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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1. 또 악인들은 선을 칭송하면서도, 정작 칭송하는 자신들이 악한 인간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p.317
- 처음부터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선을 칭송한다면 그것을 추구하려 했을텐데, 의도하지 않게 반복되는 악행으로 인해 선에 있어서 스스로 단념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자신을 긍정하며 살아가기 위해 부끄러움을 없앤 것이다.
2. 신들에 관한 한, 비록 거짓말이더라도 시민들에게 유익이 된다고 여겨질 때, 많은 거짓이 이미 성스러운 무엇, 심지어 종교적인 무엇이라고까지 포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p325
- 많은 잘못된(악의적인) 거짓이 진정한 가치마저 가려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옳지 않은 것은 분명하기에 쫓으면 안 되지만 자신감과 같은 자기 유익을 위한 선의적인 거짓을 진리로 믿는 것은 최소한 나의 황폐함을 막아주지는 않을까? 그리고 발전시켜주지 않을까?
3. 신들이 로물루스 모친의 간통은 징벌하지 않으면서 파리스의 간통은 징벌했다면, 이는 불공정한 일이다. p.325
- 신이 하는 일이 인간의 ‘공정하다’는 평가 속에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특정인은 신이 ‘불공평하다’는 신의 속성 자체도 부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인간의 관점과 시간으로는 알 수 없다고 유보함으로써 신의 공정한 속성은 유지되면서 개개의 다르게 보이는 사건들을 설명할 수가 있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무지에 대한 오류일지도 모른다.
4. 법률과 관습과 토지로 그들의 소유가 증가하여 충분할 만큼 번성하고 넉넉할 만큼 융성하자, 인간사 대부분이 늘 그렇듯이 풍요에서 시기가 생겨났다. p.337
- 평온한 시기, 만족할 만한 상황 속에서는 항상 죄악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만족은 좋은 것이 아닌가? 왜 우리는 그것을 그토록 갈망하는 걸까? 그리고 실제로 만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과거의 것을 성취해도 지금의 나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낄 수 있다. 아니 약간의 만족을 느끼지만 그것보다 새로움 불만족의 정도가 더 커서 전체적으로는 불만족하다고 느낀다.
5. 로마인들이 여자들을 납치하고 곧이어 장인들과 전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왜 신들은 로마인들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을까? p.345
- 이러한 일이 로마인들의 신에게서만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유대교의 하나님 역시 그렇지 않은가? 성경을 조금만 읽어 보아도 그러한 경우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단편적인 사건만을 보고 신들을 책망하는 것은 신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합리적으로 비판하고 싶다면 올바르게 신에 대한 관점으로 봐야한다. 하지만 그렇게 과연 신을 비판할 수 있을까?
6. 전쟁은 지배욕에서 일어난다. p.351
- 지배욕이라는 것을 인간의 마음에 심어준 이유는 무엇일까? 악한 본성의 일환이라면 그것은 처음부터 없어야 하는데, 신의 뜻이 있기에 우리에게 주어졌을 텐데 전쟁의 극단적인 상황을 유발하는 지배욕의 긍정적인 기능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7. 단지 나태에 빠진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려고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p.351
- 나태에 빠진 사람들은 이미 그 안의 정신이 황폐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정신을 개조시키기 위한 제도와 노력의 성과는 단기간 내에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신의 황폐함을 압도할만한 또 다른 정신적 충격이나 사건이 있다면 원초적 생존 본능에 의해서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전쟁이 바로 그런 것이다.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엄청난 정신적 긴장 상태는 기존의 나태함을 유발하는 정신적 황폐함을 압도하여 원초적인 생존을 위해 그들을 움직인다.
8. 지배욕이 전쟁의 명분이 되기 시작했으며 최대의 영광은 최대의 제권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p.353
- 핑계를 대자면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나는 최고의 권력은 최고의 영광을 가져다준다는 이 생각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권력이 없을 때의 비참함을 생각하면 권력은 비참함을 없애 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비참함을 없애 줄 수는 있지만 영광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닌가? 그래도 비참함을 없애 준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좋은 가치의 것이라 생각한다.
9. 검투라는 저 잔혹행위마저 칭송이라는 상급을 받는다. p.353
- 우리나라 남자라면 모두 국방의 의무를 행한다. 한마디로 거기서 우리는 싸우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 안에서는 위와 같은 상황은 당연한 것이다. 죄책감도 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앞서 말한 적이 있듯이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라고 한다. 우리가 속해 있는 국가를 위해 한 국민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국방의 의무도 해야 한다. 그런데 이곳은 잔혹한 행위가 칭송받는 곳이지 않은가?
10. 전쟁은 형제 살해다. p.355
- 유감스럽게도 국사뿐만이 아니라 세계사를 살펴보더라도 거의 모든 전쟁의 시초는 형제들의 다툼이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수많은 싸움은 물론이거니와 최근의 한국전쟁 역시 한민족의 싸움이었다. 동독과 서독의 전쟁 역시 형제의 싸움이다.
11. 그러므로 국왕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많은 신들의 주재를 받으면서도, 평화로이 통치를 한 바 없었다. p.357
-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어떠한 국왕들도 평화로운 통치를 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한쪽에게 이롭고 평화로운 것 같은 것은 다른 한쪽에게는 불리하고 고통의 순간이었다. 모두를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에 의한 통치뿐이기에 어떠한 국왕도 신을 절실히 믿는다고 해도 인간이기에 그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다. 따라서 사실 국왕에 의한 평화로운 통치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12. 때마침 일식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태양 운행의 일정한 이치에 따라서 일어난 사건임을 알지 못하는 식견 없는 군중은 그 일을 로물루스의 위력에 돌렸다. p.357
-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을 때 과거의 우리나라도 이것과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의 예가 가상이긴 하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잘 나타냈다.
13. 조국에 대한 사랑과 가없는 명예심이 이겨냈도다. p.365
- 타인에게 칭송 받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대의와 가족 중 선택을 하는 상황 속에서 대의를 택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왜 그것이 더 멋있고 좋은 것으로 추대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불행하면서까지 선택한 대의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 큰 뜻을 품고 있기는 한 것일까? 큰 뜻은 다수에게 이로운 것이기에 붙여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다수의 이로움이 개인의 행복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인가? 그런 대의 필요 없다.
14. 그렇다면 로마가 거두었다는 저 승리들도 행복한 사람들의 건실한 기쁨이 아니었고 가련한 인가들의 허망한 위로에 불과했으며 전쟁 없이는 조금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작자들에 대한 선동에 불과했다. p.369
- 전쟁의 승리는 행복을 위한 건실한 기쁨이 아니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수많은 죽음과 슬픔 속에서 전쟁의 승리가 기쁨이 될 수 있겠는가? 허망한 위로일 뿐이다.
15. 전쟁에서 오는 엄청난 살육과 더불어 여인들의 혹심한 질병이 발생했다. 여인들이 만삭이 되어 출산을 하기 전에 임심한 채로 죽어갔던 것이다. p.377
-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렇게 많은 살생이 벌어지는데 오늘날에도 왜 이런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초등교육만 배웠다면 자신의 욕심이나 이익보다 생명이 낫다는 얘기는 할 수 없을 텐데, 어째서 갖가지의 이유와 대의로 전쟁을 자행하는 것일까?
16. 그런 재난에 뒤이어 더 무서운 화재가 따랐다. 불길은 신속하게 광장 일대를 삼키고는, 불이라면 더 없이 친숙했을 베스타 신전마저 남겨놓지 않았다.
- 불의 신전을 불에 의해 없앤 것으로 보아 우리의 피상적인 쾌락 추구와 만행은 결국 그것들에 의해 우리를 파괴할 것이다.
17. 그러니까 사람이 베스타의 신물들에 이로움을 끼쳐주는 것이지 그 신물들이 인간에게 이로움을 끼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p.383
- 희망이 없는 삶은 불행하고 영위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신이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 믿음을 확실히 하고 싶어 한다. 특히 희망과 같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냄으로써 그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착각)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물 같은 것은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 같다.
18. 승리한 자도 패자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p.383
- 승리한 자의 편에서 죽어나간 용사들에게 승리의 기쁨은 어디에 있고 그것으로부터 이로움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명예롭게 죽는다는 것이 가치가 있을까? 그 명예라는 것의 혜택(?)을 받을 대상, 적어도 가족이나 친척조차 없다면 그 죽음이 무슨 소용일까?
19. 저 옛날 국가 최후의 안보를 시도하여 군대를 위해 모금하던 돈보다 더 많은 돈이 오늘날에는 극히 피상적인 쾌락을 위해 배우들에게 쓰이는 판인데 말이다. p.385
- 당시에도 저런 표현이 나왔다는 건 인간은 정말 쾌락의 노예인 것 같다. 오늘날에도 대의명분이나 다수가 인정하는 공통된 가치가 점점 사라지고 자신의 가치가 최고가 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토론할 때 공통점이 발견되기 보다는 다양성과 차별화가 더 많이 드러난다. 그러면서 조금씩 절대적인 가치, 아니 보편적인 가치는 점점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일에 자신의 돈을 투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가치(쾌락이나 여러 형태의 자신을 위하는 일)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이 당여하다.
20. 만일 우리 시대에 이런 곤궁을 당하게 된다면 과연 누가 이 사람들의 불평을 당해낼 것인가? p.385
-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기 위해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삶을 보장해줄 것 같이 얘기하고 오늘날 원주민의 몰락과 타락을 가져온 것이 생각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고 자유와 함께 보상을 해줬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몰락과 타락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대상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와 보상, 그리고 올바르게 돌봐줄 (새로운 곳에 적응해서 자립하고 번영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하지 않을까?
21. 로마 공화국의 소중한 도시의 최후는 읽기에도 소름이 끼치며 글로 적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럴 경우에 신들은 뭔가 손을 쓸 법했다. p.387
- 이러한 비참한 최후에 도대체 신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신에게는 무한한 자비와 선함이 있어야하는데, 그들은 신이 아니다. 아니 어떻게 이토록 자신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등한시 할 수 있을까? 로마인들은 어떻게 이런 신들을 따른 것일까? 신인들에 의한 잘못된 통치 때문인가? 국민이 우매하면 결국 그 비참한 결과 역시 국민들의 몫이구나.
22. 여자는 아무도 재산 상속자가 될 수 없으며 심지어 무남독녀도 상속받지 못하게 한 법이었다. p.395
- 과거에는 어째서 여자들을 천하게 여겼을까? 그들의 능력은 과거에도 남자들 못지 않게 뛰어났다고 생각하는데. 오늘날 여자들의 능력은 웬만한 남자들 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학업에 있어서 상위권은 웬만해서 여자들이라는 것을 보면 우월함을 느낀다.
23. 이것이 만일 어떤 징조였다면 얼마나 큰 재앙이 닥친다는 징조였겠으며, 만일 징조가 아니었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재앙이었겠는가. p.399
-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신이 생각한 결론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추려는 이러한 태도가 계속 반감을 갖게 한다. 길짐승들의 광포에 대해서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을 어느정도는 인정하고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확신에 차, 무시하는 듯한 말투가 3권까지 읽는 동안 반복되면서 참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꽤나 논리정연하지도 않다.
24. 하지만 해묵은 불의를 감히 제거하려는 일은 위험스럽기 짝이 없었을 뿐더러, 커다란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이 그 사건이 보여준 교훈이다. p.399
- 형 그라쿠스의 피살 후 살육, 동생 그라쿠스의 피살 후 살육. 이것은 해묵은 불의의 제거에 의해서 발생한 파멸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불의에 의해서 나타난 파멸이다. 오히려 불의는 빠르게 제거해야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의는 더 퍼져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파멸을 가져 올 것이다.
25. 만일 그 여신이 도성에 있었다면 저토록 혹심한 분란으로 국민의 화해가 갈기갈기 찢겨나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p.401
- 이러한 상황을 봤을 때, 화해의 여신이 존재하기는 한 걸까? 그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신전을 세우는 것은 의미가 있고, 그로인해 자신들의 화해를 바라겠지만, 화해가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것을 봤을 때 반대의 여신의 존재가 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26. 승리를 얻기 위해 서둘러 학살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확보한 승리를 무시하지 못하게 하려고 자행된 학살이었다. p.409
- 승리를 하기 위해서 학살을 하고, 또 그 승리에 대한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 학살을 하는 것으로부터 누군가의 위에 서서 군림하려는 욕심의 만행이 어디까지일까 두렵다.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행동까지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27. 평화가 전쟁과 시합을 벌여 어느 편이 더 잔인해질 수 있는가 겨룬 결과 평화가 이긴 셈이다. p.409
- 전쟁 중에는 무장한 사람들은 저항이라도 하다가 죽을 수 있지만 평화로운 시기의 살육은 저항도 못하고 맨손으로 죽어나갈 수밖에 없기에 충분히 더 잔인할 수 있다.
28. 오히려 저 신들을 숭배하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래야만 이런 해악도 더 미미한 해악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419
- 종말론을 예견하던 종교들이 그 종말의 시기가 지나도 변하지 않으면 신도들은 그 종교를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절실히 믿게 된다고 하는데, 로마인들과 비슷한 것 같다.
29. 하고 많은 선익을 입고서도 우리 그리스도에게 감사할 줄 몰랐던 사람들이라면 수많은 저 해악을 두고서 자기네 신들에게 탓을 묻도록 하시라. p.415
- 아우구스티누스는 진정한 신이 하나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데, 선익에 대하여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에게 감사할 줄 모르고 자신의 신들에게 그것을 돌렸다면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한 사실과 다르기에 잘못된 행동이고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로마인들에게 재앙이 닥친 것에 대해서 자신들의 신들에게 탓을 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그 탓을 돌리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로마인들의 태도를 책망하기 이전에 왜 그런 재앙을 내렸는지를 먼저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0. 선대에 사람들이 저런 신들을 숭배하고서도 더 심한 해악을 당했는데도. p.419
- 왜 과거로부터 우리는 제대로 깨닫지 못 하는 걸까? 항상 반복되는 실수로부터 우리는 조금씩은 깨닫고 나아지고 있기는 한 걸까?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생각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가 올바른 생각을 갖도록 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느낀다. 그런데 행복은 감정적 생각인가? 그렇다면 올바른 생각을 한다고 해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