, 과정 신빙주의는 영희의 믿음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산출되었다 하더라도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신빙성 있는 동일한 믿음형성과정을 거쳐 산출된 믿음들이라 하더라도 정당화되는 경우가 있고 정당화되지 않는 경우가 있게 된다. 이런 경우가 생긴다면,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그 믿음을 산출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에 근거해 판단하고자 하는 과정 신빙주의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것은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너무 넓게 결정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신빙성 있는 동일한 믿음형성과정을 거쳐 산출된 믿음들이라 하더라도 정당화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게 되는 문제를 Feldman은 ‘비구분의 문제(The No-Distinction Problem)’라고 부른다.
일반성의 문제를 과정 신빙주의가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일반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반성의 두 문제들 중 첫 번째 문제를 먼저 살펴보자. 단일 경우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이유를 Feldman은 믿음형성과정을 너무 좁고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데 있다고 진단한다. 믿음형성과정을 너무 좁게 설정하게 되면, 그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을 판단할 사례들이 극소수이거나 단 하나 뿐이게 된다. 그런데 그 극소수의 믿음들이나 단 하나의 믿음의 참․거짓 여부에 근거해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을 결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단일 경우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을 빈도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단일 경우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신빙성을 빈도로 해석하는 데 그 출발점을 두고 있다. 신빙성을 성향으로 해석할 경우 믿음형성과정이 산출한 믿음이 현실 세계에는 단 하나뿐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믿음이 참이라 하더라도 그 믿음형성과정을 신빙성 있는 것이라 간주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따라서 신빙성을 성향으로 해석하게 되면 단일 경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빙성을 성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완전히 단일 경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아니다. Feldman은 신빙성을 성향으로 해석하더라도 단일 경우의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Feldman은 이를 주장하기 위해 Schmitt의 입장을 비판한다. Schmitt는 “믿음형성과정을 구체적이고, 완전히 특수화된 사건(concrete, completely specific event)으로 간주하고, 그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을 참인 믿음을 산출하는 그 믿음형성과정의 성향으로 간주하자”라고 주장한다. Schmitt의 이런 주장을 따른다면, 신빙성을 성향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단일 경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믿음형성과정을 ‘구체적이고, 완전히 특수화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비구분의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반성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믿음형성과정을 ‘구체적이고, 완전히 특수화된 사건’으로 볼 경우, 아무리 신빙성을 성향으로 해석하더라도 단일 사건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구체적이고, 완전히 특수화된 사건’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구체적이고, 완전히 특수화된 사건’이라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단 하나뿐인 사건이다. 나아가 모든 가능세계를 통틀어도 단 하나뿐인 사건이다. 그렇다면, 그 사건에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 여부는 그 믿음형성과정이 산출한 단 하나의 믿음에 근거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단일 경우의 문제가 다시 발생하게 된다. 이는 신빙성을 믿음형성과정의 성향으로 파악하려고 했던 의도와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Schmitt의 제안이 단일 경우의 문제를 다시 불러일으키게 되는 이유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Schmitt의 제안은 믿음형성과정을 ‘구체적이고, 완전히 특수화된 사건’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 이 제안은 신빙성을 성향으로 파악할 때 얻을 수 있는 장점인 단일 경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왜 Schmitt는 믿음형성과정을 극단적으로 좁게 설정하려고 한 것인가? 믿음형성과정을 보다 넓게 설정한다면 신빙성을 성향으로 파악하는 의도를 살릴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단일 경우의 문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형성과정을 보다 넓게 설정하려 할 때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다. 바로 비구분의 문제이다. Schmitt는 구체적이고, 완전히 특수화된 사건으로 믿음형성과정을 설정하지 않을 경우 비구분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 문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라고 여기는 듯하다.
따라서 신빙성을 믿음형성과정의 성향으로 파악하더라도 정당화 여부에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의 결정 기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일반성 문제, 특히 단일 경우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신빙성을 성향으로 파악하면서도 믿음형성과정을 Schmitt의 입장보다 넓게 설정해야 한다면, 비구분의 문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인가?
Goldman은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설정하기 위한 명시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은 최소한 내용중립적(content-neutral)이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는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너무 좁게 설정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넓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제안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이 문제에 대한 Goldman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단서는 찾아 볼 수 있다.
Goldman은 과정 신빙주의를 제안하면서, 정당화된 믿음을 산출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들의 예들로서 표준적인 지각과정(standard perceptual process), 기억(remembering), 좋은 추론(good reasoning), 내성(introspection) 등을 들고 있다. 여기에 근거해서,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이렇게 넓게 설정하는 견해를 Feldman은 ‘표준적 견해(The Standard View)’라 부른다. 그런데 이렇게 넓게 규정하는 것은, <예 3>에서 보았듯이 비구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비구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표준적 견해보다는 좁게, Schmitt의 입장보다는 넓게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설정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비구분의 문제가 제기하는 핵심적인 사항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비구분의 문제는 ① 믿음의 정당화 여부와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결정할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는 점과 ②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넓게 설정하면, 동일한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된 믿음들이 정당화되기도 하고 정당화되지 않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비구분의 문제가 제기하는 핵심 사항 ②를, Schmitt와 같은 과정 신빙주의자나 Feldman과 같은 비판가들은, 정당화되는 믿음과 그렇지 않은 믿음을 각기 다른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는 점을 보임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믿음형성과정을 너무 좁게 설정해야 하기 때문에, 용이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구분의 문제가 제기하는 핵심 사항 ②를, 과정 신빙주의가 반드시 두 경우 서로 다른 믿음형성과정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인 것 같다. 3. 2. 1. 절의 (R)에 나타나 있듯이 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은 그 믿음형성과정이 작동한 입력조건에 상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한 입력조건에서 신빙성이 있었던 믿음형성과정이 적절하지 않은 다른 입력조건 하에서는 신빙성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따라서 필자는 핵심 사항 ②에 대처하기 위해 믿음형성과정을 너무 좁게 설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정 신빙주의는 정당화되는 믿음은 그 믿음형성과정이 적절한 입력조건 하에서 신빙성 있게 작동해서 산출된 것이며, 정당화되지 않는 경우는 그 믿음형성과정이 적절하지 못한 입력조건 하에서 신빙성 있게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매우 좁게 설정하지 않더라도 동일한 믿음형성과정에서 정당화되는 믿음과 그렇지 않은 믿음들이 산출되는 것은 과정 신빙주의에게 별 문제거리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비구분의 문제가 제기하는 핵심 사항 ①을 검토해 보자. 핵심 사항 ①은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와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결정할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Feldman은 과정 신빙주의가 <예 3>에서의 영희의 믿음을 정당화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있음을 지적한다. 영희의 믿음을 ‘바램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된 것으로 파악한다면, 영희가 가진 믿음의 정당화 여부에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은 신빙성 없는 믿음형성과정이 된다. 그래서 과정 신빙주의는 영희의 믿음이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Feldman의 이런 지적은 정당화 여부에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의 결정이 임의적일 수 있기에 과정 신빙주의는 반례들에 대해서 ‘어떠한 반례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으로(ad hoc)’ 대처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과정 신빙주의가 비구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핵심 사항 ①을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Feldman의 입장은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표준적 견해보다는 좁게 결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객관적 근거가 없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믿음형성과정들을 표준적 견해보다 세부적으로 나눌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을 고려해 보자. 이는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 청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 미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 등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도 더욱 더 좁게 나누어질 수 있다. ‘시각을 통해 대상을 인지하는 믿음형성과정’, ‘시각을 통해 문자를 이해하는 믿음형성과정’ 등등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구분들은 인지심리학이 탐구한 성과에 근거해서 나누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인지심리학이 구분하는 믿음형성과정들은 임의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인지심리학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믿음형성과정을 신경생리학이 밝혀주는 우리의 뇌 구조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서 구분한다. 그런데 신경생리학은 인간의 뇌 구조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제공한다고 인정된다. 그러므로 인지심리학이 구분하는 믿음형성과정들은 객관적인 토대 위에서 구분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을 고려해 보자. 인지심리학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시각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은 ‘시각을 통해 문자를 이해하는 믿음형성과정’과 ‘시각을 통해 대상을 인지하는 믿음형성과정’ 등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렇게 나뉜 믿음형성과정들은 그 과정들이 뇌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뇌의 특정 부위를 손상당한 사람의 경우, 그 부위에 위치한 믿음형성과정만을 수행하지 못할 뿐, 다른 믿음형성과정들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에 근거해서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실독증(Alexic agnosia)에 걸린 사람을 고려해 보자. 이 사람은 뇌의 특정 부위를 손상당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시각을 통해 대상을 인지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 부위를 손상당한 후부터 유독 시각을 통해 문자를 이해하는 능력만을 상실했다. 그렇지만 말은 알아듣는다. 따라서 ‘시각을 통해 문자를 이해하는 믿음형성과정’과 ‘시각을 통해 대상을 인지하는 믿음형성과정’은 객관적으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인지심리학 혹은 신경생리학의 탐구 결과에 근거해서 객관적으로 정당화 여부에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을 결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하나의 믿음형성과정은 여러 개의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각을 통해 문자를 이해하는 믿음형성과정’은 시각자극을 처리하는 인지처리과정과 이렇게 처리된 자료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의미를 파악하는, 인지처리과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한 믿음형성과정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들 중 어느 하나가 잘못 작동한다면, 그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은 현저하게 저하될 수도 있다. 따라서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은 입력조건뿐만 아니라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들의 작동조건에도 영향을 받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한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 있게 작동하기 위한 조건으로 적절한 입력조건 I 이외에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들이 잘 작동해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여야 한다. 이 조건을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들의 적절한 작동조건 O’라고 하자.
과정 신빙주의를 이렇게 세련화시킨다면, <예 3>의 영희의 믿음은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객관적으로 결정된 ‘시각을 통해 대상을 인지하는 믿음형성과정’을 거쳐 산출된 것이고 이 믿음형성과정이 일반적으로 신빙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입력조건 하에서 작동한 것도 아니고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이 정상적으로 작동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의 결정이 과학적 탐구 성과에 근거하기 때문에 임의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 또한 과정 신빙주의는 동일한 믿음형성과정이 정당화되는 믿음을 산출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점과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의 결정이 임의적이지 않다는 점을 모두 보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과정 신빙주의는 비구분의 문제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Feldman이 제시하는 또 다른 예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Feldman은 동일한 믿음형성과정이 동일한 입력조건과 동일한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의 작동조건 하에서도 정당화된 믿음과 그렇지 않은 믿음을 산출할 수 있다고 반론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우로 야구 주심의 예를 제시한다. 야구 주심의 경우,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밝기에서, 같은 투수가 던진 공을 판정하는데, 각각의 판정은 정당화 정도가 다를 수 있으며, 정당화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즉 일상적으로 ‘시각을 통해 공을 판정하는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 있게 작동할 수 있는 적절한 입력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에서라도 정당화되지 않는 믿음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당화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맥락의존적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야구를 관람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구에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투수가 던진 공의 구질과 그 구질의 스트라이크 존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일상적인 사람들의 스트라이크 여부에 대한 판단으로는 정당화되는 믿음들이 야구 주심의 경우에는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다. 또 알래스카 사람들은 흰색의 종류를 매우 다양하게 구분하는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흰색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정당화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알래스카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정당화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적절한 입력조건’이나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의 적절한 작동조건’은 맥락에 따라 그 구성요소가 달라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문가의 경우는 그 전문 분야에 대한 믿음형성과정의 적절한 입력조건과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의 적절한 작동조건이 일상인들보다는 까다로울 것이다. 그러므로 야구 주심의 경우에는 적절한 입력조건이나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의 적절한 작동조건이 매우 까다로울 것이기에, 일상적 우리의 ‘시각을 통해 공을 판정하는 믿음형성과정’과 주심의 믿음형성과정의 입력조건과 작동조건이 동일하다고 말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같은 믿음형성과정과 같은 입력조건과 작동조건 하에서도 정당화 정도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정당화 정도가 다른 것이 정당화되는 경우와 정당화되지 않는 경우의 극단적인 형태가 아닌, 정당화되기는 하지만 조금 더 정당화되는 경우와 조금 덜 정당화되는 경우로 나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만약 동일한 조건들 하에서 동일한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된 믿음들이 정당화되는 경우와 정당화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이는 입력조건과 작동조건에 이전까지는 포함되지 않았던 새로운 요소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입력조건과 작동조건에 이 새로운 요소를 추가하게 된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경우 동일한 조건들 하에서 작동한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산출된 것으로 보지 않게 된다.
그리고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믿음형성과정이 산출한 믿음들이 조금 덜 정당화되고 조금 더 정당화되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과정 신빙주의의 약점이라기 보다는 정당화의 일상적인 의미를 더 잘 반영하고 있다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정당화에 대한 일상적인 생각은 정당화를 정도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절한 입력조건과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의 적절한 작동조건이 맥락에 의존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Feldman의 야구 주심의 예는 무시해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과정 신빙주의는 동일한 믿음형성과정이라도 입력조건과 작동조건에 따라 정당화된 믿음과 그렇지 않은 믿음을 산출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두 경우를 구분해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구분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신빙성을 성향으로 해석하는 동시에, 믿음형성과정을 너무 좁게 설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단일 경우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세련화된 과정 신빙주의를 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3) 만약 시간 t에 S가 p를 믿는 것이 신빙성 있는 인지적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면,
시간 t에 S가 가진 p에 대한 믿음은 정당화된다
(R2) 인지적 믿음형성과정 P는 신빙성이 있다
=df 믿음형성과정 P는 맥락 C에 의해 규정된 <적절한 입력조건 I,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의 적절한 작동조건 O> 하에서 거짓인 믿음보다 참인 믿음을 더 많이 산출하는 경향성을 나타낸다.
이 정식화는 2. 2. 3. 절에 있는 정식화 (2)보다 단순하다. 정식화 (2)는 기억이나 논리적 추론을 통한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이 있기 위해서는 입력믿음들이 참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데 근거해서 조건부 신빙성 개념을 도입한다. 그래서 믿음형성과정을 믿음의존적인 믿음형성과정과 믿음독립적인 믿음형성과정으로 나누어 각각 (2a)와 (2b)로 정식화하고 있다. 그러나 정식화 (3)은 <적절한 입력조건 I,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의 적절한 작동조건 O>에 입력믿음이 참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에 (2a)와 (2b)의 구분이 필요하지 않다.
이제 과정 신빙주의가 정식화 (3)의 형태로 입장을 제시한다면 3. 1. 2 절에 있는 <증거주의의 반론>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증거주의의 반론>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장인 [2]-(a), 과정 신빙주의는 증거주의의 입장을 따를 때에만 정당화 이론으로서 올바른 이론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정식화 (3)은 증거주의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증거와 잘 어울리는 믿음을 믿게하는 믿음형성과정’만을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는 [2]-(a)의 근거인 [1]-(a), 신빙성 개념의 문제와 [1]-(b), 일반성 문제에 근거한 증거주의의 반론을 정식화 (3)이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결정하는 데는, 인식적 우연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믿음과 근거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인과적인 연결을 고려하는 데 과정 신빙주의가 적합한 이론임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과정 신빙주의는 정당화 이론으로서 적어도 인과적인 연결에 대해서는 필수적이며 적합한 이론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4̥ 내재주의와 외재주의
4̥ 1̥ 신빙주의에 대한 반론 Ⅱ
4̥ 1̥ 1̥ BonJour의 반례
이제까지 필자는 본 논문에서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에 대한 필수적인 이론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정당화 조건에는 인과적인 연결에 관한 조건이 필수적이라는 점과 과정 신빙주의가 인과적인 연결에 대한 적절한 이론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그런데 과정 신빙주의는 한 믿음이 정당화되는 조건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는 않으며, 원리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대표적인 입장으로 내재주의(Internalism)가 있다.
내재주의의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비판의 기본 의도는 악의적인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의 예에서 잘 드러난다. 현실 세계에서는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 악마의 세계에서는 참인 믿음을 거의 산출하지 못한다. 그래서, 과정 신빙주의의 입장에 따르면, 악마의 세계에서는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산출된 믿음이라 하더라도 모두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신빙성을 비록 성향으로 해석하고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을 입력조건과 작동조건에 상대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더라도, 과정 신빙주의는 악마의 세계에서의 믿음들을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하기 힘들어 보인다. 악마의 세계에서는 입력조건과 작동조건이 현실 세계와 동일하기 때문에 현실 세계와 동일한 조건들 하에서 믿음형성과정이 믿음을 산출한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에서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라 하더라도 신빙성 있게 작동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악마의 세계에서는 참인 믿음을 거의 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악마의 세계에서 과정 신빙주의는 거의 모든 믿음들이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런데 비록 악마의 세계에서 형성된 믿음이라 하더라도 정당화된 것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이 있다. 현실 세계에서 근거들을 충분히 감안해서 합리적으로 가진 믿음은 정당화된다. 이런 믿음들은 악마의 세계에서도 역시 정당화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그 믿음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정당화되는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과정 신빙주의는 이런 믿음을 정당화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과정 신빙주의는 문제가 있는 입장이라 볼 수 있다.
정당화에 대해 내재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이점에 근거해서 과정 신빙주의를 정당화 이론으로서 부적절하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내재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과정 신빙주의를 비판하는 글들 중에는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 조건에 대한 필수적인 입장조차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글들이 있다. 또 다른 글들은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 조건에 대한 필수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충분한 입장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에 대한 필수적인 이론조차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인과적인 연결이 정당화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생각에 기초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과적인 연결이 정당화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에 대한 필수적인 이론조차 될 수 없다는 주장은 과정 신빙주의가 악마 세계의 예를 설명할 수 없는데 반해, 내재주의는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과적인 연결까지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내재주의가 과정 신빙주의에 대해 가한 비판을 올바르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내재주의의 입장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내재주의가 인과적인 연결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시급한 것은 악마 세계의 예를 통해 내재주의가 보여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내재주의가 악마 세계의 예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정당화 개념에 합리성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악마의 세계에서 비록 신빙성이 없는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산출된 믿음이라 하더라도 그 믿음이 인식 주체에게 합리적인 믿음이라면 정당화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재주의가 정당화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하는 인식 주체의 합리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히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 그 믿음을 갖는 것이 인식 주체에게 합리적이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한 합리성의 조건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BonJour가 제시하는 예들을 살펴보자. 그리고 이 예들이 시사하는 합리성의 조건을 찾아보자.
BonJour는 과정 신빙주의의 정당화 조건을 만족시키지만 직관적으로 정당화된 것으로 볼 수 없는, 합리적인 믿음이라고 볼 수 없는 경우를 다음의 네 가지 예들로 제시하고 있다.
<예 4>
정남이는 자기가 투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다. 그러나 정남이는 자기가 투시력을 가진다는 믿음에 대해 아무런 지지 증거도, 반대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느 날 정남이는, 뚜렷한 이유없이, 대통령이 인천에 있다(p)고 믿었다. 그때 정남이는 대통령이 서울에 있다고 보도하는 많은 뉴스, 신문 등을 보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실제로 대통령은 인천에 있었고 보도들은 대통령의 신변 보호를 위해 조작된 것이었다. 더구나 정남이는 실제로 투시력을 가지고 있었고, p를 믿을 때 투시력이 신빙성 있게 작동하기 위한 입력조건과 작동조건이 충분히 만족되어 있었다. 그리고 p에 대한 믿음은 투시력에 의해 산출된 것이었다.
<예 5>
찬옥이는 자기가 투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다. 그러나 찬옥이는 자기가 투시력을 가진다는 믿음에 대해 아무런 지지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찬옥이는, 자신이 투시력을 통해 가진 믿음이라고 주장한 믿음들이 거짓으로 수없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을 계속 가지고 있다. 어느 날 찬옥이는, 뚜렷한 이유없이, 대통령이 인천에 있다(p)고 믿었다. 그리고 이 믿음이 그녀의 투시력에 근거한 것이라 주장했다. 그런데 실제로 대통령은 인천에 있었고, 그녀는 실제로 투시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찬옥이의 투시력이 신빙성 있게 작동할 조건들이 충족되었고, p에 대한 믿음은 투시력에 의해 산출된 것이었다.
<예 6>
신자는 자기가 투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다. 그러나 신자는 자기가 투시력을 가진다는 믿음에 대해 아무런 지지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자는 투시력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지하는 많은 과학적 증거들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자기가 투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어느 날 신자는, 뚜렷한 이유없이, 대통령이 인천에 있다(p)라고 믿는다. 신자는 이 믿음을 투시력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신자는 이 믿음을 지지해 줄 다른 증거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대통령은 인천에 있었고, 신자는 실제로 투시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투시력에 의해 산출된 것이었고, 그때 투시력이 신빙성 있게 작동할 조건들이 충족되었었다.
<예 7>
찬우는 매우 신빙성이 높은 투시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찬우의 투시력이 신빙성 있게 작동할 수 있는 조건들은 매우 일상적으로 충족된다. 그런데 찬우는 투시력 자체가 가능한지에 대한 지지 증거나 반대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아가 찬우는 자신이 투시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지지 증거나 반대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느 날 찬우는, 뚜렷한 이유없이, 대통령이 인천에 있다(p)고 믿었다. 그리고 찬우는 이 믿음에 대한 지지 증거나 반대 증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대통령은 인천에 있었고, 이 믿음은 투시력에 의해 산출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투시력이 신빙성 있게 작동할 조건들이 충족되었었다.
이 예들은 모두 과정 신빙주의가 제시한 정당화의 조건을 만족하지만 직관적으로 정당화된 것으로 볼 수 없는 믿음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재주의가 인식 주체의 합리성의 조건이 정당화 조건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위의 예들에서 과정 신빙주의가 설명하지 못하는 합리성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합리성의 구체적인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전에, 위의 예들이 보여주는 우연성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정 신빙주의의 정당화 조건에 근거해서 위의 예들에 나타난 p에 대한 믿음들을 정당화되는 것이라 인정한다면, 이 믿음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직관적으로 볼 때 매우 우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나타난 우연성은 앞서 살펴본 우연성과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식적 우연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1̥ 2̥ 인식적 우연성에 대한 재고찰
우리는 2. 1. 2. 절에서 인식적 우연성에 대해 살펴 보았었다. 거기에서 인식적 우연성을 설명하기 위해, 정당화의 조건을 믿음과 근거 사이의 적절한 연결에 관한 조건이라 간주했다. 그리고 정당화에 유관한 믿음과 근거들 사이의 관계를 논리적인 연결과 인과적인 연결로 나누어 생각했다. 이 두 연결 중 전통적 인식론은 논리적인 연결만을 정당화에 유관한 연결로 파악했기 때문에 <예 1>의 철수가 p에 대해 가진 믿음을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해야만 했다. 그런데 철수의 p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된 것은 매우 우연적인 일이다. 그래서 이런 우연성을 인식적 우연성이라 불렀었다.
그래서 2. 1. 2. 절에서, 믿음과 근거가 인과적으로 적절하지 않게 연결되지만 논리적으로는 적절하게 연결될 때 인식적 우연성이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필자는 올바른 정당화 이론이라면 이런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과정 신빙주의는 이런 우연성을 배제하기 위해 제안된 입장이라 설명했다.
그런데 앞절의 예들에서 보았듯이, 과정 신빙주의의 입장을 충실히 견지하면 또 다른 우연성이 발생한다. 이 우연성은 믿음과 근거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과 논리적인 연결만을 정당화와 유관한 연결들이라고 볼 때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우연성 역시 인식적 우연성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인식적 우연성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연결 역시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앞절의 BonJour의 예들에서, p에 대한 믿음들이 인과적인 연결에 대한 정당화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은, 인식 주체의 주관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우연적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p에 대한 믿음이, 인식 주체의 주관적 관점에서 볼 때, 비합리적인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른 연결을 ‘합리적인 연결(rational relation)’이라 부르도록 하겠다.
BonJour의 예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우리는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인과적인 측면과 인식 주체의 합리적인 측면 모두에 근거해서 판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식적 우연성을 두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인과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아서 생기는 우연성이 있다. 그리고 인식 주체의 합리성을 고려하지 않아서 생기는 우연성이 있다. 이 두 우연성을, 우연성이 발생한 곳에 근거해서, 외적 우연성과 내적 우연성으로 부르자. 따라서 인식적 우연성은 외적 우연성과 내적 우연성으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연성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우연성이 발생한 곳에 따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나누자고 했는데, 무엇에 근거해서 나눌 것인가? 내적 우연성은 인식 주체의 주관적 관점에서 볼 때 우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내적 우연성은 인식 주체의 관점 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외적 우연성은 인식 주체의 주관적 관점 밖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인식 주체의 주관적 관점의 범위는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인식 주체의 주관적 관점에 속하는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것들은 모두 인식 주체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구분은 인식 주체가 파악할 수 있는 지의 여부에 따라 나누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구분 기준을 김기현 교수는 인식 주체가 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지의 여부, 즉 내성가능성(introspectibility)이라 부른다.
정당화에 관한 이론은 인식적 우연성을 배제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정당화의 조건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과정 신빙주의는 외적 우연성을 배제할 수 있는 조건을 중점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정당화에 대한 외재주의적 입장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인식 주체의 합리성 조건을 통해 내적 우연성을 배제하려는 입장을 내재주의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입장을 각각 단순히 외재주의와 내재주의라 부르기로 하자.
4̥ 1̥ 3̥ 내재주의
내재주의는 내적 우연성을 배제하는 데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내재주의는 내적 우연성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정당화의 조건에 인식 주체의 합리성에 관한 조건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재주의는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인식 주체의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인 믿음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인식 주체가 갖는 믿음체계에 근거해서 볼 때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내재주의의 정당화에 대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I) 만약 시간 t에 S가 p를 믿는 것이 시간 t에 S가 가지고 있는 믿음체계 B에 근거해서 볼 때 합리적이라면,
시간 t에 S의 p에 대한 믿음은 정당화된다
그런데 이 정식화는 완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이 정식화가 내재주의의 입장을 잘 보여주기 위해서는 보다 명확해져야 할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도 합리성의 조건을 명확히 해야만 한다. 내재주의가 주장하는 합리성의 조건이 무엇인지는 4. 1. 1. 절에서 제시한 예들을 고려해 보면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우선 <예 4>가 보여주는 합리성의 조건부터 고려해 보자. <예 4>에서 정남이의 p에 대한 믿음은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정남이가, p에 대한 많은 반대 증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증거들을 무시하고 아무런 근거없이 p를 믿었다는 데 있다. <예 5>에서 찬옥이는 자신이 투시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 대한 많은 반대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투시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 믿음에 근거해서 p를 믿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찬옥이의 p에 대한 믿음은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지만 정당화된다고 볼 수 없다. <예 6>의 신자는 투시력 자체의 존재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반대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투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신자의 p에 대한 믿음은, 과정 신빙주의의 정당화 조건을 만족시키기는 하지만, 정당화된 것으로 보기 힘들다.
<예 4>, <예 5>, <예 6>이 보여주는 합리성 조건은 ‘문제의 믿음이 인식 주체의 믿음체계와 일관된 것이어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예 4>, <예 5>, <예 6> 각각에는 p에 대한 믿음과 일관적이지 않은 믿음들을 인식 주체가 가지고 있다. <예 4>에서는 ~p에 대한 믿음을, <예 5>와 <예 6>에서는 p에 대한 믿음의 전제라고 볼 수 있는, 인식 주체가 투시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과 일관적이지 않은 믿음들을 인식 주체가 가지고 있다. 내재주의가 p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되지 않는 이유를 비일관성에서 찾고 있기에, <예 4>, <예 5>, <예 6>에서 내재주의가 제안하는 합리성의 조건을 ‘일관성 조건(consistency condition)’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Goldman은 일관성 조건을 ‘방해적 요소의 부재(no undermining factor condition)’라는 조건으로 과정 신빙주의의 입장에 덧붙인다. 방해적 요소란 한 믿음이 정당화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이다. 앞의 예들에서 p에 대한 믿음은 정당화에 대한 과정 신빙주의의 조건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p에 대한 믿음과 일관적이지 않은 믿음들을 인식 주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p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되는 것을 그 믿음과 일관적이지 않은 믿음들이 방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Goldman은 <예 4>, <예 5>, <예 6>에서의 p에 대한 믿음들은, 방해적 요소인 그 믿음과 일관적이지 않은 믿음들이 있기에,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방해적 요소의 부재라는 조건은 과정 신빙주의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방해적 요소라는 것은 곧 방해적 증거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화에 관한 이론이라면 하나의 원리를 가지고 두 가지 우연성을 모두 배제시킬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야만 보다 설득력이 있을 것이고 더 완전한 이론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Schmitt는 방해적 요소의 부재라는 조건 대신에 ‘믿음철회과정(belief-withholding process)’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일관성 조건을 포섭하려고 한다.
Schmitt는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믿음을 철회하게 만드는 신빙성 있는 믿음철회과정이 없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믿음형성과정과 유사한 믿음철회과정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일관성 조건을 포섭하려 한다는 점에서 Goldman의 입장보다 과정 신빙주의에 더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믿음철회과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믿음철회과정이 신빙성이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힘들어 보인다. Schmitt는 믿음철회과정의 신빙성을 거짓인 믿음을 철회하는 빈도로 파악할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거짓인 믿음을 철회하는 빈도를 어떻게 계산할 것인지도 문제지만, 믿음철회과정에게도 여전히 제기될 수 있는 일반성 문제 역시 골치거리이다.
이와 같은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를 안고 있는 Schmitt의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과정 신빙주의와 잘 어울리는 용어로 정당화에 대한 합리성 조건을 제시하려고 한다면, 앞의 <예 4>, <예 5>, <예 6>만 해결해서는 부족하다. <예 7> 역시 해결할 수 있어야만 한다. Goldman의 제안 역시 정당화에 대한 합리성 조건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예 7>을 해결해야만 한다. 그런데 Goldman의 입장이나 Schmitt의 입장은 <예 7>을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 7>을 보자 찬우의 p에 대한 믿음은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산출되었다. 그리고 찬우는 어떠한 방해적 요소도, 신빙성 있는 믿음철회과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 찬우는 ~p에 대한 증거나, 자신이 투시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 대한 지지 증거나 반대 증거도, 투시력 일반의 존재가능성에 대한 지지 증거나 반대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는 자신이 투시력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과정 신빙주의는, Goldman의 제안을 덧붙이거나 Schmitt의 제안을 덧붙이거나 간에, 찬우의 믿음을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해야만 한다.
그러나 찬우가 가진 p에 대한 믿음은 직관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내재주의는 <예 7>을 정당화에 대한 합리성의 조건으로 해결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성의 조건은 앞서 주장된 ‘일관성의 조건’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찬우의 p에 대한 믿음은 그의 믿음체계와 일관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합리성의 조건은 일관성의 조건보다는 강한 것임에 틀림없다.
Goldman은 또 다른 합리성의 조건으로 ‘p에 대한 믿음을 산출한 믿음형성과정 이외에 p를 믿지 않게 만드는, 인식 주체가 이용가능한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 제안 역시 <예 7>을 해결하지 못한다. 찬우는 p를 믿지 않을 수 있는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BonJour는 비록 Goldman의 두 제안이나 Schmitt의 제안이 <예 7>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정당화에 필요한 합리성의 조건을 충분히 고려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BonJour는 이 점을 다음의 예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예 8>
종훈이는 역사학자인데, 어떤 역사적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오랜 연구를 통해, 그 질문에 적절한 이용가능한 모든 자료들을 조사해서 그 자료들과 가장 잘 부합하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실제로 정확했다. 그런데 종훈이는 연구가 한창일 때 우연히 신통한 유리 구슬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유리 구슬은 완벽한 신빙성은 아니지만 상당한 신빙성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 구슬이었다. 종훈이는 그 유리 구슬이 신빙성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종훈이가 그 유리 구슬에게 그가 탐구하고 있던 질문을 물어보았더라면, 그 구슬은 종훈이가 얻은 결론과는 다른 대답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래서 종훈이는 두 대답 중에서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 예는 Goldman의 ‘p에 대한 믿음을 산출한 믿음형성과정 이외에 p를 믿지 않게 만드는, 인식 주체가 이용가능한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조건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Goldman의 조건에 따르면, 종훈이가 결론에 대해 가지는 믿음은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직관적으로 종훈이의 결론에 대해 가지는 믿음을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BonJour가 <예 7>과 <예 8>을 통해 정당화 조건으로서의 합리성 조건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BonJour는 정당화 조건에 필수적인 합리성 조건으로 ‘인식적 책임의 조건(epistemic responsibility condition)’이라 부를만한 것을 제안한다고 볼 수 있다. <예 7>에서 찬우의 p에 대한 믿음은 찬우가 인식적 책임을 다해 가진 믿음이 아니기에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예 8>에서 종훈이의 결론에 대한 믿음은 종훈이가 인식적 책임을 다해 가진 믿음이기에 정당화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BonJour는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인식 주체에게 합리적인 것이어야 하며, 한 믿음이 인식 주체에게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인식 주체가 그 믿음을 믿기 위해 해야할 모든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BonJour의 제안을 ‘인식적 책임의 조건’이라 부를 수 있겠다.
Goldman 역시 인식적 책임에 대한 고려를 하고 있다. Goldman은 인식적 책임이 정당화와 유관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인식적 책임을 고려하기 위해, 정당화를 약한 정당화(weak justification)와 강한 정당화(strong justification)로 나누어 생각할 것을 제안한다. 이 제안에 따르면, 약하게 정당화된 믿음은 ‘비난받지 않을 만한(blameless, nonculpable)’ 믿음이며, 강하게 정당화된 믿음은 (R2)와 방해적 요소의 부재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믿음이다.
그런데 Goldman의 이런 제안은 당장 <예 8>을 설명하지 못한다. <예 8>에서 종훈이가 가진 믿음이 강하게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방해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종훈이의 믿음은 약하게 정당화되는 것인가? Goldman은 약한 정당화의 조건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몇 개의 충분조건만을 제시할 뿐이다. Goldman이 제시하는 약한 정당화의 충분조건은 “① 문제의 믿음이 신빙성이 없는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되었으나 ② 인식 주체가 그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이 없다고 믿지 않으며 ③ 인식 주체에게는 그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용가능한, 혹은 소유하고 있는 신빙성 있는 방식이 없으며 ④ 만약 사용한다면 그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S가 믿게 될, S에게 이용가능한, S가 신빙성이 있다고 믿는 믿음형성과정이 없다”이다. ①에서 볼 수 있듯이, 약하게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문제의 믿음이 신빙성 없는 믿음형성과정에 의해 산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예 8>의 종훈이의 믿음은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산출되었다. 그래서 약하게 정당화된 믿음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래서 Goldman의 새로운 제안은 <예 8>을 해결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따라서 Goldman의 새로운 제안은 인식적 책임의 조건을 충분히 포섭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BonJour의 인식적 책임의 조건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띄는가? BonJour는 “‘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인식주체가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BonJour가 주장하는 정당화 조건으로서의 합리성 조건이다.
그런데 인식 주체가 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단순한 메타믿음만을 가지는 것으로 인식적 책임을 다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 믿음이 정당화되는 지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없이 그저 메타믿음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당화된 메타믿음을 요구하는 것이 인식적 책임의 조건에 필수적으로 보인다. ‘한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화된 메타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적 책임의 조건을 ‘메타정당화 조건(meta-justification condition)’이라 부르자.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내재주의의 입장을 정식화해 보자.
(IJ) 만약 시간 t에 S가 p를 믿는 것이 시간 t에 S가 가지고 있는 믿음체계 B의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이라면,
시간 t에 S의 p에 대한 믿음은 정당화된다
(M) 믿음 P는 S가 가지고 있는 믿음체계 B의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이다 iff
믿음 P가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화된 메타믿음이 S의 믿음체계 B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 정식화는 앞서 살펴본 합리성의 조건 중에서 일관성의 조건을 정당화의 조건에서 제외한다. 그 이유는 앞의 3. 1. 3. 절에서 증거주의를 비판할 때 살펴본 바와 같이 일관성의 조건이 정당화에 대한 너무 강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항상 비일관적인 믿음들을 가지고 사는데, 일관성 조건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서 정당화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할 위험을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합리성의 조건에 대한 내재주의의 가장 적절한 입장을 인식적 책임의 조건, 즉 메타정당화의 조건만을 요구하는 입장이라 볼 수 있다.
4̥ 2̥ 과정 신빙주의의 대응
4̥ 2̥ 1̥ 메타정당화 조건에 대한 검토
앞절에서 내재주의의 정당화에 대한 입장을 (IJ)로 정식화해 보았다. (IJ)에 따르면,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인식 주체의 믿음체계에 비추어 볼 때 합리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이 말은 그 믿음이 인식 주체의 믿음체계와 일관적이라는 것보다는, 그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화된 메타믿음을 인식 주체의 믿음체계가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재주의의 이러한 입장에 대한 비판들이 있다. 이 비판들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인식 주체의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내재주의의 입장에 대한 반론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식 주체의 책임이라는 것, 인식 주체의 합리성이라는 것을 (IJ)의 메타정당화 조건(M)으로 파악하고자하는 내재주의의 입장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비판이다. 내재주의의 입장을 가장 설득력있는 형태로 파악하기 위해 이 두 비판을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선 첫 번째 비판부터 살펴보도록 하다. 첫 번째 비판은 내재주의가 인식 주체의 책임이란 측면이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한 비판이다. 이런 비판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한 믿음이 정당화되는 것은 인식 주체의 책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책임이라는 것은 자율적인 통제가 가능한 행동에게만 요구되는 것인데,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는 자율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각을 통해 갖게 된 믿음과 같이 자율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믿음은 책임을 따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재주의는 자율적인 통제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이런 믿음들의 정당화 여부까지 인식적 책임에 근거해서 판단하려고 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직관적으로 한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판단할 때, 오로지 인식적 책임의 측면에서만 판단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식적 책임의 측면 역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인식적 책임의 측면에서 판단하고자 하는 입장은 이 첫 번째 비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시각을 통해 믿음을 얻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분명 시각을 통해 가지게 되는 믿음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앞에 호랑이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호랑이가 있다’는 믿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각을 통해 가지는 믿음이 정당화되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과정 신빙주의의 입장인 정식화 (3)을 고려해 보자. 정식화 (3)은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을 산출한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 있게 작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믿음형성과정이 신빙성 있게 작동하기 위한 조건으로 입력조건과 작동조건을 제안한다. 그런데 입력조건과 작동조건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그리고 정당화된 믿음을 갖기 위해 통제해야 하는 요소들이 있다. 시각의 경우 우리는 시력을 교정하거나, 눈의 상태 혹은 신체 상태를 정상적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고, 정당화된 믿음을 갖기 위해 정상적으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이와 같이 시각을 통한 믿음이 정당화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우리의 믿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지만 ‘간접적으로는’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믿음의 정당화 여부에 영향을 미치므로 정당화의 조건에 인식적 책임의 조건을 부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믿음의 획득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유지 차원에서도 인식적 책임을 고려할 수 있다. 우리는 한 믿음을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하고 있을 것인지 아니면 그 믿음을 철회할 것인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믿음의 유지는 정당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인식적 책임은 정당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각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가 물이 반쯤 담겨 있는 그릇 속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막대를 볼 경우, 그 막대는 굽어보인다. 그런데 그 막대가 비록 굽어보인다고 해서, 그리고 시각을 통해 믿음을 갖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막대가 굽었다는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인식 주체가 막대가 굽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에 대해 인식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믿음은 거짓이기에 철회해야만 하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 믿음을 계속 유지한다면, 우리는 인식적 책임에 근거해서, 그 믿음이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예에 대해 인식적 책임을 정당화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획득과 믿음의 유지를 구분해서 생각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위의 예에서 시각을 통해 획득된 믿음을 인식적 책임에 근거해서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은 믿음의 유지까지 정당화 여부에 관련되는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의 획득과 믿음의 유지는 구분되어야 하고 믿음의 획득에 관해서만 정당화 여부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제안은 믿음의 유지까지 정당화 여부와 관련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반직관적인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믿음의 유지가 정당화 여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정당화 여부의 결정에 인식적 책임을 고려해야 한다면, 이는 곧 믿음을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명시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당화의 조건을 이렇게 강화하게 되면, 직관적으로 정당화된다고 간주하는 많은 어린이들의 믿음들이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는 결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더구나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 그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화된 메타믿음이 필요하다는 메타정당화의 조건은 ‘정당화됨(justifiedness)’과 ‘정당화함(justifying)’을 구분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의 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한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인식 주체가 정당화된 메타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정당화된 메타믿음이 필요한 경우는 인식 주체가 문제의 믿음이 정당화된 것으로 주장할 때, 즉 문제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정당화할 때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당화 이론을 ‘정당화됨’에 관한 탐구로 한정한다면 메타정당화의 조건은 필요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식적 책임을 정당화와 무관하다고 보는 이런 입장은 문제가 있다. 우선 믿음의 획득과 믿음의 유지를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에 문제가 있다. 믿음의 유지는 우리가 가진 믿음체계에 근거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의 획득은 우리가 가진 믿음체계와는 상관없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믿음의 획득이 우리가 가진 믿음체계와 상관이 있다면, 우리의 믿음체계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획득 역시 인식적 책임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의 획득 역시 우리가 가진 믿음체계에 의존해 있다라고 생각할 근거를 가지고 있다. Hanson이 주장했고, 이제는 폭넓게 인정되고 있는 ‘관찰의 이론 적재성 논제(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 thesis)’에 근거한다면, 믿음의 획득 역시 믿음체계에 의존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믿음의 획득에만 정당화를 한정해서 보고자 해도 정당화 여부의 판단에 인식적 책임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인식적 책임을 정당화의 조건에 포함하고자 하는 입장이 꼭 반직관적인 결론을 내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정당화의 조건에 인식적 책임을 포함시키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으로 보아야하는 어린이들의 믿음들을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결론을 반드시 도출하는 것은 아니다. 인식적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시적 결정(explicit decision)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여길 때에만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그런데 명시적 결정과 같이 강하게 인식적 책임의 조건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단지 암묵적 결정만으로도 충분히 인식적 책임의 조건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꼭 ‘정당화함’을 위해서만 인식적 책임의 조건인 메타정당화의 조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BonJour는 인식적 책임의 조건을 인식 주체가 그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화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믿음을 가질 때마다 매 경우 그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화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단지 이런 정당화된 메타믿음이 인식 주체에게 ‘이용가능해야(available) 한다’고만 주장한다. 즉 인식 주체의 믿음체계 내에 정당화된 메타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만을 주장한다. 그리고 앞절에 있는 내재주의 입장의 정식화인 (IJ)는 이 점만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까지 인식적 책임은 정당화와 무관하다는 입장에 근거한 비판인 인식적 책임의 조건을 정당화 조건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런 비판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인식적 책임의 조건으로서 적합한 메타정당화 조건을 (IJ)가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 또한 살펴보았다. 그런데 인식적 책임의 조건을 꼭 내재주의와 같이 주장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런 의문은 내재주의가 주장하는 메타정당화의 조건 (M)이 지니는 심각한 난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만약 이 난점이 해결하기 힘든 것이라면 내재주의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메타정당화 조건 (M)의 심각한 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무한 후퇴의 문제(infinite regress problem)’이다. 메타정당화 조건 (M)에 따르면, 한 믿음 P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P가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믿음 Q가 정당화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메타정당화의 조건을 계속 따르자면, 믿음 Q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Q가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메타믿음 R이 정당화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R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메타믿음인 S가 정당화되어야 한다. 또 S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메타믿음이 정당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IJ)에는 이 과정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 과정은 무한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메타정당화 조건 (M)은 무한 후퇴에 빠지게 된다.
메타정당화 조건 (M)이 무한 후퇴에 빠지게 되면 결국 우리는 어떠한 정당화된 믿음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메타정당화 조건 (M)을 올바른 정당화의 조건으로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한 후퇴를 막을 수 있는 방법 역시 제안해야만 한다. 토대주의의 입장을 따라 메타정당화 조건 (M)의 무한 후퇴를 막고자 하는 사람들은 ‘기초 믿음(basic belief)’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할 것이다. 토대주의의 입장을 따르지 않고 정합주의의 입장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BonJour가 제안하는 ‘믿음의 전제(Doxastic Presumption)’와 유사한 것을 주장해서 무한 후퇴를 막고자 할 것이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과정 신빙주의가 어떤 입장을 선택해서 무한 후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과정 신빙주의를 토대주의의 일종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Kornblith가 주장하듯이 과정 신빙주의는 토대주의적 입장과도, 정합주의의 입장과도 모두 어울릴 수 있는 입장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3. 2. 2. 절에 있는 정식화 (3)에 제시된 과정 신빙주의는 입력조건 속에 믿음이 포함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이점에서 볼 때 과정 신빙주의는 정합주의와 양립가능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합적 관계만을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의 유일한 형태로 파악하지는 않기에 꼭 정합주의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볼 수는 없다. 또, 과정 신빙주의는 지각을 통한 믿음형성이 다른 믿음을 입력조건으로 꼭 가져야만 한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토대주의와도 양립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다.
나아가 필자는 무한 후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필자는 인식적 책임의 조건으로 제시된 메타정당화 조건 (M)을 가장 바람직하게 이해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만을 밝히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과정 신빙주의가 메타정당화의 조건을 외재주의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볼 것이다.
4. 2. 2. 과정 신빙주의의 가능한 대응
우리는 내재주의가 주장하는 정당화에 대한 합리성의 조건을 인식 주체의 인식적 책임이란 측면에서 고려하고 있다. 내재주의뿐만 아니라 정당화에 대한 합리성의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정당화 이론은 합리성의 조건을 인식 주체의 인식적 책임이란 측면에서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만 <예 7>과 <예 8>을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정 신빙주의 역시 완전한 정당화 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인식 주체의 인식적 책임이란 측면을 고려하는 합리성의 조건을 정식화 (3)에 덧붙여야 한다. 그런데 인식 주체의 인식적 책임의 조건을 제시하는 데는 메타정당화 조건 (M)에 근거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앞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메타정당화의 조건에 근거하지 않은 합리성의 조건은 <예 7>과 <예 8> 모두를 해결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앞절에서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질 때마다 그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화된 메타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불합리하고 반직관적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내재주의가 주장한 메타정당화의 조건은, (IJ)에 나타난 (M)과 같이, ‘문제의 믿음에 대한 정당화된 메타믿음이 인식 주체의 믿음체계 속에 있어야만 한다’로 약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약화된 메타정당화 조건 (M) 역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4. 1. 2. 절에서 인식적 우연성을 내적 우연성과 외적 우연성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내재주의는 외적 우연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내재주의는 내적 우연성을 배제하고자 제시된 입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IJ)와 같은 입장은 외적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예를 고려해 보자.
<예 9>
자옥이는 사회과학자이다. 그녀는 오래 전에 하나의 탐구 과제에 열중해 있었다. 충분히 많은 자료에 근거해서 매우 합리적인 탐구를 통해 p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 그리고 그녀는 방법론에 대한 많은 연구를 통해 이런 탐구방법이 잘 정당화된다는 것을 믿었었다. 실제로 그 방법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매우 바쁜 일들이 많아 이 탐구에 대한 일들을, p에 대한 믿음을 까마득히 잊었다. 그런데 어제 그녀는 점장이가 하는 말을 듣고서 p를 믿게 되었다.
자옥이의 p에 대한 어제 믿음은 정당화되는가? 분명히 자옥이의 믿음체계 속에는 p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화된 메타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믿음체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믿음체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우리의 믿음체계는 매우 작아질 것이고 그래서 정당화된 믿음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재주의는 (IJ)에 근거해서 p에 대한 자옥이의 믿음이 인식적 책임의 조건인 메타정당화 조건 (M)을 만족한다고, 그래서 합리성의 조건을 만족한다고 간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직관적으로 p에 대한 자옥이의 어제 믿음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여긴다. 이는 p에 대한 자옥이의 어제 믿음과 p에 대한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자옥이의 정당화된 메타믿음 사이에 적절한 인과적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적절한 인과적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내적 우연성이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 9>에 대해 내재주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우선 내재주의가 정당화의 조건으로서의 인과적인 연결에 대한 조건 자체를 거부하는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매우 반직관적이다. 그래서 문제의 믿음과 그 믿음에 대한 정당화된 메타믿음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에 대한 조건만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면 왜 한 믿음과 그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메타믿음 사이에는 인과적인 연결이 필요하지 않은 지에 대해 설명해야 하며, <예 9>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메타믿음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문제의 믿음에 대한 근거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유독 믿음과 메타믿음 간의 적절한 인과적인 연결만을 정당화의 조건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주장으로 보인다. 또한 <예 9>에서 나타난 내적 우연성을 인과적인 연결을 고려하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제거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내재주의는 문제의 믿음과 그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화된 메타믿음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을 메타정당화 조건 속에 포함시켜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문제의 믿음과 그 믿음의 정당화에 대한 정당화된 메타믿음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을 인식 주체가 명시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부적절할 것이다. 어쨌든 문제의 믿음을 갖는데 그 믿음의 정당화에 대한 정당화된 메타믿음이 인과적인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점은 주장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메타정당화 조건을
(M*) 믿음 P는 S가 가지고 있는 믿음체계 B의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이다
=df S에 있어서 믿음 P는 믿음 P가 정당화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화된 메타믿음과 적절하게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라고 가장 바람직하게 제시할 수 있다.
이렇게 완화된 내재주의의 메타정당화 조건에 대한 입장 (M*)는 인과적인 연결에 대한 언급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인과적인 연결은 내성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내재주의와 일관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내재주의가 인과적인 연결을 포섭할 수 있다는, 그리고 이 주장에 근거한 과정 신빙주의가 적절한 정당화 이론일 수조차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M*)에는 인과적인 연결에 대한 조건이 포함되어 있기에 과정 신빙주의의 주요 개념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경쟁이론인 내재주의는 인과적인 연결이 내성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적절한 이론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합리적인 연결에 대한 분석에 과정 신빙주의가 적합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과정 신빙주의가 메타정당화의 조건을 잘 수용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이유는 합리성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메타정당화의 조건은 인식 주체의 책임에 대한, 합리성에 대한 조건이다. 그런데 합리성이란 개념이 꼭 ‘무조건적인 참의 최대화와 거짓의 최소화’라는 인식적 목표에 근거해서만 파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 듯이 보인다. 우리 인간의 인식적 목표는 ‘제약 조건 하에서 참의 최대화와 거짓의 최소화’를 달성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인식적 목표를 이렇게 파악한다면, 한 믿음이 합리적인지는 그 믿음의 참․거짓의 여부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가지게 되는 데 걸린 시간, 효율성 등도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믿음을 형성한 믿음형성과정의 처리 속도, 효율성 등도 고려해서 합리성의 기준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처리 속도, 효율성 등은 믿음형성과정을 중심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과정 신빙주의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과정 신빙주의가 내재주의보다 합리성 개념에 더 잘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논의에서 가장 바람직한 내재주의의 메타정당화 조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과정 신빙주의가 이 조건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물론 과정 신빙주의가 메타정당화의 조건을 신빙성과 믿음형성과정이라는 중심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에 대한 적절한 이론으로서 성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과정 신빙주의는 정당화 조건 중 인과적인 연결의 조건에 대한 분석에 가장 적합한 이론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재주의는 인과적인 연결의 조건에 대한 적절한 분석을 제시하기 힘들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당화의 조건이 인과적인 연결의 조건과 합리적인 연결의 조건으로 나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각각의 조건을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해서 제시하는 것이 큰 결점은 아니라 생각된다.
5. 결론
Goldman은 정당화에 대한 올바른 이론이라면 한 믿음이 정당화되는 조건들을 실질적이고 설명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에 잘 부합하는 입장으로 과정 신빙주의를 제시했다. 과정 신빙주의에 따르면, 한 믿음은 그 믿음이 신빙성 있는 믿음형성과정을 통해 산출된 것일 때에만 정당화된다.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제기되었다. 이런 비판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하나는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 이론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을 가하는 대표적인 입장으로 증거주의가 있다. 다른 하나는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 이론으로서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을 제기하는 입장을 내재주의라 부를 수 있다.
과정 신빙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들을 이렇게 두 가지로 크게 나누는 근거는 인식적 우연성 개념이다. 한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은 그 믿음과 근거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맺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믿음과 근거 사이의 연결은 논리적인 측면 이외에 다른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할 수 있다. 믿음과 근거 사이의 인과적인 연결과 믿음과 근거 사이의 합리적인 연결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두 관계들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할 경우 인식적 우연성이 발생한다.
그런데 인식적 우연성은 내성가능성의 기준에 근거해서 둘로 나눌 수 있다. 우연성이 발생한 부분에 비추어 내적 우연성과 외적 우연성으로 나눌 수 있다. 인과적 관계만을 강조하면 내적 우연성이 발생한다. 그리고 합리적 관계만을 강조하면 외적 우연성이 발생한다.
필자는 올바른 정당화 이론이기 위해서는 이 두 우연성을 배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과정 신빙주의는 외적 우연성을 배제하기 위해 제안된 입장이라 보았다.
그런데 증거주의는 과정 신빙주의가 외적 우연성을 배제하는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정당화에 대한 적합한 이론으로 볼 수 없다고 비판한다. 증거주의의 비판은 신빙성의 문제와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의 결정 문제에 근거해 있다. 필자는 신빙성의 문제를 신빙성을 성향으로 해석할 것을 제안함으로써 해결했다. 유관한 믿음형성과정의 결정 문제는, 즉 일반성 문제는 단일 경우의 문제와 비구분의 문제로 나누어진다. 필자는 이 문제들에 대해 믿음형성과정의 결정은 인지심리학의 객관적인 탐구 성과에 근거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믿음형성과정의 신빙성은 입력조건과 세부적인 인지처리과정의 작동조건에 상대적이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답했다. 이런 논의를 통해 필자는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이론으로서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에 대한 이론으로서 충분하지는 않다는 내재주의의 비판이 있다. 내재주의는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의 합리성의 조건을 제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내적 우연성을 충분히 배제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합리성의 조건으로 내재주의가 제시하는 것은 인식적 책임의 조건인데, 이는 메타정당화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필자는, 메타정당화의 조건으로는 인과적인 연결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어 외적 우연성이 발생하기 때문에, 내재주의 역시 정당화 이론으로서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나아가 필자는 메타정당화 조건을 외적 우연성이 충분히 배제될, 그리고 반직관적인 결론을 피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하였다. 이렇게 제시된 메타정당화의 조건을 과정 신빙주의의 주된 개념인 신빙성과 믿음형성과정이라는 개념으로 제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문에서 과정 신빙주의가 정당화에 대한 적합한 이론이라는 점을 보여주었으며, 나아가 충분한 이론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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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rocess Reliabilism as a theory of justification
: sophisticating Goldman's proposal
Choi, Young-Chun
Department of Philosophy
Graduate School, Seoul National University
For a belief to be justified is for that belief to be based on an adquate ground. Traditionally the connection between a belief and its ground which is proper for the epistemic justification has been thought merely as logical connection. But beside logical connection, the connection between a belief and its ground could be futher investigated on two aspects : the causal connection and the rational connection. If only one connection among these three connections are emphasized exclusively, then 'epistemic accident' must be brought about. So I insist that a correct theory of justification must fully exclude the epistemic accident.
A. Goldman insists that, to be a correct theory of justification, it should concern the causal connection between a belief in question and its ground. So Goldman proposes 'Process Reliabilism'. According to Process Reliabilism, a belief is justified only if it is produced by reliable belief-forming process.
Many critiques have raised against Process Reliabilism, which could be divided into two sorts. One sort of critiques which has been proposed by 'evidentialist' is that Process Reliabilism cannot be an adequate, necessary theory for justification. The other sort of ciritique which may be rooted in 'Internalism' is that Process Reliabilism cannot be a sufficient theory for justification.
Evidentialists attack Process Reliabilism mainly on 'the problem of the concept of reliability' and 'the generality problem' which may seem to be fatal to Process Reliabilism at a glance. The problem of the concept of reliability is that there is hardly found the proper interpretation of reliability on which Process Reliabilism could rely to be an adequate theory for the conditons of causal connection. Against this charge, I suggest to conceive reliability as propensity. The problem of generality is the problem of determining the scope of relevant belief-forming process, according to which it is easy for Process Reliabilism to be an arbitrary theory because it seems to be that there is no objective standard for determining what belief-forming process are relevant to, or responsible for, the justification of a belief in question. I answer this problem by suggesting to determine the scope of belief-forming process on the ground of objective outcomes of cognitive psychology, and by showing that the reliability of belief-forming process must be relativized to 'input condition' and 'working condition of subordinate cognitive analyzers'. Following these argument, I argue that Process Reliabilism must be an adequate, necessary theory for justification.
Internalists point out the insufficiency of Process Reliabilism on the ground that it cannot consider adequately 'the condition of rationality' for justification. It is the condition of cognitive responsibility that internalists propose for the condition of rationality. It usually has been concreted 'the condition of meta-justification'. Defending Process Reliabilism, first of all, I sophisticate the condition of meta-justification to free from anti-intuitive implications which are said to be crucial defects of internalism. Then, I show the possibility that, although Process Reliabilism mainly concerns the condition of the causal connection, Process Reliabilism can include the sophisticated condition of meta-justification.
After all, I think to succeed in arguing that Process Reliabilism must be an adequate, necessary theory and can be a sufficient theory for justification.
Key Words : Process Reliabilism, Reliability, Belief-forming Process, Epistemic Accident, Generality Problem, Epistemic Responsi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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