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 진리와 시대의 징표
1코린 12,31-13.13; 루카 7,31-35 /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2024.9.18.
닷새에 걸친 추석 명절 연휴의 끝자락에서 어느 덧 완연해진 가을 기운을 느낍니다. 사람은 계절의 변화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거역할 수 없습니다. 순응해야 하는 대상은 더 있습니다. 몸의 리듬도, 마음의 흐름도, 더욱이 영혼의 울림도 그러합니다. 매일의 미사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영혼의 울림을 초래하는 거대한 떨림입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과 영혼 그리고 자연의 변화는 물론, 시대의 징표도 알아보는 눈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담긴 지혜는 통찰력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만나신 유다인들은 이 통찰력이 몹시 모자랐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빗대셨습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길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아이들과 같다.”(루카 7,31-32)
루카는 가난한 이들 앞에서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차지하리라는 복음을 제6장에서 예고하신 예수님께서 실제로 선포하시는 행적을 제7장에서 보도하였습니다. 로마인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쳐 주시고(루카 7,1-10) 과부의 외아들도 살려 주셨습니다(루카 7,11-17). 그러던 중 헤로데 영주의 악행을 비판하다가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신원을 묻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 왔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 7,19)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을 인용하여 이렇게 답변하셧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이사야의 예언을 알고 있는 이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일종의 선문답(禪問答)이었습니다. 이는 정의와 회개의 외침으로 당신의 길을 미리 닦아 놓은 세례자 요한이지만, 위대한 그 예언자적 행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가 다가와서 이루어지는 시대의 징표를 알아보게 하기 위한 선문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의 세태에 대한 평을 하셨습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자주 단식하며 거친 음식과 옷을 입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회개하라고 외치자, 회개하여 세례를 받은 백성도 많았지만 완고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루카 7,30) 요한은 메시아께서 오실 사랑의 길을 닦기 위하여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한 선구자였고, 과연 요한의 뒤를 이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가난하고 병들어 아픈 이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겉치레로라도 그 권위를 인정하는 척 했던 세례자 요한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비아냥거렸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7,34)라고 비방한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요한과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단계적 계시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는 눈이 아예 멀었던 까막눈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줍니다. 인간 이성만을 중시하던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을 고려한 해석인데, 그 사랑에 이르는 믿음과 희망의 덕을 간직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것이 향주삼덕(向主三德)입니다. 주님을 향한 세 가지 덕이라는 뜻이지요. 향주덕의 첫째는 믿음의 덕, 즉 신덕(信德)입니다. 나라에 임금이 있으면 그 용안(龍顏)을 직접 보지 못해도 나라 백성들이 임금이 계신 것을 믿듯이, 이 세상에는 세상을 지어내신 조물주가 계시다는 것을 믿는 삶이 신덕을 행하는 것입니다. 향주덕의 둘째는 희망의 덕, 즉 망덕(望德)입니다. 이 세상을 지어내신 조물주가 계심을 믿는 신덕은 자연스럽게 그 조물주께서 지니신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다스려지는 하느님 나라가 존재함을 믿고 희망하게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것이 망덕입니다. 향주덕의 셋째는 사랑의 덕, 즉 애덕(愛德)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삶은 아무 노력도 없이 살다가 죽어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 나라를 앞당겨 실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향주삼덕의 으뜸이 애덕입니다.
240여 년 전 이 땅에 복음을 들여온 선비들은 조선사회가 보여준 시대의 징표를 유학이 지향하는 가치와 실제 조선사회에 작동하는 통치 이데올로기 사이의 간극에서 찾았습니다. 즉, 유학이 지향하는 충(忠)과 효(孝)의 관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중용(中庸)의 도덕적 가치는 옳은 것이지만, 실제로 조선사회를 통치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는 성리학적 가치질서는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등을 심각하게 짓밟는 사회악의 요소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가치와 현실 사이의 간극뿐만 아니라 유학이 이상으로 삼는 가치들은 어디까지나 사람들 상호간의 질서를 규정하는 현세적 규범일 뿐, 조물주나 내세 그리고 천당과 지옥의 관념조차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접한 선비들은 중국 선교사들이 취했던 보유론(補儒論)적 입장에서 더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즉, 유학의 이념과 가치를 완성하는 완유론(完儒論) 내지 극복하는 극유론(克儒論)의 입장에서 진리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신세계였고 이를 대표하는 가치가 향주삼덕이었습니다.
박해자들은 유학의 이념만이 아니라 성리학적 통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려고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했지만, 완유론 내지 극유론의 입장에서 개인의 양심을 발견한 천주교를 받아들인 선비들과 이를 전해 받은 민초들이 일단 신앙을 받아 들이고 나면 아무리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고문으로 위협을 가해도 진리에서 나오는 그 엄청난 힘으로 신앙 진리를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박해는 종식되었다고 하지만, 향주삼덕의 가치를 위협하는 세태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바로 자본과 이로 인한 욕심과 빈익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의 사회악 구조입니다. 민족 복음화의 과업에 있어서, 또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 복음화의 과업에 있어서는 향주삼덕의 가치관에 따라서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폐해를 극복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 두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바람직한 자세는 교회 이식이나 교세 확장의 차원이 아니라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현세적이고 물질 위주의 가치관을 능히 넘어설 수 있는 향주삼덕의 가치관으로 복음의 향기와 매력을 발산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진리를 맛보게 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시대의 징표가 아닐까 합니다.
끝으로, 박해시대 교우촌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이 가정에서 매일 바쳤던 저녁기도 중에 나오는 삼덕송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모처럼 가족들이 모인 이 명절 연휴에 자녀들에게 이 아름다운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신덕송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그르침이 없으시므로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나이다.
망덕송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
애덕송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시며 한없이 좋으시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