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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매구 - 각묵스님
불교는 연기와 무아를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이다. 불교 2600년사를 통해 전개되어온 불교주류의 가르침은 이를 근본으로 하여 전개되어 왔다. 초기불교는 오온무아와 제법무아를 천명하였으며, 아비담마도 제법의 보편적 성질(共相)로 무상.고.무아를 강조하였고, 반야중관은 아공법공을 외쳤으며, 유식도 인무아와 법무아를 주창하였다. 이렇듯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조건발생(緣已生)이요, 그래서 무아라고 불교 주류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설하였다. 무엇보다도 무아의 가르침은 오온, 12처, 18계로 정리되는 존재의 배후에 자아니 절대아니 참나니 순수이성이니 이데아니 창조주니 하는 어떤 불변하는 실체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대사자후이며 불교만대의 표준이다.
‘여래장’ 불교교학 혼란 야기
그런데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불교의 주류가 되어 스스로를 대승 중의 대승이라고 자처하게 된 여래장 계열의 경론에서는 연기와 무아를 설하기는 하였지만 아울러 마치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의 배후에 있는 양 일심을 천명하였고, 여래장이나 불성이 상주하는 듯한 언어표현을 즐겨 구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여래장에는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이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여래장이 불공(不空)이라 한다면, 평천창 교수의 말처럼 이것은 공을 무아와 연기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적멸한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만일 불성이나 여래장이 불공이요, 존재의 배후에 일심이 상주불변한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면, 여래장 계열의 경론은 스스로가 불교이기를 포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불교이해가 수승한 것이라 외친다.
물론 특정 교파의 주장이 특정한 시대에 등장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성향이나 시대정신을 고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래장 사상이 나타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특히 이것이 중국불교의 주류가 된 데는 이 사상이 그 시대 중국의 통치자들과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에 더 어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문화적,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지대한 영향 하에 놓여온 한국불교도 그러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과학을 시대정신으로 하는 현대에는 오히려 연기와 무아를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는 초기불교 등 불교주류의 가르침이 더 적합할 것이다. 불교사 전체로 보면 방계일 수밖에 없었으며, 비불교적 언어표현을 즐겨 사용하여 불교교학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온 여래장 사상에 더 이상 우리 불교가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양머리 걸고 개고기 파는 격
현양매구(懸羊賣狗)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춘추시대 고전 〈안자춘추(晏子春秋)〉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현양두매구육(懸羊頭賣狗肉)의 준말이요, 직역하면 ‘양의 머리를 매달아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이다. 좋은 물건을 간판으로 내세우고 나쁜 물건을 팔거나, 표면으로는 그럴 듯한 대의명분을 내걸고 이면으로는 좋지 않은 본심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 고사성어는 〈벽암록〉등의 아주 많은 중국불교 선어록에서 잘못된 견해를 질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은 수승한 불교라는 양 머리를 내걸었지만 존재론적 실체를 찬양해마지 않는 외도의 개고기를 파는 것은 혹시 아닐까?
[불교신문 2336호/ 6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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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매구’를 읽고 - 이평래교수
연기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두 개의 갈대 다발이 서로 기대고 있는 것처럼 마음(na-ma, 名)과 몸(ru-pa, 色)도 그렇다는 것이다. 명색(名色)이란 ‘na-ma-ru-pa’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다.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감수작용(vedana-, 受).추상작용(sam.jn~a-, 想).의지작용(sam.ska-ra, 行).인식작용(vijn~a-na, 識)을 가리킨다.
이 다섯 가지를 모두 합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다섯 가지 구성요소(Pan~ca skandha-h., 五蘊)’라고 한다. ‘다섯 가지 구성요소’는 변화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변화를 속성으로 한다. 무상(anicca, 無常)이다. 현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모두 늘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왜 변화하는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아(ana-tman, 無我).공(u-nyata-, 0, 空)이다. 초기.부파.대승의 어느 시대의 불교를 막론하고 연기와 무아를 변함없는 진리로 섬긴다. 불교신자는 이것을 믿고 외도는 안 믿는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깨달은 이인가. 그렇다. 무엇으로 깨달았는가. 마음으로 깨달았다.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분별기(vibhajya-vya-karan.a, 分別起)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죽은 이는 모두 윤회하는가?” “번뇌가 있는 이는 윤회(sam.sa-ra)하며, 없는 이는 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고따마 붓다의 전유물인가.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다섯 가지 구성요소’로 되어 있으므로 사람에게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람에게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생.노.병.사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생.노.병.사의 필연성을 깨닫는 길을 도(ma-rga, 道)라고 한다.
도를 닦을 때 무엇을 도구로 삼는가. 못을 박을 때는 망치 그리고 나무를 켤 때는 톱을 도구로 삼는 것처럼, 도를 닦을 때 마음을 도구로 삼는다.
여래장은 마음의 또 다른 이름일뿐
여래장의 空해석 초기불교-중관사상과 달라
불교의 역사 속에서 오로지 ‘마음’이라고만 불렀는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 여래장(tatha-gatagarbha, 如來藏) 또는 불성(buddhadha-tu, 佛性)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일부학자는 왜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하는가. 연기와 공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여래장은 연기와 공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공여래장(空如來藏).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rl-ma-la-devl--sim.ha-na-da-su-tra,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대정장(大正藏)> 12-221c) 또는 “공진여(空眞如).불공진여(不空眞如)”(<대승기신론>/<대정장(大正藏)> 32-576a)는 번뇌의 존재여부를 두고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공은 초기불교나 중관사상에서의 공과는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공여래장.공진여는 번뇌가 0%(u-nyata-, 空)라는 말씀이고, 불공여래장.불공진여는 지혜와 자비가 100%(au-nyata-, 不空)라는 말씀이다. 인(hetu, 因)으로서의 여래장(불성)과 과(phala, 果)로서의 여래장(불성)으로 풀이한다. 인으로서의 여래장을 잘 갈고 닦으면 과로서의 여래장이 된다. 고타마 싯다르타를 예로 들어보자. 보디나무(Bodhitree)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의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와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를 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전자는 인으로서의 여래장을 여러 깔빠(kalpa) 동안 갈고 닦던 보디싸ㅅ뜨와(bbodhisattva, 菩提薩)이고, 후자는 과로서의 여래장으로 증장해버린 붓다(Buddha, 佛陀)이다. 과로서의 여래장으로 성숙한 붓다에게는 탐.진.치(ra-ga.dves.a.moha-)의 삼독이 모두 소멸해 버려 번뇌가 0%(空)이고, 향기롭고 아름답게 넘쳐흐르는 지혜와 자비가 100%(不空)라는 논리이다.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의 여래장(마음)이나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여래장(마음)이나 모두 여래장(마음)이다. 뜰에는 감나무에 짙푸른 감이 매달려 있다. 이 짙푸른 감을 잘 가꾸면 가을에는 짙붉은 감이 될 것이다. 떫고 짙푸른 감(땡감)이나 달고 짙붉은 감(단감)이나 모두 감이다. 같은 감이라고 하는 본성(本性)으로는 불이(不異)이며 떫고 달다는 위상(位相)으로는 불일(不一)이다.
[불교신문 2345호/ 7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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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장 유감 - 각묵스님
<승만경>은 여래장을 “여래장은 상주불변이다. 그러므로 여래장이다.(如來藏常住不變 是故如來藏)”라고 정의하고 있다. 힌두교의 정전인 <바가왓기따>는 읊는다. “칼날이 그것(자아)을 상하게 할 수 없고 … 바람도 그것을 말릴 수 없다. … 그것은 영원, 상주, 부동, 불변, 태고이다.”(BG.ii.22~25)
그렇지만 여래장을 신봉하는 자들은 여래장은 자아가 아니고 중생이 아니며 영혼(命)이 아니고 인(人, 진인)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다. 만일 여래장이 자아라고 하면 그것은 즉시 외도의 가르침이 되는 줄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천창 교수의 고백처럼 상주불변하는 여래장과 영원, 상주, 부동, 불변, 태고인 자아의 차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오히려 대승 <열반경>은 한술 더 떠서 적극적으로 “자아란 곧 여래장을 말한다.(我者是如來藏義)”라고 설한다. 상주불변하는 여래장을 설한 가르침을 두고 진정한 대승이라든지 일승이라든지 최상승이라든지 한다면 그토록 무상.고.무아를 강조하신 우리 세존 부처님이 어찌 통탄하실 일이 아니겠으며, 이 어찌 현양매구(懸羊賣狗)가 아니겠는가.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은 ‘법’을 중심한 초기불교-아비담마/아비달마-중관-유식의 불교 주류의 가르침이 결코 될 수 없다. 우리에게도 불성이 있고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을 강조한 ‘믿음의 종교’일 뿐이다.(<인도불교의 역사>, 하 148~9 참조) 그런데 불교의 믿음은 여래장이나 불성이나 일심에 대한 믿음보다는 초기경이 강조하고 있는 불.법.승.계에 대한 믿음이면 충분하다.
여래장이 마음이면 상주불변 불가
여래장 경론은 외도성행하던 시대의 산물
혹자는 여래장을 마음이라 강변한다. 그런데 불교 주류의 가르침은 마음(心)을 식(識)과 동의어라고 설한다. 그리고 불교 주류의 가르침은 오온 외에 절대로 나라는 실체가 없다고 강조한다. 식은 오온의 하나의 구성요소이며, 오온은 무상이요 고요 무아요 조건발생(緣起)이라는 것은 불교의 상식중의 상식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래장이 마음이라 한다면 여래장은 무상이요 고요 무아다. 절대로 상주불변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만일 오온 외에(非卽非離蘊) 일심이나 여래장이 따로 있다 한다면 이것은 불교의 근본원리에 어긋나는 상식 이하의 유치한 외도적 발상이며 현양매구일 뿐이다.
유식의 식은 전변(轉變)하는 것이다. 안혜는 식전변을 ‘인찰나가 멸하고 과찰나가 인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이라 하여 아뢰야식을 비롯한 모든 식을 ‘찰나생 찰나멸’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식의 식은 상주불변이 아니다. 오히려 유식은 식이 조건발생(依他起, 緣起)인 줄을 모르고 자아라고, 상주불변이라고 거머쥐고 있는 것을 변계소집이라 비판하고 있지 않는가.
분명 여래장 계열의 경론은 시대의 산물이다. 그 시대가 외도의 가르침이 성행하는 때였기에 외도적 성향을 가진 하근 중생들을 불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상주불변의 여래장이나 불성이 필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불교 2600년의 전개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이 시대에서까지 비불교적이요 외도적 사유를 마구 해대는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에다 일승이니 최상승이니 하면서 목을 매달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무아를 역설하는 <금강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불교신문 2345호/ 7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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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경전이나 론서를 보고난 후의 생각이다.
각묵스님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초기불교가 부처님의 직설에 가깝고 중국에 건너온
대승불교는 왜곡되었다는 주장을 요즘 불교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불성과 여래장이 연기와 공성에 어긋난다는 것인데, 불성이나 여래장을 상견으로 보는 견해이다.
각묵스님은 이번 글에서 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여러차례 불성, 여래장, 참나에 대해 비판적 견해의 글을 썼었다.
이런 각묵스님의 글에 반론을 제기한 이평래교수의 글은 적확하게 요점을 지적하고 있다.
“공여래장(空如來藏).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rl-ma-la-devl--sim.ha-na-da-su-tra,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대정장(大正藏)> 12-221c) 또는 “공진여(空眞如).불공진여(不空眞如)”(<대승기신론>/<대정장(大正藏)> 32-576a)는 번뇌의 존재여부를 두고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공은 초기불교나 중관사상에서의 공과는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평래교수의 설명은 경전에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중관사상의 공, 여래장 혹은 진여과 관련된 공, 불공이 아함부 경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여러 불자님들은 알고 계신가? 그부분을 인용하겠다.
중부니까야 III. p104(중아함경 제49권 190, 소공경(小空經))
[예를 들어 이 미가라마따 강당에는 코끼리들, 소들, 말들, 암말들이 공(空)하고 금이나 은도 공하고 남자나 여자들의 모임도 공하다. 그러나 불공(不空)인 것이 있다. 즉, 수행승의 승단 하나만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아난다여, 수행승은 마을에 대한 지각에 관해 작의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지각에 관해 작의하지 않고 숲에 관한 지각 하나만을 조건으로 작의한다. 그가 숲에 대해 지각할 때 마음은 도약하고 신락하고 정립되고 해탈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안다. 마을에 대한 지각을 조건으로 하는 어떠한 환뇌도 여기에는 없다. 그러나 유일한 환뇌가 있다. 즉 숲에 대한 지각 하나만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지각의 세계는 마을에 대한 지각에 관하여 공하다고 알며 이 지각의 세계는 인근에 대한 지각에 관하여 공하다고 안다. 그러나 불공인 것이 있다. 즉 숲에 대한 지각 하나만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을 공으로 관찰한다. 하지만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있으므로 있다고 분명히 이와 같이 안다. 아난다여, 이것이 그에게 진실 한 것이며 전도되지 않은 것이며 청정한 것이며 공(空)의 현현이다]
이평래 교수의 글을 보자
[공여래장.공진여는 번뇌가 0%(u-nyata-, 空)라는 말씀이고, 불공여래장.불공진여는 지혜와 자비가 100%(au-nyata-, 不空)라는 말씀이다. 인(hetu, 因)으로서의 여래장(불성)과 과(phala, 果)로서의 여래장(불성)으로 풀이한다. 인으로서의 여래장을 잘 갈고 닦으면 과로서의 여래장이 된다. 고타마 싯다르타를 예로 들어보자. 보디나무(Bodhitree)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의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와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를 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전자는 인으로서의 여래장을 여러 깔빠(kalpa) 동안 갈고 닦던 보디싸ㅅ뜨와(bbodhisattva, 菩提薩)이고, 후자는 과로서의 여래장으로 증장해버린 붓다(Buddha, 佛陀)이다. 과로서의 여래장으로 성숙한 붓다에게는 탐.진.치(ra-ga.dves.a.moha-)의 삼독이 모두 소멸해 버려 번뇌가 0%(空)이고, 향기롭고 아름답게 넘쳐흐르는 지혜와 자비가 100%(不空)라는 논리이다]
이 설명은 소공경의 공과 불공의 쓰임과 일치하고 있다.
기신론에서 공진여, 불공진여의 설명을 인용하겠다.
[부차 이 진여란 것은 언설분별을 의지하여 이종의 의미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가지가 되는가, 하나는 여실공이니 능히 구경에 실을 현하는 연고요 둘은 여실불공이니 자체가 있어서 무루의 성공덕을 구족한 연고니라.
말한 바 공이란 것은 근본을 좇아 이미 옴으로 일체염법이 상응치 않는 연고니.....
말한 바 불공이란 것은 이미 법체가 공해 망이 없음을 현한 고로 곧 이 진심이 항상해 변치 않아서 정법이 만족할 새 곧 불공이라.....]
공이란 일체염법 즉 번뇌가 0%라는 야그이고 불공이란 진심, 지혜와 자비가 100%라는 야그다.
이평래교수가 바르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또한 소공경에 의하면 공과 불공이 진실한 것이며 전도되지 않은 것이 청정한 것이며 공의 현현이다고 하고 있다.
용수보살의 중론 제23장 전도를 관찰함에서 일부를 인용하겠다.
[만약 아와 정과 상과 락이 존재한다면 나와 정과 상과 락은 전도가 아니네
만약 아와 정과 상과 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아와 부정(不淨)과 무상(無常)과 苦이 존재하지 않네....]
상락아정은 불공이며 무상고무아부정은 공이라는 야그가 되겠지요. 이것이 공의 현현이라 소리죠. 아함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죠.
이러한 공, 불공, 공의 현현(공성) 쓰임으로 볼 때 중관사상의 공은 공의 현현을 의미하는 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현장스님의 반야심경의 해석분에는 범어분에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다고 한다. 성법스님의 글에서 생략된 부분이 소개되어 있는데, <>부분이 빠진 부분이라 한다(그런데 글의 흐름상 시고 색중유공이 시고 공중유색이 되어야 되는거 아닌가??? 공의 현현을 무(공)와 유(불공)로 표현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是故 色中有空 有受想行識 有眼耳鼻身意 有色聲香味觸法 有眼界 乃至 有意識界 有無明 亦有無明盡 乃至 有老死 亦有老死盡 有苦集滅道 有智亦有得 以有所得故>
이정도만 기술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 한가지 더 언급할 것이 있다.
각묵스님은 엄청 강조한다.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해야 한다고....
그런데 묻고 싶다.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하는 것은 어떤 수단을 통해서 인가?
즉 그것을 일종의 마음작용이다.
이평래 교수는 [고타마 싯다르타는 깨달은 이인가. 그렇다. 무엇으로 깨달았는가. 마음으로 깨달았다]라고 했다.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한 것은 마음으로 했다는 소리다.
상좌부의 견해는 마음은 대상을 가진다. 즉 찰나생 찰나멸의 관점이다. 여기서 모순이 생긴다.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한 것도 찰나생멸하는 마음 작용이라는 소리다. 이건 무아를 철견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상좌부에서는 사티라는 용어가 있다.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하는 건 사티라는 용어로 설명되는 마음작용에 의한다. 사티라는 마음작용은 찰나생, 찰나멸하지 않는 특수한 마음작용이어야 말이 된다. 이 모순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상주하는 마음을 정의하지 않으면 이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북방대승 경전에서는 각이라 용어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아함부 경전에서는 지,수,화, 풍, 공, 식 6계를 말하지만
능엄경에서는 지,수,화,풍,공,식, 각 7계를 말한다.
이러한 여래장 논쟁에서는 각묵스님이 완패하였다.
비단금의 관전평이다
첫댓글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은 ‘법’을 중심한 초기불교-아비담마/아비달마-중관-유식의 불교 주류의 가르침이 결코 될 수 없다. 우리에게도 불성이 있고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을 강조한 ‘믿음의 종교’일 뿐이다.(<인도불교의 역사>, 하 148~9 참조) 그런데 불교의 믿음은 여래장이나 불성이나 일심에 대한 믿음보다는 초기경이 강조하고 있는 불.법.승.계에 대한 믿음이면 충분하다.] 동아시아의 가르침 속에는 여전히 아래 제가 설명하는 것처럼 등인지 된장인지 구분안하는 가르침으로 흘러가는 풍조이다. 즉 수행에 세밀함을 드러내지 않는다..._()_
따라서, 후박나무님처럼 세밀하고 분석적이고 아우럴수있는 고타마 싯달타의 가르침으로 동아시아는 거듭나야한다..._()_
저는 각묵스님의 견해를 지지합니다...정말 고타마 싯달타의 가르침을 등인지 된장인지 구분이 안가게 설명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으니깐요. 즉 아함경에 토대를 두지않은 북방불교는 헛개비입니다..지금의 논의 자체가 건설적인 것입니다....하루빨리 조사선과 화두선이라는 수행체계에서 자리 잡고 있는 한민족 고유의 마음챙김을 되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_()_
사띠는 마음작용이다...누구는 말라식(자의식)이다. 그냥 소슬은 사띠의 주체적 바탕은 의와 의식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입니다._()_ 그럼 마음마음하는 맴이 뭐꼬?
공사상 공사상하는 불교 철학적인 용어를 이제는 내려놓아야 수행으로써의 고타마 싯달타의 가르침이 살아 숨쉴 것입니다. 한자로 된 경전을 쉬운 언어 바른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 즉 번역이 아닙니다. 충분한 용어 설명 쫌 제대로 하는 가르침이길 바랍니다....화엄경 읽어보니깐 아함경하고 일치되는 부분이 많더만...중학생 정도의 ?은 불자가 그러더구많요 무엽지같은 장면은 빼고 ㅎㅎㅎㅎ
현실적으로 현양매구(懸羊賣狗)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북방의 가르침이 전부 틀렸다는 야기가 아닙니다.잘 정비하여야합니다. 논리적으로 학문을 대하는 어린 세대를 위해서라도요! 최근에 번역된 서양불교서적 쉽디쉽지요 ㅎㅎㅎㅎ. 우린 얼마나 애매한 용어들이 너무너무 많은지 등인지 된장인지 구분이 안되지요! 즉 세밀함/설득력이 덜하다는 이야기 입니다....._()_
북방대승경전의 覺의 등장은 초기 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참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한 것으로 저는 봅니다. 상좌부에서 사티에 해당되고 유식에서는 전식득지(이것도 중국에서 나온것임)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기신론에서 보이는 체,상, 용의 구조는 이런 문제를 매끈하게 해결했습니다. 각묵스님은 교학자인네 실참이 교학지식에 미치지 못했기에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걸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비단금님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각묵스님이 보신 것이 타당합니다...수행이라! 실참하신 분 중에 각묵스님정도의 교학적 입장을 이해할 스님이 몇분이나 계시는지요..단언하건데 별로 없습니다...대부분이 잘이해하지 못합니다.....꼭찝어보면 교학의 이치에 맞지않는 두리뭉실형입니다...위에서 소슬이 대승적 입장에서 설명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것이 실정입니다..._()_
[상좌부의 견해는 마음은 대상을 가진다. 즉 찰나생 찰나멸의 관점이다. 여기서 모순이 생긴다.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한 것도 찰나생멸하는 마음 작용이라는 소리다. 이건 무아를 철견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어째서 이렇게 말하는지요. 또 [상주하는 마음을 정의하지 않으면 이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게 해결인지요?..()
저는 이리 질문하신 후박나무님의 견해에 한표..._()_
이것은 실참과 관련된 겁니다. 마음은 대상을 가지며 찰나생, 찰나멸하고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하는 건 사티라는 마음작용이다 는 이론적인 겁니다. 마음의 찰나생멸을 어떻게 관찰합니까? 무슨 수로 엄청 짧은 순간인 찰나생 찰나멸하는 걸 관찰하겠습니까? 또한 마음의 찰나생멸을 관찰하는 것은 그 어떤 것입니까?
등무간연으로 우리같은 중생들은 마음 작용은 끝임없이 지속됩니다. 실참을 하게 되면, 지속되는 마음작용의 변화상이 처음으로 관찰됩니다. 상좌부에서는 마음작용의 변화상을 캐치하는 마음작용을 사티라는 용어로 지칭합니다. 무상유정처에서는 관찰자가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무아입니까? 비상비비상처에서도 관찰자도 관찰대상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럼 이게 무아입니까? 그런데 선정력이 쌓이면 깨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깨워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선정의 끝입니다.
이론상 상좌부의 사티는 찰나생멸하는 마음작용입니다. 관찰자가 멸해버리면 무아는 추론에 의한 것이지 철견한것은 아닙니다. 관찰자가 사라지는 체험은 무상유정처, 비상비비상처에서 할 수 있습니다. 대상이 멸하는 건 멸진정에서 뿐입니다. 이론상 사티는 생멸하는 마음작용이기 때문에 멸진정에서는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깨워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문제가 초기 유식에서도 있었습니다.
야뢰야식도 생멸심입니다. 야뢰야식이 멸함에도 깨워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구식이 등장합니다. 생멸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사티를 생멸하는 마음작용으로 보는 상좌부에서는 이론상 최고 선정처는 비상비비상처라는 논리적 한계를 갖게 됩니다....
[생멸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적확하게 말씀드리면 고타마의 가르침이 아닙니다^^그러니 "상락아정"이라 표현합니다. 이것은 8정도의 관점에서 바른 언어가 아닙니다^^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여래장 계통은 빗나간 견해들입니다...._()_
[생멸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혹시 불생불멸을 뚯하신다면 이야할 수있습니다만 대개가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이야기의 진원지가 여래장 계통의 견해를 가진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엄밀히 말씀드리면 적확하게 불교가 아닙니다..._()_
소슬님! 어떤것이 고타마의 가르침입니까? 부처님께서 직접 기술하신 경전이 있습니까? 왜 아함부 경전, 반야부경전, 유식계열의 경전들의 서술된 스타일이 다릅니까? 또한 부파간 전승되는 아함부경전들이 서로 다릅니까? 그리고 우리가 접하는 아함부, 반야부 경전들이 그당시에 유행했던 경전 전부였을까요?
비단금님 복잡하게 갈것이 없습니다.스타일은 달라도 하는 소리는 일맥을 가져야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몸은 허물어져도 없어져도 마음만은 영원하다는 이야기의 진원지가 바로 여래장계통의 견해라는 소리입니다..._()_
"상락아정"의 용어도 중론에 등장합니다. 용수보살은 서기2세기경에 생존하신분이죠. 세친보살은 서기 4세기경분이십니다. 불멸후 6백에서 8백년이 지났습니다. 그 당시에 여러종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종파가 부처님의 직설이라고 주장했을 거라는 건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멸후 2천5백여년이 지난 지금 그것도 외국에서 고타마의 가르침은 이렇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용수보살님께서 도 딲았다는 수행이야기있다면 저도 한수배우지요...이분은 학자였습니다. 불교를 더복잡하게 만든 장본인이지요...서양의 가르침은 적어도 토대는 확실히 논리적이고 쉬운 언어로 가르치지요...참고로 What Buddhists believes/불교이야기, 담마난다 스님/이병두 옮김/미투_()_
서양서적이 거북스러우시면 [법정스님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전재성 님의 아함경 시리즈, 각묵스님 대림스님 번역 아함경 시리즈 초기불전연구원 편]을 권합니다..._()_
상락아정에대한 소슬의 견해 : 조건 지어진 것들은 모두 무상하고, 조건 지어진 것들은 모두 괴로우며 조건지어지거나 조건지어지지않는 것들은 영혼이나 자아가 없다. 즉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법구경, 제277, 278, 279]로 대신합니다. 고타마 싯달타의 견해로는 상락아정 영원한 항상하는 즐거움! 스스로를 맑힘! 영원한 착각입니다....제대로 표현하면 불생불멸!!! 태어나지 않으니 괴로움도 없고 멸함도 없는 것이다..._()_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화엄경),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법화경) : 여래장이 상견이라고 하니 일체법 불생불멸하니 제불이 항상 존재한다고 하니 이것도 상견이네요. 소슬님! "불생불멸"은 常입니까? 無常입니까? 도대체 어떠한 상태를 불생불멸이라고 합니까? 불생불멸의 어휘가 등장하는 아함부 경전이 있습니까?
불생불멸의 어휘가 등장하는 아함부 경전이 있습니까? : 없습니다^^ ㅎㅎㅎ 언어에 들어있는 함축된 뜻을 제멋대로 번역하여 마치 제불이라는 산냐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화엄경 법화경이란 뒤섞여 사는 세상에 그냥 불법이 무인가를 맛베기 보여주는 보살수준의 경일 뿐! 하근기의 사람들을 위한 경이고 또한 화합을 제일로치는 자비심으로 써내려 선재동자의 구도기....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세상에 이런 선생들이 있구나. 선지식 shopping을 온몸으로 다닌 선재동자의 구법의 과정 속에 나타난 이야기입니다..._()_
화엄경 법화경, 대승기신론에 나타나는 중요한 key를 빼고는 그냥 믿음 돋아주는데 약으로 쓰시길...근데 믿음은 계율청정, 법의 자비함, 승가의 청정!!! 이것으로 족하지요...._()_...
반야심경에 나타나는 불생불멸 불구부증....반야심경...믿음을 돋구기 위한 원기회복의 약방문!!! Lets go Lets go to the Paradice.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_()_
대승기신론은 신라가 고유의 믿음신앙! 풍류도! 신선사상!(사유상은 조선의 사고체계를 제대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소슬은 반가사유상을 신선을 꿈꾸는 청년으로 본다)이라는 엔진을 갈아치우기위해 시대적으로 도입된 것이다....개인적으로 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을 좋아합니다만...._()_
천년이상 중국, 한국, 일본 등 그동안 존재했던 수많은 불자들은 왜곡된 부처님 가르침만 보다가 사라졌겠네요.... 법화경과 화엄경은 범어본이 있다하니 부처님이 태어나신 나라에서도 제대로된 부처님 교설을 보고 가지 못한 불자가 상당하겠네요....
고마타 부처님께서는 이세상에 오셨다가 가셨습니다. 소슬님 께서는 [몸은 허물어져도 없어져도 마음만은 영원하다는 이야기의 진원지가 바로 여래장계통의 견해라는 소리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몸을 가지고 이땅에 오셨다 가신 고마타 부처님은 몸도 버리고 마음도 소멸했다는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소슬님의 견해로 여래장이 상견이라면 몸도 마음도 멸해 버린 것은 단견이 되지 않습니까?
< 마음이란 무엇인가? > 마음은 물질이 아니고 비 물질이다. 마음은 비 물질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느낌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이것들을 일으키는 마음을 알 수가 있다. 마음은 매 순간마다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진다.앞선 마음이 사라지면 뒤에 마음이 새로 일어난다.새로 일어난 마음은 있던 마음과 다른 마음이다. 마음은 있지만 항상 하는 마음이 아닌 것이다. 항상 하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으며 조건에 의해 계속 변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 아니다.
마음은 물질 없이 혼자서 존재하지 못하며 물질과 함께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다. 마음이 지속하는 시간은 빛이 번쩍하는 순간의 백만분의 일보다 짧은 순간에 머물면서 변한다.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지지만 종자가 있어서 다음 마음에 과보를 전하고 사라진다. 그래서 마음은 과보의 힘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이 과보가 바로 종자, 조건, 정보, 원인과 결과다. 이처럼 나라고 하는 정신과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은 먼저 행위가 있고 그 행위에 대한 과보가 만든다.
매순간 생멸하는 마음은 한 마음이 아니므로 어제 있었던 마음이 오늘의 마음이 아니다. 현재의 마음이나 조금 뒤의 일어난 마음들은 조건에 의해 흐르고 있는 새로운 마음들이다. 나의 마음이 있다면 죽을 때 호흡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숨을 쉴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죽기 전의 마지막 호흡임을 알아도 어쩔 수 없이 숨을 거두어야 하며 마지막 마음조차도 끝내야 한다. ......묘원님의 글을 인용하며...._()_
묘원님의 견해도 단견(斷見)이네요. [죽기 전의 마지막 호흡임을 알아도 어쩔 수 없이 숨을 거두어야 하며 마지막 마음조차도 끝내야 한다] 몸도 마음도 끝나버리네요. 영원히 상주하는 거나 단멸해 소멸하는 거나 불교의 중도는 아니죠...
그리고, 제법무아의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무아를 설명한 경전 구절을 인용해 주시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법구경의 제법무아의 법은 유무위법을 포함하는 담마로 기술되어 있지만 아함부 경전에서는 유위에서만 무아가 나옵니다. 어느것이 불설에 맞는 걸까요? )
언제 잘 정리하여 서로 탁마하였으면 합니다...차한잔 올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