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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보이지 않는 전쟁
전쟁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다.
전면전, 전술전 그리고 육탄전.
그러나 난 이런 전쟁을 해 본 적이 없다. 남자들이 몇 시간이고 앉아서 한다는 그 흔한 스타크레프트같은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은 할 줄도 모른다.
강현준을 타깃으로 놓고 나서도 난 그를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내 나이 24살,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먼저 취했다. 우리 반의 담임이며 학생주임이기도 한 국어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는 젊고 지식인이며 참 ...공정하게 생긴 사람이다.
“전 강현준이 학생회장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지?”
“절 괴롭힙니다.”
“현준이가 왜 널 괴롭힌다고 생각하지?”
“..그건...아마 재미를 위해서?”
“왜 현준이가 재미를 위해서 널 괴롭힌다고 생각하지?”
“...아마도 걔 인간성이 나빠서?”
“현준이 인간성이 나쁘다는 증거가 있니?”
“절 괴롭히니까요.”
“현준이가 왜 널 괴롭힌다고 생각하지?”
도저히 대화가 되지 않았다.
투덜대며 교무실을 나와서 난 기숙사 사감선생을 찾아갔다.
“방을 바꾸고 싶습니다. 모노와 한 방을 쓰는 건 좋지만 현준이와 한 방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왜?”
“현준이는 보기와는 다르게 인격적으로 성숙한 아이가 아닙니다. 전 그런 아이와 같이 방 못쓰겠습니다.”
사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현준이 같은 애랑 방을 못 쓰면 이 학교에서 네가 같이 방 쓸 수 있는 학생은 하나도 없어. 빨리 네 방으로 가!!!”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도움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나 혼자 부딪쳐 보는 수밖에...
학교에서는 피했지만 기숙사 방에서 현준의 얼굴을 보는 것이 적잖이 불편했다. 모노는 책속에 머리를 박았고 난 머릿속으로 어떻게 하면 강현준에게 복수를 할까 궁리하고 있었다. 현준과 눈이 마주치면 아무렇지도 않고 미소를 날려주는 여유를 부렸지만 잠을 자는 그의 얼굴에다 주먹질을 하는 시늉이라도 실컷 해야 속이 풀렸다.
모노는 현준이 앞에서는 내게 말도 안 걸었지만 현준이가 없을 때 내가 모노를 데리고 이런 저런 충고를 늘어놓으면 꽤 듣는 척은 해주었다. 서둘러 모노를 변화시키고 싶어서 자꾸 모노에게 엄마처럼 누나처럼 잔소리를 해대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모노야, 운동을 좀 해보지 그러니?"
"모노야, 넌 좀 더 먹어야 돼."
"모노야,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보면 어떨까?"
"모노야, 우리 교회 같이 가자."
이런 식으로는 모노와 가까워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모노에게 난 이제 잘난 척하고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계집애같이 생긴 전학생이 돼버렸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모노를 이해하도록 애쓰며 모노와 가까워져야 했다. 하지만 우선 모노를 태권도장에 등록 시키는 것에는 성공을 했다. 물론 몇 가지 협박이 필요했지만...
태권도 관장은 모노를 보자마자 마치 뷔페를 먹으러 온 한 달 굶은 범이와 똑같은 눈빛을 보였다. 관장이 모노의 앞 뒤 위아래를 살피면서 말했다.
“이건 도전이야. 도전. 음...우리 도장에 불가능한 놈은 없다는 것을 내가 증명해 주겠어! 잘 왔어, 잘 왔어.”
남자 기숙사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지만 해도 이건 너무 했다. 방귀냄새 하나만으로 한 층을 전멸시킬 수 있는 아이도 있었고 방을 누가 토해놓은 것처럼 지저분하게 쓰는 아이들도 많았다. 난 남자아이들이 자면서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거기를 긁는 장면 같은 것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현준은 그나마 깔끔한 편이었지만 내 동생 모노는 이층침대위에서 끊임없이 뭔가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냄새나는 양말, 과자 봉지, 속옷, 책, 코 푼 휴지 등등. 처음엔 나도 말없이 그런 것들을 치워 주었다. 어쨌건 나는 모노의 누나였고 내 유전자에 있는 여성성은 그런 것들을 깔끔하게 치우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모노의 빨랫감을 바구니에 넣어주는 나를 보고 현준이 한마디 했다.
“모진이는 모노 엄마 같다?”
‘이 녀석 뭐라고 떠드는 거야?’
난 최대한 부드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가 얼른 사라졌다.
“설마 모노 팬티까지 빨아주는 건 아니겠지?”
“필요하다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 정도도 못해주겠어?”
내 대답에 모노가 마시던 음료수를 뱉어냈고 현준이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날 보았다. 난 얼른 덧붙였다.
“좋아..한다는 건 우정을 말하는 거야. 우린 닮았으니까 서로 공감대도 많고..하여튼 난 남자들의 우정을 소중하게 생각하거든.”
때 마침 싸이보그와 로보캅, 트랜스 포머가 현준을 찾아 왔다. 좀처럼 이 방에는 얼씬도 안하던 애들이었는데... 그들은 나와 모노는 쳐다보지도 않고 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12년 간 한국에 없었다고 해도 내 한국말은 완벽하다. 하지만 난 애들이 떠드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 귀에는 애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씹@#$%@#$%&@#$쩔#$@병@@@#찔@#졸%$붕@#@쎄#콱@@@좆*@#깡.”
마침내 애들 대화의 99%가 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싸이보그가 모노에게 말했다.
“모노! 가서 과자 좀 사와. 음료수도 알아서 적당히.”
‘모노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켜왔다는 말이지!!!’
내가 책상을 ‘꽝’ 치고 말했다.
“좀 나가줄래? 공부하는데 방해된다.”
모노가 내게 하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모노야, 잘 봐. 애들한텐 이렇게 당당하게 나가야 하는 거야.’
“시끄러워서 공부하는데 방해 된다고. TV룸에 가서 떠들면 되잖아.”
“이런 씨@#$@#”
그 뒷말은 듣지 못했다.
싸이보그가 주위에 있던 책을 던졌고 로보캅이 날라와서 내 멱살을 잡았기 때문이다. 후덜덜... 열아홉 남자고등학생들이 이런 거였나...이건 진짜 모노가 겁낼 만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모노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데 기죽은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깡패들과 너희가 다른 점이 뭔지 알아? 깡패들은 아무 때나 지들 내킬 때 맘대로 주먹질하지만 니들은 선생님들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치졸하게 이렇게 뒤에서만 주먹질한다는 거.”
싸이보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뭐야 우리가 깡패라는 거야?”
“아니, 깡패만도 못하다고.”
싸이보그의 주먹을 현준이가 막았다.
“너 말 잘한다.”
현준의 눈짓에 애들이 나를 풀어주었다.
“너같이 말로 이기려는 애들의 진심이 뭔지 내가 맞춰 볼까?”
“...?”
“아, 맞기 싫어. 아, 무서워. 때리지만 마.”
“그럼 니들처럼 주먹으로 해결하려는 애들의 진심은 이거야. ‘너 말이 맞아, 하지만 인정하기 싫어’.”
현준이 자못 부드럽게 말했다.
“김모진. 갑자기 왜 이렇게 까칠해? 요새 무슨 문제 있어? 사감선생님한테 방을 바꿔달라고 했다고 들었어.”
“...?”
“내가 불편하게 했나?”
“니들, 티오피한테 다 실망이야.”
“왜? 우리가 뭘 어쨌다고? 아, 욕하는 거 듣기 많이 거북했어?”
“그것 때문이 아냐.”
모노가 손톱을 물어뜯는 게 보였다.
‘걱정 마. 모노야. 네가 말한 건 얘기 안 해.’
“니들 진심을 알아. 특히 너 강현준. 겉으로는 학생회장으로서 모범적으로 굴지만 속으론 아주 배배 꼬인 애라는 거 다 알아.”
“나랑 얼마나 지냈다고 나에 대해서 그렇게 다 아는 척이지? 너무 성급한 판단과 선입견은 안 좋은 건데...”
현준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난 그래. 척 보면 알아."
“그러셔? 하긴 나도 너를 알 것 같다. 크라운에 처음 온 날의 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 그 희망에 가득 찬 표정을 말이야.”
“내가 뭘?”
“마치 성공을 보장하는 복권에라도 당첨된 양 희망에 가득 찬 그런 표정.”
비록 내 경우는 아니었지만 대다수의 이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 그런 미래에 대한 꿈을 품고 온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뭐가 잘못된 건지 난 모르겠는데?”
현준이 천천히 말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건...지들이 지옥에 있는 줄도 모르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 얼굴들이야.”
“지...옥이라고? 여기가?”
현준이 모노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해 봐. 모노야. 여기가 천국이냐, 지옥이냐?”
모노가 얼른 대답했다.
“지..지옥이지. 완전 지옥이지.”
현준이 애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모노한테 아무것도 시키지 마라. 모진이 획 돈다. 이 자식 모노를 아주 끔찍하게 생각하거든.”
학교에서 오후에 자원봉사활동을 떠났다. 당연하게도 학생회 멤버들인 티오피클럽아이들이 차량을 섭외하고 물품을 지원받았다. 학교 앞에 선 트럭들을 보고 내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자 모노가 한마디 했다.
"별..별것도 아냐."
"별것도 아니긴? 지금 우리 자원봉사 가는 거냐? 아니면 정부차원으로다가 북한에 구호물자 보내는 거냐?"
"저..기 저 과자는 과..과자회사 간부를 아버지로 둔 싸..싸이보그 덕분이고 저 옷들은 로보캅 부모님이 보내신 거, 저기 사..사..쌀은 트랜스포머 부모님이 보내신 거. 그러니까 별것도 아냐."
"아니지..모노야.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선 안 돼. 그들이라고 저런 거 무료로 내놓는 거 안 아깝겠니? 많아서 퍼주는 것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거야."
이런..또 말투가 누나가 설교하듯 나와 버렸다. 모노가 인상을 썼지만 안경만 추켜올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서귀포 시에 위치한 한 양로원이었다. 우린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시설 이곳저곳을 견학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들어선 장소는 화장터였다. 화장터까지 갖추어진 요양원에 사는 기분은 과연 어떤 것일까?
현준은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어주었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학생회 블로그에 실릴 기사를 위한 사진이었다. 다가가 그에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는 할머니 똥기저귀 갈라고 하면 기절할 애가 참..사진빨 하나는 잘 받는다."
"...비꼬지 마. 난 학생회장이고 때로는 얼굴마담 노릇할 필요도 있는 거야."
"그러셔? 명문대 진학용이 아니고?"
현준이 말없이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너 역시도 편견덩어리일 뿐인 거냐? 넌 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현준의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나의 편견이라...그럼 내가 현준을 오해하고 있다는 말인가?
드레곤은 뒷마당 텃밭에서 어떤 할아버지와 일을 하고 있었다. 텃밭에는 배추며 양파 등이 심어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잡초를 뽑으면서도 말을 쉬지 않고 있었고 드레곤은 열심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쑥이 많이 없어졌어. 전에는 쑥이 많았는데. 저기 저 민들레 저걸 뜯어서 된장에 싸먹으면 맛있어. 저기 저 동백에 진딧물이 너무 많아. 진딧물 죽이는 약을 사야 해. 저기 봐봐. 무궁화가 참 좋지? 근데 왜 저 바른 짝에 있는 건 꽃이 작을까?"
할아버지가 나까지 앉혀놓고 온갖 식물들에 대해서 끝도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자 나와 드레곤의 눈이 마주쳤다. 드레곤이 말했다.
"원래 이러셔."
할아버지가 드레곤의 말에 나를 보았다.
"왜 이런 얘기 듣기 싫어? 재밌지 않아?"
"아..예. 재..밌어요."
"젊은이는 좋겠어."
할아버지는 드레곤에겐 '승호학생'이라고 부르면서 내겐 '젊은이'라고 불렀다.
"네? 뭐가요? 할아버지."
"이렇게 친구도 있고."
"할아버진 친구 없으세요?"
"먼저 다 가버렸어. 그래도 여기 꽃들도 많고 텃밭도 있고 하니까 나은데..그래도 왜들 다 그렇게 먼저들 급하게 갔는지 몰라."
"..."
"젊은이!"
할아버지가 일어섰다.
"네?"
나와 드레곤도 덩달아 일어섰다.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셨다.
"이제 보니 자넨 젊은이고 나는 늙은이네."
난 할아버지의 유머에 예의상 웃어야 하는 건지 할아버지가 본인을 늙은이라고 표현했기에 예의상 웃지 않아야 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젊은이는 좋겠다. 젊어서... 아이고, 재밌게 살아. 세월 후딱 가."
할아버지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와 드레곤만 텃밭에 남았다. 불쑥 혼잣말이 나왔다.
"정말 이상해. 나이 들면 정말 꽃들이 나무들이 채소가 그렇게 좋아지나? 그냥 이름 없는 들꽃도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보시고 물도 주시고..."
"..그런 거 나도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의외였다. 남성호르몬이 넘쳐나는 이 또래의 남자 아이들도 그런 생각을 한다니...드레곤이 말했다.
"아마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가봐. 그러니까 미리 흙과 친해지는 준비를 한다고 해야 하나?"
돌아오는 버스 뒷좌석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누군가 과자봉지를 한 아이의 머리위에 던져서 시비가 붙었고 싸움을 말리던 아이들까지 합세했다. 그 소동을 지켜보던 내 뒤에 앉아있던 드레곤과 내가 눈이 마주쳤다.
"젊은이들...츳츳츳."
나의 말에 드레곤이 미소를 지었다. '두둥'하고 심장이 십이지장까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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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ㅋㅋㅋ 젊은이들 츳츳츳;; 모래가 상.대.적.으로 늙은이라서 그런가요?ㅋㅋㅋㅋ 애나님 소설은 항상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자정이 지나면 애나님 소설 또 보겠지요? 근데 댓글이랑 리얼리티랑 무슨 상관인가요?ㅠㅠ 우리 애나님 좀 많이 좀 많이 오시면 안될까요? 난 진짜 애나님 좋은데..`
지금 소설 제목을 바꾸면 안되나요? "마이 러브, 드레곤"이라고요.
아무래도 전 드레곤과 사랑에 빠진 것 같네요.ㅋㅋㅋ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도 사랑에 빠지고 싶어요 옆구리가 너무 시려서 올겨울 잘 보낼수있을지 모르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