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法華經)》 약왕보살본사품에 따르면, 약왕보살은 부처님의 사리탑에 자신의 몸과 팔을 불살라 공양(소비공양)을 올릴 정도로 지극 정성으로 사리탑을 예배한 보살이다. 탑을 향해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공양을 올리는 이 석상의 독특한 자세(공양상)가 이러한 법화경 속 약왕보살의 사리탑 공양 장면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을 고쳐주는 '부처(전각의 본존)'로서, 주로 왼손에 약단지(약병)를 들고 좌상이나 입상으로 독립하여 모셔진다 .약왕보살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사리를 수호하고 보살피며 중생을 치유하는 '보살(협시 또는 공양자)'로서, 탑을 향해 공양을 올리거나 부처님 옆에서 중생의 구원을 돕는 역할을 한다.
석탑 정밀 해체·보수 과정에서 석탑 기단부와 보살상이 앉아 있는 대좌(하대석)의 석재 재질, 조각 기법, 지대석의 연결 구조가 완벽히 일치함이 확인되었다. 즉, 보살상은 탑을 다 세운 뒤 나중에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1022년(고려 현종 13년) 석탑을 건립할 때 처음부터 석탑의 일부로서 함께 구상되고 조각된 것이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서 약왕보살이 부처님의 사리탑에 자신의 몸을 바쳐 극진히 공양했던 것처럼, 고려 왕실과 오대산 승려들은 거란 전쟁의 참화를 씻고 사리를 봉안한 탑(1022년 건립)을 향해 약왕보살이 영원히 공양을 올리는 형태를 석조 미술로 구현해 낸 것이다.
거란의 침입으로 도성이 잿더미가 되고 나주까지 먼 피난길을 떠나야 했던 청년 군주 현종, 그리고 초목처럼 짓밟히면서도 삶을 견뎌내야 했던 고려의 백성들. 전쟁이 끝난 직후 세워진 이 거대한 팔각석탑과 그 앞의 보살상은 단순한 돌조각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눈물과 피땀을 닦아주는 거대한 위로의 안식처였다.
다만 월정사와 신복사지의 보살좌상은 석탑 바로 앞에 오른쪽 무릎을 꿇은 자세(공양 자세)로 배치된 가장 완벽한 공양상인데, 한송사터 보살솨상 무릎을 꿇은 대신 한쪽 다리를 얹은 편안한 자세(유희좌/편좌)를 취하고 있어 양식과 조형미는 월정사·신복사상과 완벽히 동궤를 이루고 있다.
첫댓글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바로 앞에는 오른쪽 무릎을 꿇고 공양을 올리는 형상의 석조보살좌상(국보)이 놓여 있었다. 현재 진픔은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이며 탑 앞에는 복제품(리플리카)이 놓여있다.
탑과 보살상이 하나의 예배 세트를 이루는 독특한 구도로, 붓다의 사리를 모신 탑에 공양을 올리는 숭고한 신앙적 행위를 입체적으로 표현한 최고 수준의 석조 조각이다.
석조보살좌상의 정확한 존명은 약왕보살(藥王菩薩)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며, 학계 및 사찰에서는 석조약왕보살좌상으로 불린다.
《법화경(法華經)》 약왕보살본사품에 따르면, 약왕보살은 부처님의 사리탑에 자신의 몸과 팔을 불살라 공양(소비공양)을 올릴 정도로 지극 정성으로 사리탑을 예배한 보살이다. 탑을 향해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공양을 올리는 이 석상의 독특한 자세(공양상)가 이러한 법화경 속 약왕보살의 사리탑 공양 장면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성지라는 점에서 문수보살로 보거나, 중생의 병을 고쳐주는 약사여래/약왕보살 신앙과의 연관성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사리탑에 공양을 올리는 도상적(圖像的) 특징 때문에 학계에서는 약왕보살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약왕보살(藥王菩薩, Bhaisajyarāja)은 불교에서 중생의 신체적 질병은 물론 마음의 번뇌와 무명(無明)이라는 근본적 병까지 고쳐주는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치료·치유의 보살이다.
《법화경(法華經)》 '약왕보살본사품'은 약왕보살의 신앙적 정체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경전이다. 전생에 '일체중생喜見보살'이었을 때, 부처님과 법화경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몸에 향유를 바르고 불을 붙여 공양을 올리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을 바쳤다.
소신공양 이후 다시 태어나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에 자신의 팔을 불살라 공양을 올렸는데, 이 신심에 감동한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팔이 다시 원상복구되었다고 한다.
보통 아미타불이나 석가모니불의 좌우 협시보살로 등장할 때 동생인 약상보살(藥上菩薩)과 쌍을 이루어 함께 나타난다.
약왕보살의 도상적 특징은 손에 약병(藥壺), 약풀(藥草), 혹은 불사리를 담은 은혜의 용기나 연꽃같은 지물(持物)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주로 묘사된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처럼 사리탑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탑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는 《법화경》 속 약왕보살의 사리탑 공양 장면을 가장 완벽하게 형상화한 독특한 한국적 도상이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을 고쳐주는 '부처(전각의 본존)'로서, 주로 왼손에 약단지(약병)를 들고 좌상이나 입상으로 독립하여 모셔진다 .약왕보살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사리를 수호하고 보살피며 중생을 치유하는 '보살(협시 또는 공양자)'로서, 탑을 향해 공양을 올리거나 부처님 옆에서 중생의 구원을 돕는 역할을 한다.
약왕보살은 단순한 의료의 의인화를 넘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진리를 위해 바치는 극진한 헌신(소신공양)과 치유를 동시에 상징하는 보살이다.
보살좌상을 팔각구층석탑과 함께 고려 현종 13년(1022년)경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022년은 고려가 거란의 침입(3차 거란 전쟁)을 물리치고 국가적 안정을 되찾아가던 시기이다. 이에 따라 고려 왕실과 오대산 불교 세력이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평화를 기원하며 대대적으로 사찰을 중창하고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을 세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거란과의 혹독한 전쟁(1018~1019년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치러낸 직후, 국가의 안녕과 전쟁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고려 왕실과 오대산의 고승(대덕)들이 주도하여 탑을 세우고 약왕보살을 안치했음을 보여준다.
약왕보살의 제작배경도 같은 맥락으로 석탑과 완전한 한 쌍(세트)으로 제작되었다.
석탑 정밀 해체·보수 과정에서 석탑 기단부와 보살상이 앉아 있는 대좌(하대석)의 석재 재질, 조각 기법, 지대석의 연결 구조가 완벽히 일치함이 확인되었다. 즉, 보살상은 탑을 다 세운 뒤 나중에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1022년(고려 현종 13년) 석탑을 건립할 때 처음부터 석탑의 일부로서 함께 구상되고 조각된 것이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서 약왕보살이 부처님의 사리탑에 자신의 몸을 바쳐 극진히 공양했던 것처럼, 고려 왕실과 오대산 승려들은 거란 전쟁의 참화를 씻고 사리를 봉안한 탑(1022년 건립)을 향해 약왕보살이 영원히 공양을 올리는 형태를 석조 미술로 구현해 낸 것이다.
참혹했던 2·3차 거란 전쟁 직후였던 만큼, 중생의 병과 고통을 고쳐주는 약왕보살의 치유 상징성은 전쟁으로 상처받은 고려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데 가장 절실했던 시대적 염원과도 일치한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약왕보살상은 현종 대 고려인들이 시련을 이겨내고 올린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맹세이자 하나의 완벽한 불교 미술 작품인 셈이다.
힘든 세월을 견뎌낸 현종과 고러인들이 이 탑과 보살상을 세우고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 같다!
거란의 침입으로 도성이 잿더미가 되고 나주까지 먼 피난길을 떠나야 했던 청년 군주 현종, 그리고 초목처럼 짓밟히면서도 삶을 견뎌내야 했던 고려의 백성들. 전쟁이 끝난 직후 세워진 이 거대한 팔각석탑과 그 앞의 보살상은 단순한 돌조각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눈물과 피땀을 닦아주는 거대한 위로의 안식처였다.
탑 앞에 몸을 숙이고 손을 모은 약왕보살의 모습은, 곧 "이제는 참혹한 전쟁 없이 나라와 가족이 평안하기를" 간절히 빌었던 현종과 고려 백성들 자신의 모습이었다.
자신을 불살라 공양을 올리고 마침내 치유를 얻은 약왕보살처럼, 전쟁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산하와 중생의 삶도 다시 피어나리라는 희망을 석탑과 보살상에 담았던 것이다.
강릉의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 역시 이 월정사 보살상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석탑 앞에 무릎을 꿇고 있어, 고려 시대 강원도 영동 지역에서 크게 유행했던 '탑 - 약왕보살 공양상' 배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머리에 높다란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으며, 통통한 뺨과 살포시 머금은 미소, 화려한 장신구 표현이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과 대단히 유사하다.
화강암이 주를 이루는 한국 석조각에서 드물게 부드러운 대리석(또는 백색 사암계 석재)으로 조각되어, 피부와 옷주름의 표현이 매우 유연하고 우아하다.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역시 월정사·신복사지 보살상과 동일한 '고려 전기 강원도 영동 지역의 석조 공양보살상 계통'에 속한다.
한송사지 보살상 역시 사찰의 중심에 위치한 불탑이나 본존불을 향해 공양을 올리는 도상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월정사와 신복사지의 보살좌상은 석탑 바로 앞에 오른쪽 무릎을 꿇은 자세(공양 자세)로 배치된 가장 완벽한 공양상인데, 한송사터 보살솨상 무릎을 꿇은 대신 한쪽 다리를 얹은 편안한 자세(유희좌/편좌)를 취하고 있어 양식과 조형미는 월정사·신복사상과 완벽히 동궤를 이루고 있다.
고려 전기 오대산과 대관령 너머 강릉(명주)을 중심으로 한 영동 지역에서는 화엄·법화 신앙과 결합하여 탑 앞에 정교하고 우아한 석조보살상을 배치하는 독창적인 미술 유행했다. '영동 지역 석조보살상 파'를 형성한 것이다.
한송사지 보살상, 월정사 보살상, 신복사지 보살상은 모두 고려 시대 영동 지역 호족 및 왕실의 후원 속에서 탄생한 동일한 학파·계통의 명작들이다.
세 보살상은 모두 높은 원통형 보관, 살집이 있는 푸근한 얼굴, 섬세한 장신구 표현 등 동일한 양식적 계통을 공유하지만, 자세(도상)*와 석재, 상세 표현 기법에서 명확한 차이점을 가진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은 오른쪽 무릎은 땅에 대고 왼쪽 무릎은 세운 공양 자세(착좌/공양상)이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무엇인가(향로나 연꽃)를 쥐고 팔각구층석탑을 간절히 지그시 바라보는 구도이다.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도 월정사 보살상과 동일하게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세운 삼층석탑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공양을 올리는 자세이다. 월정사 상에 비해 몸을 앞으로 약간 더 숙여 한층 엎드린 듯한 신심을 표현했다.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은 두 보살상과 달리 한쪽 다리를 가부좌하고 다른 쪽 다리를 세우거나 편안하게 내린 유희좌(遊戲座) 내지 편좌(偏座) 형태이다. 탑에 직접 바짝 다가앉은 직전 공양상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자유롭고 풍류가 느껴지는 편안한 자세이다.
월정사 보살은 높고 웅장한 원통형 보관, 가슴에 화려한 영락(목걸이) 장식을 하였고, 원숙하고 깊은 삼매에 빠진 듯한 미소를 띠고 있다
신복사지 보살상은 보관의 두께감이 두텁고, 다소 투박하지만 향토적인 정감을 표현했다. 둥글둥글하고 정겨운 시골 어머니·보살 같은 인상이다.
한송사지 보살상은 보관과 귀걸이, 목걸이의 세공이 가장 정교하며 고려 귀족 미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미소가 매우 온화하고 현대적인 감각이 느껴질 정도로 세련된 얼굴이다.
위치 및 성격을 비교해 보면
월정사와 신복사지 보살상은 석탑과의 세트 구성이 완전하게 입증된 사례로 탑 바로 앞 기단부에 착석하여 '석탑(사리탑)에 공양을 올리는 약왕보살'의 도상을 극적으로 완성했다.
한송사지 보살상은 사찰 터의 본존불이나 석탑 앞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독립된 조각으로서의 완성도가 매우 높아 고려 왕실 및 강릉 지역 최고 호족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제작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 보살상은 모두 고려 전기 화엄·법화 신앙의 독창적 수용과 강원도 지역 석조 공양상 파의 성립을 입증하는 한국 미술사의 독보적인 유산들이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한송시지 석조보살좌상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