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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종교는 유니테리언이다. "No creed", 즉 아무 것도 신조로서 믿지 않는다. 미국의 남북 전쟁은 일반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해 일어난 전쟁으로 이해되지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 복잡한 배경이 있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북부에서는 몇 가지의 사상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은 1800년에서 1840년 정도까지 미국의 뉴잉글랜드와 뉴욕주 북부를 휩쓸었던 두 번째 큰 각성운동 (the second great awakening)이었다. 이것은 사상적 종교적 운동이었고 결국 남북전쟁은 이런 사상적 종교적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준비되었던 것이다. 이 운동은 청교도 주의인 칼뱅주의를 버리고 유니테리언 종파가 득세하게 만들었으며 유니테리언종파를 넘어서 에머슨이라는 인물이 문화적 영향력을 가지게 만든다.
그러한 변화의 기본은 기성사회 혹은 굳어진 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 칼뱅주의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악하다고 말하면서 전통을 지키자는 보수주의라면 유니테리언은 인간을 긍정하고,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믿고 이성의 힘을 믿었다. 그들은 예수를 높게 평가하지만 예수를 신격화하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며 신 앞의 평등을 강조해서 여성과 노예의 인권을 강조한다. 보스턴의 하버드 대학은 남북전쟁 전에 이러한 유니테리언들의 대학이 되었다.
한국에는 유니테리언이 없기 때문에 나는 외국을 여행 할 때는 그 지역의 유니테리언 교회를 꼭 방문한다. 그 이유는 유니테리언 교회는 어떤 신조나 교리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마다 색깔이 완전히 달라서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방문 했던 교회 중에 마이애미 교회는 예수, 석가, 마호멧, 힌두교의 신의 걸게 그림을 크게 걸어 놓았고 하와이 교회는 고급 예술가들의 사롱 같은 분위기였고 캐나다의 몬트리얼 교회는 활발한 YMCA같은 분위기였고 시드니 교회는 휴머니스트 클럽 같은 분위기였다. 하와이 호놀룰루 유니테리언 교회도 갔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교회는 오바마를 키운 외할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가 다녀서 어린 시절 오바마도 다니던 교회였다.
유니테리언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셀베르투스는 신학자이자 의학자이고 법률가였다. 어린 나이에 그는 모국어는 물론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하였으며, 15세에 성경을 원문으로 독파하고 수도사가 됨으로서 종교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종교인으로 기득권을 누리며 살지 않고 종교를 비판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그런 삶을 살게 된 계기는 1530년 2월, 볼로냐에서 거행된 샤를 5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것이었다. 대관식에 참여하는 셀베르투스는 황제의 대관식을 주관하는 교황의 거만과 허세, 세속에 찌들고 타락한 교황을 맹종하는 황제를 본 뒤, ‘신성한 종교가 이래서는 안된다.’라고 생각하고 후원자를 떠나 리옹, 제네바 등을 돌며 종교개혁 지도자들을 잇달아 만나고 다닌다.
셀베르투스는 종교가 곧 권력이었던 시대에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를 상대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핵폭탄’을 날렸던 것이다. 1531년에 ‘삼위일체론의 오류에 대하여, 제7권’ (De Trinitatis erroribus libri vii)을, 1532년에 개정판인 ‘삼위일체에 관한 대화, 제2권’(Dialogorum de Trinitate libri ii)을 잇달아 발간한다. 그러나 당시로선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었던 이 혐오스럽고(?) 시뻘건(?) 책은 널리 알려지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요주의 인물, 제거 대상으로 찍히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셀베르투스는 눈치 빠르게 빌라노바루스(Villanovarus)로 이름을 바꾸고 프랑스 리옹으로 튄다. 수 년간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던 그는 1538년 파리대학 의학과에 입학한다.
그가 의학과에 입학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애정 이상의 선택이었다. 그는 대주교의 주치의가 되었으며, 의학자로서 폐를 통한 혈액순환을 최초로 기술한다. 비극은 1546년 자신의 사상을 보충하여 개정한 ‘그리스도교 회복’(Christianismi Restitutio)의 원고를 칼뱅에게 우편을 통해 보내서 만나고 싶다는 뜻을 담아 전하면서 시작된다. 셀베르투스는 감히 당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일인자인 칼뱅에게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도전장을 보낸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카톨릭이던 개신교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교리다. 근데 셀베르투스는 삼위일체에 대해 성경에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그러므로 무조건 성경에 근거해야 하는 개신교의 교리에 어긋나며,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는 별개라고 주장했다.
셀베르투스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가지고 싸움을 붙은 것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수장인 칼뱅에게 도전장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직접 만나서 토론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2년여 동안 서신교환을 통해서만 의견을 주고 받는다. 칼빈에 의하여 대면 토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553년 셀베르투스는 칼뱅에게 보냈던 원고의 완성본인 기독교 강요에 대한 반론이자, 카톨릭, 개신교 모두를 비판하는 ‘그리스도교 회복’를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간교한 칼뱅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셀베르투스를 출판업자와 함께 카톨릭의 로마교회 종교재판소에 고발한다.
종교재판에 회부된 출판업자와 셀베르투스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묵비권을 행사한다. 발간된 일부는 셀베르투스의 가명인 빌라노바누스로 되어있었고, 셀베르투스와 출판업자는 한 목소리로 ‘우린 그런 책을 낸 적 없다’고 우겼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재판에서 셀베르투스는 사형을 선고 받는다. 증거는 일전에 칼뱅과 주고받았던 원고가 칼뱅에 의해 종교재판소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셀베르투스는 감시의 소흘함을 틈타 탈출에 성공한다. 중대한 이단을 놓친 로마교회 재판소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의 초상을 앞에 두고 ‘천천히 산채로 태워 재로 만든다’는 사형을 선고하며 끝이 난다.
그러나 탈출에 성공한 셀베르투스는 그 해 8월, 바로 칼뱅이 있는 제네바 거리에서 연행된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세르바투스가 제네바에 등장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그에게 칼뱅은 운명적 연적이라는 것이다. 직접 만나 해결하지 않으면 도저히 끝나지 않을 논쟁이었던 것이다.
제네바에서 시의회 주관으로 재판이 열린다. 재판이 진행되며 칼뱅과 셀베르투스의 법정논쟁이 벌어졌지만 이미 끝난 게임이었다. 시의회는 재판에 대해 제네바와 자매관계에 있던 네 도시(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에 문의하기도 했다. 네 도시는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 이렇게 두 달이 걸린 재판은 결국 제네바 시의회의 3일간의 최종논의를 통해 만장일치로 ‘가장 고통스런 사형’인 화형을 선고하며 끝이 난다. 이로서 셀베르투스는 제네바에서 종교개혁가인 칼뱅에 의해 종교적 사형을 당한 최초가 되었다.
1553년 10월 27일 샹펠(Champel)의 화형장. 화형에 필요한 집과 나무, 그리고 그의 원고가 차곡히 쌓여있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집과 나무, 그의 원고는 물론이요, 그의 살덩어리도 서서히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칼뱅은 화형장에 오지 않았다고도 하고, 사형 직전 셀베르투스를 찾아가 ‘저주나 받아라’고 호통을 쳤다고도 한다.
셀베르투스는 당시 가장 고통스런 끄을려죽이는 처형을 당했다. 그 이유는 바로 ‘다름’과 ’다름을 행사한 자유’ 때문이었다. 종교를 강요하던 시기에 강요를 거부했고, 오직 종교였던 시기에 반론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350년이 지나 칼뱅의 후학들이 셀베르투스를 태워 죽인 바로 그 자리에 속죄비를 세웠다.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신앙이 순교로부터 발원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순교를 당할 정도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시작 했지만 지금은 가장 힘이 없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역시 인간은 뭐든지 믿어야만 힘이 생기는 것 같다.
다음은 1997년 시드니 유니테리언 교회에서 했던 첫 설교이다. 물론 영어로.
당신들은 영어를 잘못하는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사람들은 자기가 쓰는 언어를 모르면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이 자기보다 아는 것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모든 종교에서 공통되는 것은 진리는 문자나 언어에 갇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불교의 유명한 선사들은 말 보다는 상징적 행동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쳤다. 홍콩 무술영화를 보면 눈앞에 있는 상대가 갑자기 높은 나무 위로 뛰어오르는 것을 본다. 그 때 나무 위로 같이 뛰어 오를 수 있어야 싸움이 될 수 있다.
이것처럼 선불교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문답도 전혀 논리적이 아니고 비약이 많다. 선불교에서는 홍콩 무술영화처럼 제자가 스승의 논리의 비약을 따라갈 수 있어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가 비유로서 진리를 가르친 이유도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다. 진리를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마치 소가 먹은 것을 되새김질하듯 듣는 사람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야 하는 비유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성서에서 예수는 많은 부분을 역설로서 말하고 있다. 예수가 역설로서 말한 것은 진리를 언어로 표현 할 수 있는 방법 중에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영원한 불행은 예수의 역설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 있는 것 같다.
성경 다음으로 세상에서 제일 많이 팔린 책은 로빈슨 크로소우란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가지 다 읽은 사람이 많지 않을 터이지만 실제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제일 많이 읽은 책은 단연 ‘로빈슨...’일 것이다.
하여간에 식인종도 사람이니 분명히 이름이 있었을 터인데 로빈슨은 원주민을 무슨 강아지 이름 짓듯이 만난 날이 금요일이어서 후라이데이로 정했다. 당연히 문명세계가 아닌 자연세계인 무인도에서는 원주민인 후라이데이가 로빈슨 크로소우 보다 더 적응을 잘하는 우수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라이데이를 야만인처럼 묘사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백인이 백인을 위하여 쓴 책이기 때문이다.
대비되는 책으로 파파라기라는 책이 있다. 남태평양에 있는 사모아 군도의 한 추장 투아비비가 처음으로 런던에 가서 문명세계를 돌아보고 온 다음에 자기 부족에게 행한 연설이다. 이 책에서 투아비비는 문명세계의 의식주, 경제, 산업, 농업, 환경 신앙 등등을 소박한 언어를 통하여 비판한다.
예를 들면 원주민들은 해를 보고 일어나고 일하고 잠이 드는데 문명인들은 모두들 손목에 소리가 나는 조그만 기계를 차고서 그 기계가 말하여 주는 대로 움직인다고 풍자가 아닌 사실을 표현한다.
서부 영화에서 가끔 인디언들끼리 만나면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무뚝뚝하게 말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볼 때가 많다. 처음에 나는 그것을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영어를 모르는 인디언의 세계를 야만적인 분위기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전적으로 오해를 한 것이었다. 인디언 세계에서는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을 진정한 예의로 알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 보다 생각이 먼저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수록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하여 온 관심을 집중 시켜서 표정에서라도 상대의 뜻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하나님과 상대 하는 것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입으로 기도하기는 하지만 정말 하나님과 말로서 통할 수 있을까? 말 보다는 생각, 우리의 관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나는 하나님도 바로 그런 방법으로 나와 상대한다고 생각한다. 쉽게 주고받는 말 보다 서로 깊은 관심을 갖는 것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첫댓글 유니테리언 교회는 어떤 신조나 교리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마다 색깔이 완전히 달라서 흥미가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방문 했던 교회 중에 마이야미 교회는 예수, 석가, 무하마드, 힌두교의 신의 걸게 그림을 크게 걸어 놓았고 하와이 교회는 고급 예술가들의 사롱 같은 분위기였고 캐나다의 몬트리얼 교회는 활발한 YMCA같은 분위기였고 시드니 교회는 휴머니스트 클럽 같은 분위기였다. 특히 하와이의 호놀룰루 유니테리언 교회는 오버마를 키운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가 다녀서 어린 시절 오버마도 다니던 교회였다고 해서 인상이 깊었다.
유니테리언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설교를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몇 달에 한 번씩 영어로 어렵게 겨우 겨우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교회 운영위원회에서 유니테리언 목사가 될 의사가 있으면 장학금을 대줄 터이니 하버드 대학(원래 하버드 대학은 유니테리언이 세운 학교이다.)에 가서 공부를 해보라고 정식으로 문서로 제안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