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서초 예배당과 어두운 강남 예배당의 극적 대비…믿었던 목회자들에게 느낀 실망과 절망
목사의 박사 학위논문 표절 사태의 여진이 계속되던 2013년 11월 24일, 사랑의교회는 서초 예배당에 입당하며 성대한 이벤트를 치렀다
5.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사랑의교회 서초 예배당 본당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멋들어진 캘리그래피가 떴다. 본당 6500석을 가득 메운 교인들은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넓고 큰 무대에 전 연령대로 구성된 교인 100여 명이 빨간색 목도리를 두르고 올라와 있었고, 오 목사는 중심에 자리했다.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교인들과 함께 찬양을 부르는 그의 얼굴은 황홀감에 젖어 있었다. 사랑의교회는 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서초역 앞 신축 예배당으로 예배 장소를 옮겼다. 일주일 뒤 진행된 '입당 예배' 때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찬사가 쏟아졌다. 그야말로 성대한 이벤트였다.
오 목사 부임 후 사랑의교회가 교계와 사회의 비판을 받은 때가 몇 번 있었다. 2007년 이랜드 파업 때(이랜드 회장이 당시 사랑의교회 장로였다), 2008년 오 목사가 당시 이 대통령의 대운하 공약을 지지하는 칼럼을 썼을 때, 광우병 시위에 대해 "죽은 사람 하나 없는데"라고 폄하했을 때, 그리고 2009년 서초역 앞에 초대형 예배당을 신축하겠다고 발표했을 때다. 이런 일들이 오 목사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해도, 아니 오 목사의 실체를 조금씩 드러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예배당 신축'에 대한 생각은 교인들마다 분분했다. 현재 사랑의교회갱신공동체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때는 건축에 찬성했던 사람이 많았다. 강남 예배당 크기에 비해 교인이 너무 많고 시설이 노후해서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문학적 비용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대출을 받더라도 교회가 받느니 내가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서정식 집사도 그랬다. 그래서 건축 헌금도 힘에 지나게 했다. 부담스러운 금액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오 목사도 한창 "무임승차하지 말라"고 강조하던 때였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오 목사가 불법을 저지르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유혜경 씨(48)는 고 옥한흠 목사의 건축 헌금 독려 영상을 보고 "마음이 요동쳐" 헌금을 작정했다. 그 역시 자신에게 과한 액수를 헌금했다. 폐암을 앓고 있던 옥 목사가 세상을 떠나기 열 달 전 힘든 육신을 일으켜 찍은 영상이었다. 교인들의 마음은 크게 움직였다. 옥한흠 목사 또한 사랑의교회에 새 예배당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긍정했으나, 그의 사후 밝혀진 내용들을 보면 그가 결코 지금과 같은 예배당 건축을 찬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유혜경 씨를 비롯한 사랑의교회 교인들은 이를 알 수 없었다.
사랑의교회가 서초 예배당으로 이전하고 나서부터 갈등은 더 심해졌다. 마당 기도회를 하던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도저히 서초 예배당에 갈 수가 없었다. 새 예배당이 크게 지어졌다고 해서 오 목사의 거짓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늘 그랬듯 강남 예배당에 모였고 자연스럽게 마당에서 기도회를 시작했다. 오 목사 측은 마당 기도회를 적극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리모델링'이라는 명목으로 마당에 건축 폐기물을 잔뜩 쌓아 놔 기도회를 할 수 없게 했다. 교인들이 폐기물을 치우고 기도회를 계속하자, 이번에는 예배당 전체를 펜스로 두르고 입구에 강철판을 덧대 아예 출입할 수 없도록 용접해 버렸다. 교인들이 철판을 뚫고 들어가자 교회는 교인들에게 소송을 걸었다.
그해 성탄절 예배는 초창기부터 사랑의교회갱신공동체에 함께한 교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2013년 12월 25일 강남 예배당은 또다시 펜스와 합판, 용접으로 굳게 닫힌 상태였다. 교인들은 이를 하나씩 제거해 가며 어렵게 본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문을 사용할 수 없어 옆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종탑 건물에 있는 좁은 계단을 통해 한 사람씩 줄을 지어 한 발 한 발 지하 예배당으로 들어갈 때는 로마제국의 압제를 받아 지하에 굴을 파서 예배했던 '카타콤'을 떠올렸다. 예배는 몇 시간이나 지체됐지만 교인들은 자발적으로 찬양을 부르면서 기다렸다. 오목사 측은 전기도 난방도 모두 차단했다. 교인 2300여 명이 지하 본당에서 서로의 체온에 기대 휴대폰 불빛의 도움을 받아 예배를 드렸다.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화려한 서초 예배당과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강남 예배당의 대비는 극적이었다. 교인들은 예배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환경에서 평생 신앙생활 해 온 교인들에게 예배란 목사가 주재하고 준비된 공간에서 집전되는 것이었다. 항상 최상의, 최고의 것을 드려야 한다고 목사들에게 배워 왔다. 성탄절 예배라면 오케스트라 반주와 100명에 달하는 성가대원의 쩌렁쩌렁한 칸타타가 울려 퍼지는 게 당연한 환경에서 수십 년간 지내 왔다. 펜스와 합판을 뚫고 들어간 어둡고 추운 공간에는 준비된 것이 별로 없었다. 반주자의 손은 시렸고 피아노 소리는 처량했다.
2013년 12월 25일 사랑의교회 강남 예배당에서의 성탄 예배.
"너무너무 좋았어. 내 평생 잊을 수가 없어." 김근수 집사에게도 그때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 있다. 20여 년간 강남 한복판에 있는 대형 교회를 다니며 편하게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그 추위와 어둠 속의 성탄절 예배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예배 경험이었다.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성가대의 찬양도, 유명 목사의 설교도, 그 어떤 화려한 이벤트도 없었다. 김 집사는 그제야 예수님도 보잘것없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성탄절은 낮은 곳으로 오신 그분을 기억하는 날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예배를 마치고 사랑넷 인터넷 카페에 이렇게 썼다.
"요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씩 알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 고난을 친구 삼아 남은 생을 주님을 위해 살아 봅시다."(계속)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5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