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가 장가가는 것도 자기 욕심 채우려는 것이지, 처녀 욕심 채워주려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첫날 저녁부터 싸우고 일평생 싸웁니다. 서로 제 욕심만 채우려고 하니 아이들 여러 명 낳고 살아 봐도 개성이 안 맞고 욕심이 안 맞아서 싸우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가령 갑이란 남자가 을이란 여자를 사랑해서 연애를 한다면, 갑은 을에게 이런 요구를 합니다.
"너는 내 꺼야! 다른 사람하고는 이야기도 하지 마라. 쳐다보면 안돼. 꼭 나만 기다리고 있어" 사회 정의상 이렇게 말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마음의 요구는 그렇게 됩니다.
이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내 꺼니까 다른 여자하고 교제하면 안돼." 이런 식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점령입니다.
남의 생명의 자유라는 것은 손끝만큼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곧 도둑입니다.
자비를 가진 남자라면 장가를 가더라도 남이 데려가지 않는 아주 못생긴 처녀를 하나 얻어다가 다 맡기고, 호강시켜 줘야겠다. 하루 백 만원을 벌어서라도 다 맡기고, 잘 살든지 못 살든지 저 여자 뜻대로 하게 해야겠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언제나 상대를 존중하고 위해 주는 이런 생활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편 본위로만 하고 자기는 조금도 내세우지 않는 남자 앞에서 아무리 악녀라도 보살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여자 마음엔 그 남자뿐이고, 우리 남편이 제일이라는 생각만이 있을 것입니다.
남편이 보살로 보이고 부처로 보입니다. 그러면 서로 보살이 됩니다.
중생들은 언제나 조건부로 상대편을 사랑해 주려 하니, 상대도 '네가 하는 것만큼 사랑해 주겠다.' 그러는 것입니다.
'네가 나한테 부족하게 해준 만큼 나도 섭섭하게 해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내외간에 날마다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나쁜 심리로 남을 점령하려는 것이고 남을 구속하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비는 남을 해방하려는 마음이고,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입니다. 박애라고 하는 것도 절대의 사랑이 못되고 자기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안 믿는 사람하고 만나면 내외간이나 부자간에도 서로 삼팔선이 생깁니다. 자기를 전혀 잊어버린 사랑, 어떤 한계를 두지 않는 사랑,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주의(主義)와 맞지 않는 사람이나, 환경을 초월해서 상대방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인(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불교에서만 가능합니다.
불교에서는 기독교를 믿고 착한 일해도 천당 가고, 유교를 믿고 착한 일해도 천당 가고, 아무 것도 안 믿고 착한 일해도 천당 극락 간다는 인과설(因果說)에 윤리관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남녀간의 사랑, 부부간의 애정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가령 남편이 바람 피우고 하니 첫날 저녁부터 생과부가 되어 가지고 일생 동안을 지내는 사람이라도 남편을 나쁘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남편을 따라주어야 합니다.
밤에는 남편이 가는 대로 등불 들고 바래다주고 몇 십만원씩이라도 갖다 주면서 우리 남편 비위 좀 잘 맞추어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합니다.
우리 주인은 내 힘 가지고는 위안이 안되니, 당신이 좀 그렇게 해주면 내가 그 은혜를 갚겠다고 정성으로 부탁하면서 알지도 못하게 가만히 돈을 놓아두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태적인 자학생활이거나 히피족들의 경우에서와 같은 막살이식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진심으로 하는 참회생활이고 진심으로 남편을 행복하게 하려는 사랑으로 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 생에는 그러한 남편을 안 만난다는 것입니다. 빚을 다 갚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남편이 첩을 얻었을 때는 여자가 흔히 저주를 합니다.
"두 사람이 꼭 껴안고 누웠을 때 불이나 나서 타죽었으면…"
만일 여자가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면 복을 받겠습니까?
전생에 제가 나빠서 남편이 그렇게 하는 줄을 모르고, 다시 산 사람 둘이나 불에 타죽게 하는 죄를 지었으니 이런 여자는 죽어서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입니다. 낮이고 밤이고 24시간을 두 사람이 타죽는 생각만 할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질투의 불길이고 성내는 마음이고 어리석은 중생의 인과생활이기 때문에 죄악의 연속이 될 뿐입니다.
적어도 불자라면 이런 죄악의 불구덩이로 빠져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뉘우쳐야 하고 이런 업(業)의 고랑을 벗어나는 길을 갈 줄 알아야 합니다.
불교신앙이란 인과(因果)를 철저히 믿는 자세입니다. 삼라만상이 다 내 마음의 그림자고 내가 주동이 된 것이니 내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호강도 고생도 내가 다 지은 일이며, 부모나 남이 나를 호강도 고생도 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가운데 있는 복(福)을 남이 받을 수 없고, 내 마음이 죄지은 것을 누구를 줄 수도 없으므로, 제 복 제가 받고 제가 당한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나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둥이 여자를 만났다 해서, '이년 자동차에 치어서 죽지나 않나? 오늘 저녁에 당장 죽어 택시에 송장으로 실려왔으면!' 이렇게 생각하는 남자도 신세 망칩니다.
세세생생 그렇게 만나 가지고, 나중에 개미가 되어도 싸우고 병아리가 되어도 싸우고, 비둘기가 되어도 싸웁니다.
비둘기 암컷 수컷 둘이서 퍽 좋아하고 다정하지만, 그 놈도 길러보면 싸우는 놈이 있습니다. 비둘기 기르는 사람이 매일 모이를 주는데 한번은 모이를 다 주어도 안나 오는 놈이 있더랍니다. 이상해서 나중에 들어가 보니, 두 놈이 싸워서 털이란 털은 다 뜯어 없어지고, 알몸으로 며칠씩 우리에서 나오지도 않고 소리도 없이 서로 주둥이를 물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한 놈이 콩을 주워 먹으러 나가려 하니,
"콩이 다 무어냐? 네 입에 콩이 들어가게 할 줄 아느냐?" 하면서 놓아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인과응보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부인이 저녁마다 밖에 나가더라도 욕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못 나가게 절을 하여도 안되고, 달래도 안되고, 욕을 해도 안되고, 나중에는 때려주고 행패를 해도 안됩니다.
"전생에 네가 나를 배신하고 다른 사람하고만 좋아해서 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느냐?" 이런 원한이 골수에 박혀서 영원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리가 없어지면 못 나가겠지 하고 최후 수단으로 부인의 한쪽 다리를 끊어 놓는다 하더라도 안됩니다.
"다리를 끊어서 죽여봐라!" 하면서 한쪽 다리로 담을 넘어갑니다.
"내 마음에 쌓이고 쌓인 이 원한이 그렇게 쉽게 풀릴 줄 아느냐. 네 놈이 내 다리를 다 끊고 내 몸을 끊어봐라. 내가 네 놈을 좋아할 줄 아느냐?" 이렇게 마음먹어집니다.
이 원한을 푸는 방법은 오직 참회(懺悔)뿐입니다.
영혼은 이렇게 전생의 인연관계를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첫눈에 좋은 사람, 보기 싫은 사람을 다 압니다.
부인이 밤에 잘 나가더라도 어디로 가느냐고 등불을 들고 바래다주고 또 따라가서, "나의 힘과 재주로는 우리 마누라를 마음껏 즐겁게 해줄 수 없으니 제발 당신이 우리 마누라 비위를 좀 잘 맞추어 주시오."
이렇게 간청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참회를 해야 전생의 죄가 참회되고, 그래야 내생(來生)에는 그러한 여자를 만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하없는 영웅도 마누라한테는 꼼짝 못합니다.
백만 대병을 거느리는 대장이라도 부하를 물속 불속으로 들어가게 명령하는 것은 할 수 있고, 항우 같은 천하 장사를 단번에 때려눕힐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기운 없는 마누라에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고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일본 메이지(明治) 시대에 이또오(伊藤博文)가 일본군을 현대식으로 조직 한 뒤 동양을 집어먹으려고 군대를 훈련시킬 때입니다.
메이지가 사열을 나왔을 때입니다. 메이지가 사열을 나왔을 때 이또오가 한번 보라는 듯이 "앞으로 가!" 하고 구령(口令)을 내렸습니다. 십만 대병이 앞으로 나가다가 바닷가의 절벽에 다다랐습니다. 수천 명이
절벽 밑에 있는 바다로 떨어집니다. 뒤에 가는 사람은 앞의 사람이 절벽에 떨어져서 죽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앞으로 계속 나갑니다.
잘못하면 십만 대병이 다 죽을 판입니다. 메이지는 겁이 나서 그만하면 됐다고 이또오를 찬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군대라는 것은 이런 명령 계통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므로 그래야 싸움을 할 수 있고 조국을 지키고 국민을 보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또오도 자기 마누라한테는 꼼짝 못합니다.
군대는 내 명령 하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다 뛰어들어가는데 조그마한 마누라한테 가서는 꼼짝도 못하는 자기를 번민하던 서양의 어느 장군은 병사들을 모아 놓고,
"마누라가 자기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이 있거든 흰 기 밑에 모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빨간 기 밑으로 모여라." 하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다 빨간 기 밑으로 모이는데 못 생긴 병사 하나가 흰 기 밑으로 가서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마누라를 자기 명령에 복종하도록 만든 것은 정말로 오 천년을 통한 영웅 가운데 한 사람도 없지 않은가!
마누라한테는 할 수 없는데!
말이 많으니 말로도 어쩔 수 없고 때리면 고함을 지르고 발악을 해서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여인인데! 저 못난 녀석은 어떻게 여자를 굴복시켰을까?
장군은 기이하게 생각한 나머지 호기심을 잔뜩 가지고 흰 기 밑에 있던부하에게 쪽지를 하나 써서 보냈습니다.
오늘밤에 내가 한턱 낼 터이니 우리집으로 꼭 좀 오라는 내용입니다. 그날 저녁에 그 못생긴 병사는 대장 집으로 초대를 받아 저녁 식사와 차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 대장은 신중한 태도로 부하에게 물었습니다.
"마누라를 어떻게 하면 복종하게 할 수 있는가? 도대체 집에만 오면 마음이 불안해 죽겠네. 자네 알다시피 연병장에서야 온 나라가 내 세상이고, 천하가 내 세상 아닌가? 마누라를 마음대로 하는 묘법이 있으며 나한테 좀 가르쳐 주게. 그 은혜는 내가 잘 갚아 주겠네."
이렇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 부하는 방바닥에 엎드려 합장을 하고 나더니, "아까 제가 흰 기 밑으로 간 연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십년 전에 집을 떠나올 때 우리 마누라는 나의 손을 꼭잡고 '우리가 지금 아들딸도 없는데 죽으면 내가 큰일납니다. 당신이 전쟁이 끝날 때 안죽고 돌아와야 합니다. 당신 좀 재치가 있어야 돼요. 백병전이 벌어질 때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으로는 절대 가지 말고, 사람 없는 곳으로만 가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오늘도 만일 제가 사람 많이 모인 곳으로 갔다가 그것을 마누라가 알면 마누라한테 혼날까봐 그것이 두려워서 흰 기 밑으로 갔었던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장군은,
"그러면 그렇겠지, 넌들 별 수가 있겠느냐. 너는 오히려 한술 더 뜬 녀석이로구나!" 하고 웃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나웠던 부인의 마음을 항복 받고 현모양처로 만든 실화가 하나 있습니다.
경상도 현풍이라는 곳에는 곽씨가 많이 살고 있습니다. 이 현풍 곽씨의 시조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곽씨들은 현풍 고을 여기저기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종손(宗孫)집은 부자였는데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20년 전에 다 시집가고 장가가던 옛날이라서 처녀가 이십이 넘으면 노처녀라고 시집 못간다고 했고 총각도 20이 넘으면 노총각이라고 하던 때였습니다.
더군다나 이 종손집은 외아들이라서 그 부모들은 일찍 장가를 보내려고 서둘렀고, 딸 가진 사람들도 신랑집이 원체 부잣집인 데다 양반집 귀동자라고 하니 여기저기서 사위 보려고 야단들입니다.
모두 다 제각기 중매를 넣고는 졸라댔고, 신랑 부모도 손자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본인이 절대 장가 안간다고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들은 야단을 치고 달래고 했지만 아들이 끝내 말을 듣지 않아서 한해 두해 해를 거듭한 것이 아들의 나이 이십오세까지 되었습니다.아버지는 할 수 없이 아무도 없는 조용한 틈을 타서 아들을 불러놓고
장가를 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아들 대답은 의외로 이상했습니다.
"저는 장가가고 싶은 데가 한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를 말 안하고 자꾸 딴 데만 말하므로 그래서 장가를 안가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어디냐? 진작 애비한테 말을 했더라면 늙은 애비가 손자를 두서넛은 보았을 게 아니냐? 그게 누구냐?"
아버지는 또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자기 마음속에 있는 집 딸을 말하는데 들어보니까 그 여자는 어려서부터 몸이 크고 기운이 세어서 아이들을 때려주고, 거기다 바느질이나 밥 짓는 것도 못하고 글자 하나 모르는 망나니 처녀였습니다. 할 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일거일동이 형편없는데 또, 오줌은 꼭 서서 누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상놈들까지도 이 여자한테는 생각을 내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듣고 그만 정신을 잃다시피 했습니다.
"이제는 양반집 망하게 됐고 종가집 개망신하게 됐구나!"
이렇게 한탄했지만 아들은 기어코 그 처녀가 아니면 장가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또 물었습니다.
"네가 그곳으로 꼭 장가를 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아들의 대답하는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그 처녀가 소변을 서서 보는데, 이것은 아랫배와 하부(下部)를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애를 기르고 낳는 곳을 그렇게 조심스럽게 지니는 태도로 봐서 이 여자는 틀림없이 좋은 자식을 하나 낳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아버지가 가만히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고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서 날짜를 받아 가지고 청혼장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처녀로부터 내일 당장 식을 올리자는 기별이 왔습니다.
잔칫날이 되어 마당에 차일(遮日)을 치게 됐습니다.
그런데 새 색시가 밖에 나와서 차일을 보더니 이런 것은 다 걸리적거리니 집어치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차일도 못쳤습니다.
마을 처녀들이 와가지고 족두리 쓰고 연지곤지 찍고 신랑에게 절을 하라고 가르쳐 주니까,
"얼굴을 왜 가리냐? 내가 문둥이도 아닌데? 그것 다 필요 없는 거야. 내 얼굴 그대로 보이고 그냥 하지, 좋은 옷도 필요 없어."
이렇게 소리를 치고는 마당에 나와서,
"그런데 신랑 될 사람은 언제 떠났기에 아직도 안오는 거야!" 하면서 시집갈 처녀가 떠들어댑니다. 그리고 또 하는 말이, "그 남자가 나한테 장가온다고 제가 자청했으니까 내가 얼굴 보고 마음에 없으면 결혼 안하는 거야. 딱지 놓아야지!"
이렇게 떠들고 있을 때 신랑이 마당에 도착하여 가마에서 나왔습니다.그러자 색시가 신랑을 보고,
"그놈 똑똑히 잘 생겼다. 됐다!"
이렇게 떠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웃었고 색시 부모는 크게 놀랐습니다. 신랑에게 절을 하라니까, "나보다 키가 작아서 절할 수 없어."
내뱉듯 한 마디 하고는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좀 있다가 밖으로 다시 나와서 밥도 먹고 손님을 대접한다고 하면서 신부가 왔다갔다 분주하게 서둡니다. 신부는 해도 지기 전에 밤에는 자야하므로 손님들은 해지기 전에 그만 다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손님들은 할 수 없이 다 갔습니다.
어른이 침방을 정해 주기도 전에 일찌감치 신방에 들어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하고 살라고 왔지?"
신랑은 잘못 하다가는 얻어맞을 판이고 해서 대답도 잘 못하고 잠자코 어벙벙하게 밤을 지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는 색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 집사람이니 이제 당신집으로 갑시다."
이렇게 하여 신랑은 색시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왔습니다.
그러니 시아버지 시어머니도 큰 걱정입니다. 예의가 있는 양반집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나운 며느리가 들어와서 잘못 하다가는 며느리에게 얻어맞고 봉변을 당할 판입니다. 밥을 할 줄도 모르고 빨래나 바느질도 할 줄 모르고 재주라는 것은 서서 소변보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신랑은 그날부터 신부를 방에다가 앉혀놓고는 마당에서 자꾸만 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본 신부는 사람 망신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하면서 나와서 막 때립니다. 그래도 신랑은 절만 합니다.
변소에 가면 따라가서 절을 하고, 우물에 가면 우물까지 따라가서 절을 하고 만날 때마다 자꾸만 절을 합니다.
신부는 남의 집 딸을 데려다가 망신만 시킨다고 욕을 하고 야단입니다.그러거나 말거나 신랑은 절만 합니다.
1년을 이렇게 계속하고 나니 아무리 무지막지한 여자였지만 신랑의 진실한 정의에 감동이 됐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제는 절 좀 그만하시오. 남의 집 딸 데려다가 생과부 만들어 놓았지만, 내가 또 가만히 보니까 당신이 고자인 모양이지만, 당신의 절하는 정성을 봐서도 이제 다른 곳으로는 다시 시집가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절 좀 그만하시오."
이렇게 사정을 했습니다. 그래도 신랑은 계속해서 절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랑이 서당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부인과 마주치게 돼서 신랑은 여전히 절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는 이미 그 여자의 심경에는 변화가 왔을 때였습니다. 그 여자는 감격한 목소리로 신랑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 좀 그만 두십시오. 내 이제 당신이 나한테 절하는 뜻을 다 알았습니다.
지금부터 당신 시키는 대로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죽으라면 죽고 다 할 터이니 정말 절 좀 그만 하십시오."
이렇게 울면서 애원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때리고 욕하던 것이 너무나 양심적인 신랑의 정성에 못이겨 망나니 부인이 아주 지극한 참회를 하게 됐고, 마음도 열려서 영특하게까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님께 일일이 사죄하고 절을 하고는
"제가 이제부터 신랑을 잘 섬기고 잘 하겠사오니 안심하십시오."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그런 뒤부터는 이 며느리는 정말 훌륭한 효부(孝婦)가 되었습니다. 내외간에도 한방에 자게 되어서 어린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옛날 태교법(胎敎法)에 아이를 배면 남자와 동침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어디서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아기를 가진 뒤부터는 남편도 자기 방에 못 오게 하고는 태도도 일변했습니다. 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아서 부모들은 아주 좋아하고 남편도 기뻐했는데, 이 여자는 애기 낳느라고 심한 고통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그 뒤부터는 이 여자는 아이를 낳을 게 아니라는 생각으로 신랑을 방에
영영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낳은 아들 하나를 열심히 온 정력을 다해서 잘 길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낳은 아들이 나중에 영의정(領議政=首相)까지 했고 위대한 인물이 되어서 현풍 곽씨의 시조로까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시 신랑이 예상한 대로 그 여자는 남편보다는 자식을 더 소중히 여겼고 위대한 아들을 낳아서 곽씨 문중을 빛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사납고 거칠고 개차반이었던 처녀가 어떻게 그런 영웅 아들을 낳을 수가 있고 현모양처로 변화할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첫째 처녀 때의 그 여자는 남보다 거칠고 말괄량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여자가 남보다 특별히 많은 기운을 타고나서 그 기운을 발산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둘째 그 여자의 일거일동은 어디까지나 천진하고 순박 그대로일 뿐 악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거나 욕심과 시기, 질투, 모략, 간사 따위의 마음으로 꽉 찬 그런 여자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는 점,
셋째는 무엇보다도 아내를 위해 끝까지 자기 참회적인 태도를 취했을뿐 조금도 불평이나 화풀이를 하지 않은 남편의 지극한 정성이 그 여자의
마음속 깊이 양심을 감동시켰고, 성스러운 마음의 고동을 움직여주었다는 점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깡패였던 부인이라도 남자가 정성을 다해서 위해 주면
현모양처도 될 수 있고, 반대로 남편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훌륭한 부인의 내조가 있으면 반드시 훌륭한 청년이 된다는 교훈을 잘 배울 일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잘난 영웅은 있어도 아버지 잘난 성인이나 영웅은 없다' 고' 해서 옛날에는 남자 교육보다도 여자 교육을 더 엄격하게 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깨달아야 할 점이 많습니다.
어린이가 열 달 동안 뱃속에서 어머니 피를 그대로 닮아 버립니다.
그래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이 더 크게 됩니다.
또 출생한 뒤에도 어머니의 인간성 여하에 따라서 자녀의 교육이 크게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는 더욱더 그런 사회여서 아무리 약하고 배운 것이 없는 여성이라도 남자한테 안 지려고 합니다.
말 한 마디도 양보를 안하고 버팁니다. 이 마음이 바로 우리 가정을 파탄으로 이끌고 불행을 가져오는 원인입니다. 아들딸이 분리되는 원인입니다.
내외간의 싸움은 다 여자가 양보하면 해결됩니다.
여자가 절대 복종하면 남편도 마누라 때문에 절대 복종되어집니다.
어느 한쪽이 먼저 시작하면 됩니다. 마누라가 안지면 남자가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해서 집이 망하고 나라가 망하고, 나 하나 잘못해서 이 나라가 혼란하다는 그런 태도로 참회하고 겸양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복을 받습니다.
이런 태도로 부부간에도 참회하고, 양보하고, 봉사해 주고, 참으로 위해 줘야 이것이 자비이고, 진정한 애정이고 행복의 문입니다.
불교의 이런 자비 사상은 35억 인류에게까지 확대하여 35억을 나 혼자
살릴 수 있도록 나 혼자 일하자 하는 이런 정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공산당은 '너도 나도 일하고 일 안하는 사람 죽이자!' 이런 지침을 내세우면서 실제는 공산당원들이 일반인을 착취하고 있지만, 불교는 진실로 남을 위해서 일하자는 자비심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세계 35억이 사람마다 다같이 남을 살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세계는 지상 극락이 됩니다.
이렇게 남을 해치지 않고 서로 위해 주며 사는 세상이 극락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