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금강나루 뱃사공 이석재 묘와 세종 전의이씨시조 이도 묘
1. 금강 뱃사공 이석재 묘에 관한 전설
* 설화에 의하면, 당나라 주호선사는 공주순방길에 금강나루 뱃사공 이방이가 효심있고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나룻배를 타고는 강을 건느자고 요구하고 강을 건느자 다시 되돌아가자고 요구하기를 반복하여 10여 차례에 이르렀으나 이방이가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에 탄복한 주호선사는 이방이의 아버지 이석재의 묘자리를 잡아주고 이 자리는 꽃이 반쯤 핀 형국(半開花) 또는 달이 반쯤 찬 형국(半月形)이니 2백년후 후손이 번창할 것이라 하였다.
* 이 곳에 장사지내면 8백년후에 자손이 크게 떨칠 것이며 하늘과 땅이 도울 것이라고 하였다는 설화도 있다.
* 또한 설화로, 주호선사는 회(灰) 천포를 사용하여 묘를 쓰고 이장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는데 후손들이 국풍 박상의가 흉지라고 하는 말을 듣고 이장하려고 파묘해 보니 “박상희가 래룡일절이 끊어진 줄 알고 만대영화지지인줄은 모른다”(南來妖師 朴相熙 單知一節死 未萬代 榮華之地,)고 새긴 지석이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2. 이석재 사적비(事蹟碑)
* 전의이씨종중이 세운 이태사선산(李太師先山) 사적비(事蹟碑)에 의하면(네이버 브로그 “제이 역사문화 나들이”에서 발췌함), ➊(註; 이 부분은 종중이 직접 쓴 부분이다)묘지가 있는 곳은 공주 신관동 석방산 아래이고 갈룡음수형이다. ➋(註: 영조 갑술 족보수정시 德容이 쓴 글이다) 전설에 의하면 전의이태사의 선대가 살면서 행려인(行旅人)을 접대구제(接待救濟)하여 크게 은혜를 베풀었더니 어느 날 괴이한 중이 적덕한 사람을 알아보고 좋은 묘자리를 잡아주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장사를 지내면 자손이 매우 번성하여 금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이씨는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년에 가까운데도 그 고장 사람들은 이 묘를 가르켜 李太師의 先山이라 칭한다 ➌(註; 덕용의 글이다) 생각컨대 태사공이 금강에서 고려태조를 만났다면 공주가 세거지이었을 터이고 그렇다면 금강변에 선조묘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공주의 산소에 관한 상고 할만 한 문헌이 없으며 또한 태사공의 위로 몇 대 묘소인지도 알 수 없는 관계로 후손(註; 22세손이다) 지돈녕부사 징하(徵夏)가 공주목사로 재임시 돌을 다듬어 全義李太師先山이라 새겨 입비(立碑)코자 하였으나 종중의 의논이 같지 아니하여 묘 발치에 버려 두었다. 영조신유년(1741년) 징하의 계자(季子, 막내 아들) 德顯이 또한 공주판관이 되었을 때 이 고장에 전해오는 전설이 오래되었으나 끝끝내 의심할 것은 아니라 주장하고 지난날 버려두었던 表石을 묘앞에 세우고 아울러 禁伐地로 삼아 수호하여 왔다. 금번 보첩중수시(註; 영조 갑술년, 1754년이다)에 즈음하여 관련된 문적(文蹟, 나중에 참고하기 위하여 남긴 문서)이 없어서는 아니되겠기에 전설에 근거한 立石事由을 적어 후일 상고하는데 대비하는 바이다.(영조 갑술 수보시에 현감 德容 씀)
➍(註; 이하는 고종 경자보 편술자의 글이다) 근자에 진양재집(眞陽齋集, 註; 주호선사가 죽기전에 쓴 글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진양재는 전의이씨 재실이므로 종중에서 보관하던 문서일 것이다)을 보니 아래와 같은 당나라 주호(朱湖)의 기록이 있었다. 순화신묘(淳化辛卯 註; 신라 헌강왕3년인 원화? 811년이다)시월(十月) 어느날 금강나루터에 이르러 착한 사공의 너그럽고 인자함에 금강북쪽 가까운 곳에 산소자리를 하나 잡아주고 그의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하였다. 간좌(艮坐)언덕으로 손사병정方에서 흘러들어 오는 물이 유(酉)方으로 흘러나가니 만대영귀하고 크게 발복할 대지로서 어질고 착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얻기 어려운 자리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방이(李芳伊)의 지극한 효성은 후일 반드시 경복을 누릴 것이기에 그에게 소점해주어 그의 아버지 이석재(李碩才)를 장사지내게 하였던 것이다.
➎(註; 고종 경자보 편집자의 글이다) 이때가 辛卯年十一月 初九日이니 천문으로는 地雷復卦, 지리로는 水火未濟卦이니 반개화 또는 반월형으로 이곳에 장사지낸지 2백년후에는 세상을 떨칠 자손이 태어나 하늘이 돕고 땅이 받들 것이므로 나 역시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한 그 덕에 감격하여 묘소를 소점해주고 기록하노라 하였다더라
➏(註; 경자보 편집자의 글이다) 이 說은 구보에 실려있는 先山속전(俗傳;민간에게 전해오는 이야기)과 비슷한데 다만 양대(兩代)선조의 이름을 이방이와 이석재로 밝힌 점이 다르다. 이번 족보 수정시에 추록하여 후일에 비고(備攷)하고자 한다. 고종 경자(註; 1901년)수보시 추록하였다. 편술자 미상
* 묘비(전의이태사 선산)는 이덕현이 세운 것이고 사적비는 근자에 건립한 것
* 사적비원문(네이버 브로그“제이 역사문화나들이”에서 인용, 감사합니다.)
* 묘와 비석---
3. 전설과 사적비에 대한 검토
* 풍수전설은 대부분이 사실과 허구가 뒤석여 있고 과장이 많으므로 새겨 보아야 된다. 종중에서 전해오는 족보와 사적비에 기재한 것이 제일 정확할 것이다. 주호선사의 소점을 받아 811년 이석재의 묘를 쓰고 뒤에 보듯이 110년후에 이도가 탄생하고 전의이씨가 번창하였다. 그러나 이석재 묘는 후손중 유력자 이징하가 전의이씨선산이라는 비석을 제작하고도 종중에서 이의가 있는 바람에 세우지 못하고 방치해두었는데 그의 막내아들 이덕현이 1741년 비석을 세웠다. 그러므로 9백여년간 전의이씨가 관리하지 않고 실전지경에 있었던 것이다.
* 진양각과 석상---전의이씨들은 진양각을 지어 그 안에 주호선사를 작은 석상으로 조각하여 모시고 있다.
* 그러나 박상의(朴尙義, 1538~1621, 朴相義 朴相熙가 혼용되나 이식의 택당집에 적힌 朴尙義가 정확)를 언급한 지석은 남아 있지 않는다. 설마 주호선사가 8백년뒤의 일을 박상희라는 이름까지 정확히 알 수 있을 리 없다. 도선국사풍수비법회는 주호선사가 신라 유리자의 통맥법을 적용하여 소점하였고 박상의도 통맥법으로 감평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주호선사가 소점한 것은 811년이고 묘비를 세운 것은 1741년이며 그 사이 失傳상태이었다. 한편 박상의는 흔히들 1621년에 卒하였다고 하나 광해군 폐위시인 1623년까지 국사로 활동했고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광해군이 신임하던 풍수들이 인조반정으로 신병에 위험을 느끼고 피신하였다) 그럼에도 박상의 권유로 파묘해보니 지석이 나와서 복구했다면 이징하가 비석을 세우려 할 때 종중에서 무슨 이유로 이의를 제기했겠는가? 왜 사적비에 그런 이야기가 없는가? 통맥법이 유리자의 법이라면 당나라 주호선사가 신라에 와서 배웠다는 말인가?
* 남연군묘도 회를 3백포를 사용하여 1미터 두께로 덮었고 그 때문에 독일 오페르트가 파묘에 실패하였다. 가난한 뱃 사공의 묘를 누가 도굴할까? 1천포나 덮을 면적도 없다. 이 묘는 바람을 타기 때문에 주호선사는 비보책으로 석회포장을 하도록 지시한 것이라 추측한다.
* 그러나 2백년후 또는 8백년후에 후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일리 있다. 13세손에서 45개파가 생겨서 폭발적 번성을 시작하였고 23세손무렵인 1천6백년대(영조)에 현달한 후손이 많았다.
4. 전의이씨(全義李氏)
전의(全義)는 전성(全城)또는 전산(全山) 전은(全恩)이라고도 하며 현재 세종시 전의면 일대를 말한다. 인구는 16만4천(2015년, 59위), 조선문과급제188명(인구는 59위인데 급제자는 17위이므로 전의이씨가 명문가라는 말을 듣는다), 상신5명, 삼도수군통제사14명(이상하게 수군통제사가 많다)이다. 예안이씨(인구는1만8천명)는 전의이씨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5. 뱃사공 이석재와 전의이씨시조 이도와의 관계
* 이석재의 상계(上系)는 알려지지 않는데 그 지역에 살던 이씨로 추측된다. 상계가 뚜렷하지 않는 이씨는 대체로 알평이 原始시조이다.
* 이방이 부자(父子)는 금강나루에서 뱃사공을 하였는데 인심이 두텁고 효심이 깊었다. 이방이는 주호선사의 말에 따라 가르켜 주는 곳에 묘를 썼던 바 120년 뒤 후손 중 이치(李齒)가 고려 왕건이 군사를 거느리고 금강나루를 건늘 때 금강 물길을 잘 알고 있는 덕으로 도강에 큰 공을 세웠다. 왕건은 포상으로 이도(李棹)라는 이름과 전의(全義)의 넓은 땅를 하사하였다. 이도는 삼한삼중대광태사(三韓三重大匡太師)에 오르고 후손이 번성함에 따라 전의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 고려왕건은 개성의 토호이었는데 궁예의 부하장수로 활약하다가 918년 신숭겸등의 도움으로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였고 견훤과는 925년부터 주로 경북의 신라국경에서 전투를 벌려 929년 고창(현재 안동)전투에서 대승하고 935년 일리천(현재 선산)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리어 견훤의 아들을 처형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하였다. 이치(李齒)가 고려왕건의 군사를 도우고 이름을 하사받았으니 그 시기는 920年代로 추측할 수 있다.
이를 미루어보면 이석재와 이도의 생몰년도는 알 수 없지만 이석재 묘는 811년 조성되고 이도는 929년경 활약하였다고 추측되므로 이도는 이석재 묘를 쓰고 약110년뒤에 탄생하였다고 보면 되겠다.
* 보통 이런 경우 이석재를 원시조 또는 도시조(여러 파가 있을 경우)라하고 이도를 중시조 또는 기세조(起世祖)라고 부르는데 전의이씨는 이석재를 시조 이태사(이도를 말한다)의 선조라고 부른다. 통례에 따르지 않아서 어색하다. 다만 이석재로부터 이도까지의 계대를 알지 못한 탓에(그 사이의 선조들은 미미하였던 것 같다) 이석재를 도시조가 아닌 직접 시조로 모시기는 어려울 것이다. 통맥법에 따라 감평하면 35代 현인장상이 배출되고 전의이씨 번성도 이 묘의 발복이라한다. 그렇다면 전의이씨가 이석재를 시조로 묘시 않고 이방이 이하 4대가 실전된 것과 9백년간 이 묘가 실전되었던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6. 이석재의 묘(공주 신관동 산10)
* 이 묘에 관하여, ①이도(李棹) 묘와 함께 명혈이라는 다수 견해, ② 이도 묘는 명혈이 아니고 이석재 묘가 명혈이라는 견해, ③이석재 묘는 명혈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 ① 다수설은 이 묘는 사신사를 갖추고 생기가 있으며 대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서 길하다고 하고, 이도의 묘도 복호형으로 역시 명혈이라 한다. 그러나 이석재의 묘는 청백이 없어서 바람을 탄다. 우리나라 지형은 태백산맥이 척추를 이루고 서방으로 토지를 전개하므로 동출서류수(東出西流水)와 백호강세가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西出東流水가 귀하기 때문에 길한 유수로 보고 있음에 대하여 동출서류수는 흔히 있기 때문에 동출서류수라는 이유만으로 길하다고 할 수 없다.
② 이도 묘는 생기가 없어서 혈이 아니다. 반대로 이석재 묘는 자기안산(自己案山)으로 길하고 지기와 천기가 조화를 이루고 남근(男根)모양으로 강건너 여근(女根)모양의 산과 조화를 이루어 자손이 많다는 견해이다.(北光)
그러나 여기 묘의 경우 사성(莎城, 月形, 애미라고도 함)은 인작(人作)으로 만든 것으로 낮고 빈약하여 장풍이 어렵다. 안산은 묘의 전면에서 기운이 나가는 것을 막고 반대로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아 소국(小局)이나 중국(중국)의 울타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풍수격언상 “안산은 눈썹 높이가 적당하다”는 것이다. 이 묘의 자기안산은 묘의 발치 아래에 낮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안산으로의 가치가 없다. 뿐만아니라 혈을 만든 뒤 순전여력이 멈추어 혈처를 보호하는 경우, 또는 용이 내려가다가 기룡혈을 만든 후 거팔모양 또는 뒤돌아보는 모양을 만들고 계속내려가는 경우에 자가안이 되는 것이다. 신안동김씨 김번 또는 청주한씨시조 한란 또는 정인지의 묘를 보면 자기안이 어떤 모양새인가를 알 수 있다.
후손을 생산함에는 남성이 필요하지만 여성의 역할이 훨씬 크다. 그러므로 여근(子宮)혈은 있으되 (예컨대 지보 동래정씨묘, 함안조씨시조묘) 남근혈은 본적이 없다(남근에 쓴다면 아마도 바람둥이가 배출될 것이다)
* 이석재 묘 약도---
* 이석재묘와 장풍--
* 남근이라고 주장하는 도면--
③ 이석재 묘는 산의 높은 곳에 있는데 청백이 없고 청룡쪽에 금강이 직선으로 흐른다. 가까운 안산이 없다. 사성과 전순을 보토하였으나 천작(天作)에 미치지 못한다. 주호선사가 회석 천포를 사용하라고 하였다면 이는 바람을 막아줄 비보책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명혈이 될 수 없다.(소수설이다, 同旨 민중원)
7. 이석재 묘의 역할
이방이의 후손은 가난하고 자손도 이도가 태어날 때까지 4~5대를 독자로 이어온 듯 보인다. 李棹때 비로소 3남을 두어 손세확장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 혈은 흉지는 아니고 나름의 역할이 있었다고 본다. 즉, 주호선사는 이방이가 효심깊고 덕이 있어서 장차 후손들이 크게 번창할 것이라 내다보고 이 자리를 소점해주었으나 때를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이장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방이 이하 4~5대 후손이 뱃사공을 하면서 선행을 하여 이도가 탄생하는 기반이 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 묘가 속발하여 부유하게 살았다면 이도가 고달픈 뱃사공으로 살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도가 태조를 만나 공을 세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전의이씨가 이 묘자리 덕에 번성한 것이 아니라 이방이의 효심과 선행을 보고 하늘이 후손의 번성을 예정해두고 있었고 주호선사는 천지운행을 알아차리고 이 묘자리를 소점하여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8. 시조 이도의 묘 (세종시 전의면 유천리 산3-1)
* 마을 길옆에 크다란 신도비가 있고 그 뒤 조금 가면 동그란 원판위에 묘가 있다. 입수가 좋으나 북향인 탓에 봉분에 이끼가 많다. 도선국사가 소점한 복
호혈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태조(877~943, 918 즉위)는 도선국사(827~898)가 사망할 때 27세이었고 이도가 태조를 만난 것은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한 918년이후라고 추측되므로 도선국사가 소점하였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호랑이가 노려볼 개바위가 있고 기운이 옹골차다. 상등초급대혈이다.(2023.9)
* 이도 묘 옆모습---
* 봉분뒤에서 앞으로--
* 구암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