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외 4편)
김준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풀어진 끈이 목에서부터 흘러내려
손가락 틈으로 기어 나간다
거리의 바늘구멍이 넓어지고
캄캄한 석간夕刊 귀퉁이에서
거미줄 하나가 끈을 잡아 당긴다
주머니를 손 넣어 저어보면
돌멩이뿐인 종이의 광장과
아직 만날 수 없는 민중이 누워 있다
옆집으로 빗나간 나뭇가지처럼
흉터만 남은 안타까운 사지四肢
흔들릴 때마다 바짓가랑이 속에서
개울음소리가 컹컹 쏟아진다
간격을 두어 총소리가 들린다
찢어진 속옷, 감춰진 시간도 굴러 떨어진다
또르르 말아지는 거미줄에
고통스런 아우성이 걸려 파닥이고
저 빨간 혓바닥 가운데
얼굴 하나가 모래처럼 부서진다
고노이 섬
어디 어디에 숨어서 있나
갈대가 사람의 키를 넘는 고노이섬
갈대가 사람보다도 많이 흔들리는 고노이섬
밤이나 낮이나 굴속에서 붉은 숨을 쉬고
굴속에서 천만리 빗소리를 만나고
굴속에서 젖꼭지를 물려주고 미역국을 마시고
굴속에서 깨어진 손거울을 들여다보고
배춧잎을 씻고 아이 녀석의 기저귀를 빨고
그러나 굴속에서 울고 웃던 맨발의 여자베트콩은
어디 어디에 숨어서 있나
어디 어디에 숨어서 피를 흘리나
조니워카와 샴팽과 꼬냑크와 막걸리가 엎질러진 고노이섬
도마뱀이 쇠붙이처럼 녹이 슬은 고노이섬
원주민의 눈알이 모래주머니처럼 쏟아지는 고노이섬
먼 나라서 싸우러 온 새파란 젊은 애송이들이
지옥보다 캄캄한 민간인의 공동묘지
수억 년 석탄이 잠든 무덤 구뎅이에서
너도 나도 쭈그려 앉아 수음手淫을 한다지
무덤에 잠복호를 파고 들어가 총칼을 든 채
원숭이처럼 움츠리고서 수음을 한다지
밤마다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모가지를 넣어
도깨비 불 같은 비곗덩어릴 깜박깜박거리지
어디 어디에 숨어서 있나
갈대가 사람의 키를 넘는 고노이섬
히히 남의 총이 모자란 고노이섬
누군가 판초를 뒤집어쓰고 담배를 피우는 고노이섬
어린애의 장난감마저 죽어버린 고노이섬.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슬퍼하지 말라
절망하지 말라
좌절하지 말라
그리고 꿀꺽꿀꺽 먹어라
그리고 파닥파닥 살아라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강물이 흐르고 새가 날던
아득한 옛날부터
장미꽃에
물방울이 맺혀 구르듯
이 세상 천지 모든 것들은
그렇게 둥그러이 그렇게
완벽한 꿈으로 젖어 있나니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구멍이 뚫리거나 쭈그러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그것은 깊은 바다 속의 물고기처럼
지느러미 하나라도 잃지 않고
이 세상 구석구석을 살아가며
때로는 파아란 불꽃을 퉁긴다
오늘 슬퍼하지 말라
오늘 절망하지 말라
오늘 좌절하지 말라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면서
주룩주룩 슬퍼하는 자는
벼락을 맞아 죽으리라
하늘과 땅을 보면서도
절망하는, 좌절하는 자는
악마와 돼지가 돼버리리라
오오, 이 세상은
아이에게 젖을 빨리는
어머니와 산봉우리로 가득하고
밭고랑에 씨앗을 놓는
아버지와 봄비와 하느님으로 가득하다
오오, 하늘 아래
빈틈없이 꽃피어 있는
사람의 사람다움!
사람의 눈물과 앞가슴!
그리고 사람의 따스운 두 손!
노래 물거미
남과 북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DMZ 늪―
목마른 노루새끼들
종종 주둥이로 스쳐가는
지뢰밭 물구덩이 안에서
거미 두 마리가 엉겨 붙는다
반경 2cm가 될까 말까 한
물방울 속을 비집고 들어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암놈과 수놈
사랑을 한다
작은 하나
다치지 않고, 찢김도 없이
아흐,
둥근 물방울 속에
들어가 몸을 섞는다
단순한, 소박한, 완벽한, 꿈꾸는!
다시라기
던져라 꽃
던져라 술 던져라 밥
서녘바다 저 바다에
퍼렇다 떼죽음 당한 시간
퍼어렇다 떼죽음 당한 파도
떼죽음 당한 불두화 향기
떼죽음 당한 싯다르타
떼죽음 당한 사람의 아들
떼죽음 당한 하늘과 땅
한 마리 새가 죽으면
밤하늘 별들도 눈을 감고
한 송이 백합꽃이 꺾이면
세상의 모든 꽃들도 시들고
떼죽음 당한
사랑과 사랑의 실체
304명의 심장, 영혼들아
밥을 뿌리면 밥에 붙어서
술을 뿌리면 술에 붙어서
꽃을 뿌리면 꽃에 붙어서
바닷길 닦으면
황천길 닦으면 촛불 밝혀
오라 강강술래로 오거라
둥근 달 앞세우고
―독일어 시선집 『노래 물거미 Gesang der Wasserspinnen』 iudicium 뮌헨, 2024
--------------------
김준태 / 1948년 해남 출생. 1969년 《시인》으로 등단. 시집 『참깨를 털면서』 『국밥과 희망』 『지평선에 서서』 『밭詩』 등 20여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