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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葉周作 - 치바 슈우사꾸 치바 슈우사꾸는 1794년 정월 원단에 리쿠젠(陸前)국 쿠리하라(栗原)군 하나야마(花山)마을 荒谷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출생지는 센다이 氣仙군 氣仙村이라는 설도 있다.
슈우사꾸의 할아버지 吉之丞(요시노죠오)는 이와끼(磐城)국 相馬 나까무라(中村)藩의 검술사범으로서 스스로의 유파이름을 北辰夢想流라고 칭했다.
1778년 무렵 이유있어 하나야마 마을로 이주하여 의술을 업으로하게 되었다.
요시노죠오의 딸은 辛右衛門 成勝(나리까쓰?)라는 의사를 양자로 맞아 3남을 두었다.
나리까쓰는 양부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검의 달인으로서 아이들에게 검을 가르쳤다.
둘째아들인 슈우사꾸는 아명을 於兎松이라 하였으며, 後年 桶町千葉이라고 불린 세째아들 定吉과 함께 탁월한 소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나리까쓰는 1809년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해 고향을 떠나 에도 근교의 松戶라는 곳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름을 浦山壽貞으로 고치고 의사로서 생계를 꾸리며, 셋째아들에게 文武를 겸한 수행을 시켰다.
壽貞은 우연히 松戶 출신의 오노(小野)파 一刀流의 中西도장 출신의 검사인 淺利又七郞義信과 알게되었다.
淺利는 若州 小병藩 에도 저택의 검술사범이었다.
슈우사꾸는 淺利의 도장에서 배우는 도중 스승의 소개로 하타모또인 喜多村 이와미노카미(石見守)의 가신이 되고,
16세에 슈우사꾸라고 개명했다.
오노派 일도류 중서도장은 당시 제자 3,000명이라고 부르는 일본 제일의 대도장으로 명검사를 배출했는데
淺利는 그중에서도 특이한 경력의 인물이었다.
그는 松戶의 빈농에서 태어나 마따시치(又七)이라고 불리던 소년시절에는 모시조개를 팔아 먹고 살았다.
에도(江戶)의 마을을 아침에 일어나 팔러다녔고,
일이 끝나면 중서도장의 한쪽 구석에 앉아 제자들의 연습하는 것을 열심히 보는 것이 일과였다.
그 大도장의 주인인 忠兵衛는 3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경을 하려 오는 마따시치를 보고,
어느날 어떤 생각이 떠올라 門弟한사람과 시합을 시켜보았다.
마따시치는 보고 배운대로 죽도를 들고 마주섰는데 1,2년은 배워야 할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주어,
충병위는 장래성이 있다고 보아 그를 내제자로 삼았다.
그는 즉시 두각을 나타내 6,7년후에는 모든 궁극의 도를 다 배웠다.
이윽고 중서도장의 추천으로 소병藩에 사관(仕官)했으나 모시조개팔이 마따시치를 잊지 않으려고 성을 淺利,
이름을 마따시치로 한 것이다.
슈우사꾸는 그에게서 수행했는데 북진몽상류 수련에 총매진하여 23세 때에 모든 도의 궁극을 다 배웠다.
마따시치는 그가 범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 도장에서의 수업을 그만두고,
옛스승인 중서충병위의 도장에서 다시 기법연마를 시키기로 했다.
중서의 도장에는 先代, 先先代 중서의 문하에서 組大刀(쿠미다찌)의 명인인 타까자끼번의 무사인 테라따,
시합을 시켜서 천하무적인 시라이, 소리없는 검법의 명인인 高柳등 3명이 있었다.
누구나 천하에 강호라는 이름이 있는 검사이다.
천리는 중서도장에 슈우사꾸를 보낼 때, 타일렀다.
[테라따의 쿠미다찌는 그대로 두고, 시라이, 高柳의 두사람 중 어느누구라도 좋다, 10판 승부에서 3판, 세판 승부에서 1판을 칠 수 있게 되면 그대의 기술도 일류의 것이 된다]
슈우사꾸는 중서도장에서 수련을 거듭했다.
태어난 큰 그릇인 그는 선배인 三羽에게 기력에서 뒤지지는 않았다.
시라이는 쿠미다찌와 죽도를 쥐고 하는 시합 검술로 고행을 한 인물로서, 후진양성에는 열심이었으나,
高柳는 초보자도 철저하게 아프게 다루었다.
슈우사꾸는 도장에서 우상화되있는 그들을 처음부터 경쟁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쿠미다찌의 명인 테라따는 자기 목도끝에서는 火炎이 나온다고 말하고, 시라이는 바퀴가 나온다고 했으나,
실은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아니다.
칼끝 세치가 날카롭고, 상대의 검끝을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슈우사꾸는 그들의 기술을 겁내지는 않았다.
또, 高柳는 어떠한 사람과 시합을 해도 자신의 죽도에 상대 죽도를 닿게 하는 일이 없고,
2척, 3척이나 떨어져 승부를 결하는 명인으로 보고 있었다.
상대의 나오는 머리, 또는 찌름을 넣어 결코 나의 몸에 가까이 붙이지 않고,
상대가 한발 나오는 것을 노리고 있다가,
이쪽에서 뛰어들어 치기 때문에타류시합에서 한번도 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찌름등은 호구를 왕왕 벗어나게 찔러, 邪劍의 경향이 있다고 슈우사꾸는 관찰하고 있었다.
게다가 고류는 다른 사람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연습은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기술을 연마하는 것에만 신경쓰고 있었기 때문에
초보자에게도 일부러 맞혀주지 않아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부족하다는 냉정한 분석을 하고 있었다.
슈우사꾸는 테라따의 목도로 하는 쿠미다찌 검법이 호구를 쓴 죽도검도와 시합할 때,
상대의 움직임을 재빨리 보고 선수를 취하는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직접 보고 생각했다.
[쿠미다찌, 또는 形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이다.
죽도타격이 기술이라면 이치와 기술의 겸비를 수행해야만 진짜 승부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맞으면서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뜻은 연습 상대를 아무렇게나 때릴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연습에 임해 자신의 특기가 아닌 기술을 시험해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보통은 연습에서 자신의 특기인 기술만 계속 펼쳐내어, 상대를 압도하고 싶어하지만,
그래서는 숙달이 늦다고 그는 생각한다.
특기가 아닌 기술을 쓰면 처음에는 상대에게 맞고, 찔리고, 매우 형편이 좋지 않지만,
그와 같은 연습을 계속함에 의해 비로소 숙달하게 된다고 깨닫고 있었다.
슈우사꾸는 철저한 합리주의자로서 자신의 기법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미묘한 극의(極意)를 체득해 갔다.
3년간의 수행 뒤, 그는 高柳에게 소리없는 겨눔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숙달되었고,
시라이와도 대등한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슈우사꾸가 중서도장의 면허를 받는 당일, 축하 시합의 상대로 高柳가 뽑혔다.
축하시합에서는 면허를 받는 자의 도장 떠남을 축하해 스승이나 선배가 상대가 되고 꽃을 쥐어주는 것이 관례였으나
고류가 상대인 이상 그와 같은 달콤한 승부는 바랄 수 없다.
초보자인 제자에게도 용서없이 치며, 정을 모르는 검술을 몸에 지니고 있는 고류에게 이기는 데는 실력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시합 상대로 고류가 나선 것은 淺利의 희망에 의한 것이었다.
천리는 애제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하는 것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축하시합에는 승패를 판정하는 심판이 붙지 않는 것이었으나, 이날은 테라따가 심판을 맡았다.
슈우사꾸와 고류는 테라따의 지시로 서로 죽도를 교차하여 섰다.
고류는 일도류의 정규의 겨눔자세를 취하고, 슈우사꾸는 좌상단으로 겨누었다.
고류는 타류 시합에서는 반드시 후의 선으로 상대를 쳐 이겼다.
연습 때 슈우사꾸가 고류에게 진 경우에도 항상 후의 선으로 졌다.
고류는 스스로 나아가 치는 것을 하지 않고 반드시 상대의 나오는 것을 노려 불패의 기록을 쌓고 있었다.
상대보다도 약간 늦게 치면서 대도끝은 상대의 몸에 종이 한장 정도의 빠르기로 먼저 닿는 것이 후의 선이다.
슈우사꾸는 3년간의 수련 중 고류의 기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고류와 같은 중단 청안의 자세로서는 어떻게 쳐도 후의 선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도류의 형에 없는 좌상단을 취한 것이다.
두사람은 조금 발톱 끝을 움직이면서 거리를 재고, 기회를 엿보았다.
슈우사꾸는 여기서 쳐들어가면 기술을 되튀겨버리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몸이 하나의 겨눔자세에 붙어 있지 않도록 조금씩 이동하면서 기합을 넣지도 않고, 정적의 시간이 흘렀다.
큰 도장에 모인 중서충병위 이하 동문 검사들은 숙연히 지켜 보고 있었다.
약 30분이 흘렀다.
슈우사꾸는 돌연 두손 상단의 겨눔에서 피로한 듯이 보이고 오른 손을 놓고 왼손하나로 상단을 취하고 1보뒤로 물러났다.
꾀임의 틈이다.
갑자기 고류의 죽도가 슈우사꾸의 목부근에 번쩍했다.
승부가 났다고 생각된 순간, 슈우사꾸의 한손 상단의 죽도가 고류의 머리에 닿았다.
[서로 쳤다. 무승부!] 테라따가 즉각 외쳤다.
슈우사꾸가 머리를 치고 뛰어든 그 바람에 약 4cm의 마루바닥이 쪼개졌다.
쪼개진 마루는 그날 중에 칼로 오려내 액자에 넣어 후진들의 자극제로 하기 위해 도장에 걸어두기로 했다.
천리도장에 돌아온 슈우사꾸는 일도류의 개량을 생각하여,
천리에게 쿠미다찌를 고치도록 진언했다. 淺利는 슈우사꾸를 도장의 후계자로 정하고 그를 천리家의 양자로 했으며,
조카를 처로 맞게 했으며,사까이藩의 사범자리를 양보했으나,
일도류의 개량에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슈우사꾸는 양부를 따를 것인가,
스스로의 믿는 바에 따를 것인가를 두고 번민을 거듭한 결과,
처와 함께 천리家를 떠날 결심을 했다.
그는 말한다.
[떠날 것인가, 떠날 것인가. 나 참으로 여기를 떠날 수 밖에.
소위 검도의 要義는 다수의 제자를 가르치고 키워 국가를 보위하게 하는 것에 있다.
교련(敎鍊)의 방법이 후진에게 불리한 것을 알면서,
나의 사정(私情)에 못이겨 그것을 고치는 것을 하지 않고,
자기의 소신을 굽혀서 제자를 잘못 교도하는 것따위는 결코 대장부로서 떳떳하지 못하다.
나, 父子간의 의를 끊고 떠나는 것 뿐]
슈우사꾸는 스스로의 검법의 유파를 조부의 북진몽상류에 따라 北辰一刀流라고 이름짓고 일파를 세웠으나
세상의 비난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양부를 버리고 오노파 일도류에 대항하여 새로운 유파를 세운 슈우사꾸는 무사의 대열에 올릴 수 없는 무뢰한이라는 것이었다.
슈우사꾸는 자신에의 비난이 너무나도 큰데 대해 놀랐다. 그
가운데 천리가문의 제자들로서 그를 습격하려고 하는 자도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같은 일도류를 배우는 사람 중에서 골육상쟁하는 것은 보기 괴롭다.
슈우사꾸는 그 열기가 식을 때까지 에도를 떠나 무사 수행의 편력을 하기로 했다.
1820년 27세의 그는 죠오슈(上州) 출신의 요시다가와(吉田川)이라는 스모씨름꾼을 길안내로 하여 타까자끼(高崎)에 갔다.
다시 信州, 고오슈, 스루가, 遠州, 미까와등을 돌아 다시 타까자끼에 돌아왔다.
그는 타까자끼에서 念流의 달인인 小泉源十郞과 시합을 하여 이기고,
소천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소개로 념류의 쟁쟁한 검객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 수개월의 체재중에 백여명의 문하생이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1년여의 타까자끼 체재후에 슈우사꾸는 에도에 돌아와 1822년 1월에 다시 죠오슈로 여행을 떠났다.
보름 정도를 타까자끼의 소천도장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후,
나머지 보름은 伊香保온천의 木暮武太夫方에 두류한다는 식의 여유있는 생활이었으나,
門弟들의 그에 대한 지지는 열렬한 것이었다.
그의 지도방침이 이치에 맞고, 제자의 장점을 끌어내는데에 교묘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죠오슈에서의 그의 명성이 높아진 때에 편액(扁額) 소동이 일어났다.
슈우사꾸가 소천등의 희망을 받아들여 門弟 일동 백여명의 성명를 열거한 액자를 伊香保신사에 봉납하려고 했으나
그 지방의 馬庭念流 일문의 노여움을 샀다.
천여명의 념류 문하생과 슈우사꾸 문하 백여명이 서로 다투어,
난투도 불사할 분위기의 소동을 일으켰으나 슈우사꾸는 법을 지켜 폭발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 지방의 代官의 중재로 화해가 이루어 졌으나 사건의 상세한 점은 瀧澤馬琴이 [伊香保의 額論]이라고 제목붙여 소설로서 내다 팔았기 때문에 치바 슈우사꾸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향보 소동이 해결된 1822년 가을, 슈우사꾸는 에도에 돌아와 북진일도류 도장인 玄武館을 니혼바시(日本橋)에 개설했다.
29세인 그의 교수법은 이치에 맞고 적절했으므로 제자들은 급격히 늘어났다.
북진일도류의 쿠미다찌는 종래의 오노파 일도류의 것에다 자신이 창안한 5본, 아이코다찌(相小太刀)의 쿠미다찌 6본을 보탰다.
또 오노파 일도류에서는 소도에서부터 사범허가증까지 승단제도가 8단계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을
初目錄, 中目錄, 大目錄皆傳으로 했다.
시합에 임하여서는 하단 청안을 본래의 겨눔으로 하고 있는 일도류의 관례에 집착하지 않고 임기응변으로
어떠한 겨눔을 취해도 좋도록 했다.
쿠미다찌의 설명, 劍技의 지도는 실지에 입각하여 평이한 말을 사용하고, 제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유의했다.
일도류 宗家의 전통을 고수하는 중서도장, 천리도장에서 보면, 허락할 수 없는 반역자인 슈우사꾸는 책사라든가 모사꾼등으로 악담을 들었으나,
전해오는 악습을 타파하지 않으면 진보는 없다고 하여 기죽지 않았다.
그 뒤 북진일도류의 청신(淸新)한 검기를 좋아해 입문하는 제자의 수는 대단했으며,
니혼바시의 도장은 비좁아져 3년째에는 칸다의 오타마가이께에 이전했다.
도장의 규모는 장군가 사범인 야규우 도장과 같이 8칸 4면(面)으로, 현관은 ㅅ모양으로 했다.
대지는 3,600평이라는 광대한 것으로서 북진일도류는 에도에서 검법의 쌍벽이라고 불리던 直心影流, 오노(小野)派 일도류를 능가할 기세를 떨쳤다.
넓은 대지 안에는 먼 나라에서 온 수행자나 여러 다이묘로부터 위탁된 門人들을 위해 2층의 기숙사를 지었다.
1851년에는 일족 일문 3천여명의 이름을 적은 액자를 아사쿠사(淺草) 관음당에 헌납해
그가 생애를 통해 키워온 문인의 수는 6천명을 넘었다고 할 정도로 번영을 구가했다.
슈우사꾸의 문하에서 천하에 이름을 드날린 검사의 수는, 海保帆平, 井上八郞, 庄司弁吉, 高坂昌孝 등 십수명에 이른다.
淸州八郞, 有村治左衛門도 그 문하였다.
海保帆平은 죠오슈(上州) 安中藩의 사무라이의 자식이었는데,
치바 슈우사꾸의 도장에서 훈련을 거듭해 19세에 大目錄 면허를 받았으며,
동시에 水戶藩에 500석으로 벼슬해 세상을 놀라게 한 인물이다.
井上八郞은 휴우가(日向)국 延岡城의 두부집 딸의 사생아였다.
아버지는 井上主衛이라는 內藤藩의 중신(重臣)이었으나 친자식으로 부르지 않았다.
八郞은 15세 때 분발하여 에도에 나왔다.
슈우사꾸의제자 定吉이 입문을 원하는 그와 만나 신상 이야기를 듣고 내제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海保와 같은 천재는 아니었으나 슈우사꾸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켜 쉬지않고 연습을 계속했다.
슈우사꾸는 말한다.
[검술을 배우는 자는 초보자일 때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일심불란하게 연습을 하면 자연히 묘한 것을 익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 있어서 단지 일심으로 염불을 하면 자연히 악념(惡念)은 사라지고 선심(善心)이 되며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
검술도 그것과 같은 이치이다.
연습의 수만 쌓으면 자연히 미묘한 영역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
八郞은 海保가 5년만에 대목록 면허를 얻은 것에 비해,
13년을 걸려 겨우 대목록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 뒤의 영달은 눈부셨다.
막부의 講武所 교수가 되고 뒤에 步兵의 우두머리에서부터 보병 부교오(奉行)까지 승진하고,
다시 유격대장을 겸하게 되어 봉록 5천석, 1개월의 수당이 108량이라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되었다.
鏡心明智流 桃井春藏, 神道無念流 齋藤, 心形刀流 伊庭軍兵衛와 나란히
에도 사대도장의 필두에 놓인 오타마가이께 북진일도류 도장의 융성을 불러온 슈우사꾸의 검법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슈우사꾸는 용모가 괴위하고, 신장은 6척에 가깝고, 6촌두께의 바둑판을 한손으로 들고,
50량짜리 촛불을 부채로 부쳐 껐다는 용력이 대단한 사람이었으나 그가 말하는 검법에 호걸풍의 조잡한 경향은 없다.
그의 유고(遺稿) 및 문하생인 高坂昌孝가 저술한 치바先生 直傳 劍術名人法, 히로세眞平이 편집한 검법 비결을 한번 읽으면
슈우사꾸의 검술이론이 그대로 현대 검도의 금과옥조로 될 수 있을 정도로 검의 진수를 정밀하게 설명하여 밝히고 있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검술자 가운데서도 보기 드물게 명민(明敏)한 인물이었던 것은 그것에서 입증된다.
그는 우선 수행에 있어서는 놀람, 두려움, 의심, 헤매임(驚懼疑惑)의 감정을 제어하지 않으면 검술의 숙달은 기하기 어렵다고 한다.
가운데 하나라도 마음 속에 남아 있으면 적의 기선을 제압해 승리를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초보자에게 주는 수행의 최초의 마음가짐은 읽어보아 맥빠질 정도로 평이한 내용이다.
그는 죽도의 사용방법의 좋고 나쁨에 구애받는 일은 없다,
오로지 휘두르는 운동에 익숙하게 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죽도를 상대보다도 빨리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승리를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슈우사꾸는 실전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동작을 신속하게 하는 것을 체득시키고자 한 것이다.
다음에 손잡이의 쥐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많은 수련생들이 오랫동안 단련 연습을 해 보아,
손의 안이 굳은 자, 즉 손잡이 쥐는 방법이 딱딱한 자는 기술이 늦어 진보는 대단히 늦은 경향이 있다.
손의 안이 딱딱하지도, 부드럽지도 않고, 중용을 지키고 있는 자는 동작이 민첩하고 진보가 빠르다.
죽도를 쥘 때는 새끼손가락을 약간 조이고 약지를 가볍게 하며, 중지는 다시 가볍게,
인지는 붙이는 손가락으로 하여 붙이는 정도로 해 둔다.
상대를 치고 찌를 때에 비로소 강하게 잡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도를 활발하고 자유롭게 휘두르기가 어려울 뿐만아니라,
찌름이나 치기를 할 때 칼의 힘이 강하게 되지 않는다]
손잡이를 잡는 방법에 대해 이것만큼 주의깊고 알기쉽게 설명한 사범은 당시에는 슈우사꾸 뿐이었다.
죽도를 쥐고 대결할 때, 두발 위치의 득실에 대해서는 우선, 좌우 발의 거리를 좁게 하라고 한다.
그렇게하면 뛰어들 때 앞으로 크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두발도 함께 가볍게 디디고 움직이는 것이지만, 왼발은 발톱만을 디디고, 뒷꿈치는 뜨게하여,
온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말한다.
왼발의 운동이 자유로우면 상대에게 공격받아도 신속히 진퇴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 상대로부터 몸받음을 받을 때도 이것에 응하여 받아 막고,
교묘히 넘어짐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좌우의 발을 크게 벌리고 뛰어 어느 쪽의 뒷꿈치도 마루에 닿은(두발 모두 뒷꿈치가 마루에 닿은) 발로서는 기술은 자연히 늦고 둔해지며, 보기에 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피아가 검끝을 서로 교차하여 마주섰을 때는 즉시 칼끝 세치로 상대를 몰아, 상대가 만약 나와준다면 즉시 친다,
찌른다라는 기합을 보일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칼끝 세치는 항상 할미새의 꼬리와 같이 흔들어, 끊임없는 위세를 보여 상대의 시선을 흩트리도록 마음먹도록 한다.
연습장에서는 휴식 때에도 기합을 풀지말고 다른 사람의 타격을 주목하여 눈으로보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사람의 교묘한 기술을 본 때는 그것을 기억하고 연습하여 몸에 익히도록 한다.
地연습때는 상대를 타격하는데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받는 것에만 마음을 쏟아가지고는 기술이 향상되지 않고 끝내는 실제로 위력이 없는 죽은 기술만이 몸에 붙게 된다.
격검(擊劍) 숙달의 영역에 도달하는 데는 두가지 방도가 있다.
이치에서부터 수행에 들어가는 자를 甲이라 하며,
갑은 우선 생각을 굴려서 검리를 생각한 뒤 기술을 실제로 익히는 것이다.
기술로부터 들어가는 자를 乙이라 할 경우,
을은 실제의 타격에만 전념하여 검리를 전혀 생각지 않는다.
검법은 검에 의해 공격 방어의 기술에 숙달하는 것을 주안으로 하므로,
그 어느것에 의해서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 된다.
그러나 평소의 의지가 갑에 속하는 사람은 상대의 기선을 관찰하는 것에 예민하고,
기술의 진보는 대단히 빠르다.
이것에 비하여 평소의 의지가 을에 속하는 사람은 상대의 기선을 관찰하는 데 둔하고,
단순히 서로 치기에 심신을 피로하게 하여 실패에 의하여 상처를 계속하여 주면서 오랜 세월을 걸려 겨우 숙달의 경지에 달하게 된다.
따라서, 검법을 닦는 사람은 항상 평소의 뜻을 甲에 두고,
항상 검리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검리를 생각하면서 실기를 단련하면 그 진전은 괄목할 만한 것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검의 이론을 슈우사꾸는 초보자에게 설명했다.
그는 總論에 속하는 검리의 분석에 있어 이미 다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치밀한 전개를 해 보였다.
여기에서 언급된 것은 총론 중 극히 일부이지만 읽어나가는 중에 스승으로서 탁월한 재주를 갖추고 있던 슈우사꾸의 내용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눈앞에 나타나 숨막힐 듯한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선배를 얻은 門弟들은 행운을 기뻐하며 깊이 심복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미야모또 무사시의 병법 35개조, 오륜서에도 실제에 임한 검의 이론이 개진되고 있으며,
그 박력은 비범한 것이 있으나,
슈우사꾸의 이론이 현대인에게 더 친근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키가 큰 사람에게 대하는 법. 상대에게 틈이 없을 때 틈을 만들어 내는 수단.
連勝할 때는 가끔 겨눔에 변화를 줄 것. 서로 청안 또는 서로 하단인 때의 마음가짐.
거리의 마음가짐 등 각론에 걸치는 기법의 설명은 어느것을 읽어도 총명한 스승에게 손을 이끌리어 교시를 받고 있는 때와 같은 도취감 조차 느끼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내용이다.
각론 중에 상대로부터 타격을 받았을 때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이 있다.
[상대가 나의 머리로 치고 오면 그 죽도를 받아 헤치면서 상대의 허리나 머리를 치고, 손목으로 치고 오면
그 검끝을 쳐떨어뜨리고 찌르든가, 머리를 친다.
다시 찔러오면 이것을 스쳐 헤치고 머리나 손목을 친다.
방어와 공격에 여러 기술이 있으나,
위의 세가지를 잘하게되면 나의 기술의 부족함을 한탄하지 않고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타류시합의 마음가짐에는 가벼이 나아가는 것을 삼가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있다.
중요한 시합에 있어서는 상대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몸을 단단히 하고,
상대가 나와 주면 응하여 물러서고, 상대가 물러가면 나아간다.
그리하여 틈을 보여주지 않으면 시합이 종일 걸려도 패배를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상대의 허위(虛威)는 나에게 이득이다]라는 가르침도 있다.
[타류에는 눈을 부라리고 어깨를 펴는 사람이 있다.
아주 심하게 虛威를 부려 나의 용기를 꺾고 승리를 얻으려는 것인데, 전혀 겁낼 것 없다.
그와 같은자에게는 매우 겁낸 듯한 태도를 보여 교만하게 해 두고 비밀하게 그 틈을 노려 한번 찔러 일거에 상대의 기세를 꺾으면 좋다. 이에 반하여 참으로 용기있는 자는 유약하게 보이는데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진검승부의 마음가짐에도 주목할 만한 교시를 하고 있다.
즉, 승리를 얻는데는 상대의 주먹을 조금만 베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 그렇게 하면 상대는 충분히 손잡이를 쥘수 없게 되고, 가령 쥘 수 있다고 해도 충분히 칼을 휘두를 수 없기 때문에 즉각 진퇴가 유곡이다.
슈우사꾸는 劍戒에 대하여 말한다.
1. 검술에 3聲이 있다.
하나는 적에게 알리는 소리로서 이것을 크게하면 적이 두려워 뒤를 쳐오지 않 게 된다.
또하나는 적이 뛰어들어와 치고 찌르고자 한는 생각이 보일 때 내가 큰 소리를 지르면 적은 눈치챘는가?하고 의심하게된다.
이때 치고 들어갈 것.
마지막은 적을 치고 들어갔을 때로서 내가 크게 소리지르면 두려워 위축되어 무리하게 손을 내리게 되며
그 때를 타서 승리를 얻을 것.
2. 또 세가지 꺾기(좌절 = 삼살법)가 있다.
하나는 대도를 죽이고, 하나는 기술을 죽이며 하나는 氣 를 죽이는 것.
대도를 죽인다는 것은 적의 대도를 좌우로 막거나(받치거나) 흔들어서 칼끝 세치를 세워두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하며,
기술을 죽인다는 것은 적이 능숙한 자이므로 2단 찌르기, 두손 찌르기등으로 시험해 보아 그 실패에 개의치 않고
몸근처에 달려들어 발걸기, 몸받음, 비틀어 쓰 러뜨리기등을 3,4번 하여 그 기세를 꺾어 기술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
또 氣를 죽인다는 것은 나 의 분발하여 나아가는 기세로써 위의 기술을 빈발하게 쓰면 용기에 억눌려 기력을 펴지 못하게 되 며 쳐부수기 쉽게 된다.
3. 주저하지 말고 즉각 공격할 때 3가지.
적이 나오는 참. 칼을 받아 멈춘 경우. 적의 공격수단이 다 한 때.
이 세가지는 놓치지 말 것.
4. 心意識이라는 삼요소가 있다.
心이란 전체에 고루 미치게 하는 것. 意란 좌우로 생각하는 것.
識 이란 드디어 보고 정한 바를 행하는 바를 말한다.
적을 치는데는 意가 있는 곳을 칠 것. 흔히 意 는 생각이 일어나는 참으로 아직 망설임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놓친뒤에 치고, 받고, 찌르 는 등을 해도 이미 그 생각이 정해진 뒤이기 때문에 서로함께치기가 되고 만다.
슈우사꾸가 검을 잡는 마음가짐과 기술면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하여 남은 곳이 없는 것은 이 서술로 보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검을 잡고서는 귀신을 능가하는 역량을 갖추고 있음과 동시에 문하의 청년들을 기량에 맞게 훈련하여
좋은 점을 펼치게 해주는 교육의 재능도 갖추고 있었던 합리주의자였다.
근대 검도의 아버리라고 불리움에 걸맞는 인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