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한성부 좌윤 곽재우(郭再祐)가 졸하였다. 【곽재우는 조식(曺植)의 사위이고 김우옹(金宇顒)ㆍ정인홍(鄭仁弘) 등과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성리학(性理學)을 알지 못하여서 진사시에 들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즉시 학문을 버리고 가 힘써 농사지으면서 재물을 늘려 재산이 몇 만 금이나 되었다. 그러자 시골 사람들이 그가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의심하였으나, 곽재우는 태연스레 지내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왜변(倭變)이 일어났다고 들음에 미쳐서 곽재우는 그 당시 별서(別墅)에 있었는데, 즉시 크게 통곡하고는 스스로 별서를 불태우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재물을 모두 흩어서 악소배(惡少輩) 1백여 명을 모아 왜적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먼저 의령(宜寧)에 있는 왜적을 치고 다음으로 포위당한 진주성(晉州城)을 구원하여 여러 차례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로부터 이름이 드러나서 병사(兵使)로 발탁되었다. 기해년에 군대를 파하자 곽재우는 상소를 올려 시사(時事)에 대해 말하고 이어 병사의 직임을 버리고 떠나갔는데, 변방에 2년 동안 충군(充軍)되는 것으로 논죄(論罪)되었다. 이때부터 벼슬할 생각을 끊고 전후로 제수된 명에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은 왜적을 토벌하느라 관직에 제수되었는 바, 왜적이 물러갔으면 신 역시 마땅히 물러나야 합니다. 뒷날에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경우 마땅히 다시 나와 사졸들의 선봉이 되겠습니다.’고 하였는데, 그 논의가 과격하여서 사람들이 정인홍과 같은 부류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계축년의 화가 일어남에 미쳐서 곽재우는 매번 윤기(倫紀)가 무너진 것에 대해 분해 하였다. 일찍이 정인홍의 도당과 말을 하다가 이야기가 7신(七臣)의 일에 미쳤는데, 그 사람이 7신을 주벌하여야 한다고 하자, 곽재우 역시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그 사람이 크게 기뻐하며 더 자세히 말해 주기를 청하자, 곽재우는 말하기를 ‘7신은 이미 선왕(先王)의 부탁을 받았으니 마땅히 의(㼁)와 함께 죽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아무말 못한 채 구차히 살고 있으니, 그 죄가 크다.’고 하니, 듣는 자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상소를 올려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극력 진달하였으며, 또 일찍이 말하기를 ‘폐론(廢論)이 만약 행해진다면 나 역시 모종의 결단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이에 정인홍 등이 그 말을 듣고서 꺼려하였으나 그가 재간이 있다는 이름이 평소에 드러났고 현재 방외(方外)에다 몸을 의탁하고 있었으므로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어느날 홀연히 바람과 우레가 그의 방을 감싸더니 곽재우가 그 방안에서 갑자기 죽었다. 이에 사람들이 정렬(精烈)에 감응된 것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