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사회주의 계열 인사까지 서훈, 추서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중국 만주에는 고초를 당하며 죽어간 수많은 독립투사가 있다.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에 눌러앉은 사람들은 대개 그 손자대에까지 누를 끼쳤다.
개혁개방 이전까지 독립운동가들은 반동적 민족주의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이었다.
누가 잊혀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랴? 아니, 어찌 그들과 그 후손들의 일그러진 삶을 일으켜 세우랴!
세월을 거슬러 꼭 4년 전인 2001년 5월6일. 취재차 자오허(蛟河)시에 갔을 때 김동림(金東林, 1929년 룽징 태생. 전 자오허현 현장)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박상래(朴尙來)라는 생소한 이름이 오갔다.
옌볜과 지린(吉林)시 사이에 끼여 역사학자들의 발길마저 항상 지나치기 일쑤인 자오허 아닌가? 뭔가 있을 것만 같았다. 1990년대 초 자전거를 타고 동북3성과 베이징(北京)까지 만리 길을 누비면서 독립운동 사료를 발굴했던 강룡권(1945~2000) 선생을 떠올렸다. 우선 김동림 선생의 말을 들어보자.
“강룡권 선생께서 지린 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저는 강 선생과 같이 주잔(舊站)으로 갔지요. 박상래의 손녀 박영희(朴英姬, 1953년생)가 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에 대해 너무 몰라요. 다행히 우리가 앞서 1983년 박상래의 딸 박정임(朴貞妊·1917~88)을 만나 조사를 끝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박상래는 완전히 역사에서 매몰될 뻔했지요. 정임 씨는 1925년 당시 독립군 총재 이탁(李鐸·1889~1930, 본명 濟鏞)이 직접 준 상장을 꺼내 보여줬으니까요.”
김동림 선생은 이튿날 그때 복사해 두었다는 상장을 나한테 보여주었다.
褒賞狀
朴尙來
親老家貧志體兼養令聞益彰甚庸嘉尙玆因賞典?授褒狀.
紀元四千二百五十七年九月二十五日
軍政署總裁 李鐸(印)
첫 조선인 교육장 ‘3·1학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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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늙고 집이 가난하나 몸과 뜻을 겸양해 좋은 명성을 널리 떨쳐 심히 찬양할 만하므로 이에 상을 주어 표창하는 바이다.’
이런 내용의 상장을 넣은 봉투에는 수상인은 ‘박상래군계(朴尙來君啓)’로, 발급인은 ‘중앙총재부(中央總裁府)’라고 적혀 있었다.
단기 4257년이면 서기로는 1924년. <자오허시민족지(蛟河市民族志)>에도 “1924년(民國 13년) 9월 어러허(額勒赫) 조선인 거주민 박상래가 조선인 반일단체 군정서에서 발급한 표창장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 상장으로 미루어 당시 이탁은 군정서 총재로 있었고, 박상래 역시 군정서에 소속된 독립운동가임을 알 수 있다. 지역적으로 자오허는 서간도와 연접해 있으므로 군정서 중에서도 서로군정서일 것으로 추정된다.
<자오허시민족지>에 보면 박상래는 1920년 봄 어러허에서 ‘3·1학교’를 세웠는데, 현 내에서 첫 조선인 학교였다고 한다. 그 다음해(1921) 퉁화(通化) 신흥무관학교의 핵심인 여시단(呂時丹, 일명 呂準)·이상룡(李相龍)·이탁 등 반일지사들이 다황디(大荒地)에 와서 검성학교(儉成學校 혹은 學庄)를 세웠다고 썼다.
박상래의 3·1학교에 대해 김동림 선생은 ‘9·18(만주사변) 전 어무(額穆, 지금의 자오허시)현 조선인교육’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서술한 바 있다.
‘민국 9년(1920) 반일 지식분자 박상래는 어러허에서 사립 3·1학교를 창립했다. 초기에는 교사 한 명에 학생 20여 명이었으나 점차 커져 4명의 교사에 학생은 60명으로 늘었다. 외지에서 진보적 청년들이 늘 학교에 와서 강의했고, 군중들한테 반일 사상을 선전했다. 박상래는 학교를 꾸리는 한편 민중을 조직해 야학에서 반일 선전을 했다. 그 공적이 뛰어나 반일단체 군정서에서는 그한테 상장을 수여했다.’(<蛟河市文史資料> 18~19쪽)
당시 3·1학교의 상황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3·1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한 학교임이 분명하다. 그나마 김동림 선생이 쓴 ‘검성중학’이라는 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어 다행스럽다.
원래 남만(南滿)의 조선인 반일단체는 퉁화현 하니허(哈泥河)에서 이회영 선생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서 처음 배양되었다. 1920년 봄 일본 제국주의는 봉계군벌(奉系軍閥)과 결탁해 반일 조직의 거점에 대한 대규모 토벌을 감행했다. 소위 경신년 대토벌이다. 이에 신흥무관학교는 일부분 교도대(敎導隊)와 의용대(義勇隊)를 남만에 남겨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한편으로 학교의 일부 멤버는 어무로 옮겨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했다.
평시 검성학교의 학생은 70~80명, 많을 때는 100명도 더 되었다. 대부분은 외지에서 온 청년학도들이었다. 학제는 4년이었고 학생들은 모두 집단 기숙생활을 했다. 조선어문·영어·산학통편(算學通編)·동국지리(東國地理)·대동역사(大東歷史, 1914년 李相龍編)와 박물과(博物科) 등이 있었고 군체훈련과 반일 사상교육을 겸했다.
반농반독(半農半讀)으로 땅을 개간해 농장을 만들어 반일 경비와 학교 운영 경비를 마련했다. 1924년에 제1기 졸업식이 있었는데, 대회장에 가로 걸린 현수막에는 ‘백산의 단향목은 뿌리가 굳고 잎이 무성하고 황지의 곡식은 봄에 심어 가을에 거두네(白山檀木根固葉茂, 荒地嘉谷春播秋收)’라는 의미심장한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1927년에 이르러 소련과 조선, 관내 등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와서 교편을 잡으면서 검성학교는 청년강습소로 탈바꿈했다. 학과목도 마르크스주의정치경제학·러시아공산주의혁명사·마르크스유물사관·군체과 등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민족 독립운동이 점차 공산당의 항일운동으로 번져갔다.
왜놈 그냥 두고 한민족끼리 암살하는 비극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 어러허는 자오허 일대에서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마을이었다. 민가 200여 호에 교회와 학교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 마을에서도 다황디와 마찬가지로 민족당과 공산당의 갈등이 첨예하게 번져갔다. 그 속에서 3·1 독립운동정신을 고수하던 박상래는 주변 사람에게 독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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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글을 쓰기 얼마 전 나는 한국에서 독립유공자로 살다 세상을 떠난 박소진(朴素振)의 일생을 기록한 <어느 애국지사의 일생>(朴貞一 저)에서 이런 대목을 접했다. 조금 길게 인용해 보자.
“남하마탕부락에 가서 아버님께 마도석으로 간다고 말씀드리니까 그곳에 가면 일가 아저씨 되는 박상래 씨의 유가족이 어디 살고 있는지 알아보라 하셨다. 아버님 말씀에 의하면 만주사변 전 우리 독립군들 사이에 우익분자들을 암살했었는데 박상래 아저씨도 그러한 희생자 중 한 분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소위 독립을 위해 왜놈들과 혈투하고 있는 한국독립군들 사이에 공산분자가 생겨나 우익분자들을 암살했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수인 왜놈은 그냥 두고 한민족끼리 암살한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님의 말씀이니 거짓은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시대로 박상래 아저씨의 유가족을 찾아보겠다고 말씀드리고 대황구에서 휴식 중인 부대로 귀환해 그 다음날 기차를 타고 목단강 쪽으로 출발하였다.”(58쪽)
박소진이 취사일꾼으로 일본군을 따라 무단장(牧丹江)으로 가던 때는 1938년이다. 그리고 박상래가 만주사변 이전에 사망했다고 하므로 세월이 10여 년 흐른 뒤라고 추정된다. 김동림 선생도 1975년 첸진인민공사(前進人民公社, 현재의 첸진향)에서 간부로 일할 때부터 관할구역인 어러허로 늘 다녔으며 박상래의 죽음에 대해 그 정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잔에 박상래의 손녀가 살고 있으니 거기 가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귀띔했다.
이튿날 나는 김동림 선생과 함께 택시를 타고 주잔으로 갔다. 자오허에서 주잔까지는 30리 길이었다. 1983년에 다녀갔고 또 강룡권 선생이 왔을 때도 안내를 했다면서 김동림 선생은 어렵지 않게 그 집을 찾아갔다. 허술한 초가집이었다. 박상래의 손녀 영희씨 부부는 한국으로 가고 없었다. 대신 막내동생 부부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박상래의 막내손자 병화(炳華)는 1963년생으로 생기발랄한 젊은이였다. 인사를 마친 후 나는 할아버지의 상장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의 안색이 금세 흐려졌다.
“분실했습니다. 험악한 문화혁명 시기에도 고모가 가슴에 품고 생명처럼 보관했던 것인데, 넷째형님(炳植)이 갖고 다니다 할아버지 사진하고 함께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 내막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느냐고 다시 물었다. 이번에도 그는 난감한 기색을 지었다.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고모가 잘 압니다. 생전에 살아온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고모가 사망하고 나서 자꾸 꿈에 나타나기에 불길하다고 태워버렸습니다. 요즘에도 자꾸 꿈자리가 뒤숭숭해 농을 뒤적이다 보니 누런 종이에 쓴 글이 있습데다. 오는 추석에 산소에 가서 태우려고 저기 두었는데 보시렵니까?”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더니 처마 밑 어디엔가 쑤셔박아 두었던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받아 펴며 물었다.
“이것은 누가 쓴 거지요?”
“큰고모가 쓴 거라고 하대요. 필체로 보아 작은고모가 쓴 것은 아닙니다. 지난번에 불살라 버린 글하고는 영 딴판이구먼요.”
그날 대화에서 이 대답이 확신을 가진 유일한 것이었다.
누런 종이 위에 빼곡히 적힌 ‘회심곡’
나는 병화의 손에서 조심히 종이를 받아들었다. 얇고 보풀이 인 종이는 조금만 손에 힘을 주어도 부서질 것 같았다.
빗물에 젖어 얼룩진 누런 종이 위에는 내리 줄로 한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제목은 ‘회심곡’이었다. 훈민정음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단 한 자도 해독할 수 없는 옛 조상의 말이 글줄에서 울려 나왔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레 간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구절구절에 담긴 뜻을 해독해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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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고 잘 입는 것 좋기는 좋지만 사람 근본 아니로다. 인생이 탄생하야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전 효도하고 부부간에 예가 있고 형제간에 의리 있고 친구 간에 신(信)을 주어 자제를 교훈하고 인생을 생각하야 이 세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인의예지 삼강오륜이도다. (중략) 타국 가신 낭군님을 시도 때도 없이 생각 말고 시부모님 편히 모셔 어린 자식 양육하야 일평생 지내자면 심중에 굳은 마음 천지같이 완결하여 (중략) 청산유수 흐른 물은 천년 가도 변치 않고 백설 중에 저 송죽은 동지섣달 찬바람에 백절불굴하여 있고 황하수 저 강물은 몇 천년을 맑았는가.”
시라면 시요, 소설이라면 소설인 이 글은 무려 50매 분량이다. 그리고 병화의 말에 의하면 박상래의 맏딸 효임(孝姙·1915~31)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글 전편에는 집을 떠나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며 위로는 시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자식을 키우는 한 여인의 일생이 녹아 있다. 그것도 삼강오륜을 삶의 도리로 알고 지키는 조선의 양반 규수의 형상이라고 하겠다.
‘회심곡’을 통해 박상래가 어떤 인물이고 그 가족이 어떤 집안인가를 짚어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는 유교적 교양을 받은 조선 말기의 선비의 전형이고, 그 가족은 대대로 내려온 양반 가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장에서도 친로가빈 지체겸양(親老家貧 志體兼養)을 전통 미덕으로 가상(嘉尙)히 여겨 찬양한 것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타도의 대상일 뿐이었다. 특히 1920년대 말에 맹목적인 러시아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본제국주의는 물론 전통을 고수하는 국내 민족주의 세력도 공산당의 적이었다.
민족주의 세력도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를 인류평화의 종양으로 보고 제거하려했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 간의 상잔은 비일비재했다. 김좌진 장군이 그렇게 죽어 갔고, 김규식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박상래도 그런 운명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회심곡’ 외에 또 거의 그만한 분량의 글은 이렇게 서두를 떼고 있다.
“망극하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서러워 마라. 명년 삼월 봄이 되면 너는 다시 피려니와 인생 한 번 돌아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이 세상을 하직하고 북망산에 가리로다. 어찌할고 심란험로(心亂險路) 정처없는 길이로다. 불쌍하고 가련하다 언제 다시 돌아오리. 처자식의 손을 잡고 만단설화(萬端說話) 유언하고 정신 차려 둘러보니 약탕관을 버려놓고 지성구효(至誠救效) 극진한들 죽을 병을 살릴쏘냐. 옛 노래에 말 들으니 저승길이 멀다더니 오늘 내게 당하고 보니 대문 밖이 저승이다. 친구 벗이 많다한들 어느 친구 대신 가며, 일가친척 많다 한들 어느 일가 등장하랴.”
이 글은 살아생전에 덕을 많이 쌓으면 죽어서 다시 부활한다는, 죽음이란 또 다른 인생의 시작이라는 불교의 윤회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전생 죄를 벗어놓고 후생 귀히 되어 보세. 부모님께 효도하며 나라에 충성하며 형제화목 부화부순(夫和婦順), 일가친척 신(믿음) 있으면 전생 죄를 벗어놓고 소원성취 되나니라. 부귀빈천 수요한들 모두 다 팔자로다. 사주도망 못하나니 마음 착하게 닦으시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80여 년 전 이 세상을 살다 간 한 처녀의 착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바로 그러한 마음을 가진 가냘픈 여성이었기에 아버지의 죽음을 서러워했고, 그 죄인을 단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그것에 실패하자 흐트러짐이 없었던 자신의 삶을 끝내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초가 한 채, 이불 몇 개가 살림살이의 전부
박상래의 후손들의 말에 의하면 딸 효임은 아버지의 죽음을 해명하려고 당시 만주의 군벌정부에 살인자를 고발했다고 한다. 살인자는 그녀의 집에서 머슴을 살던 젊은 부부라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박상래가 먹은 약을 그들이 달였고 박상래가 약을 먹고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운명했을 때 벌써 그들은 도망가고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처 죄인을 추적하기도 전에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세상이 뒤바뀌었다. 일제의 괴뢰 만주국은 결코 독립운동가의 죽음을 두둔해 주지 않았다. 아버지를 잃은 서러움도 미처 가시지 않은 때에 독립운동의 터전으로 잡았던 만주가 통째로 일본제국주의의 세력권으로 탈락하는 것을 본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고 자살을 택했다. 바로 마을 앞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한 불효를 씻고, 나라를 되찾지 못한 불충의 죄를 씻으려고 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민족의 백의숙제와 같다고 하리라.
박상래한테는 효임 말고도 아들 준태(準兌·1910~64)와 막내딸 정임(貞姙·1917~88)이 있었다. 그들 오누이는 한 집에서 서로 의지하면서 오랫동안 인생 고락을 같이했다. 준태는 아버지 생전에 골병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하는 독립운동에서 위험하고 힘든 일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내 자식을 두고 어찌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부려먹는다는 말인가라는 것이 박상래의 곧은 심성이었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통신연락을 하면서 풍찬노숙(風餐露宿)으로 얻은 냉병으로 나이 30이 되기 전에 폐인이 되었다.
그는 공(孔)씨 집안의 규수를 아내로 맞았다. 이름은 복기(福杞·1921~88), 열여덟 살에 시집이라고 와서 말없이 모든 고생을 참고 견디며 가정을 위해 헌신한 여인이었다. 바로 맏시누이 효임이 쓴 ‘회심곡’의 주인공 형상이라고 하겠다.
그녀가 시집왔을 때는 시아버지와 맏시누이가 없고 가정 살림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다 남편은 속병으로 바깥 일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시어머니(權松內·1881~1958)는 반백 나이이고 과년한 둘째시누이가 있었지만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었다. 오른손으로 무릎을 짚지 않고서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릴 때 어찌하여 침을 잘못 맞아 그리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광복 전에 아들 셋을 낳았다. 모두 일곱 식솔의 생계를 위해 그녀는 일을 해야 했다. 다행히 남편은 일본말과 중국어에 능해 마을에서 둔장(屯長) 일을 보아 일정한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소같이 일해도 살림은 언제나 부족했다. 광복될 때 그들의 살림살이라고는 초가 한 채, 이불 몇 개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오고 토지개혁을 하면서 지주로 낙인찍혔다. 땅 없고 재산이 없기는 해도 가장이 둔장을 했으므로 경영지주라는 것이었다. 역시 청산 대상이 되고 말았다. 온 가족이 이불 하나에 발을 넣고 자야 하는 살림에 재산이라고는 벽거울 하나가 고작이었다. 그것마저 빼앗아 가더니 이튿날 되돌려줬다. 너무했다 싶었던 모양이었다.
“개·돼지보다 못한 삶” 후손들 볼멘소리
그때만 해도 박상래의 독립운동이 죄가 되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 모두 전설적 인물로 추앙하던 독립운동가로서의 위상은 여전했다. 그러나 세월이 감에 따라 색이 바랬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반혁명 숙청운동,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끊임없는 운동 때마다 그들 일가는 핍박을 받았다. 독립운동은 이른바 민족 독립을 목적으로 한 반일투쟁이므로 공산주의 이념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에서였다.
문화대혁명에 이르러서는 지주라는 성분 때문에 계급의 적으로 되어 있는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적국인 한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 하나로 온 가족이 모두 간첩으로 내몰렸다. 가족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일을 해도 인정받지 못했다. 반동이기 때문에 노동 개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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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절름발이 시누이는 아침밥을 짓는다. 올케는 새벽일을 마치고 들어와 대략 조반을 마치고 생산대의 일을 나간다. 낮이면 강제노동을 당하고 밤이면 또 사상교육을 받아야 했다. 박씨 집안에 시집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녀는 갖은 모욕과 멸시와 박해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험한 세월을 지탱해 갔다.
박상래는 아들 회태 씨 하나밖에 없었지만 손자 일곱에 손녀 하나를 두었다. 3년 터울로 1938년부터 줄줄이 태어난 박상래의 손자들 운명 역시 부모와 마찬가지로 기구하였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했다. 남들 다 되는 소년선봉대도 될 수 없었다. 박상래의 손자들은 붉은 넥타이를 매 보지 못했고, 공산주의 청년단에 들 엄두도 못 냈다. 겨우 소학교를 졸업했을 뿐으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라면서 그들은 부모들을 여간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주 신세에 자식은 왜 낳아 개·돼지보다 못한 삶을 살게 하는가라며 볼멘소리도 했다.
회태 씨의 맏아들 병국(炳國, 1938년생)은 스물두 살 되던 해에 북한으로 도망갔다. 중국에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행히 당시 북한에서는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족을 두말 없이 받아 직업도 주고 집도 주었다. 그는 북한에서 철도노동자로 배치받아 결혼하여 산다고 집에 편지를 보낸 후 지금은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둘째 병곤(炳坤, 1941년생)은 1960년 박해를 피해 데릴사위가 되어 멀리 주타이(九臺)로 떠나갔다.
딸 영희(英姬, 1953년생)의 시집살이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1970년대에 원동욱(元東旭, 1952년생) 씨를 만나 결혼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당시만 해도 과년한 처녀였다. 원래 그녀는 시집갈 생각을 접고 살았다. 인물과 몸매는 남보다 뛰어났어도 계급사회에서 지주의 딸이라는 성분 때문에 좋은 배필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개로 만난 원씨는 성분을 따지지 않았다. ‘성분이 무슨 대수인가? 사람이 좋으면 그만이 아닌가’ 하는 그의 말 한마디에 얼어붙었던 그녀의 마음은 녹아내렸다.
그러나 시집간 날 밤부터 그녀는 시어머니로부터 지주의 딸로서 받아야 할 천대를 맛보기 시작했다. 밥도 한상에 앉아서 먹어서는 안 되고 식구들의 한담에 끼어도 안 되었다. 그녀를 감시하고 공산주의를 교육시키는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시어머니였다.
어떤 날은 일하러 갔다 들어오면 식구들은 떡을 해서 먹다가도 감추고 주지 않았다. 용돈 한 푼 주지 않아 옷 한 벌 변변한 것이 없었고 심지어 칫솔·치약도 없어 소금으로 이를 닦아야 했다. 어쩌다 말대꾸 한번 하면 마을의 부녀회에불려가 혼쭐이 났다. 지주의 딸로서 빈농의 집에 시집 왔으면 온순하게 사상 개조를 받아야 할 텐데 어찌 반항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자살을 시도했다. 강물로 걸어 들어가다가 뱃속에서 꿈틀대는 아기의 태동에 걸음을 멈추었다고 한다. 그녀는 진짜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봉사 3년으로 살다 개혁개방된 이후에야 간신히 분가해 끔찍한 생활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녀의 아들 셋은 고모의 무릎 위에서 컸다. 고모는 처녀를 고집한 분이었다. 어릴 때 장애인이 된 그녀는 일생을 집 안에서 보냈다. 마실도 다니지 않았고 장을 보러 가는 일도 없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는 피하고 조용히 집 안에서 길쌈을 하거나 책을 보았다.
시집을 가라고 강권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여자가 시집가면 시부모한테 소반을 받쳐 올려야 하는데 한 손으로 운반할 수 없으니 어찌 며느리의 소임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반동적 민족주의자로 낙인 찍혀
그녀는 기억력이 비상했다. 1983년 김동림 선생이 찾아갔을 때 그녀는 많은 독립운동 노래들을 불렀다고 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여성 독립운동가 윤희순이 지어 보급했다는 <여성의병가>였다고 한다.
1988년 고모가 사망하고 잇따라 친정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 끝내 그녀는 집을 떠나 또다시 죽음을 결심했다고 한다. 죽기 전에 자오허시 바자쯔(八家子)에 사는 먼 일가친척인 박상원(朴相源, 1921년생)의 집으로 갔다. 마침 그 집에서는 기독교 신도들이 모여 기도를 드리는 중이었다.
박상원의 부인 강경애(姜京愛, 1928년생) 전도사가 설교를 하는데 신도들 속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도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제발 저를 죽게 해주시옵소서.’ 그녀의 바람은 죽는 것이었다. 그런데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소원을 빌고 비는데 머릿속으로 밝은 빛줄기가 비쳐 오면서 막혔던 가슴이 확 풀리는 감이 들더란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때 강 권사(강경애 전도사는 현재 권사임)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는 진작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이유를 신앙에서 찾고 있었다. 그 험한 세월에도 어떤 날 이웃 마을에 사는 한족(漢族)들을 만나면 “조선사람 왜 그래? 제 민족끼리 왜 그렇게 못살게들 군다던가요”라고들 하면서 못 믿겠다는 듯 머리를 저었다. 한족 마을에도 지주가 있고 국민당 출신도 있지만 그같이 닦달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박상래의 후손들은 그들이 당한 천대를 사람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어러허로 이사한 공산당 서기가 심보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악마라고 하더라도 사회환경이 마련돼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러했을 것인가?
박상래처럼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에 눌러앉은 사람들은 대개 그 손자 대에까지 화가 미쳤다. 개혁개방 전까지만 해도 독립운동가들은 반동적 민족주의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누가 잊혀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랴? 아니, 어찌 그들과 그 후손들의 일그러진 삶을 일으켜 세우랴!?
김규식·김좌진의 후손들 "기록 없다” 유명 독립투사 후손마저 외면
호은(芦隱) 김규식(金奎植·1882~1931).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그런데 헤이룽장(黑龍江)성 상즈(尙志)시에 사는 그의 후손들은 중국에서 모진 고생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규식은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 맏아들 현욱(顯旭·1901~45)은 알 수 없는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둘째 현성(1904~46)은 1943년 공산당 혐의로 일제의 감옥에 갇혔다 광복과 함께 풀려나 병환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셋째 현이(顯伊·1912~31)는 아버지가 피살되자 원수를 갚는다고 주허로 나갔다 피살되었다. 넷째 현륜(顯崙·1919~45)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남은 것은 딸 현태(顯兌·1915~96) 여사뿐이었다. 그녀의 운명도 불운하기 짝이 없어 외아들 김무위(金茂渭)는 한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출옥 후에는 직업을 얻을 수 없었다. 1993년 내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어머니와 함께 상즈시의 거리를 헤매면서 쓰레기를 주워 연명하고 있었다. 조선족 역사학자 강룡권 선생이 그 사실을 발견하고 한국에 알렸으나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란다. 그 후 그녀는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사망했다. 황천에 가서도 현태 여사는 눈을 감지 못할 줄로 안다. 김좌진의 딸 김산조(金山鳥·1928~2004, 일명 강석·순옥이라고도 함) 여사도 자기의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녀는 딸 위연홍(魏蓮紅, 1950년생)이 김씨 집안의 아들과 선을 보았을 때도 쉽게 허혼하지 못했다. 혹시 가정 성분이 나쁜 것으로 하여 고달픈 시집살이에 시달릴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돈 측에서 “출신이 무슨 상관인가? 사람을 보고 며느리를 삼자는 것”이라고 하는 말에 감동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뒤늦게 김좌진 장군의 딸로,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인정받아 1996년에 딸 연홍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고 김영삼 대통령을 접견하고 선물을 받아오기도 했다. 김규식 선생의 막내딸 김현태 여사의 아들과 손자들은 상즈시에 살고 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김산조 여사는 김좌진 장군의 딸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한국으로부터 경제적 혜택은 전혀 받지 못했다. 그녀는 딸 집에 얹혀 살고 있었는데 입에 겨우 풀칠을 하다 지난해 암으로 사망했다. 김규식이나 김좌진은 모두 역사책에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기록한 분들이다. 그러나 박상래처럼 역사의 음지에 파묻힌 사람들은 결코 적지 않다. 그들이 독립운동을 한 것이 그 어떤 보상이나 후손들의 영달을 위해서는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광복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줄로 안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그 후손들에 대한 대우는 한국의 몫이다. |
첫댓글 매국노의 후손은 땅찾느라고 바쁘고 투사들의 후손은 살기에 바쁘고~나도 투사의 후손이기 때문에 가난하게 사는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건필!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