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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워(255) - 조선통신사 옛길 일본기행(3)
9. 눈물이 핑 도는 교토문화탐방
4월 30일, 예보대로 비가 내리고 하루 종일 흐린 날씨다. 비오는 날은 걷기가 힘든데 문화탐방에는 지장이 없어 다행이다.
오전 9시. 숙소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임진왜란 때 희생된 선조들의 귀와 코를 묻었다는 귀 무덤(耳塚, 코 무덤(鼻塚)이라고도 한다.)을 찾았다. 조선 침략에 참가한 군사들이 전공(戰功)의 표시로 소금에 절여 가져왔다는 귀와 코를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한곳에 묻어 넋을 달랬다니 병 주고 약 준 셈인가, 무덤위에 세워진 5층 석탑이 1643년의 기록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노력이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한국참가자 일동이 묵념하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멘다. 선상규 회장은 묵념의 소감을 묻는 가나이 미키오 씨에게 한, 일간의 문제 이전에 인륜에 어긋나는 만행을 저지른 일이 가슴 아프다고 술회한다.
귀 무덤에서 가까운 거리에 1206년에 창건하였다는 임제종의 본산, 건인사(建仁寺)라는 사찰이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서래원(西來院)의 감로당(甘露堂)이라는 편액을 조선통신사 일행이 썼다고 전해진다. 재일동포 이광길 씨의 주선으로 닫혀 있는 문을 열고 더 나아가니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현판이 보이고 그 글자도 조선국의 학사 아무개의 낙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연유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막부시절 초기에 조선통신사의 일원이 이곳을 방문한 것은 사실이라고 그 안에 거주하는 스님이 말한다.
건인사 앞쪽으로 오래된 골목길이 이어진다. 기생들이 접대하는 고급요정들이 들어선 곳에서 지금은 점심시간에 대중음식을 팔기도 한다는 재일동포 나카니시 하루요 씨의 설명이다. 그런 골목을 지나는 것도 문화탐방의 한 부분이리라.
골목길을 나오니 어느덧 11시가 지났다. 오늘의 주요탐방코스는 재일동포 정조문 선생이 창립한 고려미술관 방문이다. 1918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나 여섯 살에 부모를 따라 일본에 건너온 정조문 선생은 37세 때 조선백자에 매료되어 전 재산을 조선에서 가져간 그림, 도자기, 공예품 수집에 투입, 1988년에 재단법인 고려미술관을 설립하고 이듬 해 타계하였다. 조국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고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한 선생은 '모든 사람들이 조국의 문화와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동포들이 조국의 평화통일에 대해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며 1,700여점의 소장품 전부를 기증하여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을 설립한 선각자다. 이번에 처음으로 걷기행사에 참여한 이광길 씨는 정조문 선생의 사위이고 아들 정희두 씨가 상무이사로, 외손녀 이수혜(이광길 씨의 딸)씨가 연구원으로 미술관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수혜 씨에게 미술관 운영이 어떠한지 물으니 매우 힘들고 애로가 많다고 말한다.
정조문 선생의 투철한 애국심과 헌신적인 수집노력으로 민간소장으로는 유례가 드문 귀중한 작품들이 완벽하게 정리 보관된 것을 보며 숙연한 마음이다. 일행의 방문을 맞아 소장하고 있는 조선통신사 행렬도를 특별히 공개하는 등 각별히 신경을 쓴 고려미술관에 크게 감사한다.(한국 측 참가자들을 위해 이광길 씨와 미술관 측이 점심까지 대접해주었다.)
조선일보는 4월 20일자에 정조문 선생과 그 아들이 펴낸 '정조문과 고려미술관'의 서평을 크게 소개하였는데 이를 덧붙인다.
"조선은 멸시하면서 왜 조선 백자는 동경하는가?" 이 질문에 평생을 바친 수집가
항아리가 50만 엔? 뭐가 그렇게 비쌉니까?
1955년 일본 교토(京都) 게이한산조(京阪三條)역 인근의 상점 '야나기(柳)'. 말간 백자 항아리에 사로잡힌 37세 재일 교포 청년은 호된 가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조선 백자니까요. 이렇게 아름다운 형태를 지닌 것은 좀처럼 없습니다." 장식 없이 흐르는 곡선, 매끄러운 순백의 피부에 매혹된 그는 결국 1년 기한의 월부(月賦)로 항아리를 손에 넣는다. 일본에 흩어져 있는 조선 문화재 1700여점을 모아 교토 시내에 '고려미술관'을 세운 정조문(鄭詔文·1918~1989)의 수집 이력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씨는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여섯 살에 고국을 떠났다.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좌절한 아버지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 교토로 건너갔다. 아홉 살에 소학교 4학년에 편입, 초등학교 3년이 정조문이 받은 학교 교육의 전부.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 대여섯이 그에게 돌을 던졌다. "조선 정벌이야!" 부모는 생계를 위해 베를 짰지만, 조선인이 만든 옷감은 '흠집 있는 물건' 취급을 받았다. 이를 악문 정조문은 서른 무렵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었다.
둥근 백자 항아리는 그의 인생 화두를 바꿨다. 조선인을 멸시하는 일본인이 조선의 도자기는 왜 그리 동경하는지 의아했다. 그는 결심한다. "일본 속 '조선'을 모아 동포들에게 조선의 자랑스러움을 보여주자." 정조문은 교토 일대 골동품 가게를 돌아다니며 한국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다. "보지 않고는 못 배기고, 보면 만지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했으며, 손에 넣지 못하면 병에 걸릴 정도로" 수집광이었다. 1988년에는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1700여점 전부를 헌납해 지하 1층, 지상 3층의 '고려미술관'이 탄생한다.
생전의 그는 한 번도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남북이 통일되는 그때 조국에 돌아갈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대신 문화재를 사 모으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풀었다. 정신적 동지였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현 고려미술관장은 "그의 수집병은 단순히 좋은 미술품이 탐나서가 아니라 일본이 빼앗아간 조국의 미술품을 되찾아야겠다는 집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증언한다. 해외 박물관 중에서 우리 유물만을 전시한 곳은 고려미술관뿐이다. 소장품은 모두 일본에서 개인이 사 모은 것들. 그 땀의 시간이 애처롭다.
귀한 문화재를 한 점 한 점 만나는 일화가 생생하다. 하얀 벽면의 수장고에서 녹청색(綠靑色) 통일신라 범종을 만나던 순간, 그는 쳐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1200년 전 비천(飛天)의 음색이 건물 안에 소용돌이치자 "바다 건너 신라까지 울리겠네" 하며 웃었다. 소뿔을 얇게 썰어 반듯하게 만든 화각 공예품, 형형한 눈빛의 호랑이가 그려진 민화의 의미까지 짚어낸다."
고급으로 차린 점심을 들고 일행들은 각기 취향대로 자유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선상규 회장과 한동기 선생과 나, 셋이서는 교토의 명소로 손꼽히는 청수사를 택했다. 몇 차례의 교토 방문에도 가보지 못하여 아쉬웠던 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더니 이름값에 걸맞게 품격과 운치를 갖춘 관광지답게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안내를 맡은 이광길 씨는 단풍철의 경관이 더 아름답다며 사찰의 이곳저곳을 빠뜨리지 않고 인도한다. 성스러운 물이라는 폭포수에 손을 씻고 물맛을 보며 감로수인 것을 새겼다. 장수를 염원하는 기원을 이 물 마심으로 가름하자.
청수사를 나오며 교토문화탐방의 화룡점청(畵龍点靑)이라 평하였는데 니조성(二條城, 막부의 장군 숙소)을 보고 온 김중석 씨는 그곳에서 만족을 느꼈다니 다른 이들도 각기 스스로 가본 것을 으뜸으로 여기리라. 충실한 문화와 아픈 역사를 가슴에 담은 기대이상의 교토문화탐방이 되어 기쁘다.
추신,
1. 저녁에 도쿄가지 동행하는 카마타 에츠코 씨와 나고야까지 가는 오키야스 사다코 씨가 합류하였다. 교토문화탐방 전날부터 시즈오카에서 달려와 통역과 안내로 수고한 나카니시 하루요 씨는 저녁 9시 20분에 시즈오카 행 심야버스로 떠난다. 5월 13일에 시즈오카에서 합류하기로.
2. 홍익대학에서 2년 간 공부했다는 고려미술관의 이수혜 씨에게 메일을 보냈다.
'이수혜 님,
낮에는 매우 감사하였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미술관 운영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조국의 문화와 명예를 빛내는 자부심으로 더욱 열심히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점심시간에 제가 쓴 책, '인생은 아름다워' 제3권(대학 교수 정년 후 매년 한 권씩 일상의 삶을 통하여 주변에서 발굴한 '아름다운 인생'을 탐색하는 에세이집)을 정희두 상무이사께 드렸는데 오늘 방문한 고려미술관 이야기도 그 소재가 될 것입니다.
2년 전에 조선통신사 걷기 행사 때 쓴 글을 첨부로 송부하니 참고하시기를.
고려미술관의 발전과 임직원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김태호 드림'
이에 대하여 답 메일이 왔다.
'김태호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저께는 우리 미술관을 방문해주셔서 반가웠습니다.
좋은 시간이 되셨는지요?
보내주신 자료는 잘 받아보았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미술관에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라며
좋은 하루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이수혜 올림'
10. 일본에서 제일 큰 호수가 있는 시가현(濨賀縣)으로 들어가다
5월 1일, 어느덧 신록이 우거지는 5월에 접어들었다. 전날 비가 온 뒤끝이어서인지 5월의 날씨치고는 꽤 쌀쌀하다.
아침 7시 15분에 대절버스로 그제 도착했던 경판3조역 앞의 천변으로 향하였다. 8시 넘어 12명의 1일 참가자를 포함하여 40여 명이 한데 모여 간단한 출발식을 가졌다. 선상규 회장은 인사말을 통하여 '1711년에 이곳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는 바로 앞에 보이는 다리의 철제 난간을 만져보며 일본의 건축기술을 칭찬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통신사의 일본방문은 서로 앞선 부문을 전해주고 전수받는 호혜적인 성신의 교류인 것을 바탕으로 21세기 조선통신사 옛길걷기가 한, 일간의 선린우호를 증진하는 계기가 되기'를 강조하였다. 대마도에서 합류한 오오타 호토시 씨는 출발행사에 참여한 후 작별을 고한다. 작년의 서울-목포-부산 걷기에도 참여한 분으로 70대 후반에도 가방을 옮기거나 깃발을 드는 일에 앞장서며 묵묵히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도쿄 시내를 가로질러 동쪽방향으로 접어드니 이틀간 평지를 걷던 때와 달리 꽤 가파른 고개를 넘는다. 고개 너머 길가에 가마니로 묶은 쌀 짐과 수레가 통과하는 길에 깐 암석덩이가 힘들게 수레들이 통과하는 옛길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재일동포 안정일 씨는 이곳에서 가까운 비아코(琵琶湖)라는 큰 호수근처에 사는데 호수인근의 농산물을 배로 실어 와서 다시 수레로 험한 고갯길을 넘어 교토로 운반하던 일들을 설명해준다.
안정일 씨는 두 차례나 한국걷기에 동행하여 친숙한 사이인데 이번 걷기행사에는 오늘부터 사흘간 참여한다. 작년 4월에 서울-목포-부산을 35일간 같이 걸으며 내가 쓴 기록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동행들에게 나눠주느라 수고를 많이 하였기에 만나자마자 감사의 말을 하였다.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걷는 모습을 어떻게 쓰는지 궁금하게 여기는 것 같아 번역을 자원하였는데 이를 읽은 일본인들의 반응이 좋아서 기뻤다고 답한다. 어떤 부분은 정확하게 이해가 안 되어서 대강의 뜻을 파악하여 옮겼는데 진심은 서로 통하는 모양이라고 덧붙인다.
첫 번째 고개를 넘으니 다시 더 길고 높은 고개가 나타난다. 그 고개를 경계로 교토부와 시가현의 행정관할구역이 달라진다. 고개 넘어 시가현의 첫 도시는 현청이 있는 오츠시(大津), 도로와 철길이 나란히 이어지는 고개 아래로 수많은 사찰과 신사들이 연달아 나타난다. 일본인의 종교와 문화를 알기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겠다. 휴식 차 들른 일련종의 본산 묘광사(妙光寺)에는 조선관련 회화가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를 본 한국인들은 중국풍의 그림 같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보살이 따라주는 차 한 잔 마시고 나왔다.
시내로 접어드니 끝이 보이지 않는 큰 호수가 나타난다. 둘레길이가 240여km로 시가현 면적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일본 제일의 큰 호수라고 한다. 조선통신사들이 이곳을 지나며 바다인지 강인지 구별이 안 된다고 하였다는 말이 실감난다. 낮 12시 경에 호수가 바라보이는 큰 건물 안의 휴식공간에서 취향대로 준비한 점심을 들며 40여 분 간 쉬었다. 바람이 세게 불고 기온이 낮아 밖에서 점심 먹기는 어려운 날씨다.
12시 40분에 오후 걷기에 나섰다. 호수 건너편으로 오늘 도착하는 목적지가 육안으로 가늠된다. 실제 걸으니 눈으로 본 것보다는 훨씬 먼 거리, 세 시간 가까이 걸었는데 길잡이는 아직 8km나 더 가야된다고 말한다. 목적지인 쿠다츠(草津)역으로 가는 길목에 예의 신사와 사찰이 수없이 나타나고 막바지에는 일본 전국을 연결하는 주요간선(교토에서 도쿄로 이어지는 동해도를 비롯하여 4,5개의 간선도로가 전국을 잇는다.)의 옛 숙박 장소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옛길은 차량들이 다니기에는 매우 좁은 길, 새 길이 나면서 오래된 길은 역사의 유물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목적지는 옛 숙소집결지의 상징인 다쿠츠 역사(驛舍) 광장, 오후 5시 가까이 도착하여 길을 안내한 나카야스 야스오 외 10여 명에게 참가증을 수여하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후 서둘러 숙소(DAISHO호텔)에서 제공한 차량에 올랐다. 역에서 5분 거리의 숙소에 여장을 풀고 오츠시에 있는 도래인역사관(到來人歷史館)이 초청하는 만찬장으로 향하였다. 옛 숙소거리에 있는 자운영(紫雲英)이라는 화식당(和食堂)에서 재일동포인 하병준 대표와 일본인관계자들이 먼 길 걸어온 일행들을 따뜻하게 맞아준다. 각기 맡은 분야에 바쁠 텐데 이처럼 각별한 친절과 성의가 감사하다. 옛 조선통신사처럼 좋은 대접을 받았으니 기운을 얻어 많이 익히고 열심히 걷자.
* 아사히신문 시즈오카 판에 조선통신사 한일우정걷기 행사 소식과 함께 일행 중 김중석 씨가 고등학생 때 펜팔을 맺은 시즈오카의 옛 인연을 찾는 기사가 실렸다. 일본인들은 결혼하면 성이 바뀌어 옛 이름으로는 수소문하기 어려울 터, 저녁만찬 때 관련기사를 접하며 일행 모두 실낱같은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박수로 성원하였다.
11.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체험한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
5월 2일, 어제에 이어 쌀쌀한 날씨다. 재일동포 안정일 씨에게 추운 날씨라고 말하니 이상기온이라며 내일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다른 날보다 약간 일찍 호텔을 나서 출발지인 쿠다츠역으로 향하였다.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서 있으니 일본인 신사가 걷기행사 홍보플래카드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가온다. 명함을 건네서 살피니 이 지역 출신 중의원의원이다. 한일의원연맹회원이며 민주당출신 4선의원인 마즈키 다이조 씨는 국회의원들이 이 행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표면에 나서지 못한다며 한, 일간의 교류와 우호를 증진하는 일에 힘을 보태겠다고 말한다.
오전 8시, 10여명의 1일 참가자를 포함하여 40여명이 한 자리에 모여 간단한 출발식을 가졌다. 코스리더인 이 지역 출신 동호인 안바이 다키시 씨가 오늘은 특별히 조선인가도를 걷게 된다고 말한 후 내 배낭에 새긴 선린우호(善隣友好)의 구호를 가리키며 조선인가도가 선린우호를 상징하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역에서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니 나까선도(中山道)라는 도로표지가 나타난다. 쿠다츠는 나카선도와 도카이도(東海道)가 갈라지는 옛 교통의 요지, 쿠다츠시에서 조금 걸어가니 리도(栗東)시에 들어서고 잠시 뒤 머리야마(守山)시로 접어든다. 출발 후 한 시간 지나 머리야마 사찰(守山寺)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이 사찰은 조선통신사가 머문 기록이 있는데 1748년 제10차 조선통신사 일행의 반사(막부의 장군에게 줄 선물담당)가 이 사찰에 주고 간 주전자 크기의 작은 단지를 보자기에 싸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단지를 주는 사연을 적은 종이쪽지와 함께.
머리야마시를 지나니 야수(野洲)시가 나타나고 이곳에 나카선도와 조선인가도의 분기점이 있다. 조선인가도는 막부의 장군과 조선통신사 일행만 통과할 수 있는 귀빈 전용도로인데 4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도로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차 한 대가 지날 정도의 좁은 도로 옆으로 들어선 주택들도 함께. 이 도로가 오늘 도착지인 오미하치만(近江八幡)을 거쳐 다음날 도착지인 히코네(彦根)까지 이어진다. 조선통신사 일행에게는 그 성격과 특징이 가장 잘 보존된 도로라고 하겠다.
11시 쯤 되니 다리에 힘이 빠지고 걷는 속도가 느려진다. 전날부터 1일 참가자로 걷는 고진삼 씨가 다가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고단함을 잊고 열심히 걷는다, 일행과 말을 하며 걸으면 시간도 빠르게 지나고 힘이 덜 든다.
낮 12시, 야수(野守)시와 오미하치만시를 경계 짓는 인보교(仁保橋)를 건넌다. 다리 중간의 난간에 조선인가도라는 글과 함께 조선통신사의 행렬도가 그려진 목판그림이 일행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오미하치만 시계(市界)로 들어선지 10분여에 점심을 먹을 식당에 이른다. 메뉴는 생선초밥에 메밀 사리를 더한 화식이다. 30분 만에 서둘러 점심을 먹고 오후 행로에 나섰다.
오미하치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쓰구(히데요시의 양자로 입적하여 관백의 직위를 물려받았으나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반역죄로 할복자살하라는 명을 받고 비명에 갔다.)가 시행한 도시정비정책으로 지금도 상당구간이 전통보존건물구역으로 지정되어 옛 도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구역 입구에 조선통신사의 3사(正使, 副使, 從事官)가 묵기도 하고 식사장소로도 사용한 혼간지 하치만(本願寺 八幡) 별원이 있다. 별원 안의 깊숙한 곳에 조선통신사 일행을 접대할 때 쓴 식기들이 진열되어 있고 그 위의 벽에는 제8회 통신사절단의 종사관이었던 이방언이 쓴 빛바랜 액자도 걸려 있다. 1년 남짓의 긴 여행으로 고향생각에 젖은 사절들의 심사를 풀어주기 위해 조선의 그릇을 본 딴 식기를 제작하여 깍듯하게 대접한 정황을 살필 수 있고 따뜻한 봄날에 떠나서 눈이 쌓인 겨울에 돌아가는 시상을 담은 하이쿠 형식의 시구(詩句)가 애틋하다.
문화해설사는 조선통신사가 거쳐 간 경로와 전통건물들을 두 시간여 계획으로 안내할 예정이었으나 한국 측 3사 일행이 한 시간 거리의 시가현 다카쯔기읍에 있는 아메모리 호슈(雨森芳洲, 한, 일간의 선린우호 정립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의 생가를 찾기 위해 전통건물보존구역 탐방을 서둘러 마치고 오후 3시에 오미하치만 시청에서 걷기행사를 마무리하였다.
재일동포 이광길 씨가 시가현에 있는 아메모리 호슈의 연고지를 그냥 지나치기 아쉽다며 친구의 차를 섭외하고 기념관 쪽에 방문교섭을 하여 이루어진 아메모리 호슈암(庵)의 탐방은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의 소중한 수확이었다. 오후 3시에 오미하치만 시청을 출발하여 다카즈키읍의 아메모리 호슈암에 도착하니 오후 4시 반이다. 여러 가지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기념관 내부를 둘러보며 88세의 긴 평생을 바쳐 한, 일간의 성신교린에 힘 쓴 300년 전의 선각자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였다. 4년 전에 대마도에 세워진 그의 현창비를 보고 적은 글을 덧붙인다.
'아메모리 호슈는 시가현 다카츠키 출신으로 당시의 저명한 학자인 기노시아 중앙의 문하생으로 수학 중에 대마도번(藩)에서 똑똑한 유학자(儒學者)를 천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선발되어 22세부터 88세까지 대마도에 살면서 조선과의 교류협력에 힘쓴 것을 기려서 1990년에 현창비를 세웠다. 그해 5월, 노태우 대통령이 방일하였을 때 아메모리 호슈의 공적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그를 더 유명하게 하였고 이를 기화로 그해 10월에 비석이 세워졌다. 그때 노태우 대통령은 아메모리 호슈의 외교철학이 '성신의 교린’이었다는 것을 지적, 서로 속이지 않고 싸우지 말고 진실로 교류하는 외교적 관계의 지속을 강조하였다. 재일동포인 정일남씨는 그의 후손이 연세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주최 측에서는 5월 4일경에 그의 고향인 시가현을 거쳐 간다고 부연 설명하였다.'
자료 중에는 그가 부산의 왜관에서 3년간 한국어를 공부하며 적은 책에 한자는 물론 한글표기도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해유록을 짓기도 한 신유한이 그와의 교분을 아쉬워하며 조선으로 떠날 때 정표로 준 두건도 남아 있다. 그를 전문적으로 다룬 다수의 연구서직도 진열되어 있고. 기념관의 책임자인 히라이 다케이코(平井 武彦) 관장은 아메모리 호슈연구 전문가로 책도 저술하고 그림도 그리며 강연에 나서는 둥 이 지역의 저명인사라고 두 번이나 그곳을 찾은 재일동포 안정일 씨가 일러준다.
탐방을 마치고 귀로에 오르니 오후 5시가 지났다. 저녁식사시간에 맞추기 빠듯한데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 갑작스런 체증에 갇힌다. 앞쪽에서 사고가 났는지 2km 이상 밀린 차들이 꿈쩍하지 않는다. 숙소에 도착하니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 가량 늦었지만 좀처럼 갖기 힘든 귀한 발걸음이 뜻 깊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선린우호를 심층적으로 체험한 좋은 날이다.
* 점심시간에 고등학교 때의 펜팔친구를 찾는 김중석 씨에게 낭보가 전해졌다. 지금도 시즈오카에 살고 있는 옛 친구가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는 소식이다. 조선통신사 행렬이 시즈오카를 지나게 되니 자연스럽게 해후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박수로 축하하였다.
12. 운치와 격조를 갖춘 고도(古都), 히코네(彦根)에 들어서다
5월 3일, 날씨가 좋아졌다. 오전 8시, 오미하치만(近江八幡) 시청사에서 출발식을 가졌다. 전날 걸었던 이들과 새로 참여한 멤버 등 10여명의 1일 참가자(그 중에는 며칠 전 할아버지와 함께 걸은 타나구치 와타루, 다케이 파파 & 마마로 불리는 중년부부, 재일동포 고진삼 씨와 이혜미자 씨도 들어 있다.)를 비롯하여 오늘도 40여명이 모였다. 출발인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틀이나 추웠는데 걷기에 좋은 날씨입니다. 처음으로 와본 시가현에서 일본 제일의 자랑스런 호수 비와코와 역사유적인 조선인가도를 함께 걷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미하치만에서 히코네까지 힘차게 행진합시다.'
조선인가도를 따라 한 시간 쯤 걸어가니 안도마치(安土町)에 들어선다. 안도에는 오다 노부나카(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상관이었던 전국시대의 장수)의 본거지인 안도성이 유명하다. 9시 40분에 성채는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는 성 입구에 도착하여 20여분 휴식을 취하였다. 시가현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 고진삼 씨는 일본의 역사와 근처의 지리를 잘 아는 분인데 안도가 지금은 쇠락하였지만 옛날에는 정치경제적으로 활발한 도시였다고 설명한다.
안도성을 지나 고개를 넘으니 히가시오미(東近江)시로 접어든다. 전형적인 농촌풍경에 모내기 준비가 한창인 들판을 보며 안정일 씨에게 농업이 채산성이 있느냐고 물으니 생업으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직장생활하면서 주말이나 휴일에 부업으로 하는 이들이 많다고 말한다. 마침 오늘(5월 3일)부터 4일간 연휴가 시작되어서 모내기가 시작되는 중이라는 부연설명과 함께.
11시 경에 도로변의 노도가와(能登川) 컴뮤니티센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30여분 걸어가니 애지천을 건너 히코네 시로 들어선다. 낮 12시에 예약된 식당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들고 12시 50분에 오후 걷기에 나섰다. 한 시간 쯤 걸어 길가의 텐만(天滿)신사에서 휴식을 취하자 다케이 부부가 찹쌀떡(댓잎으로 싼 모치처럼 생겼는데 당사자는 흐만쥬라고 설명한다.)과 얼음복숭아 등을 간식으로 내놓는다. 감사의 인사를 하며 명함을 청하니 '안녕하십니까. 우리들은 [다케이 파파 & 마마]라고 합니다. 한글은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만 한국을 좋아합니다. 잘 부탁합니다.'라고 쓴 카드를 내민다. 한국에도 몇 차례 왔다는 부부는 삿갓모자에 복장도 통일하여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명랑한 모습이 보기 좋다.
신사에서 모퉁이를 돌아서니 하천에 유채꽃이 한창이고 공기가 맑아 먼 산까지 또렷하게 보이는 화창한 날씨가 너무나 쾌적하다. 연일 강행군하는 길손들의 피로를 풀어줌일까.
오후 3시, 히코네 중심부로 이어지는 다리에 조선가도라고 쓴 돌비석이 보인다. 시내의 골목길에는 조선통신사가 심었다는 소나무 한 그루가 운치를 더하고. 한 시간여를 더 걸어가니 중심부의 상점가를 지나 오늘의 목적지인 히코네 성이 가까운 곳에 문화해설사 두 명이 나와 일행을 맞는다.
처음 찾은 곳은 강국사(江國寺)라고 쓴 편액, 조선국 설봉이라는 글 쓴 이의 호가 새겨져 있는데 해설사의 쪽지에는 '1655년 조선통신사 서기 김의신(金義臣)'이라고 적혀있다. 그 옆에는 조선통신사의 정사가 묵었다는 소안사(宗安寺)가 반듯하다. 조선통신사가 갔던 길, 심은 나무, 쓴 글씨, 묵은 집 등의 순례가 끝나니 보너스로 일본국보로 지정된 천수각이 자리 잡은 히코네 성으로 안내한다. 400년 전에 축성되어 비교적 잘 보존된 성 안팎을 돌아보며 막부시절의 영주들의 위세와 일본정원의 특성을 살린 주변경관의 아름다움을 체득할 수 있었다. 안내 자료의 설명을 덧붙인다.
'축성 이래 4세기의 역사를 가진 히코네 성은 푸른 비와호를 배경으로 지금도 이중으로 된 해자(성곽 둘레에 판 못)로 둘러싸인 녹지가 풍부한 성곽림 가운데에 삼중 백악으로 된 국보 천수각이 덴빈아구라 등의 중요문화재의 성곽을 따라 위풍당당한 자태를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 성내에는 명승 정원이나 복원된 오모테고텐 등도 있어 귀중한 문화유산과 자연이 만들어내는 사계절의 경치는 방문객들을 매료시킨다,'
탐방을 마치고 숙소(GRAND DUKE 호텔)에 돌아오니 오후 6시가 가깝다. 5층의 객실에서 마주보이는 히코네 성과 비와호 주변으로 넘어가는 낙조가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그림 같다. 운치 있는 자연과 격조 높은 성곽이 먼 길 찾아온 손님을 반기누나.
* 히코네 성을 안내하는 문화해설사가 바위와 돌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바위는 한자의 구조가 산에 박혀 있는 것(岩, 바위 암)이고 돌은 산에서 떨어져 나온 것(石, 동 석)이란다. 아주 쉬운 이치를 뒤늦게 깨첸다. 히코네 성은 35만 개의 돌로 쌓았다. 누구든지 버려진 돌이 아니라 요긴히 쓰이는 모퉁이돌이 되었으면.
서울에서부터 참여한 박효자 씨가 히코네를 끝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도쿄까지 갈 예정이었으나 몸이 안 좋고 재일동포로서의 정체성에 갈등을 느껴 일정을 단축한 것이 안타깝다. 작년에 서울-부산을 걸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기록에도 그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하여 내가 쓴 '인생은 아름다워' 3권에 '늘 건강하고 보람된 날들이기를 기원합니다. 작별을 아쉬워하며 히코네에서'라고 서명하여 주었다. 이를 받으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처연하다. 부디 강건하시라. 교토에서부터 사흘간 함께 걸은 안정일 씨에게도 같은 책을 주었다. 그의 고향을 찾은 사연과 번역한 원본부분도 들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