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살던 시절 우리선수들의 과식습관. 확장된 위때문에 마지막에 허기가 져 스퍼트를 못했다. ‘소식과 풍부한 단백질 섭취’. 6번의 한국신기록 비결은 ‘식이요법’에 있었다.『스페인 선수가 스퍼트를 내기 시작했어요. 35㎞ 지점을 지나자마자 봉주와의 거리차이가 더 벌어졌어요. 300m 정도 차이는 나는 것 같아요. 감독님 말대로 25㎞ 지점부터 선두와 바싹 붙으라고 계속 신호를 주었지만 쉽게 되질 않나봐요』 전화를 끊은 나는 약간의 조바심이 생겼다. 남은 거리는 약5㎞. 출국하기 전 봉주의 컨디션이라면 세계신기록도 바라볼 수 있었는데…. 지난해 겨울 훈련중 당한 왼쪽허벅지 부상과 올2월 훈련중 같은 부위에 잠깐 나타났던 통증 때문에 고생했던 봉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2시간7분44초. 2위지만 한국신기록. 지난 4년 동안 갖은 발버둥을 쳐도 깨지지 않던 기록을 비로소 깬 것이다. 더욱이 8분대를 넘어 7분대로 진입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봉주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너는 이제 한국 마라톤의 기둥이다』 오늘은 편하게 잠을 잘 것 같았다. 그러나 「뒷심 부족」이란 우리 선수들의 고질적인 문제가 다시 머리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17초. 1위와 약 100∼120m 차이. 35㎞까지는 아주 좋았던 기록. 마지막 7㎞가 문제다.
'뒷심만 조금 더 길렀더라면 더 좋은 기록이 나왔을 텐데'라는 회한이 밀려왔다. 이제부터는 35㎞ 지점 이후의 훈련 보완과 조금 변형된 식이요법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오롱 마라톤팀 감독을 맡은 이후 12년간 오늘까지 여섯차례나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그 비결은 바로 「식이요법」. 그러나 그건 별 것 아니다. 바로 소식(小食)과 많은 단백질 섭취에 있다.
내가 식이요법에 관심을 가진 것은 76년 마라톤을 지도하면서부터. 체격조건이 우리와 비슷한 일본선수들이 세계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때였다. 그래서 77년부터 해마다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떠나 그들의 훈련방법을 열심히 지켜봤다. 서울로 돌아와 똑같은 방법으로 훈련하고 대회에 출전했지만 우리 선수들의 성 적은 형편 없었다. 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절망감만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체격조건에서 오히려 나았던 우리 선수들이 일본 선수에게 뒤지는 데에는 뭔가 다른 문제가 있다고 여겨져 장고(長考)에 장고를 거듭했다. 그러나 문제는 쉬운 곳에서 찾아졌다. 바로 「밥」이었다.당시만 해도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평소 고른 영양섭취를 할 수 없었던 우리 선수들은 허기가 질 때마다 밥을 마구 먹는 바람에 위가 확장될 대로 확장된 상태였다.
특히 마라톤의 최대 고비인 32㎞ 지점에선 허기가 져서 도저히 뛸 수 없다고 호소해왔고 막판 스퍼트를 내야 할 40㎞ 지점에 이르러선 거의 탈진상태가 됐다. 이렇게 후반에 약한 우리 선수들이 마구잡이로 밥과 고기를 먹는 것을 지켜본 일본 감독은 위가 확장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잘 뛰어도 마지막 스퍼트를 할 수 없다고 넌지시 귀띔해 주었다.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나는 그날 저녁부터 선수들에게 먹는 밥의 양을 줄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선수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선수들 불만이 대단했다. 밥 훔쳐먹다 들키고 혼쭐나기 일쑤. 그러나 서서히 빛을 보기 시작했다. 90·91년 연거푸 세운 김완기의 한국신기록. 『감독님, 이렇게 적은 밥을 먹고 어떻게 그 긴 거리를 뛰라 는 말입니까』
새벽운동을 마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밥상에 앉은 선수들. 그러나 자신들 앞에 놓인 밥그릇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공기에 담긴 적은 밥.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선수들에게 내뱉은 「식사 끝」. 곧이어 터져나온 볼멘소리들. 일본 마라톤 감독이 전해준 말로 쏟아지는 불만을 일축시켰다.
그 자리에선 수긍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선수들. 하지만 고픈 배를 어쩌지 못해 한밤중에 몰래 외식을 하거나 고양이처럼 부엌에 들어가 밥을 훔쳐먹기도 했다. 그런 선수는 혼쭐이 났다. 심할 때는 매도 들었다. 한창 크는 선수들을 배불리 못먹이는 내 가슴은 쓰리다 못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더욱 빈번해지자 선수들을 불러모았다.
내가 준비한 것은 고무주머니 2개와 하얀 쌀밥. 한쪽 주머니엔 1되 분량의 밥을, 다른 주머니엔 1홉 분량의 밥을 넣었다. 두명을 불러세우곤 2개의 주머니를 2시간 가까이 흔들어보라고 했다. 엉뚱한 나의 지시에 의아해 하던 선수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주머니를 사람의 위라고 생각해보자. 이렇게 많은 밥을 먹고 2시간 가까이 뛴 사람이 막판 스퍼트를 할 때쯤이면 더 많은 허기를 느끼게 된다. 즉 지구력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평상시 음식 절제와 소식을 하고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먹는다면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대신 균형잡힌 식단으로 너희들의 영양은 충분히 관리해 주겠다』
2시간 가까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흔들어댄 결과는 1되 분량의 밥을 넣은 주머니가 1홉 분량의 밥을 넣은 주머니보다 더 푹 꺼졌으며 빈 공간이 더 많았다. 그 이후 몰래 밥을 먹다 들키는 선수는 없어졌다. 그대신 그들에게 밥보다는 반찬, 특히 고기와 야채, 과일은 먹고 싶은 대로 맘껏 먹게 했다.
단숨에 효과를 볼 수 없었던 식이요법. 그러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식이요법에 확실한 믿음을 준 것이 바로 「김완기」였다. 90년 동아마라톤대회에서 김완기가 「2시간11분34초」로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이듬해 김완기는 또 다시 조선일보 마라톤에서 2시간11분02초로 자신의 기록을 32초 앞당기며 한국 마라톤 부흥기를 열었다. 이제 그 누구도 나의 식이요법에 토를 달지 않는다. 오히려 요즘엔 「고기 다이어트」니 「황제 다이어트」니 하며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고 하니 기쁘기 그지없다. 하지만 나이 어린 사람은 의학적·정서적으로 위험하니 하지 않는 게 좋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
어느정도 고수에 해당되는 말이오니 새겨들으면 죽습니다...확신합니다....
시대의 대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