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26.土. 맑음
두 발로, 두 눈으로.
5층 계단참에서부터 빙글빙글 돌아가며 1층 계단참까지 내려왔다. 내려가는 계단 통로는 올라올 때나 똑 같은 길이일 텐데 훨씬 빠르게 느껴졌다. 열려있는 방화문 틈으로 1층 홀의 불빛이 들어왔다. 1층 홀로 들어섰더니 검은 점퍼를 입고 가슴께에 인식표를 달고 있는 경비원인 듯한 사십대 초반의 남자가 안내 데스크 옆에 서 있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방화문 입구에 서서 1층 홀 안을 구석구석 쳐다보고 있자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흘깃 쳐다보더니 말을 물어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네, 사람을 좀 만나려고요.”
“사람을 만나시려고요?”
“여기서 일 하시는 분을요.”
“네에, 그러세요. 그런데 어느 분을요?”
“글쎄, 위에서 소리가 나기에 올라가 봤더니 없네요.”
“어느 분인데요?”
“그게 저, 인테리어 시공하는 분이지요.”
현관 밖으로 나와 본관 건물 앞마당 주차장에 서서 내가 침대에 앉아 있었던 4층 병실을 눈대중으로 찾아보았다.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커튼이 올려져 있는 저 병실이었겠군. 하며 조금 전 일들을 생각을 해보았다. 흔들흔들 걸어서 본관 옆에 있는 응급실을 들여다보고 다시 앞마당으로 나오는데 1층 홀에서 만난 검은 점퍼 입은 경비원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저 말입니다. 인테리어 시공 하시는 분들이 요 앞 식당에서 점심 식사 중이랍니다.”
“아. 그래요. 참 친절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시계를 보았더니 오후 1시17분이었다. 따뜻한 햇살, 살랑거리는 바람이 걷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한전을 끼고 난 길을 걸어서 삼성역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지하철을 탈까 말까 몇 번 망설이다가 걷기로 했다. 선릉역과 역삼역을 지나고 강남역을 지나서 신사역까지 걸어갔다. 가는 도중에 영동시장에 잠깐 들려보았다. 재래식 시장이란 어디에 있든지 원래 제 나름대로의 운치를 지니고 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뭔지 어수선하고, 혼란스럽고, 북적거리고, 흥에 들뜬 분위기가 있어야 하는데 왠지 한두 가지 요소가 빠져 있는 듯해서 좀 싱겁기도 하고 허전하기까지 했다. 시장 안을 기웃거리며 겯는 동안 날로 살림이 줄어가는 천석꾼 네 담장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가슴이 조금씩 헛헛해져왔다. 그나마 복닥거리는 두어 곳을 둘러보고 큰 길로 돌아 나왔다. 한 블록을 더 걸어간 뒤 신사역 부근 버스 정류장에 서서 한 대씩 굴러들어오는 버스를 쳐다보다가 연신내라는 행선지가 보이는 버스에 올랐다. 서울의 지명地名 중에 있는 세검정이라는 이름처럼 ‘연신내’라는 이름은 언제 들어도 항상 느낌이 시원하고 좋았다. 한남대교를 건너서 남산터널을 뚫고 나와 종로와 서대문, 독립문을 거쳐 무악재, 녹번동, 불광동을 지나고 나면 연신내에 이르렀다.
가는 도중 버스 안에서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그림들이란 영락없이 낮잠에 취해 늘어진 고양이 콧수염 같은 한가한 봄날의 풍경들이었다. 차창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햇살에 왼쪽 낯바닥이 따끈거렸다. 갑자기 심심해져서 버스기사 양반 머리 위쪽에 붙어 있는 룸 밀러를 통해 내 얼굴을 쳐다보거나 뒤쪽에 앉아 있는 몇몇 무심한 표정들을 번갈아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사람에게는 왜 얼굴이 있을까? 얼굴에는 왜 표정이 있을까? 표정 속에는 왜 생각이 들어 있을까? 생각들이 왜 나에게는 언어로 전달이 되어올까? 그 언어들은 문장을 이루고, 단락을 이루어 일관된 한 단위 생각들의 모둠을 이룰까? 왜 그럴까? 왜지?
연신내 연서시장市場.
길 가로 늘어선 점포를 따라 북한산을 바라보면서 걷다가 점포가 거의 없어지는 곳에 이르러서 길을 건넌 뒤 다시 간선도로 쪽으로 돌아 나왔다. 그만그만한 점포들을 따라 길을 걷다보면 봄날에 유난히 빛나 보이는 것들이 주인을 기다리며 점포 앞 땅 바닥이나 손수레 위에 놓여 있었다. 노란 몽우리를 부풀리고 있는 작은 꽃이 담긴 빨간 화분, 하얀 엿판 위에 누른 깨와 까만 콩이 들러붙어 있는 길쭉한 엿가락, 아이들 고추처럼 생겨먹은 갈색 기름기 도는 번데기, 작은 가마솥에서 막 볶아져 나와 고소한 빛을 뿌리며 사발에 담겨있는 땅콩, 임자만 잘 만나면 꽤나 귀염을 받으며 쓰일 듯한 하얀 사기그릇들, 5000원이란 가격표가 붙어 있는 환불 안 됨인 푸른 추리닝 한 벌, 방사능 피해가 전혀 없어 보이는 잘 말린 동해산 오징어와 흰 소금, 입기만 하면 어떤 여인女人이든 곱게 보일 것 같은 연두색 등산복, 그리고 싱싱한 봄나물들이 선명한 봄날의 풍경風景을 제각각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보면 보도 위로 천막이 쳐져있고, 알전구가 여기저기 매달려있는 연서시장 입구를 지나게 되었다. 바깥쪽에 복닥복닥 붙어 있는 가게들도 구경거리가 되지만 낡은 단층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군침 흘리게 하는 진짜 구경거리가 숨어 있었다. 두어 평쯤 될 만한 사통팔달 오픈 형 식당이 수십 개 모여 있어서 웬만한 미식가美食家나 대식가大食家도 충분히 만족시켜줄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 그곳에는 이른 북한산 등산을 마치고 내려온 일행들의 얼큰한 뒤풀이, 이른 귀가 길에 사무실 동료들과 딱 한 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꼼장어에 막걸리 한 사발 생각이 간절한 늙수레한 아저씨들, 소문을 듣고 일부러 떼 지어 무리지어 찾아 온 자칭 타칭自稱他稱 미식가들로 인해 영동시장에서는 사라져버린 흥겨움과 북적임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사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앉지도 않은 채 서거나 걸어 다니면서 연서시장市場 안의 풍광風光들을 구경하고 돌아다녔다. 누구도 그런 나에게 눈치를 주지도, 탓하지도, 시비를 걸지도 않았다. 그 북적거리는 냄새와 유혹하는 색과 맛깔난 소리만큼 내 오감五感들은 자유롭고 나른하도록 볼거리와 먹을거리 사이를 훌훌 날아다녔다.
(- 연신내 연서시장市場. -)
첫댓글 그랬군요~저는 오늘 무슨 연유로 연서시장 안에 있는 순대국집에서 점심을 대신 했답니다~맛이 좋았어요~산행후에 가끔 들렸던 곳이었는데,..변합없이 정겨운 풍경들 구경 하고 왔지요.
오래된 전통 시장이 주는 편안함은 우리 서민들의 삶이 녹아 있는 공간이기때문에 더 친근감이 드는 것 같습니다.
청계천답사때 점심 먹었던 광장시장이 생각납니다. 구경만 해도 즐겁고 기분 좋아 지는 곳이었어요. 감사합니다. *^^*
김울림님 덕분에 연신내 연서시장이 훤하게 다가오네요....
471번버스타고 오셨군요~ 연신내. 바로 저희 동네랍니다~요즘 긴울림님의 예전글들을 조금씩 찾아읽고 있어요..
어느 글이나 예사롭지않은 시선과 따뜻한 느낌을 나눠주심에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저랑 취미가 비슷하셔요..저도 소싯적부터 어디론가 훌쩍 버스타고 모르는 동네를 돌아다니는 그런 요상한 취미가 있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