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리적거세' 법안을 발의한 박인숙 의원 [출처: 박인숙 의원 홈페이지] |
복수는 나의 것
여론이 법정 처벌 수위의 강화나 가해자에 대한 가혹한 형벌을 요구하는 일은 처음이 아니다. 강력 범죄, 반인도적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분노는 여지없이 쏟아져 나왔다. 가까이는 수원 성폭행 살인사건의 오원춘에게, 유영철에게, 조두순에게. 따지고 보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폭력 가해사실 학생부 기재 논란도 맥락은 같다. 결국 가해자에 대한 확실한 복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성폭행 가해자 물리적 거세 법안을 대표발의한 새누리당 박인숙 의원은 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가해자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지금 피해자의 인권이 더 강조돼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가해자는 고환 하나 없이 사는 데 비해 피해자는 대장, 항문, 성기가 다 없이 사는 것을 왜 무시하느냐”며 “모든 성기능 없이 사는 것보다 고환 하나 없이 사는 게 백 배, 천 배 낫지 않나”고 주장했다. 거세로 대변되는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고, 가해자 인권에 대한 문제 제기를 가해자에 대한 두둔으로 치부하는 오류는 가해자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다. 믹서, 작두 운운하는 발언에서 알 수 있듯 초점은 범죄 사실보다 가해자에 대한 보복에 맞춰진다. 마치 가해자 개인을 잔인하게 처벌할수록 범죄율이 떨어지는 것처럼.
근본적 대책일 수는 없다
그러나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다고 범죄가 확연히 줄어든다는 보장은 없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 집중하는 것만으로 현재 발생하고 있는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를 근절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는 “범죄에 대한 기피, 위축심리가 있기야 하겠지만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전했다. 오히려 강력한 처벌의 결과로 사회적 분노가 극대화돼 더 큰 강력범죄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박진 활동가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은 빈곤의 문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거세’를 통해 남성호르몬을 억제하겠다는 것도 근본적 대책과는 거리가 있다. 강력 성범죄가 오직 남성호르몬의 작용만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호르몬 억제로 성욕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살인과 같은 방법으로 폭력성이 분출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고환이 없어 남성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더라도 뇌의 학습효과로 자극이 오면 발기가 된다. 결국 실효성이 의심되는 처벌대책으로 논란만 가중되고 있는 모양새다.
박진 활동가는 “만약 뇌에서 분비하는 호르몬이 범죄의 원인이라면 뇌를 적출하겠다는 것이냐”며 ‘물리적 거세’논란을 일축했다. 박진 활동가는 “빈곤과 사회안전망의 부족이 폭력범죄를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이같은 자극적 소재의 처벌대책과 형벌 강화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간과한다”고 주장한다.
정작 대책은 없으면서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부모들의 모임 곽희영 대표는 지난 3일, MBC 라디오 ‘김창옥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 출연해 “사회에서는 이슈가 되는 것만으로 이 사건(나주 성폭행 사건)을 특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일상적으로 많이 접해서 이번 사건을 특별하게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강력한 처벌과 사회적 공분이 쏟아지지만 이내 그 분노의 폭발이 멈추고 나면 사회는 사건을 잊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3월 수원 성폭행 살인사건 당시 경기경찰청장이 사의를 표명하며 책임을 지는 듯했지만, 곧 경찰대학 총장과 서로 자리를 맞바꾸며 책임을 마무리했다. 경기경찰청장의 ‘책임 코스프레’는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자연히 대중들의 분노도 피해 갔다.
▲ 처벌강화를 주장하는 포털사이트 덧글들 |
더구나 분노가 사그라지면 정작 피해자 구제대책에도 관심이 줄어든다. 가해자 처벌 말고는 재발방지 대책도 논의되지 않고 있다. 길병원 소아정신과의 조인희 교수는 6일 아침 YTN 라디오 ‘김갑수의 출발 새아침’에 출연해 “성폭행, 성 학대를 당한 소아들을 상담할 수 있는 교육이라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소아 정신과 의사를 포함해 전문 인력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상태”라고 전했다. 성폭행 사건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경제적 지원금도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 7월 발생한 4살 여아 성폭행 사건 피해자의 경우 연간 300만 원의 치료지원이 정부 지원금의 전부다. 나주 성폭행 사건에서도 피해자가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지원금은 구조금 최대 600만 원과 긴급생계비 수백만 원, 그리고 수술비와 치료비 정도다.
‘악마’가 은폐하는 것
사건이 발생하고, 사람들이 분노해 ‘거세’와 ‘사형’같은 처벌강화를 요구하고 나면 다시 다음 ‘목표’가 생길 때까지 조용해진다. 사람들은 증오스런 개인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것으로 잔인한 사건이 발생한 사회에 자신이 일조하고 있음에 대한 면죄부를 획득한다. 잔인함을 잔인함으로 복수하자는 잔인함. 결국 잔인한 폭력은 중첩되고 축적된다.
면죄부는 또 주어진다. 사회적 불안요소를 키워오면서 아무런 안전망도 만들어내지 못했던 권력도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악마 같은 개인이 저지른 일, 우리는 책임이 없다”는 태도. 강력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국가, 정부는 책임자 엄벌을 이야기하며 뉴스를 수사 드라마로 만들지만 정작 범죄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범죄자가 사회에서 어떻게 소외되며 범죄자가 됐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사이코패스, 성도착자 같은 말들이 유행한 것은 범죄의 모든 원인을 오직 개인에게 투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국 ‘그놈’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운다.
박진 활동가는 “대중들은 그렇게 분노를 분출할 수 있지만 공적 영역에서 보복적 대책을 내놓는 어리석음이 있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범죄’ 그 자체와 ‘범인 개인’을 구분하지 ‘않는’ 어리석음이다. 그 범인만 잡고 나면 모든 범죄가 사라지는 것인 양. 진중권 동양대 교수도 자신의 트위터(@unheim)에서 “(물리적 거세는) ‘치유’나 ‘교화’의 차원이 아니라 ‘보복’의 차원에서 얘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고대의 보복론을 부추기는 것은 시민들 사이에 근대적 법의식만 약화시켜, 사회의 인권의식 전반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저서 ‘감시와 처벌’엔 왕을 살해하려던 범인을 공개처형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범인은 광장에서 몸이 조각나며 잔인하게 처형당한다. 범인의 몸이 한 조각씩 해체될 때마다 광장에 모인 대중들은 환호하며 왕의 권력을 받아들인다. 권력은 공고해지고 지속된다. 중세에는 이렇게 잔인함을 전시하는 처형이 숱했다. 중세 중국에는 범인의 몸을 한 점씩 저며내는 ‘능지’란 형벌도 있었다. 능지가 시행될 때마다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어 잔인함을 관람했다. 그리고 그 관람과 전시는 그대로 잔인함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물리적 거세’를 운운하면서 나중에 판결이 잘못된 경우엔 호르몬제를 먹이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발언이 21세기 민주사회에 어울리는 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