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교인들이 소나무 베어 와 ㄱ자 교회를 지은 이듬해 1909년, 두 사람은 시험에 들었다. 둘이 맞붙은 장로 선거에서 이자익이 이겼다. 조덕삼은 군말 않고 열두 살 어린 머슴을 장로로 섬겼다. 이자익의 평양신학교 유학도 도왔다. 장로가 된 조덕삼은 목사로 돌아온 이자익을 지성으로 받들었다. 이자익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 지내고 장로교 헌법의 기초를 닦은 거목으로 섰다. 주인과 머슴, 장로와 목사 사이 우정이 예배당에 밴 솔 내음같이 향기롭다. 조덕삼은 언론인·정치인 조세형의 친할아버지다. 조손(祖孫)의 이목구비가 빼닮았다.
교회에 남은 옛 회의록 중엔 1921년 10월 당회 결정이 눈길을 붙든다. '아무개는 가정불화에 관하여 권면(勸勉)하고 아무개는 도박한 일로 출교하고….' 한 세기 전 작은 시골 교회가 교인의 신앙은 물론 일상도 챙겼다. 바르게 살아가도록 이끌고 꾸짖었다. 마을이 교회를 우러를 수밖에 없었다. 웅장한 건물에 구름처럼 교인이 모이는 오늘 대형 교회들을 돌아본다.
금산교회는 정규 예배를 새 벽돌 교회에 넘겨주고 문화재로 남았다. 적막하던 교회가 떠들썩하다. 광주 어느 교회 외국인반 젊은이들이 왔다. 백인 장로가 인솔해 온 중국인 유학생들이다. 남녀가 따로 앉아 금산교회 이인수 목사의 설명을 듣는다. 휘장을 쳤다가 걷어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백년 교회에 생기가 넘친다.
북으로 60㎞ 올라간 익산 성당면 두동리에 85년 된 두동교회가 있다. 또 하나 ㄱ자 한옥 교회다. 두 교회는 같은 듯 다르다. 금산교회는 남자석이 네 칸이어서 여자석 두 칸보다 길고 크다. 두동교회는 남녀 열 평씩 똑같다. 남녀 사이 휘장만 있을 뿐 목사와 여신도를 가리는 휘장은 애초에 없었다. 두동교회가 한 세대 20여년 늦게 서면서 그사이 남녀유별도 옅어졌다.
1920년대 두동마을 3000석 지주 박재신은 아들이 없었다. 아내는 교회에 나가야 자식도 볼 수 있다며 박재신을 설득했다. 얼마 안 가 아내가 아기를 갖자 1923년 박재신이 내놓은 사랑채에서 두동교회가 출발했다. 그러나 아들은 여섯 살에 죽고 만다. 박재신은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겠느냐"며 교회를 부정한다. 쫓겨난 신자들은 가난한 소작농이어서 새 교회 지을 일이 막막했다. 그때 기적처럼 안면도 소나무를 실은 배가 금강까지 표류했다. 근처 성당포에 밀려온 소나무를 헐값에 사 세운 것이 ㄱ자 두동교회다.
세월과 손때 쌓여 반질반질 윤나는 송판 마루를 보며 권정생을 떠올렸다. 안동 시골 교회 종지기로 살다 간 아동문학가 권정생은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60년대 교회 풍경을 추억했다. '농촌 교회의 새벽 기도는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석유 램프불을 켜놓고 차가운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조용히 기도했던 기억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기도가 끝나 모두 돌아가고 아침 햇살이 비출 때 살펴보면 마룻바닥에 눈물 자국이 얼룩져 있고 눈물은 모두가 얼어 있었다.'
ㄱ자 교회 마루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이 떨어졌을까. 두동교회 문 옆에 짤막한 글귀가 붙어 있다.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두 교회에 가면 신자 아니라도 따스한 감동을 누릴 수 있다. 곱게 늙은 마룻장에서 민초들의 찬송이 잔잔한 풍금 소리와 함께 환청으로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