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일본의 근대화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수탈을 받고 있을 때 왜 일본만은 예외였는가. 많은 나라들이 메이지 유신과 같은 개혁을 시도했지만 왜 일본에서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가.
'후쿠자와 유키치'(출판사와 저자는 기억이 안난다. 일본눈시리즈라는 시리즈 중의 한편이다.)는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서 정신적 지도자와 같은 인물이다.[**일본의 최고액권 만(10,000)엔권 지폐의 인물**]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유력자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켜 나갔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난학과 영학, 그리고 외국여행을 통해 견문과 실력을 쌓고 저술활동을 통해 명성을 확고히 한 후에 당대의 실력자들과 교류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여 일본 근대화의 기클을 다졌다. 사실 그의 저술활동과 교육활동을 대단할 것이 없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도 적어도 한 두명쯤 그런 지식인은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후쿠자와 유키치는 '부분적으로' 성공하고 다른 나라의 개혁주의자들은 실패했는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성공은 부분적인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유민권주의자였으나 근대일본에서는 자유민주주의가 탄압의 대상이었다.)
첫째,일본에는 이미 개항 전에 서양학문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개항 이전에도 일본에서는 이미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학문을 제한적으로나마 수용하고있었다. 아마 이것이 나중에 본격적으로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도입할 때 도움이 됐을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중국의 한 개혁적 인사와 나눈 대화가 인상적이다.
"일본에는 서양학문을 이해하고 가르칠 사람이 몇 명 정도 있습니까?"
"대략 50명정도 됩니다. 중국은 어떻습니까?"
중국인,한 숨을 내쉬며 "많아야 두세명 뿐입니다."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이런 일군의 양학자들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둘째,후쿠자와 유키치는 평생 몸을 사렸다. 그는 봉건제도를 혐오하면서도 그 불합리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지는 않았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는 대체로 그 문제를 피했다. 수많은 암살 위협이 있었는데 그는 비굴할 정도로 위험을 피해다녔다. 또 책을 출판할 때도 시기를 잘 살폈다. 예를 들어 '서양사정'이 출판됐을 때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미 미국행 배에 몸을 싣고 있었다. 또 평생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고 교육활동과 저술활동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를 지원했으며 유력자들과 교류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의 사상이 정책에 반영되도록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 자신이 일본 근대화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가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무모한 행동을 삼갔기 때문에 더 많은 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고 그의 사상이 명맥을 이어가게 된 것은 아닐까.
셋째,개혁의 지지세력.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힘싸움이 지속됐으나 일본에서는 중요한 결단의 시기에 내부의 다툼이 (어떤 방법에서든) 신속하게 해결되었다는 것이 다른 아시아 국가의 경우와 다르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물러나고, 사이고 다카모리가 제거되는 과정은 폭력적이긴 했으나 신속했다. 메이지 유신은 이런 권력정돈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 밖에 중국중심문화의 가장 변방에 있었다는 점, 외국 문화를 빨리 흡수하는 점등이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일본' (아인 부루마,을유문화사)는 1853년(일본이 개항한 해)에서 1964년(도쿄올림픽개최)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주 간결하면서도 압축적인 문장이 마음에 쏙 드는 책이다.
일본의 근대화를 논할 때 가장 큰 쟁점이 되는 것은 아마 두 가지일것이다. 첫번째는 위에서 언급했던 문제, 왜 일본만 근대화에 성공했는가일 것이고 두번째는 왜 일본은 군국주의국가가 되었는가일 것이다.
근대일본에서는 일본의 군국주의 국가가 되어가는 과정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급격한 근대화, 군대와 정치의 분리(군대는 천황 직속이었고 총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정치적 책임은 총리가 질 뿐이었고 천황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으므로 군대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은 셈이다), 사상의 공백, 고속경제성장의 용이성, 서구를 따라잡고자 하는 강한 열망, 다른 아시아국가들에 대한 우월의식, 천황의 신격화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가 혼재되어있어서 명백하지는 않다. 사실 일본의 군사국가화가 필연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일본이 군사국가가 되지 않았다면 과연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을까?)
중요한 점은 아마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일본의 지도자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험하게 생각했다는 점과 통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 국가가 가부장적 입장에서 무지한 국민들을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당시 일본에서 근대화의 목적이라는 것은 경제를 성장시키고 강한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었으므로 군사국가화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자유민권주의자인 후쿠자와 유키치조자 기쁨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군사국가가 된 것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제국주의가 풍미하던 시대였으니까.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과연 후발산업화국가가 개발독재나 제국주의를 거치지 않고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을까? 독일과 일본은 제국주의를 거쳤고, 우리나라, 싱가폴, 대만은 독재를 거쳤다..자유민주주의와 고속경제성장은 병존할 수 있는가? 아쉽게도 이를 지지해주는 역사의 사례들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해도 두 개가 병존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고민의 대상이다..
end.
민주주의와 고속성장. 어떻게보면 방향과 속도의 문제다. 독재보다는 민주주의가 보다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가능성이 많겠지만, 속도는 느릴 것이다. 정확한 목표지점에 도달하려면 속도도 빨라야겠지만 방향이 정확해야한다. 문제는 독재인 경우 그 방향의 오차가 얼마나 클 것인가,속도가 너무 느리면 이륙을 못 할 수도 있지 않은가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 얘기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란 것은 찾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운 것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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