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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작정(뜻/계획)(로마서5:1-11)
우리가 왜 인내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멸망 받았던 우리를 지옥에서 끌어내시기 위해서 삼위하나님은 각각 책임을 지셨기 때문입니다. 성부하나님은 우리들의 구원을 작정하셨습니다. 성자하나님은 작정하신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성령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시고, 이루신 구원을 사람들에게 적용시키십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멸망에 대해서 하나님의 책임론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려면 영원히 무죄상태로 만들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일어날 모든 일을 확실하게 하시는 영원한 결정(작정/God’s decrees)입니다. “예정하다”(predestinate)와 “작정하다”(foreordain)라는 단어는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정하다”는 “작정하다”보다 문자적으로 다소 좁은 의미입니다. “예정하다”는 문자적으로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의 운명을 언급할 때 사용합니다. 특별히 도덕적 행위자들의 영원한 상태와 관련될 때에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할 때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입니다. “작정하다”라는 단어는 보다 넓은 의미로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에 관한 하나님의 결정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정”(predestination)이란 영원한 구원이나 정죄의 문제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합니다. 예정이라는 개념 안에 들어 있는 “선택”(election)이라는 단어는 개인들이나 민족들 혹은 단체들이 영생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정적인 선택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유기”(reprobation)는 부정적인 의미의 예정입니다. 어떤 이들로 영원한 정죄나 잃어버림의 고통을 겪게 하는 하나님의 선택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예정”이란 “선택”이나 “유기” 혹은 둘 다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작정”이란 선택과 유기 혹은 둘 다를 언급할 수도 있지만 보다 넓은 범위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Millard J. Erickson).
하나님의 뜻(작정)은 자유적 행동과 모순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인간의 모든 동기를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하나님을 죄의 창조자로 만드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작정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역사가 발전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수립하시거나 변경하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을 수립하심에 있어서 영원 안에서 수립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하신 뜻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은 全知전지하셔서 최선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거룩하심으로 악한 것은 무엇이나 목적하지 아니하십니다. 또한 작정은 하나님의 자유에서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기 만한 피조물들처럼 부득이해서 어떤 추가적 일을 하시거나 목적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나 계획하실 경우에 조금도 제한받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작정은 일차적으로 피조물의 행복을 목적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성도의 완전을 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조물의 행복과 성도의 완전을 기하는 문제들이 하나님의 작정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에 관한 영광 속에 작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유효적 작정(efficacious)과 허용적 작정(permissive)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것 가운데는 유효적으로 발생하게 결정하신 것도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기로만 결정하신 것도 있습니다. 허용적인 섭리의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통치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은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정 속에는 모든 과거 현재 미래가 내포됩니다(Henry C. Thiessen).
성경은 하나님의 의지, 즉 그분의 계율, 목적, 계획 그리고 계명들의 뜻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의지는 우리 영적존재의 본질적 속성일 뿐 아니라 우리 인격의 필수조건이기도 합니다. 합리적인 자기결정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電氣전기, 磁氣자기 또는 식물의 생존원리와 같은 단순한 힘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결정 능력 곧 자기 자신의 선한 기쁨에 따라 행하거나 행하지 아니할 능력을 갖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그분을 이성적 피조물로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존재의 영역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자유롭습니다. 자유는 자발성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보존에 있어서만큼 행함에 있어서도 자유로우십니다. 그 까닭은 이 행위들은 그분의 본질의 필연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창조하거나 창조하지 아니할 우주를 존속시키거나 존속시키지 아니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또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데 있어서 자유로우십니다. 그 까닭은 그렇게 행할 그분의 목적은 그분 자신의 무한한 선하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도덕적 확실성이 필연성만큼 엄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decretive will)는 그분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건들의 미래 상태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교훈적 의지(preceptive will)는 그분의 이성적 피조물의 의무준칙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일으키거나 허용하는 목적을 무엇이든 작정하십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의 피조물이 행해야 할 바나 행해서는 안 될 바를 교훈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는 결코 대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금하는 것을 행하도록 작정하시거나 다른 사람들이 행하도록 야기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금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작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비록 죄를 범하는 것이 금지된 것이기는 해도,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작정적 의지가 부정적인 교훈적 의지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신학자들에 의해 학문적으로 표현되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들이 죄를 범하도록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작정적 의지는 긍정적인 교훈적 의지와 양립할 수 있습니다. 예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명령할 수 있지만, 지혜로운 이유들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금하실 수 있습니다. 흔히 숨겨진 의지(voluntas beneplaciti)와 드러난 의지(voluntas signi) 사이의 구별은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 사이의 구별과 똑같습니다. 그분의 작정들을 언급하는 전자는 그분의 선하신 기쁨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의 교훈들을 언급하는 후자는 그분이 허용하거나 허용하지 않는 것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의지는 여전히 그분 자신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분의 목적을 의미합니다. 또 그분의 드러난 의지는 그의 피조물에게 알려진 그분의 교훈들과 목적들입니다. 선행적 의지와 결과적 의지는 어거스틴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로서 작정들 상호간의 관계입니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목표(the end)는 수단들에 선행하고 전자의 목적은 후자의 목적에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행적 의지(antecedent will)를 통해서는 자신의 영광의 현현을 결정하시고 결과적 의지(consequent will)를 통해서는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세상의 창조를 결정하셨다고 말합니다. 루터교인들과 항변파(Remonstrants)는 그 말들을 이주 상이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선행적 의지를 통해서는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지만, 모든 인간이 다 회개하고 믿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지하고 결과적 의지를 통해 믿을 것으로 예지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먼저 어떤 사실을 목적하셨고, 그 다음에 다른 사실을 목적하셨다는 것입니다(Charles Hodge).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영원한 때부터 그 자신이 뜻하신바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유롭게 그리고 변치 않게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십니다. 피조물들의 의지를 침해하시는 이도 아니십니다. 제2원인들의 자유나 우발성을 제거시키지도 않고, 오히려 확립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상되는 조건들에 근거하여 장차 무엇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것을 작정하실 때 그것이 장차 있을 것으로 예지하셨거나, 또는 그 가정된 조건들에 근거하여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예지하셨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을 작정하신 것은 아닙니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3장1-2항).
성경에 정당한 권리를 부여하는 성도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의 최우선의 목적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랑으로 또 온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힘을 다해 그분 의 사랑의 중심에 그분 자신이 서 있다는 것과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 추구하는 것과 그분을 이끄는 원동력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사43:7,21). 하나님께서는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뛰어난 많은’ 지혜를 나타내려 하셨습니다(엡3:9-10). 그분 자신의 명성과 찬양과 명예를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렘13:11). 그분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알리기 위해서 고대의 백성들이 그분께 반역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시106:7-8).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삼상12:20-22). 그들을 계속해서 남겨두셨습니다(겔20:9,14,22,44).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이 최대한으로 파멸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사48:8-11). 이 모든 것은 그분 자신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과 일을 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이 땅에 첫 번째 오셨습니다(요17:4,6). 그분이 가져다 주셨고 그분 스스로가 즐거워하시는 구원의 모든 세밀한 부분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자신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게 하시기 위해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엡1:6,12,14). 예수님은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기 위해”(살후1:9-10)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러한 동일한 관심사 곧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핵심이라는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영원한 때부터 그 자신이 뜻하신바,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유롭게 그리고 변치 않게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1항을 보면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깊은 것”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된 사람들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창세전에 자신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목적과 그리고 그 뜻의 은밀한 계획과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서 오직 그의 거저 주시는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다. 그리고 모두 그의 영광스런 은혜를 찬미케 하셨다. 그러나 믿음 또는 선한 행위 또는 그들 안에 있는 인내 또는 피조물들 안에 있는 어떤 다른 것들은 하나님을 감동시켜 저희들을 선택하게 하는 조건들이나 원인이 아니다.
신앙고백서는 또한 “나머지 인류’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 위에 행사하시는 그의 주권적인 능력의 영광을 위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시기도 하신다. 그래서 택함 받은 자 이외의 나머지 인류에게는 그 자신의 뜻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서 그들의 죄를 인하여 그들을 버려두실 뿐 아니라 그들이 치욕과 진노를 당하도록 작정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는 그의 영광스런 공의를 찬미케 하려 하심이다(3장7항)
이러한 두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결정해 놓으신 자신들의 종착지에 임의적으로 도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믿을 것인가 또는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으시는 가운데 사람들이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아닌데 이는 다음의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그는 그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뜻과 의사에 의하여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들을 정하셨다(3장6항).
그 방법에는 사랑하시는 아들의 속죄 사역, 선택된 자들에 대한 유효한 부르심, 인간의 마음에 이루어진 회개와 믿음을 통한 성령의 중생시키는 사역 그리고 그분 자신의 칭의와 성화 사역 등이 있습니다. 또한 나머지 인류를 버리시기로(‘passing by’는 라틴어 praeteritio에서 유래한 ‘preterition’/간과하심을 가리키는데) 정하신 하나님의 결정이 오직 그분 자신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만 근거한 것이 사실인 반면, 그분께서 버리시기로 정하셨던 자들을 모욕과 진노에 처하도록 결정하신 것에는 그분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상태(죄)가 또한 고려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자신의 창조사역을 통해 실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창조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전능한 권세와 헤아릴 수 없는 지혜, 무한한 선하심을 섭리적으로 행사하심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가져오는 그 영원한 목적을 계속해서 실행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섭리하심은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모든 행동들에게까지 이릅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5장4항을 보면
그 섭리는 아담의 첫 번째 타락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모든 죄까지도 포함한다. 그런데 그러한 죄들은 단순한 허용에 의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허용하시되 여러 세대에 가장 지혜롭고 강력하게 제한하시고 그 밖에도 명하시고 주관하시어 그 자신의 거룩한 뜻들을 이루도록 하신다.
아담의 죄를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기쁘게 허용하셨는데, 이는 그것을 명령하시어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이미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죄로 인해 아담은 원래의 순결한 상태(ststus integritatis/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던 상태/posse peccare aut posse non peccare)로부터 타락하였고, 죄로 죽게 되었으며 영과 육의 모든 기능들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지고 말았습니다(status corruptionis). 즉 아담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non peccare)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온 인류의 언약적 대표자였기 때문에, 그가 범한 최초의 죄가 통상적인 출생에 의해 그로부터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습니다(6장3항). 이에 따라 (아담으로부터의 통상적인 출생에 의한 후손이 아닌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는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의 대표성 때문에 또한 그들 자신의 죄와 부패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윤리적 거룩성과 그분이 세운 율법의 의로운 기준에 계속해서 못 미쳤으며(롬3:23), 그로 인해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은혜로운 선택목적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으며, 그들을 위하여 그들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또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축복의 유익을 그들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통하여 그들을 영원히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비록 선택받은 자들이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에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조금도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가지고 오는 모든 것들은, 그들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자신들의 죄와 도덕적 오염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은 근본적이고 전적으로 오직 주님께만 속하며(욘2:10), 이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기 위함입니다(엡1:6,12,14/Robert L. Reymond).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면, 우리가 논리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인간들이 실제로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양립할 수 없는 어떤 행동의 상황에서 인간이 실제로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어떠한 선택을 내리도록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한다면, 인간의 죄악 된 선택의 원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돌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이 그들의 책임이라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Arminius 신학자들은 이 문제 하나만으로도 개혁주의 사상이 비성경적 특징을 보여준다고 주장했습니다. J. Kenneth Grider는 Arminius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문제에 관한 개혁주의적 생각이 “하나님의 지혜롭고 정당하며 선하신 본성과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에 위배되며,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Robert L. Reymond).
인간들이 저지르고 있는 행위는 심히 악합니다. terrorist들이 행하고 있는 일들은 가히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잔인하고 잔학합니다. 그런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들은 그 허물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로 돌리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파렴치(破廉恥)합니까?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가 창조되고 의존된 존재의 영역 안에서 특정한 행위들을 행할 능력이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의 행위는 가공(架空)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는 행동으로 표출되는 작인(作因)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행위는 비난받거나 인정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의무의 법인 도덕법이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사람의 행위는 당위(當爲)와 금지의 영역 안에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그의 행위는 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합치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행위가 따라야 할 방식입니다. 행위를 규정하거나 금지하는 법은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한 것이고, 하나님의 屬性속성은 그에 합치하는 행동의 규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행위를 원하거나 선택합니다. 바로 인간행위의 자유입니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하려 하지 않거나 또는 그 행위가 그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라면, 그가 도구가 되어 일으켜진 결과는 사실상 그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는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어떤 다른 힘 또는 행위 주체의 희생물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그것을 나의 의지에 반해서 행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지못해 어떤 것을 하거나 몹시 싫어하는 것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행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행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행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싫은 일을 행하려한 것입니다. 어떤 것이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행해질 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행위 주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을 행할 때,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그 어떤 것을 의도했기(willed)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지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습니다. 의지작용이란 그렇게 행할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도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도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진부(眞否)합니다. 그러나 의지작용의 능력은 우리가 이 능력을 특정한 방향으로 행사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생계를 영위해 나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존경할 만한 노동에 의해서 생계를 영위해 나가고, 다른 한 사람은 절도에 의존합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의지작용은 그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에게 그 자질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지작용의 능력과 실제적인 의지작용에 의한 이 능력의 행사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능력과 그 능력의 행사의 배후에 있는 것은 성품입니다. 성품의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의지작용이 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품은 욕망들, 동기들, 性癖성벽들, 도의절조(principle)의 전체적인 복합체로서 인격의 체질(habitus)입니다. 이것은 편의상 성벽의 복합체로 불립니다. 그 복합체는 구별되는 도덕적 종교적 경향, 뜻, 목적, 성벽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이(마음에서 남이니라”(잠4:23).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4,35).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막7:21,22). 성경은 도처에 선과 악의 근원으로서의 마음에 대한 강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지작용은 내적성벽에 의해 결정됩니다. Shedd는 후자를 내재적 의지작용(immanent volition), 전자를 실행적 의지작용(executive volition)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용어들을 사용하든지, 결과는 사람에게 형이상학적 구성과 일련의 의지작용보다 더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행위와 인생이력의 도덕적 종교적 특성을 결정하는 요소입니다.
사람의 행위와 인생의 종교적 특성을 결정하는 요소는 의지작용과 자기결정입니다. 의지작용이 성벽적 복합체에 의해 결정된다면, 과연 자유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의지작용의 의도와 능력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자유합니다. 자율적인 능력 또는 자율적인 행위주체가 그의 무조건적인 大權대권(특권/prerogative)에 의하여 일련의 의지작용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 작용은 그 사람이 특성적으로 어떤 사람이냐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결정됩니다. 자유는 일련의 의지작용이 자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의지작용은 자기 결정적입니다. 행위는 자기 행위입니다. 의지작용은 자기의지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외부로부터의 강요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의해 행위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지에, 결코 강제되거나 어떤 본성의 절대적인 필연성에 의해 선 또는 악이 결정되지 않는 본래적 자유(natural liberty)를 부여하셨습니다. 야고보서1:13-14은 인간행위의 이러한 과정을 묘사하였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이 원리는 선과 악에 있어서의 인간의 모든 상황 속에 적용됩니다. 그것은 타락에도 중생에도 적용됩니다. 타락에서 사람의 성벽은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범죄 행위를 낳았습니다. 중생에서 새로운 성품이 주어집니다. 그 결과 새로운 의지작용이 생겨났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마음의 내재적인 성품에 반하는 의지작용은 없습니다. 어떤 것도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의 내재적인 성품에 반하여 의도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가정은 결국 우리가 부여받은 본성을 파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선 또는 악을 위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들, 다시 말해서 선의 권고 또는 악의 유혹의 영향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은 유혹이 포함하고 있는 것을 잠자코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는 주장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의 성벽은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택 또는 수용에 의해서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자유는 소극적으로는 강제의 부재, 적극적으로는 자기 결정으로 정의됩니다. 사람은 자기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는 그의 의지작용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의지작용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 추진되기 때문입니다. 강제 없이 행사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내밀한 경향과 성벽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란 이성적 자발성입니다.
자유의 포괄성은 의지작용과 행위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벽의 복합체인 마음에도 적용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타락되어 있으나, 이 타락성은 그의 것이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타락으로 인해 사람의 성품은 거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변화는 커다란 신비이지만, 거룩하지 않은 성품은 그의 것입니다. 그 까닭에 이 성품의 모든 움직임에 대하여 그는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중생을 통해 새로운 마음을 주십니다. 사람은 중생을 통해서만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한번 주어지면 그것은 중생한 사람에게 속하며, 그것은 강제적으로 부과된 성품이 아닙니다. 새로운 성품은 그 사람의 특징적인 속성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내재적인 성품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그의 의지에 반하는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의에 의해 그의 것입니다. 반대 선택의 능력은 자유행위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대선택(contrary choice)과 대안선택(alternative choice)을 구별해야 합니다. 반대 선택은 도덕적으로 반대되는 兩者양자, 곧 하나님의 판단에 의한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반면에 대안선택은 윤리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가진 양자로서 모두 선한 양자나 모든 악한 양자 사이에서의 선택입니다. 이것은 오직 반대 선택에만 적용됩니다. 이제 이 명제를 검토하면서
소극적인 면에서 사람이 반대 선택의 능력을 가졌던 상황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완전성의 상태에 있었던 아담은 반대 선택의 능력을 가졌습니다. 이것을 부인한다면 범죄는 그의 본성의 필연적 산물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아담은 범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올바르고 거룩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범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중생한 사람은 중생에서 심겨진 거룩함으로 인하여 반대 선택의 능력 곧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內住내주하는 죄 때문에 범죄 할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서7:25은 이 취지를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상태의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 대안 선택의 능력이 결핍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범죄의 필연성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모든 사람)는 전적으로 타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에베소서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러나 죄의 속박의 영역 내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대안적 행위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중생한 사람은 비록 그의 확정된 거룩함의 상태로 인하여 특정한 것들을 의도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가 선과 악의 범주 안에서 대안적 선택을 가지는 많은 상황들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모든 선택과 행위들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과 오직 예정된 행위들만이 일어난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하지만 대안적이며 반대적인 선택능력은 인간의 作因작인과 가능성의 영역에서 배제될 것입니다. 반대선택의 능력은 완전성의 상태에 있는 아담의 속성으로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정은 모든 것을 포괄하지만, 사람에게서 그의 행위를 빼앗거나 그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하는 자발적 결정을 그로부터 박탈할 정도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정은 그것이 유효한 경우에 반대선택의 능력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예정이 인간의 책임과 갈등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은 대안 선택의 능력과 갈등하지도 않고 배제하지도 않으며 그것은 이 능력이 필연적으로 단정될 때 반대선택의 능력과 갈등하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죄의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무력은 우리로부터 자유행위를 박탈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자유행위 때문에 죄의 속박이라는 고발이 가해질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생한 상태에서 특히 영화된 상태에서 선을 행할 거룩한 필연성과 그 반대의 불가능성은 자유행위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행위가 그 특성화를 가능하고 적절하게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으로부터 생기는 필연성이 아니라, 확정된 선과 악의 상태에서의 필연성과 도덕적 종교적 상태에만 배타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류가 타락하기 전 반대선택의 능력은 아담의 자유 행위의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아담이 그의 완전성 안에서 확정되었더라도 그는 여전히 자유로운 행위 주체였습니다. 반대선택의 능력은 시험을 목적으로 존재했습니다. 죄의 상태에서 선에 대한 전적인 무력은 자유 행위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선에 대한 전적인 무력과 책임 있는 행위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는 상대적이고 영화 상태에서는 절대적이 되는 거룩함의 확정(confirmation)은 우리를 자동기계로 만들지 않습니다. 이러한 확정 상태에서 자유행위는 최고도로 표현되고 실현되고 있습니다. 자유행위의 핵심은 외부로부터의 강제 없이 우리의 본성과 특성에 따라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된 자유행위는 사람과 천사의 모든 상태들에 적용됩니다. 자유 행위는 확실성(certainty)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어떤 행위가 미래에 발생할 것은 확실하지만 발생의 양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불확실성과 조건성이 자유에 필수적이라든가 발생의 확실성이 자유행동(free act)의 본질과 양립할 수 없다고 하는 입장에 반대합니다. 이 입장은 인간의 책임성을 위해 예정을 부인하려는 입장과 유사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행위의 관계를 분석해서 유효한 완전한 일치(concursus)를 발견하고 인식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각의 영역과 실재성과 완전성에 대한 침해 없이 모두를 옹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先知)는 발생의 확실성을 전제로 합니다. 그의 예정은 모든 발생을 확실하게 합니다. 그의 섭리에 의해 예정된 것은 변함없이 실행됩니다. 오직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섭리의 영역 안에서만 우리의 자유 행위는 사실이며, 그것은 오직 그렇게 옹호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살며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예정된 목적의 성취에 있어서 섭리는 우리의 존재에 필수 불가결한 자유와 양립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 존재에 불가결하며, 결코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기 위해 작용하지 않습니다(John Murr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