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단에서 SUV로 세계 자동차 시장 트렌드가 급격히 이동했다. 이와 맞물려 국내 SUV시장에서 이루어진 변화 중 하나는 바로 가솔린 SUV에 대한 인식 개선이다.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SUV=디젤’이라는 공식이 성립했다. 가솔린 SUV는 연비가 나빠 '기름 먹는 하마'로 취급당하면서 외면을 받아 왔다. 적어도 국내 소비자들이 SUV에 휘발유를 넣고 탈 생각 자체를 안 했다는 이야기다. 무거운 차체에 세단과 동일한 가솔린 파워트레인을 얹으니 힘이 달리고 연비가 나빠질 수 밖에 없었다.
SUV 시장이 커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자동차 업체들이 앞다퉈 파워트레인의 효율을 개선한 것이다. 여기에 체는 눈에 띄게 커졌지만 경량화에 집중하면서 무게는 오히려 가벼워졌다. 자연스럽게 세단 못지않은 주행감과 연비를 확보하게 됐다. 가솔린 엔진 특유의 부드러운 회전질감과 정숙성은 덤이다. 여기에 동일 사양의 디젤 모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덕에 가격에 민감한 중소형 SUV위주로 가솔린 SUV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디젤 게이트의 여파와 디젤엔진이 미세먼지 발생 원인 중 하나로 지목 받으면서 ’디젤’이라는 유종 자체에 대한 소비자의 거부감이 심해진 것도 가솔린 SUV 시장에는 호재로 작용했다.
국산 가솔린 SUV는 르노삼성 QM6가 이끌고 있다. QM6는 가솔린 판매비중이 80%가 넘을 정도다. 매달 3000대 이상 팔리면서 국내 가솔린 SUV 판매 1위를 질주하고 있다. 디젤 모델보다 270만원 가량 저렴한 3000만원 내외의 합리적인 가격과 준수한 연비가 인기의 이유다. 수입 가솔린 SUV는 각축전이다. 디젤의 경우 독일세가 대세였다면 가솔린은 일본차가 상당수 포진한다. 국산 SUV 베스트셀링 모델인 현대 싼타페는 디젤 비중이 90%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싼타페 디젤 가격으로 구입을 고려해 볼 만한 3천만원대 수입 가솔린 SUV를 살펴봤다. 국산과 수입 준중형, 중형 SUV가 뒤엉켜 치열한 경쟁을 하는 시장이다.
1. 닛산 엑스트레일
올해 3일 첫 수입 신차로 등장한 닛산 엑스트레일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SUV 기록을 보유한 닛산 로그의 유럽 수출형 모델이다. 현재 북미시장에서 토요타 RAV4에 이어 4번째로 잘 팔리는 차다. 미국시장에만 작년 한 해 40만대 가량 판매됐다. 세계 시장에서 검증된 월드 베스트셀링 모델이라는 게 강점이다. 국내에 출시된 모델은 3세대 페이스리프트 모델이다. '한 지붕 두 식구' 격인 르노삼성 QM6와 동일한 플랫폼을 사용한다. 유럽시장에서는 2017년부터 판매되던 차라 타이밍이 다소 늦은 감이 있다.
엑스트레일은 르노삼성 QM6처럼 세단 감각의 주행 질감과 인테리어, 온로드 주행에 최적화된 부드러운 승차감, 넉넉한 실내공간이 매력이다. QM6보다 배기량이 큰 2.5L 4기통 가솔린 엔진이 장착돼 넉넉한 힘을 낸다. 여기에 닛산 X-Tronic 무단변속기가 맞물린다. 트림에 따라 전륜구동과 4륜 구동을 선택할 수 있다. 복합연비는 10.6km/L로 동 배기량 가솔린 중형차 수준의 연비다.
국내에 판매되는 닛산 엑스트레일은 일본 큐슈공장에서 생산된다. 르노삼성 부산공장에서 생산돼 전량 북미에 수출되는 로그와 디자인을 빼고 사양면에서 대부분 비숫하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차량을 팔지 못하고 비슷한 차량을 해외에서 수입해오는 셈. 부산공장에서 닛산 로그를 생산할 당시 르노 브랜드와의 혼선을 감안해 국내 출시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내부사정 때문이다.
이런 비효율적인 모순이 결국 차량가격 상승으로 이어진 게 아쉬움이다. 가격은 전륜구동 모델 기준 3460만원부터 시작한다. 적어도 국내 시장에서는 따근한 신차라는 게 매력이다.
2. 토요타 RAV4
토요타의 간판 SUV RAV4는 2009년 토요타의 한국시장 진출과 함께 3세대 페이스리프트 모델부터 판매를 시작했다. 롱휠베이스 모델을 들여와 공간 활용성은 뛰어났지만 부족한 편의장비와 토요타 특유의 투박(?)한 디자인으로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전면부와 특히 후면부에 커다란 스페어타이어를 매달고 있는 모습이 동급 SUV에 비해 ‘옛날차’ 느낌이 났다. 월드 베스트셀러 SUV라는 엄청난 타이틀과 TV광고까지 열심히 했지만 판매량은 평범했다. 더구나 디젤 인기에 따라 비슷한 가격대의 폴크스바겐 티구안 디젤 모델에 크게 뒤졌다.
현재 판매중인 모델은 4세대 페이스리프트 모델이다. 작년 한해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SUV에 이름을 올렸다. 기존 밋밋한 디자인에서 토요타의 최신 패밀리룩으로 탈바꿈해 세련미를 더한 것이 특징이다. 출시 된 지 꽤 됐지만 도로에 많이 없어 신차 느낌이 난다.
2.5L 4기통 가솔린 엔진에 6단 자동변속기를 매칭했다. 4천만원이 넘지만 SUV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하이브리드 모델을 갖춘 게 RAV4의 경쟁력 중 하나다. 복합연비는 가솔린 2.5L 전륜구동 모델이 11.0km/L, CVT미션과 AWD가 장착된 하이브리드는 13.0km/L로 준수하다. 가격은 전륜구동 모델 기준 닛산 엑스트레일과 동일한 3460만원부터 시작한다.
3. 지프 컴패스
2007년 처음 출시된 지프의 준중형 SUV 컴패스는 2000년대 초 현대 NF쏘나타에 탑재됐던 ‘세타’ 엔진을 기반으로 만든 2.4L 가솔린 엔진을 탑재했다. 당시 2천 만원대 저렴한 가격으로 쏠쏠한 판매고를 올렸다. 2011년 한차례 페이스리프트를 거쳐 플래그쉽 SUV인 그랜드 체로키와 비슷한 전면 디자인을 적용해 인상이 확 달라졌다. 무단변속기(CVT)였던 트랜스미션을 현대파워텍 6단 자동변속기로 교체해 연비도 소폭 개선했다. 속을 들여다 보면 여러모로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차다.
현재 국내시장에 판매중인 모델은 풀 모델 체인지를 거친 2세대 컴패스다. 그랜드 체로키를 닮은 외관이 더 세련돼졌다. 지프 특유의 투박한 모습은 유지한 채 LED를 품은 램프가 ‘요즘차’ 느낌을 준다. 175마력을 내는 2.4L 가솔린 엔진과 9단 자동변속기가 매칭된다. 기본으로 전자식 4륜구동이 적용되는 점도 경쟁력이 있다. SUV의 명가로 불리는 지프 로고를 단 차 답게, 도심형 SUV를 지향하는 경쟁차들에 비해 오프로드 주행성능이 뛰어난 것은 컴패스의 강점이다. 복합연비는 9.4km/L로 경쟁차에 비해 다소 부족한 편이다. 아울러 일본 경쟁차량에 비해 인테리어 소재와 마무리가 뒤진 것도 흠이다.
가격은 2.4L 론지튜드 모델이 3990만원부터다. 4천만원에서 10만원 빠지는 생색내기용 가격이다. FCA코리아는 1월 600만원을 할인해주는 프로모션을 진행중이다.
4. 혼다 CR-V
CR-V는 혼다의 대표 준중형 SUV다. 일본을 비롯해 중국, 영국,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6개 국가의 현지공장에서 생산될 만큼 혼다의 월드 베스트셀러 모델이다. 국내에는 2004년 2세대 모델로 처음 소개돼 앞서 소개한 모델 중에서 가장 먼저 한국땅을 밟았다.
당시 CR-V는 3천만원 초반이라는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만나볼 수 있었던 수입 SUV로 2.4L 가솔린 엔진 단일사양만 고수했다. 가솔린 SUV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수입차’에 대한 기대감과 실용성이 돋보이면서 뒤이어 출시된 3세대까지 인기를 끌었다. 2007년에는 수입 베스트셀링 1위에 오르는 기록을 갖고 있다. 하지만 고유가 파동으로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2000원을 돌파하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가솔린SUV인 CR-V의 인기는 차갑게 식었고 현재까지 회복을 못하고 있다.
현재 판매되는 모델은 5세대로 차체 사이즈를 키워 공간활용성이 넉넉해졌다. 2.4L 가솔린 엔진을 버리고 1.5L 터보차저 가솔린 엔진으로 과감히 다운사이징 했다. 배기량은 크게 줄었지만 오히려 출력은 높아졌다. 여기에 무단변속기(CVT)를 매칭해 연비까지 개선했다. AWD를 탑재하고도 복합연비가 12.2km/L로 경쟁차 중 가장 뛰어나다.
앞서 지난해 5월 차량 부품에 녹과 부식이 발생하는 문제가 불거지면서 판매가 중단됐지만 지난 주 18일 부터 개선된 2019년형 모델의 사전계약을 실시했다. 새롭게 전륜구동 트림을 추가하고 최신주행보조 장치인 '혼다센싱'을 기본 탑재한 것이 특징이다. 가격은 전륜구동 모델 기준 3690만원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