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윤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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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기행 윤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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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0. 20:25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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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최고 영도자 ‘윤세주’(1901~1942)
1942년 10월 12일자 중국공산당 팔로군 계열 신문인 <신화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태항의 군민, 제열사들의 장례식 거행. 대회장에서는 ‘복수, 복수, 복수’라는 구호 소리 천지를 진감. 본구 각계 인사들은 쌍십절 31주년 기념일에 팔로군의 좌권 장군과 조선의용대 혁명열사들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18무(畝)나 되는 황토묘지의 뒤켠은 깎아세운 절벽이 막아섰고...등부 총참모장이 장례식에 참가한 5천여명의 군민으로 이룬 조객들을 지휘하였다.“(<조선족 백년사화><1985, 중국 요녕 인민출판사> 재인용)
1942년 일본군 40만의 대대적인 소탕전에 맞서 벌인 중국공산당 팔로군의‘반소탕전’은 항일전투 중 가장 격렬했던 전투로 꼽힌다. 이때 팔로군과 합류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조선의용대의‘최고영도자’ 석정 윤세주도 전사했다. 그때가 그의 나이 41세였다.
윤세주는 3·1운동이 배출한 1세대 민족해방운동가로서 드물게도 1940년대까지 전선을 이탈하지 않고 40대의 혁명가로 젊은 전사들과 함께 초지일관 민족해방의 신념을 불태운 인물이다.
그는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계 우파인사들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의3대세력을 이뤘던 약산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및 민족혁명당 노선을 뒷받침한 최고 이론가이자 탁월한 선전·조직가로 이론·실천을 겸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약산 김원봉과 ‘동전의 양면’이라고 불릴 정도로 상호보조적이고 절친한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그와 달리 사회주의자로 차츰 사상적 변신을 거쳐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중국공산당에 합류해 북상항일 투쟁을 벌인 그는 민족해방운동사의 중요한 골마다 삶의 족적을 남겼다.
밀양 3·13 만세시위 주동
석정은 1901년 6월 24일 경남 밀양군 밀양면 내이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윤희규와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에서 4남중 막내였던 그는 어렸을 때 “매우 영특한 인상에 의협심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조카뻘되는 윤상선(80세·밀양 거주)씨는 기억한다. 석정보다 2살 위로 한 동네에서 자랐던 김원봉이 석정이 죽은 뒤 민족혁명당 기관지 <앞길>(1943년 6월 5일자)에 실은 ‘석정 동지 약사’는 그의 성장과정을 짚어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이 글에 따르면 석정은 ‘일한합병’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모여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고 보통학교 수학시절에는 일장기를 변소에 파묻다가 교장에 발각돼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했으며 이일로 학교를 자퇴한다. 이후 중학교 입학 자격이 안 되는데도 이전의‘애국경력’으로 조선인이 경영하던 사립 동화중학교에 입학했다.
김원봉 등과 의열단 창립
이곳에서 석정은 약산과 함께 ‘조선이 상무(尙武)를 하지 않아 멸망하였다’는 생각으로 연무단이란 비밀조직을 만든 뒤 신체단련훈련과 조선의 지리역사 및 육도삼략 공부를 열심히 했다. 석정을 위시한 동무들이 학교에서 단군 개천일 공식행사를 하지 못하게 되자 밀양거리를 쏘다니며 ‘단군개천가’를 ‘고성방가’한 것이 물의를 빚자 그렇지 않아도 배일(排日)학교로 찍혀 눈 밖에 났던 동화중학은 이 일로 해서 폐교하게 된다.
상경하여 오성중학교에서 학업을 마저 끝낸 뒤 낙향하여 <독립신문> 경남지국을 경영하던 그는 이때 하연악(1901년 생)과 결혼한다.
결혼 뒤 곧바로 일어난 3·1운동 소식을 듣고 그는 서울로 올라가 독립선언문 수백장과 태극기를 제작해 고향에 돌아와 3월13일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뒤이어 들이닥친 검거선풍을 피하여 해외로 흘러간 많은 애국 청년들처럼 그도 1919년말 만주 길림성으로 망명해 조직적 운동가로서 새 삶을 모색하게 된다. 이때 일제는 그에 대한 수배령을 내린 뒤 궐석 재판을 통해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이미 중국에 와있던 김원봉과 상면한 그는 1919년 11월 9일 길림성에서 12명의 동지와 함께 의열단(단장 김원봉)을 창립했다. 이때 결의한 ‘공약10조’와 “구축왜국 조국광복 타파계급 평균지권”이라고 밝힌 다른 기록으로 미뤄보아 의열단은 단순한 폭력테러단체라기보다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혁명적 민족주의 단체의 성격을 띠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정은 의열단이 조선총독부, <매일신문>, 동양척식회사 등 3곳의 파괴공작을 1차계획으로 세운 자리에서 참가자들 중 가장 어린 19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지들을 졸라 이 계획을 책임지고 1920년 국내에 잠입한다. 그러나 국외에서 들여온 무기류를 밀양의 미곡상 김병환의 집에 숨긴 것이 발각돼 6월 16일 경성의 한 요리집에서 회합을 갖던 윤세주 등 6명이 체포됐다. 당시 신문들이 “기미운동 이후로 가장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한 제1차 의열단-일명 밀양폭탄사건”(<동앙일보> 1921년 6월 22일)이라고 한 이 사건으로 윤세주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그가 법정에서 “우리의 제1차 계획은 불행히도 실패했지만 피체되지 않은 우리 동지들은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왜적을 섬멸할 것이다‘고 최후 진술한 것처럼 박재혁의 부산경찰서폭탄사건(1920년 9월), 최수봉의 밀양경찰서폭탄사건(1920년 11월) 등이 잇따랐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죄수와 간수 등을 공부시키고 애국사상을 불어넣어 후일 에비 조직원으로 삼는 등 탁월한 조직가로서의 면모를 이미 보이기 시작한 그는, 27년 출옥 뒤 밀양으로 돌아와 신간회 밀양지회를 조직하고 총무간사로 일한다.
이 무렵 석정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꽤 고민한 흔적을 보인다. 감옥생활로 인한 오랜 단절 탓이었는지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고 한때 <중외일보> 기자, 경남 주식회사 사장 등의 ‘표면활동’을 하면서 1929년에는 아들 남선을 보았다.
1932년 여름 중국 남경에서 10여년 만에 석정과 상봉한 약산은 그가 한 발언을 이렇게 옮겼다. “나의 과거의 일생은 다만 열정과 용기로써만 조선독립을 하려고 분투하여 왔다. 그러나 현재는 나의 경험과 교훈에 근거하여 단혈 열정과 용기만으로는 목적을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그럼으로 나는 나의 혁명적 인생관·세계관 등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나의 두뇌를 재무장하여야, 나아가 정확한 혁명운동을 추진할 수 있다. ”
그는 그해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남경 선사묘에 조선민족혁명 간부학교가 개설되자 의열단 투쟁경력 등에 비추어 교관이 되라는 조직을 청을 거절하고 1기생으로 입학했다. 이때 시인 이육사가 석정의 권유로 이 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다.
33년 2기학교가 시작되자 석정은 생도에서 교관으로 자리를 바꿔 운동사와 유물사관 등 사회과학 등을 강의하면서 국내 조직활동을 한 경험을 살려 의열단의 국내활동을 지도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남경군관학교 사건의 진상>)
조직가로서 능력 탁월
32년 11월 상해에서 의열단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김두봉·조소앙·신익희), 한국혁명당(윤기섭), 조선혁명당(최동호·이청천), 한국광복동지회(김규식) 등 5개 좌우익단체들이 모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했다. 신간회에 이어 두 번째인 이 좌우통일전선체는 “해외 민족해방운동, 내부의 필요와 노력으로 얻어낸 성과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강만길 교수는 밝힌다.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1991년 화평사).
이 단체에서 석정은 김두봉, 김규식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 6인상무위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면서 의열단대표로서 이전의 신간회 활동 경험을 살려 명실상부한 통일체 건설에 주력한다.
1935년 마침내 대일전선통일동맹은 ‘한국민족혁명당’이라는 새로운 단일당으로 개편돼 민족의 자주독립, 진정한 민주공화국 건설, 국민생활상의 평등제도 확립 등 3대원칙 아래 활동을 시작했다. 석정은 당중앙집행위원이면서 한글판 기관지 <민족혁명>과 <앞길>의 책임편집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약산의 표현에 따르면 “당 조직 선전교육공작에서 그의 탁월한 천재를 표현”하였다.
이즈음 지상에 발표된 <우리 운동의 새출발과 그 이론적 기초> <본 당의 강령과 현단계의 중심임무> <우리 운동의 새출발과 민족혁명당의 창립> <1936년의 세계전망> 등 그의 글들은 항상 실천적 필요에 응하는 이론적 산물로서 민족혁명당의 노선으로 채택되었다.
중국공산당 팔로군 합류
석정은 1935년 10월 김규식의 후임으로 당 훈련부장을, 37년 1월 2차 당대회에서 당청년운동위원회 주임을 맡는 등 조직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한편 <당의 훈련> 등 팸플릿을 기초했다.
또 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해로 들어가 선전선동 활동에 주력하며 중국정부와 함께 일본과 조선을 향해 단파라디오 방송을 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통일전선의 확대과정으로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민족혁명당을 비롯해서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김성숙·김규광),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조선청년전위동맹(최창익) 등 4개 단체의 연합으로 결성된다. 38년 ‘조선의용대’(총대장 김원봉)가 임시정부의 조선광복회보다 2년 앞서 무한에서 결성돼 중국에서 처음으로 독립된 항일무장군대로 등장한다. 석정은 의용대 훈련주임으로 있으면서 기관지 <전고(戰鼓)>의 주간으로 일했다.
조선의용대는 화중·화남 등 6개전구 13개 성에 걸친 광대한 작전지역에서 국민당 배속, 선전부대로 활동했으나 조선과 지리적으로 먼데다 국미당 정부의 ‘소극항전’에 대한 불만이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싹터 ‘북상항일’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김원봉의 견해와 충돌했다.
결국 40년 11월 확대간부회의에서 ‘파북’ 결의가 이뤄져 전위동맹의 젊은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제2지대(지대장 김학무)가 1차로 화북으로 떠난다. 석정이 정치지도원으로 있던 1·3혼성지대(지대장 박효삼)도 태항산으로 향했다.
석정이 중경의 김원봉과 결별해 의용대를 이끌고 팔로군에 합류한 사실은 여러모로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석정 밑에서 혁명당원으로 할동했고 지금 연변에 거주하는 소설가 김학철씨는 두 사람의 관계를 ‘동전의양측면’으로 비유하면서 석정이 가고 김원봉이 남은 것은 국민당 정부의 원조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계략’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석정의 사상적 변모와 이후 김원봉이 임정에 곧바로 참여한 과정을 감안하면 두 사람의 사상적 결별로 이해된다.
석정은 41년 6월 태항산에 들어가 민족 해방운동의 최고참 선배이자 의용대의 실질적 영수로 활동하다 42년 5월말 일본의 소탕전 중 요녕 마전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뒤 5일 만인 6월 3일 숨진다.
82년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중국공산당은 같은 해 10월 10일(쌍십절) 당시 어수선한 정세에 비추어 놀랄마큼 웅장한 ‘조선혁명열사 석정동지지묘’를 세우고 장례식을 치른 뒤 “열사전을 편찬하고 각급 학교의 교과서로 사용하며 각 기관의 전통적 교육재료로 삼을 것을 결정했다”(<신화일보> 42년 8월 29일).
의용대 후신인 의용군과 화북조선독립동맹이 광복 뒤 ‘연안파로서 북에서는 숙청당하고 남에서는 북한 공산당의 구성요소로 간주돼 차가운 눈길 속에서 ‘잊혀진 공산주의자들’로 불리는 가운데 석정 윤세주는 그 운명을 피해 남쪽에서는 82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됐다. 그리고 북에는 45년 남쪽으로 귀국했다가 월북한 아내 하씨와 유일한 혈육 남선씨가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출처] 윤세주|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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