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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 유홍준 (창비, 2011)
부여·논산·보령 1 내 고향 부여 이야기
- 서울 사람으로, 영남대 10년 근무한 대구가 제2의 고향. 시골 생활에 대한 로망으로 5도2촌에 적당한 집 물색. 집에서 3시간 거리, 집 가까이 절집이 있고 문화유산의 전통이 있는 고장, 20~30분 거리에 박물관이 있는 곳.
- 부여 외산면 반교리, 근처 냇물이 있는 폐가 구매. 방 하나, 부엌 하나 있는 8평짜리 3칸 기와집과 헛간과 뒷간을 붙인 4평짜리 플라스틱 기와집 지음. 나무기둥 쓰고 않고 돌담으로 뼈대를 올림.
- 당호를 휴휴당. 조선시대 포도를 잘 그린 이계호의 아호. 나도 쉬고 쉬는 집. 막상 5도2촌 생황을 하니 쉴 시간이 없었다. 여름이면 풀 뽑아야지, 봄 가을로 밭에 나가 살아야지, 나무 가꾸어야지, 겨울이면 장작 패야지, 해가 지고 나야 책 볼 시간이 생긴다. 집사람은 더 바빠서 투정. “젠장, 쉬러 왔다고 휴휴당이라고 하더니, 이건 쉬는 걸 쉬는 집이 됐네.”
- 반교리 청년회원 기준 60, -> 65세.
- 반교리 돌담길
부여·논산·보령 2 그 많던 관아는 다 어디로 갔나
- 주말이면 반교리에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찾아온 사람이 김무한 부여군수. 집에 와서 하소연. “세계역사도시 시장군수대회가 있어 참가했는데 내가 부여에서 왔다고 하니까 좌다 멸망한 나라의 수도에서 왔다고들 하는 거 아닙니까?...왜 백제에 대해서는 왜 멸망한 순간만 기억하려고 합니까?”
- 백제 이미지가 그렇게 남게 된 데에는 계백장군과 의자왕의 이야기가 너무 강하게 박혀 있는데다 백마강과 낙화암의 비뚤어진 전설도 한몫했을 것. “군수님, 우선 백마강 유람선의 그 엉터리 전설 얘기나 바꾸라고 하세요.”
- “그건 시정하겠습니다. 그것 말고 부여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있죠. 능사에서 발견된 백제용봉대향로와 규암에서 새로 발견된 왕흥사 사리함은 백제 아름다움의 극치예요. 그걸 자꾸 부각시켜야죠. 국립부여박물관에 가서 그것부터 보라고 해야죠.”
- 나는 군수에게 백제 이야기는 의자왕이 아니라 백제문화의 전성기인 성왕, 위덕왕, 무왕의 얘기가 자주 인구에 회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건 나도 알죠. 그런 건 교수님 같은 분이 열심히 강조해서 국민들에게 백제를 올바로 알려야 할 일이고, 나 같은 군수가 할 일이 따로 있지 않을까요?”
“제가 무얼 도와드릴까요?”
“교수님, 백제 이전에도 부여가 있고 백제 이후에도 부여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백제 이전에 송국리 청동기시대 유적지가 있고, 고려시대 유적지론 대조사, 무량사, 장하리 석탑이 있고, 조선시대 유적지론 홍산 관아가 있죠.”
“바로 그겁니다. 부여에 온 사람들이 정림사 오층석탑, 낙화암만 보고 가면서 멸망한 나라의 유적이라 볼 것이 없다느니 실망했다느니 하는데 이런 곳까지 보고 가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봄 가을로 교수님이 유적지를 안내하는 답사 프로그램을 갖고 싶습니다.”
“내가 그렇게 시간을 내기는 힘든데요.”
“힘들다뇨. 교수님은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청년회원 아닙니까?”
- 작년부터 봄 가을로 2차례씩 부여문화원이 주관하는 ‘유홍준과 함께하는 부여답사’에 차출되어 내 고향 부여의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일을 하고 있다.
- 답사일정은 송국리 선사유적지, 대조사, 흥산관아가 1코스이고, 장하리 삼층석탑, 무량사, 반교리 돌담길을 2코스로 하여 홀수달은 1코스, 짝수달은 2코스로 답사하고 있다.
- 송국리 청동기시대 유적지 : 남한 최대의 청동기시대 유적지. 송국리를 모르면 사실상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도굴꾼이 신고되어 붙잡히면서 알려짐. 그들이 파해진 돌넘무덤에서 비파형 동검이 출토.
- 비파형 동검은 우리나라 전기 청동기시대 지배층의 상징유물. 랴오닝식 동검이라고도 불리는데,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출토된 것이 40자루 정도. 이것이 후기 청동기시대로 들어가면 한반도에서만 출토되는 한국식 세형 동검으로 바뀜. 특히 비파형 동검은 대개 고조선의 영역에서 출토되어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형 단지와 함께 고조선의 3대 상징유물.
- 이런 바파형 동검이 부여 송국리에서 출토. 고고학상 매우 중요한 발견으로, 삼국시대 금관이 출토된 것에 비교할 만한 일. 1995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에 들어가 1997년까지 모두 11차례 발굴조사.
- 송국리는 기원전 5.6세기에 사람이 살았던 방대한 취락지로 70여 기의 집터와 함께 마을을 둘러싼 목책, 그리고 녹채(방어용 나무침)를 무수히 꽂아두었던 시설들이 확인. 많은 종류의 토기와 돌칼, 대롱옥, 굽은옥 출토, 청동거울의 거품집도 출토되어 청동야금이 직접 이루어졌음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고. 불에 탄 쌀이 수습되어 이들이 논농사를 지었다는 사실도 확인. 이런 대규모 청동기시대 유적은 아직 남한땅에서 나온 곳이 없다.
- 조선 관아의 비극적 종말 : 이 많던 조선시대 군현의 관아는 일제 침략과 함께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다.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 일제는 이른바 각 고을에 주재소를 두었고, 1910년 한일병합 뒤에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 해 1914년에 대개 4개의 군, 현을 합쳐 시, 군으로 바꾸었다. 일례로 부여군은 부여현, 홍산현, 석성현, 임천군 등 4개의 군,현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 일제는 새로 통합한 행정구역의 군청을 조선시대 관아에 두지 않고 자기네 풍으로 새로 지으면서, 관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옛 도시공간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신시가지를 만들었다. 오늘날 일부 남아 있는 관아 건물과 관아터들이 모두 시내 한쪽에 물러나 있는 것은 이런 이유다. 그리고 용도를 잃어버린 관아 건물은 대개 새로 등장하는 학교 건물로 이용되었다. 연풍초등학교, 고부초등학교, 안의초등학교, 거제중학교 등 지금 전국의 유서 깊은 지방 초중등학교들이 거의 다 옛 관아 자리에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관아의 권위를 보여주는 2층 누각의 문루는 철저하게 파괴했다
부여·논산·보령 3 백제의 여운은 그렇게 남아 있고
-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월간중앙]에서 특집으로 ‘충청도 기질 대해부’라는 기사.
-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느리다. 동작의 문제라기 보단 마음의 여유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서울택시 기사가 공주에 갔는데 앞차가 너무 느리게 가서,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림. 신호대기 상황에서 상대 운전자가 와서 한마디. “그렇게 바쁘믄 어저깨 오지 그랬시유.”
- 충청도 사람들은 좀처럼 속을 보여주지 않는 더듬수가 있다는 것도 실은 매사에 신중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여론조사기관에서는 충청도를 ‘무덤’이라고 한다. 표준오차가 (+-) 5%를 넘는다는 것은 조사결과가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충청도 여론조사는 (+-) 12%를 제시하기도 한다. 출구조사조차 믿기 힘들다고 한다.
- 나는 충청도의 이 간접적인 표현이 지닌 속뜻을 심도있게 취재해보았다. 그 결과 “넘 염려 말어”는 찍어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충청도 사람 입에서 “글씨유”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틀렸다는 뜻이다. 더 큰 부정은 “냅둬유”이고 완벽한 부정은 “절단나는겨”다. 충청도 사람들은 ‘아니다’ ‘안된다’는 직접화법은 거의 쓰지 않는다. 부정적인 말을 나타낼 때는 꼭 “소 용읎슈”아니면 “틀렸슈”다.
- 사람들이 이렇게 신중하다보니 충청도에서는 공연이 잘되지 않는다. 연극배우들은 관객 호응이 보이지 않아 죽을 맛이라고 하고, 대중음악에서도 좀처럼 반응 을 보이지 않아 아무리 인기가수라도 충청도에 공연 왔다가는 번번이 울고 간다고 한다.
-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문화재청장 시절 백제역사재현단지 개관식에서 축사를 하면서 “공주 부여를 유네스코 세계역사지구로 등재시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내심 박수가 나올 것을 기대했지만 박수는커녕 식장 안이 물 끼얹은 듯이 조용해지면서 시선이 갑자기 나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대충 마무리 말을 한 다음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곁에 있던 도지사가 내 손을 잡아끌면서 “고마워유. 그런디 여기 사람들은 함부루 박수 같은 건 안 쳐유 미안허구먼” 하는 것이었다.
- 장하리 삼층석탑(p389)이 3층 몸돌의 가운데 홈을 일부만 판 것이 포인트가 되어 조형적 텐션을 잘 만들었다. 대조사 석조관음 보살상(p396)과 관촉사 은진미륵(p405)도 나름 고유의 매력(개성적 파격적이며 민중적 소망이 담겨있다)이 있다.
부여·논산·보령 4 바람도 돌도 나무도 산수문전 같단다
- 무량사는 부여가 내세우는 가장 아름다운 명찰이며, 대한의 고찰이다 보물이 무려 여섯개나 된다. 무량사는 초입부터 답사객에게 고즈넉한 산사에 이르는 기분을 연출해준다. 외산면 소재지에서 무량사로 접어들면 이내 은행나무 가로수가 오릿길로 뻗어 있다. 사하촌 입구에 다다르면 길 가운데 느티나무가 가로막고 그 옆으로는 나무장승이 한쪽으로 도열 하듯 늘어서 있다.
- 무량사는 무엇보다 자리앉음새가 그렇게 넉넉할 수 없다. 무량사 입구에 당도해 차에서 내리는 답사객은 이렇게 넓은 산중 분지가 있나 싶어 너나없이 앞산, 뒷산, 먼산을 바라보면서 가벼운 탄성을 던진다. 문경 봉암사, 청도 운문사처럼 사방이 산등성이로 둘러싸인 산중. 분지에 자리한 열두판 연꽃 같은 편안한 절이다. 그런데 그 분지가 사뭇 넓어 시원한 맛 이 있다.
- 산사의 인프라는 산일 수밖에 없는데 만수산은 일년 열두달이 무랑사보다 더 아름답다. 꽃 피는 봄철, 단풍이 불타는 가을, 눈 덮인 겨울날의 무량사야 말 안해도 알겠지만 아직 잎도 꽃도 없고 눈마저 없어 을씨년스러운 2월에도 만수산은 수묵화 같은 깊은 맛이 있다. 나무에 봄물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마른 가지 끝마다 가벼운 윤기가 돌 때면 산자락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 없다.
- 무랑사는 일주문부터 색다르다. 원목을 생긴 그대로 세운 두 기둥이 아주 듬직해 보이면서 지금 우리가 검박한 절집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묵언으로 말해준다. 여기에서 천왕문까지의 진입로는 기껏해야 다리 건너 저쪽 편으로 돌아가는 짧은 길이지만 그 운치와 정겨움은 어떤 정원설계사도 해내지 못할 조선 산사의 매력적인 동선을 연출한다.
- 천왕문 돌계단에 다다르면 열린 공간으로 위풍도 당당하게 잘생긴 극락전 이층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왕문은 마치 극락전을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드는 액틀 같다. 적당한 거리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극락전의 넉넉한 자태에는 장중한 아름다움이 넘쳐흐르지만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미더움이 있다. 극락전은 무량사 건축의 핵심이며 이를 기준으로 해서 앞뒤 좌우로 부속건물과 축조물 그리고 나무가 포치해 있는데 그것들이 아주 조화롭다
- 무량사는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하지만 문무왕은 7세기 분이고 범일국사는 9세기 스님이니 이는 말도 안된다. 낭혜화상 무염이 창건했을 개연성이 더 큰데, 무염은 가까이 있는 성주사를 창건한 스님이다. 태조암 쪽으로 가다보면 통일신라시대 절터가 있다. 여기가 원래 무량사 자리로 거기에 서면 만수산 산자락 품이 더 넓고 편안하다.
- 그런 무량사가 불에 타 고려 고종(재위 1213-59) 때 중창됐다고 한다. 아마도 원나라 침공 때 불에 탄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 불탄 자리를 버리고 지금의 위치로 옮긴 듯하다. 그것은 오층석탑(보물 제185호)과 석등(보물 제233호)이 말해준다.
- 임진왜란 때 무량사는 병화를 입었다. 이것을 인조 때 진묵대사(1563~1633)가 중창했다고 한다. 무량사 극락전은 그때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극락전 안에 있는 소조아미타삼존불(보물 제1565호)의 복장에서 나온 발원문에 1633년에 만들었다고 분명히 적혀 있고, 따로 보관된 괘불(보물 제1265호)에는 1627년에 그렸다는 기년과 함께 혜윤, 인학, 희상이라는 화승들의 이름도 적혀 있으니 무량사는 이때 대대적으로 불사를 일으켜 오늘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 일천년의 연륜을 갖고 있는 고찰에는 반드시 그 절집의 간판 스타가 있게 마련인데 무량사의 주인공은 단연코 매월당 김시습(1435-93)이다. 우화궁 위로 보이는 건물이 김시습의 영정(보물 제1497호)을 모신 영산전. 생육신의 한 분인 김시습은 방랑 끝에 말년을 여기서 보내고 59세의 나이로 세상은 마쳤다.
-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명이고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저자라는 사실은 학생시절에 배우고 알고 있지만 그의 일대기나 인간상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본 일이 없다. 김시습의 일대기는 율곡 이이가 선조대왕의 명을 받아 쓴 <김시습전>이 있고, 이문구의 소설 <매월당 김시습> (문이당 1993)과 심경호 교수의 <김시습 평전> (돌베개, 2003)이라는 명저가 있다.
- 김시습의 본관은 강릉이다 세종 17년(1435)에 태어난 그는 놀라운 천 재였다. 세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이 이 얘기를 듣고 승지에게 과연 신동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승지는 다섯살 김시습을 무릎에 앉히고 “네 이름을 넣어 시구를 지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 그의 시에 대해, 세종대왕은 보고를 듣고는 역시 천재라며 직접 보고 싶으나 군주가 어린아이를 직접 시험한 예가 없다며 “재주를 함부로 드러나게 하지 말고 정성껏 키우라. 성장한 뒤 크게 쓰리라”라며 비단도포를 선물했다고 한다.
- 이때부터 그는 오세라는 별호를 얻었다. 21세 때 그는 삼각산 중흥사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이 양위한 사실을 전해들고는 방성통곡한 다음 몸부림쳤다. 책을 불사르고 급기야는 광기를 일으켜 뒷간에 빠지기도 했다. 22세 때 사육신이 마침내 처형되자 성삼문, 유응부 등의 시신을 수습해 노량진에 묻어주고 작은 돌로 묘표를 삼았다. 그리고 24세에는 중이 되어 방랑을 시작했다. 6,7년간 관서 관동 호서지방을 두루 유람하고 31세엔 경주 남산(금오산) 용장사에 서실을 짓고 정착했다. 이때 <금오신화>를 지었다. 그는 세상을 버렸으나 김시습의 명성은 지식인사회에서 자자했다. 효령대군의 청을 받아 서울 원각사 낙성회에 참석해 찬시를 짓고 돌아간 일도 있었다.
- 세조가 죽자 그는 경주를 떠나 서울 근교로 올라왔다. 성종 3년(1472), 38세의 김시습은 도봉산, 수락산의 절로 와서 40대 전반까지 머물며, 문인들과 교류하고 시를 짓고 유교와 불교의 참뜻을 강구했다. 그러다 47세 때는 아예 환속해서 장가도 들었다. 그러나 세월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1년도 못돼 아내와 사별하고, ‘페비윤씨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세상을 버리고 스님 모습으로 관동지방에서 방랑생활을 했다. 그리고 58세에 무량사로 들어와 이듬해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청한자, '세상의 쓸모없는 늙은이'라는 뜻의 췌세옹 등이 있다
- 율곡은 <김시습전>에서 김시습은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며 대범하고 솔직하였다고 평했다. 또한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고 세태에 분개한 나머지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하여 세상과 어울려 살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불가에 의탁하고 방랑을 일삼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당대의 명신이자 문장가인 서거정(1420~88)은 김시습을 국사라 칭찬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