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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반에이크의 작품세계
[1436~1441]- Jan Van Eyck
[Jan van Eyck(1393~1441) :Belgian, Early Netherlandish painter]
당시에 새로 개발된 유화 기법을 완성한, 주로 초상과 종교적인 주제들을 다룬 자연주의적인 패널에서 은폐된 종교적 상징들을 많이 사용했다.
걸작으로는 헨트 대성당에 있는 제단화인 〈어린 양에 대한 경배 Adoration of the Lamb〉(1432)가 있다.
얀 반 에이크는 1422년 10월에 네덜란드의 백작인 바이에른의 요한의 '명예 시종 겸 화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1395년 이전에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 그는 1425년 그 백작이 죽을 때까지 계속 헤이그 궁전에서 일했으며 그뒤 잠깐 브뤼주에 머물다가 그 해 여름에 플랑드르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이자 가장 중요한 예술 후원자인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리프의 부름으로 릴에 가서, 죽을 때까지 그 공작 밑에서 일했다. 그는 필리프 공을 위해서 그뒤 10년 동안 많은 비밀 임무들을 수행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베리아 반도를 2차례 방문한 일이었다.
첫번째는 1427년 스페인의 이사벨라와 필리프 공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2번째는 1428~29년에 포르투갈의 이사벨라에게 청혼하기 위한 것이었다. 필리프 공의 신뢰를 받던 그는 이 혼인 교섭들에 직접 참여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또한 공작에게 약혼녀의 초상화를 선사해야만 했다. 1431년 브뤼주에 집 1채를 구입하고 그 무렵 마르가레테라는 여자와 혼인했는데, 그녀에 대해서는, 1406년에 태어났고 그와의 사이에 2명 이상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밖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브뤼주에 살면서 계속 그림을 그렸고, 1436년 다시 필리프 공을 위해 비밀여행을 했다. 그는 1441년에 죽었으며 브뤼주에 있는 생도나티앙 교회에 묻혔다.
마지막 10년 동안에 그린 그림들만이 그의 작품으로 확실히 확인되었으므로 초기의 발전 과정은 이 후기 작품들을 미루어 추론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에이크는 플랑드르 회화의 창시자로 찬사를 받아왔으며, 학자들은 중세의 사본 채식(彩飾)이 번창하던 마지막 단계에서 그의 예술의 원천을 찾았다.
그의 후기 그림에서 나타나는 자연주의와 우아한 구도는 부르고뉴의 공작들을 위해 일한 익명의 부시코 장인과 림뷔르흐 형제(폴·헤르만·예하네코인)와 같은 15세기초의 사본 채식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1439년의 한 자료는, 얀 반 에이크는 필리프 공을 위한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한 채식자에게 보수를 지불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사본 삽화 간의 관련성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토리노·밀라노 기도서 Turin-Milan Hours〉(토리노 시립박물관)라는 문제의 책에서 한트 G.라는 서명이 확인된 몇 점의 세밀화를 그의 작품으로 보는 점이다.
'에이크풍의' 이 세밀화들의 연대를 1420년대나 또는 그 이전으로 잡을 경우 그가 이것들을 그렸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최근에 이 세밀화들이 적어도 그보다 20년 뒤에 그려졌으며, 따라서 그것들은 그의 모방자가 그린 것이라는 견해가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얀 반 에이크의 초기 작품에서 〈토리노·밀라노 기도서〉를 빼면 그는 국제 고딕 양식의 사본 채식과 그다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의 화풍이 확립되는 데에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확실히 투르네의 화가인 로베르 캉팽(1378~1444경)의 패널들이었는데, 플랑드르의 미술사에서 캉팽이 중요한 구실을 했음이 최근에야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에이크는 1427년 투르네 화가조합이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을 때 캉팽과 만난 것이 틀림없으며, 캉팽의 미술에서 대담한 사실주의와 은폐된 상징적 표현법 및 밝은 유화 기법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이 유화 기법은 이후에 에이크의 고유한 양식적 특징이 되었다. 투르네의 시민이었던 캉팽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번화한 궁정에서 일하는 학식있는 대가였으며, 플랑드르 미술가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들에 서명을 했다. 그가 그린 패널의 대부분에는 '요하네스 데 에이크'라는 당당한 서명이 적혀 있으며, 몇 점의 작품에는 '최선을 다해'(Als ich chan)라는 그의 오만한 좌우명이 들어 있다.
캉팽의 명성이 사라지면서 그가 얀에게 미친 영향이 잊혀지고 그리하여 대부분의 캉팽 작품들이 얀의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조금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얀 반 에이크의 그림 중 9점에 그의 서명이 적혀 있고 10점에 연대가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그것의 연대를 추적하는 데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의 걸작인 〈어린 양에 대한 경배〉라는 제단화에 휘베르트 반 에이크를 이 그림의 주요제작자로 소개하는 매우 미심쩍은 글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미술사가들은 〈젊은 남자의 초상(진실한 추억) Portrait of a Young Man (Leal Souvenir)〉(1432)을 비롯해 〈조반니 아르놀피니와 조반나 체나미의 혼인(?) The Marriage of Giovanni Arnolfini and Giovanna Cenami(?)〉(1434)·〈성모와 카논 반 데르 파엘레 Madonna with Canon van der Paele〉(1434~36)·〈성모와 아기 예수와 성인들 Madonna and Child with Saints〉(1437)·〈성녀 바르바라 St.Barbara〉(1437)·〈샘가의 성모 Madonna at the Fountain〉 등 그다지 야심적이지는 않지만 얀의 양식 발전을 보다 확실하게 추적해볼 수 있는 작품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 그림들은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몰려 있지만, 얀이 로베르 캉팽의 조각과도 같은 묵중한 사실주의에서 좀더 섬세하고 다소 깐깐한 회화 양식으로 나아간 일관된 발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헨트 제단화 Ghent Altarpiece〉에 1432년의 연대가 적혀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을 그의 양식 발전 과정상 최초의 것으로 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는 것 같지만, 이 대작의 제작에 휘베르트가 참여했는지의 문제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제단화에 적혀 있는 구절은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뚜렷이 밝히고 있다. "가장 위대한 화가인 휘베르트 반 에이크가 (이 작업을) 처음 시작했고, 2번째로 위대한 화가인 그의 동생 얀이 그 뒤를 이어 완성했다……." 이 주장을 기초로 하여 미술사가들은 휘베르트가 〈헨트 제단화〉에 이바지했다고 생각해왔으며, 심지어 〈수태 고지 The Annunciation〉(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무덤의 세 마리아 The Three Marys at the Tomb〉(로테르담 보이만스반뵈닝겐 박물관) 등 좀더 초기의 '에이크풍'의 몇몇 그림들까지 그의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삽입 구절은 16세기에 전사된 것이고 그 이전의 자료들에서는 휘베르트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면, 알브레히트 뒤러가 1521년 헨트를 방문했을 때 오직 얀 반 에이크만을 찬양했으며, 그뒤 1562년에 플랑드르의 역사학자인 마르쿠스 반 바르네웨이크는 그 제단화의 제작자로서 오직 얀만을 언급했다. 더욱이 최근의 문헌학적 연구는 삽입된 구절에 대한 신뢰성에 심각한 의혹을 던지고 있다. 따라서 휘베르트가 그 작품 제작에 참가했다는 것은 매우 의심스러우며, 그의 미술에 대한 어떤 지식도 현재로는 불확실할 뿐이다.
한편 휘베르트의 존재는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헨트의 시문서를 보면 '거장 휘베르트'(meester Hubrechte de scildere)라는 기록이 3번이나 나오며 그의 묘비명의 사본에는 그가 1426년 9월 18일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휘베르트 반 에이크가 얀과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16세기에 왜 그가 〈헨트 제단화〉의 주요부분을 그린 것으로 여겨졌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그와 휘베르트의 관계, 그가 채식자로 활동했을 가능성, 로베르 캉팽에 대한 재평가 등으로 인해 얀 반 에이크의 업적과 중요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는 초기 작가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유화를 그리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재질감과 빛, 그리고 자연의 공간 효과를 충실히 묘사하는 기법을 완성했다. 그의 사실주의 기법을 능가하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일찍이 1449년에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인 키리아쿠스 당코나는 그의 작품들이 '인간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자연 그 자체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캉팽처럼 에이크에게도 자연주의가 단순히 기술적 재주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자연은 신을 구현한 것이었으며 그는 일상 사물들로 가장한 종교적인 상징들로 그림을 채웠다. 그의 풍경화와 실내화들을 그토록 자연스럽게 비추고 있는 빛까지도 신의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얀 반 에이크의 기법이 세련되고 그의 상징적 표현이 난해하기 때문에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미술에서 일부만을 빌려 썼다.
캉팽의 수제자인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은 스승의 평범한 사실주의를 에이크풍의 우아함·섬세함과 조화시켰는데, 사실 캉팽도 말기에는 에이크의 우아한 양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에이크의 공방에서 도제살이를 했으며 그가 죽은 뒤 〈성모와 아기 예수와 성인들과 기증자 Virgin and Child, with Saints and Donor〉(뉴욕 시 프릭 컬렉션)를 마무리한 페트루스 크리스투스조차도 웨이덴의 영향을 받아 에이크의 양식에서 복잡한 요소들은 곧 버렸다.
15세기 후반에 네덜란드의 화가들인 휘고 반 데르 후스와 유스투스 반 헨트가 에이크의 유산을 되살렸지만, 퀸틴 마시스나 얀 마뷔즈 같은 16세기초 플랑드르의 대가들이 얀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을 때 그들은 원래의 작품에 비견할 수 없는 단지 충실하기만 한 모사품들을 만들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얀 반 에이크의 영향이 캉팽과 웨이덴의 보다 쉬운 양식들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으며, 오직 얀이 2차례 방문했던 이베리아 반도에서만 그의 미술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탈리아에서는 키리아쿠스와 인문주의자인 바르톨로메오 파초가 그의 뛰어남을 인정하여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 및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인 피사넬로와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와 함께 그를 당대의 주요화가로 평가했다. 그러나 르네상스기의 미술가들은 그밖의 화가들처럼 그를 모방의 대상보다는 감탄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의 그림은 지금도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으며 그 뛰어난 기교도 여전히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많은 화가들에 의해 모사되어왔으며 수집가들이 탐을 내는 미술품이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을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과의 평화조약을 맺기 전에 〈헨트 제단화〉를 벨기에로 되돌려줄 것을 명기하고 있다.
[Daum백과사전]
중세말인 14세기말에서 15세기초 사이 서양미술에서는, 장식적인 우아함을 특징으로 하는 ‘국제 고딕(International Gothic)’ 양식이, 전유럽의 봉건 궁정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15세기 미술은 국제 고딕의 비현실적인 양식화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흐름은 알프스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발달했는데, 남쪽은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가, 북쪽은 플랑드르(오늘날의 벨기에 서부, 네덜란드 남서부, 프랑스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가 그 중심지였다. 이탈리아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미학을 선보이며 황금기를 구가했던 15세기 플랑드르 사실주의 미술의 토대를 만든 제1세대이자 대표작가이며, 북유럽 회화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화가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년경~1441년)다.
얀 반 에이크의 출생 시기, 장소, 교육 및 초기 작품 활동에 대한 자료는 확실한 것이 없다. 오늘날 벨기에 동부, 랭부르(Limburg) 지역의 마세이크(Maaseik)에서 1395년경에 태어나, 필사본 화가(illuminator) 수련을 받고, 1425년경까지 덴 하흐(Den Haag, 영어 표기는 Hague)의 홀란드 백작 궁정에서 일한 적이 있던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형제인 후베르트(Hubert)와 람베르트(Lambert), 누이 마르가레테(Margarete)도 화가였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플랑드르는 부르고뉴 공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1363년에 필리프 (Philippe le Hardi)가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 지방을 봉토로 받으면서 시작된 부르고뉴 공국은, 그가 플랑드르 백작의 딸과 결혼하면서 플랑드르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디종(Dijon)에 있던 부르고뉴 궁정이 플랑드르의 산업, 상업, 금융의 중심지 브뤼헤(Brugge)로 옮기는 15세기 초부터 플랑드르 미술은 ‘궁정 귀족’과 ‘부르주아’라는 두 계급의 든든한 후원을 받게 되었다. 얀 반 에이크는 부르고뉴 공국의 궁정화가인 동시에, 새로 탄생해 세력을 키워가던 부르주아 시민 계급의 취향을 대변하는 화가였다.
얀 반 에이크는 1425년경부터 필리프 3세(Philippe le Bon)의 궁정화가로 활동하며 공작의 초상, 공작이 계획한 십자군 원정을 위한 세계 지도 등을 그렸다고 하나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의 손으로 그린 것이 확실한 작품 중 전해지는 것은, 1432년부터 사망한 해인 1441년까지 10년 동안 제작한 25개의 그림뿐이다. 남아있는 그림의 주제는 종교화 특히 성모상과 초상화가 대부분이고, 이 작품들의 제작 기간에 차이가 별로 없어 양식의 변천은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조화로운 구성, 빛과 그림자의 효과에 대한 정밀한 관찰에 기반한 극도로 세밀하고 사실적인 묘사, 완벽한 마감은 전설적이어서, 후대에 그는 유화를 발명한 사람으로 칭송되었다. 당시 패널 회화의 주류는, 광물이나 식물에서 추출한 안료를 달걀 노른자에 개어 그리는 템페라화였지만, 안료를 기름에 섞어 사용하는 유화도 시도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를 유화의 발명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프레스코, 템페라화 등과 구별되는 유화 특유의 깊고 풍요로운 색채, 섬세한 입체감, 생생한 질감을 완벽하게 구현한 화가로는 얀 반 에이크가 선구적이고 독보적인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사실적인 공간
[헨트 제단화] 열었을 때 1432년, 패널에 유채, 375×520cm, 신트 바프 성당, 헨트, 벨기에
사실주의와 새로운 플랑드르 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은 15세기 플랑드르 제단화 중에서 가장 큰 헨트(Ghent)시 신트 바프(Sint-Baafs, 영어 표기는 St. Bavo) 성당의 [헨트 제단화 Ghent Altarpiece]다. 이 제단화는 헨트 시장 요스 베이트(Joos Vijd)가 대성당의 가족 채플에 걸 목적으로 주문하여, 후베르트 반 에이크가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1426년에 사망했다.
얀 반 에이크는 공작의 거처가 있던 릴(Lille)에서 궁정화가로서의 업무를 하는 중이어서 곧바로 이 작업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1428~9년에는 공작이 맡긴 임무 때문에 포르투갈과 스페인 여행을 하기도 했다. 1431년에야 그는 브뤼헤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 작품 제작에 들어가 1432년에 완성했다.
후베르트와 얀이 정확하게 어떤 부분을 그렸는지 구분하는 것은 아주 어렵고 논쟁이 많은 문제다. 사실 양식의 차이와 전체적인 부조화는 제단화 전체에서 발견된다. 중앙 패널, 경첩으로 연결된 좌우 날개 패널이 있는 세 폭 제단화(triptych) 형식인데,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의 패널 네 개가 모여 각각의 폭을 구성하고 있어 다소 복잡해 보인다. (이 시대 화가는 액자 디자인과 제작도 직접 했는데 현재의 것은 본래 화가가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쳤을 때 하단 가장 왼쪽에 있는 패널도 원작이 도둑맞아 대신 채워 넣은 모사본이다.)
평일에 볼 수 있는 닫은 화면 하단에는 주문자인 요스 베이트 부부와, 조각의 느낌이 나게 단색으로 그려진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이 있다. 세례 요한은 본래 이 교회의 수호 성인이었고, 사도 요한은 주문자의 수호 성인이다. 중앙 네 패널은 마리아에게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가브리엘 천사의 모습을 담은 수태고지, 그 위에는 예수의 탄생을 예언한 스가랴, 미가, 이교도 무녀들이 그려져 있다.
주일과 축일에 볼 수 있는 펼친 화면의 상단 중앙에는 하나님(혹은 예수)이 교황의 삼중관을 쓰고, 세속 왕의 왕관은 발치에 두고 앉아 있다. 그 좌우로 성모와 세례 요한이, 그 옆에는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천사들이, 그 옆에는 아담과 이브, 아담의 위에는 가인과 아벨의 번제, 하와 위에는 가인의 아벨 살해 장면이 있다. 하단 다섯 패널은 이어지는 장면이다.
중앙에는 희생양 예수를 상징하는 피 흘리는 어린 양, 그 주위에는 예수 수난 도구들(Arma Christi)과 향을 들고 둘러선 천사들, 그 앞에는 생명수 샘을 상징하는 팔각형 우물이 보인다. 사방에서 어린 양에게 경배를 하기 위해 사도, 예언자, 순교자 등이 모여들고 있다. 하단 좌측 두 패널에는 말을 타고 이 경배에 참여하러 오는 기사와 판사, 우측 두 패널에는 맨발로 자갈길을 걸어오는 순례자와 은둔자가 보인다.
제단화 전체의 주제는 인간 구원의 역사다.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된 원죄와 타락이 예수 탄생의 예언, 수태고지, 예수의 희생, 신자의 순교, 최후의 심판을 거쳐, 생명수가 흐르고 생명 나무가 우거진 천국에 이른다는 것이다. 상단 패널을 가로로 보아 최후의 심판 장면으로 해석하면 중앙의 인물은 데이시스(Deësis: 심판자 예수,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는 중재자 역할의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나란히 등장하는 도상)의 예수가 되고, 하단 중앙 그림의 세례반, 예수, 비둘기 모양의 성령과 연관해서 수직으로 연결된 세례 도상으로 해석하면 성부 하나님이 된다.
양식으로 봤을 때 인물들이 한 화면에서도 크기가 다르고 일관성이 없는 것은 중세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그림에서는 크게 두 가지 중세와 완전히 달라진 것이 있다. 첫째는 중세 회화 배경에 주로 보였던 금색 대신 사생에 근거한 자연 풍경이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중세 그림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을 나타내려 했다. 중세 그림에서 즐겨 사용한 황금색은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것으로, 금색은 거리감이나 공간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비현실적인 색이다. 인간 구원의 모든 역사가 한 화면에 축약되어 담긴 얀 반 에이크의 천국 풍경에 아직 구체적인 시간은 나타나지 않는다. (회화에 담기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는 방향으로 역사가 전개되어 인상주의의 ‘찰나’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장소는 구체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공작을 대신해 알프스를 넘나들고 예루살렘까지도 여행을 한 것으로 알려진 화가는, 북유럽의 자연에 더해 여행 중에 보았던 이국적인 식물과 건축물도 그림 속에 사실적으로 그려 넣었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마리아, 천사들조차도 타일이 깔린 바닥이라는 구체적인 공간 속에 존재한다. 새 예루살렘을 나타내는 원경의 건축물과 그 너머 산의 표현에는, 후에 레오나르도가 말하는 공기 원근법이 사용되어 흐리고 푸른 모습을 띠고 있다.
중세 회화와의 두번째 큰 차이점은 인물이 이상화되지 않고 개성을 가진 존재로 재현되었다는 점이다.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다른 등장인물도 그렇지만 닫힌 화면에 그려진 주문자 부부의 실물크기 초상은 이런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제단화의 일부분으로 등장한 주문자 초상은 이후 독립 초상화로 발전하여, 중세의 익명성에 묻혀 있던 개인이 천년만에 이름과 개성을 가진 존재로 부각되기 시작하는데 얀 반 에이크는 이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제단화 전체의 주제는 인간 구원의 역사다.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된 원죄와 타락이 예수 탄생의 예언, 수태고지, 예수의 희생, 신자의 순교, 최후의 심판을 거쳐, 생명수가 흐르고 생명 나무가 우거진 천국에 이른다는 것이다. 상단 패널을 가로로 보아 최후의 심판 장면으로 해석하면 중앙의 인물은 데이시스(Deësis: 심판자 예수,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는 중재자 역할의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나란히 등장하는 도상)의 예수가 되고, 하단 중앙 그림의 세례반, 예수, 비둘기 모양의 성령과 연관해서 수직으로 연결된 세례 도상으로 해석하면 성부 하나님이 된다.
양식으로 봤을 때 인물들이 한 화면에서도 크기가 다르고 일관성이 없는 것은 중세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그림에서는 크게 두 가지 중세와 완전히 달라진 것이 있다. 첫째는 중세 회화 배경에 주로 보였던 금색 대신 사생에 근거한 자연 풍경이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중세 그림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을 나타내려 했다.
중세 그림에서 즐겨 사용한 황금색은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것으로, 금색은 거리감이나 공간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비현실적인 색이다. 인간 구원의 모든 역사가 한 화면에 축약되어 담긴 얀 반 에이크의 천국 풍경에 아직 구체적인 시간은 나타나지 않는다. (회화에 담기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는 방향으로 역사가 전개되어 인상주의의 ‘찰나’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장소는 구체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공작을 대신해 알프스를 넘나들고 예루살렘까지도 여행을 한 것으로 알려진 화가는, 북유럽의 자연에 더해 여행 중에 보았던 이국적인 식물과 건축물도 그림 속에 사실적으로 그려 넣었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마리아, 천사들조차도 타일이 깔린 바닥이라는 구체적인 공간 속에 존재한다. 새 예루살렘을 나타내는 원경의 건축물과 그 너머 산의 표현에는, 후에 레오나르도가 말하는 공기 원근법이 사용되어 흐리고 푸른 모습을 띠고 있다.
중세 회화와의 두번째 큰 차이점은 인물이 이상화되지 않고 개성을 가진 존재로 재현되었다는 점이다.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다른 등장인물도 그렇지만 닫힌 화면에 그려진 주문자 부부의 실물크기 초상은 이런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제단화의 일부분으로 등장한 주문자 초상은 이후 독립 초상화로 발전하여, 중세의 익명성에 묻혀 있던 개인이 천년만에 이름과 개성을 가진 존재로 부각되기 시작하는데 얀 반 에이크는 이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천년 만에 등장한 이름과 개성을 가진 얼굴들
헨트 제단화 이후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그림 중 서명과 제작 연도가 적힌 최초의 작품은 1432년의 [남자의 초상 Portrait of a Man]이다. 모델은 짙은 녹색 샤프롱(chaperon)을 쓰고 모피로 옷깃과 소매 끝을 댄 붉은 의상을 입은 남자이다. 화가는 개인 초상화에서 3/4 각도의 상반신이 보이는 형식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 사람 역시 그런 자세를 취하고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실제 같은 착각을 주는 눈속임 효과(trompe-l’oeil)로 그려진 돌 난간에 ‘충실한 기념’이라는 뜻의 큰 글씨가 보이고, 그 위에는 희랍어로 ‘티모테오스’라는 이름, 맨 아랫 줄에는 ‘우리 주의 해 1432년 10월 10일에 얀 반 에이크에 의해서 그려짐’이라고 씌어 있다.
당시 화가 주위에는 티모테오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이름은 일종의 환유(metonym)로 생각되었다. 플라톤이 활동하던 시절 고대 그리스에 이 이름을 가진 음악가가 있었기 때문에, 모델은 부르고뉴 궁정 음악가이며, 그가 말아 들고 있는 종이는 악보의 일종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티모테오스는 부조로 유명했던 조각가라며 이 그림은 궁정 조각가를 모델로 한 것이고, 그가 쥔 종이는 조각의 계획을 메모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모델이 법률가이며 이 그림은 사후에 그려진 묘비명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모델의 신원이 어떠하든, 이 인물의 짧고 뭉툭한 코와 올라간 윗입술, 초록색 눈이 주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고요한 표정의 냉정하고 세밀한 묘사는, 그려진 지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봐도 그를 눈앞에 대하는 듯 생생한 현실감을 준다.
이 작품처럼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물이 1433년의 초상 [붉은 샤프롱을 쓴 남자 Man in a Red Chaperon]의 주인공이다. 앞의 남자와 달리 머리에 쓴 천을 말아 올린 이 남성 역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침착한 표정이다. 액자에는 새겨 넣은 듯한 눈속임 효과를 내는 글씨가 그려져 있는데, 하단의 글씨는 ‘1433년 10월 21일에 얀 반 에이크가 나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서명과 제작 시기를 나타내고 있다. 상단에 씌어있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대로’라는 글씨로, 화가가 다른 작품에도 사용한 적이 있는 자신의 좌우명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겸손과 자부심이 동시에 읽힌다.
이 작품은 모델이 관람자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화가의 자화상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헨트 제단화] 펼친 화면의 하단 좌측 패널에서 화면 밖 관람자를 바라보는 사람 역시 화가의 자화상으로 추측되었던 적이 있다. 화가는 아내의 초상화와 짝(pendant)으로 자화상을 그린 적이 있으나, 현재는 아내 초상만 남아 있고 그의 자화상은 도둑 맞아서 행방을 알 수 없다. 얀 반 에이크의 초상화 속 인물이 특별한 감정을 표시하는 경우는 없다. 화가는 침착하고 고요한 가운데서 모델의 개성과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본 것이다.
헨트 제단화 이후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그림 중 서명과 제작 연도가 적힌 최초의 작품은 1432년의 [남자의 초상 Portrait of a Man]이다. 모델은 짙은 녹색 샤프롱(chaperon)을 쓰고 모피로 옷깃과 소매 끝을 댄 붉은 의상을 입은 남자이다. 화가는 개인 초상화에서 3/4 각도의 상반신이 보이는 형식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 사람 역시 그런 자세를 취하고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실제 같은 착각을 주는 눈속임 효과(trompe-l’oeil)로 그려진 돌 난간에 ‘충실한 기념’이라는 뜻의 큰 글씨가 보이고, 그 위에는 희랍어로 ‘티모테오스’라는 이름, 맨 아랫 줄에는 ‘우리 주의 해 1432년 10월 10일에 얀 반 에이크에 의해서 그려짐’이라고 씌어 있다.
당시 화가 주위에는 티모테오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이름은 일종의 환유(metonym)로 생각되었다. 플라톤이 활동하던 시절 고대 그리스에 이 이름을 가진 음악가가 있었기 때문에, 모델은 부르고뉴 궁정 음악가이며, 그가 말아 들고 있는 종이는 악보의 일종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티모테오스는 부조로 유명했던 조각가라며 이 그림은 궁정 조각가를 모델로 한 것이고, 그가 쥔 종이는 조각의 계획을 메모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모델이 법률가이며 이 그림은 사후에 그려진 묘비명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모델의 신원이 어떠하든, 이 인물의 짧고 뭉툭한 코와 올라간 윗입술, 초록색 눈이 주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고요한 표정의 냉정하고 세밀한 묘사는, 그려진 지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봐도 그를 눈앞에 대하는 듯 생생한 현실감을 준다.
이 작품처럼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물이 1433년의 초상 [붉은 샤프롱을 쓴 남자 Man in a Red Chaperon]의 주인공이다. 앞의 남자와 달리 머리에 쓴 천을 말아 올린 이 남성 역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침착한 표정이다. 액자에는 새겨 넣은 듯한 눈속임 효과를 내는 글씨가 그려져 있는데, 하단의 글씨는 ‘1433년 10월 21일에 얀 반 에이크가 나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서명과 제작 시기를 나타내고 있다. 상단에 씌어있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대로’라는 글씨로, 화가가 다른 작품에도 사용한 적이 있는 자신의 좌우명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겸손과 자부심이 동시에 읽힌다.
이 작품은 모델이 관람자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화가의 자화상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헨트 제단화] 펼친 화면의 하단 좌측 패널에서 화면 밖 관람자를 바라보는 사람 역시 화가의 자화상으로 추측되었던 적이 있다. 화가는 아내의 초상화와 짝(pendant)으로 자화상을 그린 적이 있으나, 현재는 아내 초상만 남아 있고 그의 자화상은 도둑 맞아서 행방을 알 수 없다. 얀 반 에이크의 초상화 속 인물이 특별한 감정을 표시하는 경우는 없다. 화가는 침착하고 고요한 가운데서 모델의 개성과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본 것이다.
숨겨진 상징, 빛나는 사물의 표현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 1434년 , 패널에 유채, 82.2×60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2인 초상화라고 할 수 있는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 The Arnolfini Portrait]은 얀 반 에이크의 대표적인 초상화이자 다양하고 흥미로운 의미와 논쟁거리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반짝이는 황동 샹들리에와 붉은 침대, 예수 수난의 열 장면이 들어간 둥근 거울로 꾸며진 화려한 방 안에 두 남녀가 서 있다. 남자는 긴 모피와 큰 모자를 썼고, 여자는 모피로 목과 소매 둘레를 댄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 폭이 60cm밖에 안 되는 작은 화면에 금속, 모피, 동물의 털, 다양한 옷감, 유리와 벽 등 서로 다른 재질을 가진 물건을 극도로 섬세하고 정확하게 재현한 화가 특유의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두 모델의 신원과 그 의미에 대해서 많은 해석이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이들이 이탈리아 루카(Lucca) 출신으로 브뤼헤에서 활동하던 무역상이자 금융업자인 지오반니 디 아리고 아르놀피니(Giovanni di Arrigo Arnolfini), 지오반나 체나미(Giovanna Cenami) 부부이고, 이 그림은 이들의 결혼식 장면이라는 해석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림 안의 모든 사물은 ‘숨겨진 상징’이 되어 ‘그려진 혼인 증명서’와 관련된 의미를 가진다.
벗어놓은 신발은 이곳이 신성한 의식이 진행되는 장소라는 것을 의미하고, 강아지는 부부가 지켜야 할 정절, 창가의 오렌지는 다산과 풍요 혹은 원죄와 구원, 샹들리에의 촛불과 방 전체가 비치는 거울은 이들의 생활이 전지한 하나님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거울에 비치는 부부 외의 두 명의 인물은 혼인 서약의 증인인 화가와 신부의 아버지이며, 거울 위에 씌어진 ‘1434년 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다’는 말도 이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유부녀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고, 남자도 통상 결혼식에서는 쓰지 않는 모자를 쓰고 있으며, 12세기부터 성사의 하나가 된 결혼이 교회가 아니라 집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신랑 신부가 서로 오른손을 맞잡아 성사되는 결혼 형식(dextrarum iunctio)과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이 그림이 결혼 장면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이럴 경우 방안의 사물들은 종교적인 상징이라기보다 세속적인 자부심을 표현하기 위한 대상이 되며, 모델은 자신의 경제적 성공을 과시하고, 경건한 결혼 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초상화를 주문한 것이 된다. 또다른 해석으로 이들의 손 동작은 남편이 아내에게 그의 부재시 사업을 관장할 법적 권한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는 이들이 지오반니 디 아리고 아르놀피니 부부가 아니라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그는 1447년에야 결혼을 해서 그림이 그려질 당시 미혼이었고, 모델이 된 것은 그의 형제인 지오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Giovanni di Nicolao Arnolfini)와 코스탄자 트렌타(Costanza Trenta) 부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코스탄자가 1433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림은 아내 사망 일주기를 기념하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샹들리에에서 타고 있는 초가 남편 쪽에 있는 것 하나 뿐인 것도 이것이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되는 그림의 의미도 흥미롭지만, 거울을 도입하여 그려진 화면 너머 관람자가 있는 곳까지 그림의 공간으로 담고 있는 대담하고 기발한 구성은, 17세기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나오기까지 능가할 만한 작품이 없는 이 그림만의 혁신적인 면모이다. 또 창으로 빛이 들어오는 실내의 한 구석을 배경으로 빛의 효과를 섬세하게 표현한 것은 베르메르의 회화에 그대로 이어지는 요소이다. 이 그림은 이후로 그려질 전신 초상화, 실내 정경을 담은 장르화, 정물화라는 세 가지 분야 회화 모두에서 큰 영향을 끼친 선구적인 작품이다.
플랑드르 사실주의적 풍경화의 시작
니콜라 롤랭 수상의 성모] 1435년경 , 66 cm X 62 cm, 루브르 박물관
이 그림 속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인간의 7대 죄악(분노,색욕,시기,탐욕,탐식,교만,나태을 암시하는 상징이 곳곳에 숨어 있다.
롤랭 재상 뒤에 새겨진 부조는 실제 조각처럼 정교하게 그려졌는데 아담과 이브의 추방(교만), 카인의 아벨 살해(시기), 술 취한 노아(탐식) 등을 묘사하고 있다. 기둥의 주두에 새겨진 사자는 분노를 나타내고 , 로지아의 기둥과 기저 사이에 납작하게 찌그러진 토기는 색욕을 나타낸다.
로지아 밖의 정원에 핀 갖가지 꽃들(백합,장미,데이지,작약 등)은 성모 마리아의 미덕을 상징하고, 멀리 발코니에 서 잇는 두 남자 중 묽은 터번을 슨 남자는 얀 반 에이크가 자신을 그린 것으로추정된다. 화면 중앙의 조그만 다리위에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누능로 찿기는 매우어려우니 확대경으로 보면 좋다
얀 반 에이크의 종교화는 대부분 성모자상을 그린 것인데 그 가운데 1435년경에 제작된 [니콜라 롤랭 수상의 성모 Madonna of Chancellor Nicolas Rolin]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걸작이다. 그림 왼쪽에 등장하는 남성이 이 작품을 주문한 니콜라 롤랭으로 부르주아 계급 출신으로 부르고뉴 공국에서 선왕 장(Jean sans Peur)에 이어 필리페 3세를 위해 봉사하며 신임을 얻어, 공작으로부터 수상의 직위와 귀족의 작위를 하사 받은 공국 최고의 실력자이자 최고 부자 중 하나였다. 그가 고향인 프랑스의 오텅(Autun)에 있는 교회의 가족 채플에 보낼 목적으로 그린 이 그림에서도 그는 실제 생활에서처럼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 이전에 주문자는 [헨트 제단화]의 시장 부부처럼 성인들과는 구별되는 공간에, 성인보다 작게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롤랭은 성모자와 같은 공간에, 이들과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으며, 중재하거나 소개하는 수호 성인도 없이 홀로 성모자를 대면하여 예수로부터 축복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을 그가 기도 중에 본, 내면의 눈에 비친 환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얀 반 에이크 특유의 정교하고 화려한 묘사가 주는 실물감은 그러한 해석을 감각적으로 압도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종교화에서 주문자 초상화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가 된다.
이 작품이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화면 중앙 아케이드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가지는, 사실주의적 풍경화와 관련된 가치이다. 서양 미술에서는 고대부터 인물이 중심이었고 풍경은 인물의 배경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졌다.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면서 종교화 등에서 배경인 풍경의 의미가 커지기 시작해서, 16세기에 관념적인 풍경화, 17세기에 사실적인 풍경화가 등장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아케이드는 풍경화의 액자 역할을 하는 정사각형의 틀을 만들어, 독립적인 풍경화로 가는 과도기 단계를 보여준다.
강을 사이에 두고 수상의 뒤쪽으로는 그가 부르고뉴에 소유한 포도원을 연상시키는 언덕, 작은 성당, 광장 등이 보인다. 아기 예수 뒤편으로는 고딕 대성당과 첨탑이 밀집한 대도시가 펼쳐져 있다. 화가의 다른 그림처럼 이 작품에서도 일상적인 사물은 종교적인 상징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수상 뒤 풍경은 물질적인 지상의 세계, 예수 뒤편은 정신적인 천상의 세계를 의미하며 이 둘이 강 중앙의 다리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성은 이러한 의미에 맞추어 했을 수도 있으나, 풍경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화가는 관찰과 사생에 근거한 사실적인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선 원근법에 따라 사물은 멀수록 작아지고, 공기 원근법에 따라 원경의 사물은 흐리고 푸른 기운을 띠는 것으로 묘사되어 깊이감과 거리감을 전달한다. 강에 비친 그림자 표현에서는 수면에 비치는 광선을 효과적으로 포착한 인상주의적인 면모도 발견할 수 있다.
얀 반 에이크를 비롯한 북유럽 미술의 원근법은 이탈리아 미술의 수학적 원근법과 비교하면 정확하지 않은 면이 있다. 그는 모눈종이 위에 정확한 비례로 작아지는 사물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직관에 의한 원근법을 구사했다. 이는 인물의 표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이 해부학에 의거한 구조를 파악해서 인물의 현실감을 만들어내려고 한 데 비해, 그를 비롯한 북유럽 미술가들에게 사실성은 정확한 세부묘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에서는 화가의 붓으로 짠 옷감, 화가의 손길이 지문을 만들듯이 촘촘히 지나가 만들어진 피부, 만지면 뽑힐 듯한 모피 등이 살아서 저마다 다른 파장의 빛을 발하고 있다.
얀 반 에이크는 생전부터 이탈리아에서도 유화의 발명자로, 사실적인 초상화가로 높이 평가되었고, 그에게서 유화를 배워 이탈리아에 소개했다고 바자리가 기록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나 보티첼리, 기를란다이오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16세기 들어 영향력이 감소했다.
이 시기에는 북유럽 회화 전반이 이탈리아 미술에 비해 침체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플랑드르에서 얀 반 에이크의 이름이 잊혀진 적이 없고, 카렐 판 만더(Karel van Mander)의 기록에서 그는 북유럽 미술 전통의 설립자로 추앙되었고, 북유럽의 화가 대부분의 미술 수업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도상해석에 집중되었던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최근 들어 기법, 후원, 사회적 기능 등으로 초점이 옮겨가고 있다.
글 김진희 / 미술평론가
Portrait of a Man with Carnation, 1435, oil, on wood , 40 x 31 cm
Staatliche Museen zu Berlin, Gemäldegalerie, Berlin, Germany
Portrait of Baudouin de Lannoy, 1436~1438, oil on panel, 26 x 20 cm
Gemäldegalerie -Staatliche Museen zu Berlin, Gemäldegalerie, Berlin, Germany
Portrait of Cardinal Albergati, 1435, sketch and study, on paper, 21.2 x 18 cm
Kupferstich-Kabinett, Dresden, Germany
Portrait of Giovanni Arnolfini, 1435, oil, on wood , 29 x 20 cm
Gemäldegalerie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Gemäldegalerie, Berlin, Germany
얀 반 에이크 이후로 플랑드르 초상화가들은 생생한 표정, 손동작과 함께 3/4 측면으로 대상을 묘사하였다. 인물은 배경에서 두드려져 보이며 관람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듯하다
The Annunciation, 1434~1436, Oil transferred from wood to canvas
93 cm X 37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on, DC, (United States)
<수태고지>는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를 중심으로 경건하면서도 아름다운 수태의 순간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신앙에 대한 상징을 나타내는 그림의 모든 것이 One big message를 나타내고 있다. 이 상징은 그림을 둘러싸는 전체적인 배경부터 여러 요소들을 사용해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마리아앞에 그려진 하얀 백합은 순수, 순결을 상징하고 비둘기 모습을 한 성령은 금빛 줄기 속에 마리아에게 잉태되는 순간을 그림을 의미한다. 그림의 배경에 해당되는 마리아의 뒷 벽면의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유일신을 의미하는 인물이 그려져 있고, 그 밑의 기둥을 지나 세 개의 창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즉 기독교 신앙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가브리엘과 마리아는 놀랍도록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가브리엘의 왼쪽 다리 부분은 마리아의 옷감에 닿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 심지어 서로의 대화를 써넣었다. 친절하게도 마리아의 대답은 신이 읽기 쉽도록 거꾸로 적혀있다. 암호라기보다는 직접적인 의미를 나타낸 화가의 단순함마저 숭고하게 다가온다.
이에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것에 놀람과 당황하면서도 숭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화가는 이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감정을 마리아의 두 손에 담아 표현해냈다. 천사 가브리엘은 엄숙하면서도 미소를 띤 크리스탈 홀을 쥐고 있는 성스러운 분위기이다.
인물들이 서 있는 바닥면에는 모세, 십계명, 예수의 수난 등을 다룬 삽화들이 그려져 있다. 가브리엘과 마리아는 바닥과 벽의 둥근 장식에 있는 구양성서의 삽화로 둘러 쌓여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것이 예수의 삶에 일어난 여러 사건에 대한 예고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얀 반 에이크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깊이있는 의미를 넣어 아름다운 화폭을 완성해낸다. 세로로 긴 화폭에 광선은 매우 또렷이 전체적인 그림을 비추고 있다. 가브리엘과 마리아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며 가브리엘의 크리스탈 홀과 옷의 보석 등에서 빛이 반사되는 표현은 그 깊이감까지 느끼게 한다. 또한 가브리엘의 천사 날개는 뛰어난 칼라스킴의 표현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오크판자에 그려졌는데 최근 초벌질 위에 그려진 밑그림을 발견했다고 한다. 다큐의 한 전문가가 '반 에이크는 우리가 이 그림을 보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라는 말이 참 오묘했다. 현대 과학의 발달로 우리는 오백년도 더 된 화가가 명작을 그려내는데 고민의 흔적과 과정을 읽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밑그림에서는 백합도, 비둘기도 없었다. 또한, 화가가 가브리엘의 손가락 모양은 작품처럼 위를 향하고 있지 않다. 그가 가브리엘의 손동작과 눈동자의 표현 등에서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밑그림이 빛과 명암의 뉘앙스를 모두 느낄 수 있을만큼 정교하고 꼼꼼하게 그려져있다는 것이다. 이런 꼼꼼하고 치밀한 스케치와 뛰어난 채색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해냈다.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단연 화려한 대천사의 사제복과 마리아의 푸른 의복일 것이다. 그는 값비싼 안료를 정교하고 복잡한 혼합절차를 통해 마리아의 청색옷감을 표현해냈다.(여기서도 화가로서 만족할만한 후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브리엘의 정교하고 화려한 사제복은 실재의 것을 보고 그려낸 것 같은 의심을 하게 만든다.
이것은 실재의 직물에 대한 연구와 관찰, 그리고 그의 상상이 결합되어 섬세하게 그려진 것이다. 사제복의 그려진 큰 패랭이 꽃은 신의 꽃이라고 불리며 그리스도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숭고한 장면의 포인트인 마리아에게 내려지는 신의 빛 줄기는 순금으로 칠해져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수태고지는 러시아로 넘어가게 되고 에르미타주에 머무른다. 블라디보스톡의 기후는 나무를 뒤틀리게 만들고 그림을 파괴할 것이기에 오크판자를 떼어 캔버스에 전사하는 방식의 복원이 된다. 섬세하지 못한 이 복원 작업은 작품 고유의 광택을 잃게 하고 다리미로 압력을 가해 캔버스에 전사해야 했던 탓에 표면에 캔버스의 질감이 박히게 만들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이 작품은 당시 미국의 재무장관이었던 앤드류 멜론의 수집품에 속하게 되고 오늘날 소장처인 워싱턴국립미술관에 걸리게 된다. 당시 에르미타주의 큐레이터는 이 작품을 지키고 싶었지만 정부의 예술품에 대한 가치는 높지 않았다. 작품을 건내라는 정부의 문서에서 '반 다이크'라는 오타를 발견한 큐레이터는 이를 트집잡아 거절하지만 재발신을 해온 정부의 문서로 결국 수태고지는 조용히 미술관에서 사라져 멜론의 수집품 속에 들어간다.
멜론은 좋지 않은 경제상황과 정치적 이유로 미술품에 대한 수집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이 탈세혐의로 그를 기소하고 이 과정에서 수태고지와 그의 수집품들이 모두 드러난다. 이 공판에서 앤드류 멜론은 워싱턴 미술관 개관 계획을 밝히고 수집한 미술품들은 모두 개관과 함께 기증되었다. 미술관 개관의 기폭제였던 수태고지는 지금까지 워싱턴국립미술관에 걸려 사랑을 받고 있다.
The Annunciation (detail), about 1434~36, Oil on canvas transferred from panel, 93 X 37 cm.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The Annunciation Detail of Virgin, 1435, Oil on canvas
93 x 37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