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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004>
그날밤 김명천은 세탕을 뛰었는데 마지막 손님은 일산의
나이트크럽에서 분당까지 모시게 된 사모님 두분이었다.
차종은 신형 그렌저. 두분 사모님은 40대 중반으로 이미 취기가
올라 있었지만 점잖았다. 김명천의 나이나 신장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다. 그런데 차가 외곽
순환도로로 접어 들었을때 문득 뒷쪽 오른편에 앉아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다 싫증나, 이민이나 갈까봐."
"나두 그래."
왼쪽 여자가 맞장구를 쳤다.
잠자코 앞쪽을 바라본채 김명천은 긴장했다. 차안은 조용했고,
밤 공기가 차에 부딪치는 소음만 귀를 울렸다.
"숙희는 LA에다 백만불이 넘는 집을 얻었다던데, 집안에
풀장도 있다더라."
오른쪽이 낮게 말을 이었다.
"백만불이면 12억이야. 내 아파트 한채만 팔아도 된다구."
"미국에선 백만불이 큰 돈이지. 흥."
왼쪽의 갸름한 얼굴이 코웃음을 쳤다.
"강남에선 45평짜리 아파트 한채 값이야. 숙희가 한국에 오면
그것 팔아서 30평짜리나 겨우 얻을걸?"
"하긴 은행 융자를 끼고 샀을 테니까."
여자들의 대화에 활기가 띄워졌지만 김명천의 어깨는
늘어졌다.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대화인 것이다. 그때 갸름한
얼굴이 김명천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이민 가고싶지 않아요?"
그리고는 덧붙였다.
"이렇게 대리 운전이나 할바에는."
백미러를 올려다본 김명천은 여자가 아차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김명천이 백미러를 향해 웃어 보였다.
"요즘은 돈이 있어야 이민도 가는것 아닙니까? 저는 비행기
요금도 없습니다."
"돈이 있다면 가겠어요?"
이번에는 오른쪽 여자가 묻자 김명천은 머리를 저었다.
"안갑니다. 사모님."
"왜요?"
"그냥 한국에서 살겠습니다."
"외국 나가 보셨어요?"
목소리만 들어도 여자의 표정은 알수 있었으므로 김명천은
머리를 조금 숙였다. 백미러에 자신의 굳어진 얼굴을 비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답 안할 수는 없다.
"가보지 못했습니다. 사모님."
"나가보면 생각이 달라질거예요."
"그렇습니까?"
"이 좁은 땅에서 아웅다웅하면서 살았던 것이 우습게
보일거라구요."
"아아, 예."
김명천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는지 여자들은 더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어머니는 지금도 파출부를 나가고 있다. 앞쪽을
응시한채 김명천은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꿈은
소박했다. 그저 세 식구가 한집에서 의식주 걱정없이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행상을 하여 모은 돈으로 내 첫 등록금을 내
주었다. 그야말로 피나는 돈이었다. 외국에 나가살다니,
어머니는 펄쩍 뛸 것이었다. 돈을 아무리 벌어도 그렇다.
김명천은 문득 어머니가 지금까지 한번도 세상살이에 불평을
한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쁜 표정의 어머니 모습이 많았다. 중학교때
신문배달을 해서 받은 월급을 어머니한테 줄때가 그랬다.
고등학교때 전교에서 3등을 했을때도 그렇다. 훈련이 센
해병대에 지원해서 첫 휴가를 나왔을때도, 심호흡을 한
김명천은 깊은 어둠에 묻힌 앞쪽을 노려보았다. 어머니는
낙망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서로 의지하고 믿었으며
감사했다. 나는 한국에서 그렇게 살 것이다.
개척자<005>
다음날 오전 9시 5분전에 김명천은 방배동의 단층 주택앞에
섰다. 미리 전화로 연락을 한터라 벨을 눌렀을때 철제 대문에서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대문안으로 들어선 김명천은
현관 앞에 세워진 은색 승용차를 보았다.
"어서 오세요."
현관문이 열리더니 외출복 차림의 30대 여인이 나왔다. 늘씬한
몸매가 더욱 두드러지도록 몸에 붙은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고
운동화를 신었다. 여자 뒤로 40대쯤의 사내가 보였는데 작은
키에 왜소한 체격이었다.
"제가 김명천입니다."
김명천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자 여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잘 부탁해요. 제가 운전이 서툰데다 몸도 좋지 않아서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자는 김명천에게 눈인사만 했을뿐 잠자코 차에 올랐다.
남자는 일본인이다.
사장 서충만의 설명에 의하면 여자는 일본인의 현지처이고
일년의 반은 제주도에서 산다.
그동안 여자가 여러번 대리운전을 이용했지만 서충만이 모두
직접 나섰기 때문에 씀씀이에 대한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뒷자석에 둘을 태우고 거리로 나섰을때 여자가 말했다.
"말씀 들으셨겠지만 호텔 예약은 설악산 호텔에 해 놓았으니까
동해안 관광부터 하기로 해요. 내일은 설악산을 볼테니까."
"알겠습니다. 사모님."
쉬라고 말할때까지 아뭇소리 말고 달리기만 하라는 뜻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오히려 편했으므로 김명철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아직 1만㎞도 주행하지 않은 새차여서 차 안에는 가죽 냄새가
배어져 있었다. 차가 고속도로 진입로에 들어섰을때 여자가
남자에게 말했다.
"그래도 한국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지는 않아요. 여보."
유창한 일본말이다. 사내는 가만 있었지만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과는 언제 어떻게 헤어질지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여자가 힐끗 백미러를 보는 눈치였으므로 김명천은 시선을
들지 않았다.
"난 당신을 배신하지는 않는다는거죠."
"당신이 신뢰를 보인다면 배신하지 않겠어요."
"알고 있어."
사내가 말하더니 짧게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를 배신한 적
없어."
서로 배신하지 않겠다고 장담하는 것을 보면 관계에 문제가
발생한 것 같았다.
그때 여자가 머리를 들더니 김명천에게 물었다. 물론
한국어였다.
"아저씨, 일본어 해요?"
"못합니다."
금방 대답한 김명천이 백미러로 여자를 보았다. 그러나
일본어는 대학때 마스터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아니, 천만에요."
부드럽게 말한 여자가 다시 사내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난 내 인생을 모두 당신에게 맡겼어요. 여보."
여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호소력이 있었다. 그래서 김명천은
하마터면 백미러로 뒷쪽을 볼뻔했다. 여자의 유창한 일본어가
이어졌다.
"하지만 당신에게 부담은 주기 싫어요. 이렇게 한달에 한번씩
만나기만 해도 난 행복해요."
그말을 들은 김명천의 가슴도 메어졌다.
개척자<006>
강릉 경포대에 도착 했을때는 오후 12시 반이었다. 관광호텔
앞에 차를 주차시켜놓고 둘이 호텔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면서 김명천은 점심값으로 2만원을 받았다. 물론 돈은
여자가 준 것이다. 거기에다 3시까지 자유시간을 얻었으므로
김명천은 햄버거와 콜라로 점심을 때웠다. 점심값으로
6000원을 썼으니 1만 4000원이 수입으로 남았다. 맛있는
요리보다 영양가 우선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것은 김명천의
습관이다. 가난과 절약이 몸에 베어 있었지만 김명천은 결코
그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양가 없는 음식에 턱도
없이 비싼 돈을 내고 사먹는 사람들을 질시하거나 비난하지도
않았다. 적응해가는 것이다. 전에는 햄버거도 사먹지 못했다.
지금은 햄버거로 때울 수준이지만 나중에 수십만원짜리 풀
코스 요리를 시켜먹을 기회가 온다면 거침없이 먹을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공중전화 박스는 비어 있었다. 요즘은
휴대전화가 보급되어서 초등학생도 소지하고 다니지만
어머니와 동생 정은은 아직 없다. 김명천이 집에 전화를 했을
때 불안했던 예감이 맞아 떨어졌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집에서 전화를 받았다는 것은 몸이 아파서
일을 나가지 못했거나 일이 없을때 뿐이다. 그 경우에 어머니는
언제나 기운없이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 나, 어머니 아들."
김명천이 소리치듯 말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기운을 차리고는
목소리에 생기가 띄워지곤 했다.
"응, 명천아."
"나, 지금 강릉에 왔어. 회사일로."
"점심은 먹었어?"
"응, 생선회를 실컷 먹었어."
"잘했다."
어머니가 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곧 목소리가 더 밝아졌다.
"난 괜찮다. 오늘은 네가 보내준 돈으로 김장을 하려고 집에
있어."
"김장값은 따로 보내 준다니까."
"두 식구가 먹을건데 몇 포기면 돼."
"주인집에서는 뭐라고 안해?"
"아직 그런말 없으니까 걱정 안해도 된다."
어머니가 자르듯 말했으므로 김명천은 심호흡을 했다. 방
한칸에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독채 전세금이
1000만원이었으니 지방이라고 해서 싼편이기는 했다. 그래서
지난달부터 집 주인이 전세금을 500만원 더 올리든지 집을
비우든지 하라고 독촉하는 중인 것이다. 이것도 정은이를
통해서 겨우 들은 말이다. 어머니는 김명천에게 한번도
내색조차 하지 않았는데 전해준 정은이를 몇날며칠을 두고
혼냈다는 것이다.
"어머니, 두달만 기다리면 내가 5백 만들어 보낼게. 그때는
보너스에다 수당이 함께 나올테니까."
김명천이 호기있게 말하자 어머니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우리가 다른곳으로 이사가면돼. 시골에는 싼 집이 많아."
"그래도 정은이 학교 다니고 어머니 일 나가는데."
했다가 김명천은 말을 그쳤다. 김명천은 어머니에게
운송회사에 다닌다고 했지만 회사 전화번호는 알려주지
않았다. 1년전에 공사장에 나가면서 무역회사에 취직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탄로가 난후에 어머니는 며칠간 식사도 하지
않았다. 다시 어머니가 기침을 했으므로 김명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머니."
하고 불렀지만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고 기침소리도 끊겼다.
송화구를 막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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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긴글 이지만 한가한 시간이라 다읽었습니다...재미있네요...
넘 짧다 그치? ㅎㅎㅎㅎㅎㅎㅎ잼지네 ㅎㅎㅎㅎ
어머니가 너무좋은분입니다.나하고는 전혀 딴판인듯....
와~ 잼지내요. 소설을 보는느낌인데요, 잘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모정의 세월입니다
진한 감동으로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