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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6
#성육신
예수님의 무죄하심은 마리아의 처녀성과는 무관하다.남자의 씨에 원죄가 있듯이,여자의 씨에도 원죄가 있다.예수님의 잉태는 마리아의 씨를 취한것이 아니라,그녀의 몸을 빌리신 것이었다.왜냐하면 그분의 인성은 그전에도 하늘에 존재하셨기 때문이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시며 앏하와 오메가라고 하셨는데,어제와 앏하때는 인성없이 신성만 계셨었다고 하면 존재에 일관성이 깨질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도 성육신 전 영원전부터 계셨어야만 한다.
#여호수아 #Joshua 5:4-9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빠져나오던 당시에 그들의 신앙은 차마 신앙이라 하기에 매우 민망할 정도로 미숙한 초기 단계에 불과했다. 그들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서 믿고 따랐던 것이 아니라 단지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 내려진 재앙들을 보고서는 육적인 두려움에 휩싸여 경황없이 따라나왔던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로 갈라진 홍해를 지나가게 하셔서 홍해 물로 세례를 베푸시고 이스라엘의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시며 그들을 '군사'라고 칭하셨는데, 이는 그들에게 과분한 영예의 칭호를 주심과 더불어 그 칭호에 걸맞는 자격을 갖출 의무도 부여하신 것이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한 성도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도 같다. 중생한 지 하루밖에 안되었건 수십년을 믿어왔건 상관없이 모든 성도들은 공중권세 잡은 마귀들과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신령한 의무도 받았으므로 작은 고통에 엄살이나 앓는 소리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홍해 물로 세례를 베푸시고 남자들에게 할례를 베푸시고 여호와의 군사로 삼으셨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기대를 저버리고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함으로써 40년 동안 광야를 전전하다가 20세 이상은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아야 하는 징벌을 받게 되었다. 이는 그들이 아무리 외적으로 물세례와 할례를 받았어도 내적으로 변화되어 장성하지 않으면 구원의 언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겉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자임을 표방한다 하더라도 거룩하고 경건한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들의 구원의 확신은 성경으로나 성령으로나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자기들만의 정신승리에 불과할 뿐임을 가르친다.
반면에 광야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손들은 홍해 물로 세례도 받지 못하였고 광야 길에서 할례도 받지 못한 채 40년 가까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할례 받지 못한 자'로 지내야만 했고 부모 세대처럼 여호와의 군사라는 칭호도 받지 못했지만 그들은 부모 세대와 달리 여호와의 진정한 군사로 거듭났고 요단 강물로 세례를 받았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할례의 징표를 받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천적이 없는 사자처럼 담대하게 여리고가 뻔히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할례를 받는 믿음을 선보였다. 부모 세대는 믿음없이 세례와 할례를 받았었고 자녀 세대는 믿음으로 세례와 할례를 받은 것이었다. 부모 세대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것은 순종함이 없었다는 것이었고 자녀 세대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순종함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믿음은 성령의 열매로 증거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8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이스라엘이 당했던 애굽의 수치는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가 만연한 나라 애굽에서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세입자로서 살아야 했던 것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애굽인들에게서 가혹한 멸시와 핍박을 받아야 했던 것과, 4백여 년간의 애굽 생활에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 조차도 잊고 살 정도로 참된 신앙을 잃어버리고 애굽의 우상을 섬기며 살았다는 것과, 애굽의 가마 곁에서 몰래 먹던 고기와 마늘과 외와 부추 등의 음식물을 탐할 정도로 노예 근성에 찌들었던 것과, 그 노예 근성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40년 동안 끊임없이 모세를 대적하고 여호와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였던 것 등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그 애굽의 수치를 짊어지고 다닐 수 밖에 없었고 부모 세대들이 전부 죽은 후 자녀 세대들의 신앙이 거듭나고 할례를 받고 난 후에야 비로소 여호와께서는 그 수치의 멍에를 벗겨주신 것이었다. 중생하기 전 신자들은 공중권세 잡은 자와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때에는 자신들이 마귀와 죄의 노예라는 인식을 하지 못한채 마치 애굽 가마 곁의 고기에 만족했던 이스라엘처럼 세상에서 누리는 육적인 부귀영화에 만족하며 살아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성령으로 중생한 이후에야 비로소 신자들은 그 전까지 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차츰 인식하게 되고 과거에 무분별하게 처신했던 자신들의 행위들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되어 날마다 조금씩 벗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중생했다 하면서도 그 전의 육적인 생활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기 전이 좋았다며 그리워하는 자들은 애굽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다가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은 부모 세대 이스라엘과 같아서 의미없이 교회를 전전하다가 결국에는 교회를 저버리고 스스로 광야 같은 세상에서 엎드러져 구원을 영영 상실해버리게 된다. 하지만 그런 거짓 신자들을 반면교사 삼아서 애굽 같은 세상을 탐하지 않고 육의 할례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신앙의 고난을 감내하며 좁고 협착한 주님의 길을 충실히 가는 성도들은 삶의 마지막 날에 또는 주님 다시오시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세상에서의 수치를 벗어버리는 은혜를 얻게 된다.
#20221116
#정부
아무리 악하고 불의한,또는 신앙양심에 따라 그렇게 여겨지는 정부라 하더라도 교회와 신도는 정부에 반하는 집회나 시위나 저주 비방 악담 조롱 등을 해서는 안된다.정부에 대한 교회와 신도들의 유일한 덕목은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모든 정부정책을 묵묵히 수행하고,성경에 반대되는 정책에는 신도 개인 또는 교회별로 성경의 원리에 따라 저항하는 것 뿐이다.
#벨기에신앙고백서 Article 1: The Only God / 유일하신 하나님
We all believe in our hearts and confess with our mouths that there is a single and simple spiritual being, whom we call God -- eternal, incomprehensible, invisible, unchangeable, infinite, almighty; completely wise, just, and good, and the overflowing source of all good.
우리 모두는 단일하시고 단순하신 영적 존재, 즉 우리가 하나님이라 부르는 분께서 이러하시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고 파악할 수 없고 보이지 않으시고 변하지 않으시고 무한하시며 전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선하시며 모든 선한 것들이 흘러 넘치는 근원이 되십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의 대상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이시므로,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에 대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내용에 대해서 비록 각자의 수준은 다를지라도 동일한 지식과 믿음과 고백을 해야한다.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체의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영혼을 각성시키셔서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담대히 고백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음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되고,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고 시인하며 몸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닮아가 장성한 의의 분량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단일하시다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으로서 오직 유일한 단 하나의 본질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단일하신 본질은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으로 구분되신다고 하더라도 셋으로 분할 또는 증식되는 것이 아니라 세 위격께서 한 본질을 신비한 방식으로 소유하신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분이신 절대자로서 이 하나님께 필적하는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악의 우두머리인 사탄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인 천사 중 하나에 불과한 자로서 처음에는 선하게 지음받았으나 스스로 타락한 존재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단순하시다는 것은, 여러 요소, 본질들로 섞이거나 나누이지 않으시고 한 본질이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으로 구분되시나 세 위격께서 서로 다른 본질을 가지고 합치신다거나 삼등분 된 본질을 하나로 합치신다거나 하신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순수하고 완전한 신적 본질을 신비한 방식으로 공유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것은 물질적인 요소가 없으시고 육체로는 감각할 수 없는 존재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처럼 순전한 영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며, 사람은 영이 혼 및 육체와 연합하는 방식의 존재로 지음받았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하는 영원하신 존재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시공간의 물질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우주의 기원과 그 이전을 알지 못하므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원성을 파악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의미로만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물질적인 관측을 총동원 하더라도 하나님을 관측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셋째 하늘의 천사들이라도 하나님의 영적 실체를 직접 볼 수는 없고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약간의 영광만을 볼 수 있다. 성도들은 성령께서 그들의 영을 특별하게 각성시켜주실 때에만 하늘의 천사들처럼 하나님의 약간의 영광만을 볼 수 있게 된다. 모세가 본 여호와의 등은 하나님의 영적 본질 자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육체의 등이었다.
하나님께서 불변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불변하시다는 것은, 영적 본질에 성장이나 성숙이나 감소나 쇠퇴 등이 없으시고 항상 동일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역이 불변하시다는 것은, 만물의 창조와 섭리하심을 창세 전 절대 불변하신 선택과 계획과 작정에 따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이루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제한된 인식으로는 마치 하나님의 섭리가 때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무한히 대응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해서 그 존재방식이 변경되신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그분의 인성이 성육신 때에 비로소 생성되셨다는 기존의 성육신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그분의 인성이 성육신 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존재하셨다고 하면 해결된다.
하나님께서 무한하시다고 하는 것은, 생명과 권세와 영광과 존귀와 능력 등이 영원하심만큼 끝이 없으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가 분명히 끝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류로서는 아직도 그 끝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제약없이 하고자 하시는 일들을 뜻하시고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혜와 공의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 등 사람이 바라마지않는 모든 선한 덕목들의 기원은 오로지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그러한 덕목들을 영의 양심에 조금 받아 누리는 것이다. 중생한 성도들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선한 덕목들을 공급받아 거룩해져 가고, 믿지 않는 자들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성도들을 보존하시기 위해 얼마간 그 선하신 덕목들을 부여하신다.
#20201116
#민수기 #Numbers 9:15-23
길을 안내한 구름(출 40:34-38)
15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20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21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22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23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성막은 이 땅에 계셨을 때의 예수 그리스도의 초라한 인성을 상징하며 그 위를 덮은 구름과 불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항상 임재하신 하나님, 특별히 성령 하나님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고 불과 성령으로 깨끗함을 입는다고 하심으로써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치 물이나 불로 정결하게 하시는 분이라 하시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성막을 덮은 구름과 불은 자연적으로나 인위적으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신적 현상일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오로지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진영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출애굽기에서는 구름과 불이 밤낮으로 교대로 생긴 것이 아니라 밤에는 구름 속에 불이 피어났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물과 불은 동시에 존재하지 못하는 자연적 속성에 따라서 설명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구름은 보통의 구름이 아니라 심지어 모세조차도 감히 함부로 뚫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여호와의 영광으로 충만한 그런 구름이었다. 아마도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목격한, 천둥번개가 난무하는 접근불가한 흑운과도 방불했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이 구름과 불에 물리적인 자연현상과 속성에 천착하여 낮에는 구름이 백성들 위에 덮여 더위에서 보호해주고 밤에는 불기둥이 광야의 밤추위에서 백성들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과연 그것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으며 우리에게 신앙의 유익을 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밤에 성막 위에 피어난 불은 구름 속에 있었던데다가 그 한 지점의 불로 2백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과 가축들과 짐들이 거하는 넓은 지역을 전부 따뜻하게 할 수 있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위와는 달리 추위는 백성들이 각자 불을 피워서 충분히 스스로 따뜻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여호와께서 그런 것까지 챙겨주실 필요는 없으셨다. 물론 낮에는 성막 위의 구름이 백성들 위에 덮였다고도 볼 수는 있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이 당시 모세에게 속한 광야의 백성들이 구름으로도 세례를 받았다고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광야의 살인적인 더위는 사람이 대처할 방안이 마땅하지 않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구름으로 강한 햇빛을 차단시켜주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이 구름에서 우리가 더욱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구름으로 인한 부수적이고 육적인 유익보다는 근본적이고도 신령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비록 성막 자체는 이스라엘 진영의 한 지점에 있었어도 그 위를 덮고 있는 구름으로써 백성들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불로써 그곳에 여호와삼마이신 하나님께서 계심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비록 어두운 밤에도 이정표처럼 환하게 타오르는 성막 위의 불을 보면서 두려움 없이 안도함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으로는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영원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 보좌 오른편으로 복귀해 계신다. 그러나 신성으로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기도할 때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형상으로 각자에게 임하신 것처럼 모든 성도들 각자를 성전으로 삼으셔서 그들 개개인의 영에 내주하셔서 하늘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신다. 또한 성막 위의 구름이 이스라엘 진영 전체를 덮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 위에 드리우셔서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시키시고 인도하신다.
구름과 불이라는 신비한 징표는 끝없이 이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광야에 머물렀던 40년 동안만 지속되었고,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이후에는 만나와 함께 사라졌다. 즉, 이 징표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 한시적으로만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들이 종료되었다고 해서 임마누엘과 여호와삼마의 하나님까지 그들에게서 떠나신 것은 절대로 아니다. 도리어 백성들의 눈에는 더이상 보이지 않더라도 여호와께서는 신령한 방식으로 항상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는 백성들은 자기들이 광야에서 받은 여호와의 율법대로 순종하는 일만 남았던 것이다. 이는 사도들 시대에 예수님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과 이적들이 오늘날까지 지속되지 않는 이유와도 같다. 사도들과 제자들이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형상으로 성령을 받고 많은 능력을 행하며 심지어 하늘의 주님을 보는 등의 놀라운 체험을 한 것은 교회의 터를 세우기 위한 한시적인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그 터가 잡힌 오늘날에는 아주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당시와 같은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그렇다고 이러한 성령의 사역이 완전히 중단되었다고 단정해서도 안된다.). 대신에 우리에게 주신 기록된 말씀인 성경의 원리를 따라서 역사하시기를 기대해야 한다. 아무리 내 마음이 여기에 더 머물고 싶더라도 성경이 떠나라 규정하고 성령께서 떠나라 감동을 주시면 주저없이 내 마음을 그곳에서 떠나야 한다. 반면에 내 마음이 더이상 머물고 싶지 않더라도 성경이 더 머물라 규정하고 성령께서 더 머물라 감동을 주시면 몇 년이 되건 간에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떠나야 할지 머물러야 할지에 대한 판단은 성경을 객관적 근거로, 성령을 주관적 근거로 삼아야 하는데, 혼자서는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믿을만한 목회자의 판단을 따르는 것이 필수적이다.
#최후심판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실때, 먼저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그다음에 살아있던 성도들이 들림받는다고 하였으니 분명 시간차가 있을것이다. 즉, 먼저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는 모습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목격할것이고 그 이후에는 살아있던 성도들이 죽음을 겪지않고 변화된 모습으로 하늘로 들림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죽음을 겪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복이라고도 할수 있다.그렇다면 들림받지 않고 남아있는 버려진 자들도 죽음을 겪지 않을까? 도리어 마지막날까지 믿지 않은 자들은 더 처절한 첫째 사망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버려진 자들에게 주어질 첫째 사망은 아마도 모든 형질이 불에 녹아 풀어 없어질 때 겪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주의 모든 물질을 녹이는 심판의 불이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벼랑 끝으로 몰리는 것처럼 서서히 도망칠수 없는 불길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야 극한의 공포를 맛볼수 있으니까.
#20191116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3장.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하와는 전 인류를 통틀어서 최고의 지성을 가졌었으나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먹은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인해 지성이 어두워져서 제대로 된 옷도 만들어 입지 못하고 고작 나뭇잎이나 얼기설기 엮어 간신히 몸을 가렸다.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어이없고 비참하며 초라해 보이셨을까. 피조물 중의 피조물로 그렇게 손수 귀하게 지으셨는데, 그렇게 바보 같은 모습으로 벌벌 떨며 앉아 있으니 얼마나 불쌍해 하셨을까 싶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그들을 괘씸해 하시면서도 그들이 초라한 나뭇잎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하셔서 친히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다. 이는 우리의 죄를 징계하시다가도 우리의 비참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같이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고도 뻔뻔한 자들에게는 긍휼없이 오로지 공의의 심판만을 베푸신다. 따라서 성도라면 누구든지 죄를 지었을 때 죄책감과 부끄러움과 후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이 필수다.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느 짐승을 잡은 가죽으로 만드셨는지 아니면 당신의 영광스러운 살을 일부 떼어 지으셨는지는 모르겠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직 에덴에서 쫓겨나기 전이므로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 때문에 다른 동물이 희생되어야 했을지는 의문이어서 후자가 더 유력해 보인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의 살을 잘라내어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주셨을 경우, 뱀에게 저주하신 바와 같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수게 되는 때에 당신께서 친히 아담과 같이 되어 육신의 생명을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실 것에 대한 언약의 증표라고 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성과 인성의 형상을 따라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고 그들이 범죄하자 당신의 살을 떼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으며, 먼 훗날 죄인인 아담의 형상으로 당신의 인성을 극도로 낮추어 오시게 되셨다. 그리고 33년 정도 그 낮아지신 육체로 순종과 희생을 이루시고 인성의 영혼과 육체가 3일 동안 분리 됨을 경험 하셨다가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창세 전의 영광스러운 인성을 회복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