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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8. 묵상글 ( 사순 제1주간 화요일. - 바뀌어야 할 나의 기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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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8. 사순 제1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바뀌어야 할 나의 기도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말씀하시며
올바른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도 잘못되었다면 바꾸라는 것이고,
회개의 사순 시기에 우리의 기도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꾸라는 말씀인데,
이는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위선자의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나무라시며 바꾸라고 하신 주님 말씀의 연장선상입니다.
우리가 회개한다면 기도와 관련해서도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회개’ 또는 ‘회개한 기도’는 어떤 것이고,
올바른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우선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말뿐이라는 생각,
말을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
기도를 길게 하고 오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이기도 하니 말이 없을 수야 없지만
말만이 기도가 아니고 말 없는 친교와 통교도 기도이며,
말없이 그저 함께 있는 것도 기도이며
그러므로 무엇보다 사랑이 기도입니다.
예를 들어 오래된 친구와 연인을 봅시다.
그들에게는 만남이 중요하고, 함께 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말이 중요하고, 말을 많이 나누는 것이 만남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들 사이에는 사랑에서 비롯된 서로 간의 믿음이 있고
사랑을 나누는 수단이 말 말고도 풍부하기에 말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말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 그러니까 사랑도 진실도 감정도 없는 사람이,
그러니까 오늘 주님께서 나무라시는 빈말을 쏟아내고 그것도 많이 쏟아냅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도는 길게 하고 오래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실하게 하느님 앞에 나아가고, 사랑으로 함께 있으며,
혀뿐 아니라 눈과 코와 귀 등 모든 감각으로 사랑을 나누고,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나누며 전 존재적 일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자세도 바뀌어야 합니다.
들으려고는 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려는 자세,
달라고만 하고 드리려고 하지 않는 자세를 바꿔
먼저 들으려는 자세,
먼저 감사와 찬미와 흠숭부터 드리는 자세,
그리하고 나의 청도 겸손하게 아뢰는 자세가 돼야 합니다.
열매 없는 기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기도하고도 행복하지 않은 기도,
기도하고도 실천하지 않는 기도,
기도하고도 사랑이 생기지 않는 기도,
이런 기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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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8.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마태 6,9)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내줍니다. 곧 그래서 그의 기도를 보면,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으며,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이 기도문 안에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 기도는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65)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드립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해서 맨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빠, 아버지”입니다. 곧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아버지”를 부르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입니다.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중세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를 올바르게 바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마태 6,9)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성자의 반열로 들어 올리시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제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을 양식으로 삼아 당신 안에 살고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소서.
용서하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 되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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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8.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는 하느님과의 소통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기도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가 기도해 준다고 하면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본인은 기도에 소홀히 하면서도 남에게는 기도해 준다고 말하고 또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6,7-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니 청하는 바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잘 통할 수 있습니다. 기도란 하느님과의 소통입니다.
많은 분이 묵주기도, 9일기도, 15기도, 33일 봉헌기도, 자비의 기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등등. 성인 성녀들이 즐겨 봉헌하였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따르는 삶의 쇄신과 실천 없이 목표한 바를 채우기에 급급해하면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모든 기도의 기초입니다. 많이 하는 것보다, 깊이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루이 에블린은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열심을 다해 공덕을 쌓고, 많은 것을 청하지만 실제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한상봉). 그러므로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꿰뚫어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이사야서 말씀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4).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나보다 나를 더 환하게 아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때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믿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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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8.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에게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는데 큰 아들은 안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서 밭에 나가서 일하였다. 둘째 아들에게도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는데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이 바뀌어서 밭에 나가지 않았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겠느냐?” 제자들은 당연히 밭에 나가서 일을 한 큰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비슷한 이야기를 유대인들에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하였지만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선택 받은 민족이면서도 하느님의 아들이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겠다고 합니다. 누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모두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누가 형제요! 어머니이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나의 형제이며 어머니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셈’을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냐시오 성인은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곧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면 쉽게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였고 온갖 시련과 고난이 다가와도 끝까지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지향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먼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고, 악에게 구해 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선순위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나머지 것들은 모두 채워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2월의 마지막 날을 지내면서 예전에 들었던 노래 “모두 다 사랑하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늘에 구름 떠가네. 보라색 그 향기도/ 이 몸이 하늘이면 얼마나 좋을까/ 내 곁에 사랑도 가네. 빨간 입맞춤도/ 시간이 멈춰지면 얼마나 좋을까/ 비 맞은 태양도 목마른 저 달도/ 내일의 문 앞에 서있네/ 아무런 미련 없이/ 그대 행복 위해 돌아설까나/ 타오르는 태양도 날아가는 저 새도/ 다 모두 다 사랑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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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8.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7~8년 전에 해외로 특강 나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의 한인 교회공동체의 초대로 특강을 하게 된 것이었지요. 특강을 마친 다음 날, 저를 초대해 준 신부님과 신자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위해 도심지 레스토랑에 들어갔습니다. 날이 너무 좋아서 야외 테라스에서 햇빛을 받으며 식사하는데, 한 신자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즘에는 한국 관광객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모두 등산복을 입고 오시거든요. 유행만 따르는 잘못된 모습이라고 봅니다.”
당시에 ‘노스페이스’라는 상표가 큰 유행을 주도했고, 그래서 가격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나 어른이나 상관없이 이 옷을 사 입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이상하게 보였을 것 같습니다. 다 똑같이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역시도 개인의 취향이 아닐까요? 무조건 잘못이라고 말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전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곳에도 한국 사람이 참 많았는데, 작품 감상보다 유명한 그림 앞에서 사진 찍겠다는 마음이 더 커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림 볼 줄도 모르는데, 굳이 세세하게 쳐다보기보다는 사진이라도 남기는 것이 더 의미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또 다른 행동을 한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나와 다를 뿐입니다. 다르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볼 수 있겠지만, 틀렸다고 단정하는 순간에 일치는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다른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다양함을 지니신 주님과 하나 되고 있나요? 사람과도 하나를 전혀 이루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9)면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
주님의 용서보다 먼저 우리의 용서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설명해주시지요.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마태 6,14)
용서는 틀렸다고 단정해서는 할 수 없는 덕목입니다. 그 사람의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통해서만 주님의 용서가 우리를 향해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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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의 보따리다. 인생이 끝나기 전에 자신의 보따리에서 무엇을 꺼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달라진다(H.포스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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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8.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기도와 삶-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당신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시나이다.”(시편90,1.2)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살기위하여, 영혼이 살기위하여 기도합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기도뿐입니다. 잘 바르게 기도하고 싶은 깨끗한 욕심, 청정욕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이, 광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기도와 삶은 하나라는 말입니다.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은 교회의 한결같은 가르침입니다. 또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처럼,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말을 많이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하지만, 절대 그러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알고 계셔도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기도를 통해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이 아닌 참으로 ‘필요한 것’을 청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많은 말로써가 아니라. 마음의 순결함과 통회의 눈물로써 우리 간청이 들어 허락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경우가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 모든 이가 모여 있을 때, 기도는 짧게 해야 한다.”(성규20,4-5ㄱ)
기도와 더불어 얼마전 로마교구 전례 담당자들에 대한 교황님의 강론에 대한 즉석 연설에 공감했습니다.
“길고 추상적인 강론은 재난이며 강론은 반드시 10분 이내가 되어야 한다. 종종 사람들이 40분이 넘는 철학강의를 듣는다고 말한다. 강론은 학술 발표문이 되어서는 안된다. 강론은 8-10분 정도가 적당하며 신자들이 가정으로 돌아가 다시 곱씹을 수 있도록 생각과 느낌, 이미지를 포함한 강론이 되어야 한다.”
기도중의 기도가, 기도의 모범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아주 간절하고 절실한, 단순하고 본질적인 기도로 예수님의 삶이 압축 요약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도 주님을 닮아 오늘 지금 여기서 단순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됩니다.
기도 또한 평생과정이며 평생 훈련입니다. 기도의 훈련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아쉬워, 참으로 살기위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참 중요한 영성훈련이 기도의 훈련입니다. 주님 친히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신 다음 당신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앞서 세 청원은 하느님 중심의 청원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라는 서두의 말마디처럼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며 우리는 아버지의 자녀로서 서로 형제임을 확인합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이 언제나 우선적 관심사가 되고 우리 삶의 중심인 아버지를 향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자녀답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 또한 최선의 노력을 다해 협조해 드리며 책임을 다하게 됩니다.
어제 수도원 23년도 예결산회의를 하면서 순간, “위로는 하느님, 아래로는 돈”이라는 생각이 불연 듯 들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느님 중심”의 하늘을 잃어버리면 곧장 “돈 중심”의 비인간화의 삶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신학교 때 문세화 신부님의 강의중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라는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인간답게 너무 추상적이다, 아버지의 자녀답게 아주 구체적이고 분명하다. 그러니 아버지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해주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미사시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권고합니다.
이어 우리가 땅에서의 현실 생활에 절대적 필수 요소인 넷입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청원이요, 용서해달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악에서 구해달라는 간절한 청원입니다. 간절한 네 청원과 더불어 우리의 협조도 필수입니다. 일용한 양식을 위해, 용서를 위해,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악에서 구함받기 위해 우리 또한 최선을 노력을 다해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의 기도에 더하여 주님은 용서를 다시 강조하십니다. 용서를 청하기전 우선 다른 이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않는다 하십니다. 용서도 의식적, 의도적 훈련입니다. 기도의 훈련이듯, 용서의 훈련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진지하게 바칠 때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말씀의 위력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이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그대로 주님의 기도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기도의 자리는 미사전례입니다. 우리는 미사전례중 영성체 예식시 다함께 아버지의 한가족, 한자녀들이 되어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친후 일용할 양식인 성체를 모십니다. 바로 한마음으로 바치는 주님의 기도와 더불어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충실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로 현세의 욕망을 억제하며, 천상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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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8.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기도에 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떤 기도는 이런 은총이 있고, 이런 은총을 얻으려면 꼭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기도에는 이런 은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기도를 찬찬히 다시 읽어봅니다. 천천히 한 숨에 한 줄씩 천천히 읽어 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알려주신 기도 안에는 그저 찬미와 감사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어떤 것도 찾아 나서거나 우리 원함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하고 그분께 감사할 뿐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모든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 다가서게 하는 문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문은 모두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바로 찬미와 감사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이지, 은총은 어떤 과정을 거친 이에게 주시는 당연한 보상이 아닙니다. 기도는 자격증을 따는 듯한 테스트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면서 진심을 담아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다면, 온 정성을 담아 감사할 수 있는 한마디를 봉헌한다면 그 기도는 그 자체로 훌륭한 보석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주님께서 알려주신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봉헌해보세요. 천천히 한 숨, 한 숨을 통해 찬미와 감사를 하늘로 올려보십시오. 그 안에서 우리는 만족하고 기쁨 충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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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웃어주면 세상도 웃어준다.
이곳 갑곶 성지에서 방문하시는 신자분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거나 피정할 때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특히 강연이나 피정을 마무리하며 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기도했다고 해서, 강연을 들었다고 해서, 또는 짧은 몇일을 피정했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다시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같은 고통과 같은 고민과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나 피정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의 작은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나를 바꾸십시오. 고통과 고난이 바뀌지 않고 다가온다면 그것을 끌어안아 보십시오.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뀝니다.
그렇게 내가 활짝 웃어주면 세상도 활짝 웃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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