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압지의 명칭은 신라 시대에는 월지라고 칭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갈대와 부평초가 무성하여 오리와 기러기가 날아다니는 한가로운 못'이라는 뜻으로 시인, 묵객들에 의하여 불리워지게 되었다.
1)창건연대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신라 문무왕 14년설(674년)과 문무왕 19년(679년)설을 들 수 있으나 현재 674년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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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문무왕 14년 2월 궁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금과 기수를 길렀다.
문무왕 19년 동궁을 창기하고 안밖의 여러 문의 액호를 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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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압지 출토 유물 중에 의봉 4년(679년)과 조로 2년(680년) 명의 연호가 새겨진 벽돌과 기와가 출토되어, 이것으로 미루어 679년에 공사가 시작되고 680년에 완료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2)월지의 조성 배경
월지와 임해전은 삼국 통일 전쟁을 수행하던 문무왕이 고구려와 백제의 궁성 규모를 직접 보았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축조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문무왕은 통일 정부의 위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단행하였는데 이 때에 백제나 고구려로부터 포로로 데려온 기슬자들과 인력들 을 활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2)-1 안압지에 투영된 고구려적 요소
1. 호안석축의 기운 정도가 거의 수직인 점
2. 호안 석축 축조 방법으로 산의 돌과 가공석을 동시에 쓴 점
3. 돌의 규모가 크다는 점
4. 연못 바닥에 돌을 고르게 깔았던 점
5. 물의 정화를 위해 입수구의 형태가 매우 복잡한 점
6. 호안 석축 전방에 일정한 간격으로 괴임돌을 놓은 점
이상이 안압지에 드러나는 고구려적 요소들인데, 고구려는 연못을 생활의 필수 수단으로 생각하고 실용적으로 사용했던 것에 비해 안압지는 그 기능에서 일보 전진하여 종교적이며 환상적인 기능까지 갖추었다고 보고 있다.
2)- 2 안압지에 투영된 백제적 요소
이것은 고구려에서는 발달하지 않은 조경사상이다.
즉 신선사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연못을 만드는 것은 백제적인 발상을 표현한 것이다.
중국의 진시황 이래로 발달해 온 신선이 산다는 삼선도 사상은 한초 이래 도가사상과 함께 더욱 발전하여 당나라에 이어졌다.
이것을 받아들인 백제는 진사왕 7년(391년), 무왕 35년(634년), 의자왕 15년(655년) 당시에 중국의 영향 아래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흡수하여 신라 특유의 독특한 문화로 재창조한 것이 월지와 임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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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주박물관대학에서 나온 답사자료집을 참고로 정리한 것입니다.
아래 신라의 삼국문화 통합 의지에 관한 논쟁 과정 중에 한예찬님이 불국사나 석굴암이 통합 문화 정도가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어서 참고로 올립니다.
신라 문화를 살펴보면 삼국 전쟁 이후 제일 먼저 드러나는 문화 통합의 결정체가 안압지이고 백미라고 합니다.
문무왕의 삼국 통합의 의지가 드러나는 증거물이라고 합니다.
이 안압지의 조경 방식은 일본으로 전해져서 오늘날 일본 정원 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안압지의 조경이 일본 조경의 모델이 되어 번성했고 조선 후기에 일본의 정원 조경 방식이 역수입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조선의 조경 방식은 자연과 어우러지고 하나되는 정원인데(소쇄원을 예로 많이 들죠) 후기에 이르러 연못에 인공섬을 넣는다든가, 인공석을 이용하여 거북이나 학과 같은 상징물을 넣는 방법을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본의 방식은 안압지가 그 기본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옆으로 약간 빠졌지만 고구려의 문화를 신라가 받아들였느냐, 또는 고구려의 유민 을 신라가 받아들여서 흡수했느냐에 대한 제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올려봅니다.
경주의 선도산은 신라 건국의 성모성지입니다.
선도산 꼭대기의 큰 바위에는 '성모구기'라는 옛 글씨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태종 무열왕릉과 김인문묘로 추정되는 왕릉급 무덤들이 즐비합니다. 선도산을 답사해보면 수많은 무덤들이 봉분이 사라진채 흔적만 남기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왕족들의 공동묘지인 셈입니다. 이곳 서쪽 자락에 김유신 장군의 묘로 추정되는 왕릉이 있습니다. (경명왕 대에 이르러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으니.... 확실치는 않지만)
김유신묘의 아랫쪽으로 약 500M(?) 쯤 내려오면 왕릉급에 해당하는 대형 고구려고분이 있습니다. 이미 도굴되어 그 흔적만 남아있지만 연도가 길고 석실의 형태가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김유신묘 부근에 남아있는 왕릉급 고구려 고분은 누구의 무덤일까? 이 무덤은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추정되는 그 시기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시기는 대략 실성왕 전후인데 그 시기의 왕릉은 대체로 천마총 부근에 집중하여 있습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저는 통일기 전후로 추정해 봅니다.
신라에서 그 시기에 대형 고구려 고분을 남긴 그는 과연 누구인가? 신라 왕족들은 그가 누구이길래 왕족들의 공동묘지에 그가 묻히는 것을 허락했을까? 선도산에는 그런 무덤들이 얼마나 더 있었을까? 경주 시내에 확실하게 남아있는 고구려 양식의 고분은 불국사 로타리에 있는 방형분입니다. 그것은 규모가 매우 작고 시신을 뉘었던 석상(돌침대)도 작아 어린 아이의 것으로 추정하고 벽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도 하는데 아마 9세기 이후의 무덤이 아닌가 추정을 합니다.
신라가 삼국 전쟁 이후 삼국문화의 계승 의지가 있었느냐 하는 문제는 저는 역사는 후손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데 의미를 두고자 합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쓴 김부식이나 일연은 경주인이었을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고려의 사람이었습니다. 고려가 그 국호에서 고구려의 계승의지를 분명히했고, 고려의 사람들이 남긴 책에 김유신이나 태종 무열왕이 삼한통일, 또는 삼국통일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냈다면 고려는 이 삼국의 전쟁을 민족 통합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삼국의 전쟁에서 가장 가까웠던 시대의 사람들이 민족통합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면 후대의 우리가 굳이 폄하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우리의 정통성을 신라와 한강 유역에 두려는 이들에게 반발하려는 뜻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더우기 신라에게 삼국계승의지가 없었다고 치부한다면 고구려는 더더욱 우리 역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영토는 차지하지 못한 불완전한 통일이었지만 그 유민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 흔적들이 남아있다고 강력히 주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중국이 통일신라와는 관련이 없는 나라 고구려를 그들의 변방국가로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첫댓글오옷. 역시 아혜모호님이시군요. 종래에 일반인들에게 주목받지 못했던 지역을 통해서 새롭게 역사를 보는 안목을 넓히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현장을 목격하신 분의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시는군요. 항상 좋은 글을 남겨주셔서 운영자로서 다시 감사드립니다.
준수님, 항상 과찬을 하셔서 민망합니다. 놀리는 것은 아니시죠? ^^.... 한예찬님, 제가 이름을 거론한 것에 대해 기분이 상하시진 않으셨는지...예찬님의 생각이나 글이 동화나 소설로 형상화되면 당장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적을 했습니다. 늘 건필하시기를 ^^
첫댓글 오옷. 역시 아혜모호님이시군요. 종래에 일반인들에게 주목받지 못했던 지역을 통해서 새롭게 역사를 보는 안목을 넓히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현장을 목격하신 분의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시는군요. 항상 좋은 글을 남겨주셔서 운영자로서 다시 감사드립니다.
안압지를 생각치 못했군요. 지난 여름,경주에 갔을 때 월성까지 가서도 안압지는 못보고 왔는데 나중에 경주에 다시 가게 되면 안압지를 꼭 가봐야겠습니다.
준수님, 항상 과찬을 하셔서 민망합니다. 놀리는 것은 아니시죠? ^^.... 한예찬님, 제가 이름을 거론한 것에 대해 기분이 상하시진 않으셨는지...예찬님의 생각이나 글이 동화나 소설로 형상화되면 당장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적을 했습니다. 늘 건필하시기를 ^^
저도 문무왕이 삼한통합의 의지를 가졌고 그 흔적이 문화유산에도 남아있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만 그 이후 신라 지배층의 포용성에 대해 아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혜모호님의 의도하신 말씀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