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군의 旌閭(孝行)이야기
20. 禮山 효자 김의재金義載와 처 창원황씨昌原黃氏 정려
예산군 봉산면 정려 9곳이 있다. 고도리에 효행정려는 2곳이다. 고도리 산193-2번지, 효자 김의제와 부인 창원황씨 정려와 고도리 179번지에 위치한 박희석과 박기택의 정려이다.
6월20일이다. 큰 딸 생일이다. 아침에 큰 딸과 핸드폰으로 영상통화를 했다. 외손녀와 사위가 잘 살고 있나 보다. 행복해 보였다. 사람은 태어나면 매년 생일을 맞는다. 탄생은 축복이다. 축복을 받으며 탄생한 사람들은 부모에게 효행을 한다.
김의재金義載(1804~1859)와 처 창원황씨昌原黃氏 1891년 고도리에 건립된 정려는 야산 아래 있었다. 이번 예산군 관내 정려 방문은 20번째이다. 대개 정려는 도로변과 눈에 잘 보이는 만가 옆에 있었다. 하지만 아내와 토요일 탐방한 정려는 도로변에 떨러진 산 아래 구릉에 있었다. 어렵게 정려를 찾았다. 정려 아래 세집이 살고 있었다. 한 가옥 마당을 지나가도 개는 소리 내어 짖지 않았다. 개 주인은 짖지 않는 개를 꾸짖어도 관심 없었다. 개는 잘 먹지 못하고 더위에 지친 듯하다. 정려문 아래 밭 도로변에 익모초가 자라 있었다. 농약을 하지 않는 것 같아 안심을 했다. 아내는 정려가 위치한 산언덕을 오르지 않았다. 연신 익모초를 뜯었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삼복더위 점심 전에 일을 마치고 들어와서는 힘들어 하셨다. 점심 밥상이 들어오면 가끔 반찬이 부실하였는지 어머니에게 “마늘 좀 까서 가져오라?”라고 했다. 그러고는 햇마늘을 고추장을 찍어 드셨다. 아버지는 6남매와 부모님을 모신 10명의 가장으로 살아서 평생 동안 농촌의 삶은 고달프고 힘들었으리라.
김의재는 본관이 경주(慶州)이고, 자는 성필(聖弼)이다. 아버지는 김노환(金魯煥)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다.
그는 1804년(순조 4) 5월 4일 홍주 합덕리(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그의 부친은 돌아가셨다. 어른처럼 시묘살이 했다. 어머니가 병에 걸려 오이와 물고기 먹고 싶다고 말 하자, 그는 40여리 이상 된 곳에 가서 소량의 참외와 물고기를 구하여 봉양을 했다. 그와 부인 황씨는 넓적다리와 손가락을 잘라 부모에게 받들었던 부부 효행 사실은 조정으로부터 정려문을 받을 만 했다. 충남도내 선비가 효행공적을 자세히 관아에 상소한 결과 통훈대부사헌부감찰(정6품괸직)을 특증하고 정려를 짓도록 명하였다. 부인과 같이 1890. 3월 정려각을 봉산면 고도리에 세워 현재 효행의 내용이 전해진다.
정려의 내부 중앙의 앞쪽 상단에 ‘효자 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 김의재지문(孝子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金義載之門)’ 현판이 있다. 뒤쪽 상단에 ‘효열부 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 김의재 처 증숙인 창원황씨 지문(孝烈婦 贈 通訓大夫司憲府監察金義載妻贈淑人昌原黃氏之門)’이라고 쓴 현판도 걸려 있다.
익모초 益母草
삼복더위 지친
아버지 보신해 준
착한 풀
어머니 사랑에 쓰디쓴 즙
목에 걸려도
10명의 가족을 위해서
아버지는 눈물을 참으며 마셨다.
엄니는 여성에게
이로운 풀
드시지 않은 채
수십 년 아버지에게
즙을 만들어 드렸다.
이번 봉산면 고도리 창원황씨
부부 정려탐방 나온 아내
정려주변 돌아보지 않았다
나를 위해 분주히
익모초만 채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