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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대학살’ 전모 보고서 100년만에 국내 첫 공개
김연옥 육사교수 日비밀문서 번역“
연료를 사체 위에 둘 때 어떤 부상자가 일어서려고 시도했으나 곧바로 총검으로 찔러 화염 속에서 타 죽게 했다고 합니다.”
이는 캐나다 기독교장로회 푸트 선교사가 1920년 10월 30일 중국 지린(吉林)성 용정(龍井)촌 인근의 한국인 마을 장암동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학살 현장을 조사해 기록한 것이다.
일본군이 저지른 간도참변(경신참변)에 대한 캐나다 선교단의 보고서 등이 100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 공개됐다. 김연옥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최근 번역 출간한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를 통해서다. 김 교수는 “간도출병사는 조선군사령부가 1920년 ‘간도 작전’의 전모를 담아 1926년 일본 육군성에 보낸 비밀문서”라며 “그동안 일부만 알려졌던 선교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고 있어 독립운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1920년 간도에 내려진 비밀지령 “조선인 저항세력을 초토화하라”
100년만에 공개된 ‘간도참변 진실’
“날이 밝을 무렵 무장한 일본 보병의 일대(一隊)가 기독교 마을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짜기 안쪽 방향에 있는 볏단을 쌓아놓은 곳에 방화하고 촌민 일동에게 집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 눈을 마주칠 때마다 사살했고, 반사(半死)인 채로 쓰러져 활활 타오르는 건초 더미에 덮여 금세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타 버렸다. 그사이 어머니도, 아내도, 자녀들도 마을 내 성년 남자 모두가 강제 처형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푸트(W R Foote) 선교사와 함께 간도참변 현장을 목격한 용정촌 제창병원장 S H 마틴 선교사가 1920년 10월 31일 장암동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쓴 ‘장암동 도살 사건’이다. 김연옥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최근 번역해 펴낸 ‘간도출병사’에 부록으로 실렸다. 마틴은 “가옥은 전부 불타버리고 일대가 연기로 뒤덮여 당시(當市·용정촌을 가리킴)에서도 그 불길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며 “나는 불탄 가옥 19채, 무덤 및 시체 36구를 목격했다”고 썼다.
○일본군, 학살 뒤 천장절 축하
마틴 선교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곡지(谷地)와 본가도(本街道) 사이 촌락 중 기독교도가 있는 집을 전부 불태워 버린 뒤 천장절(당시 다이쇼 일왕의 생일인 10월 31일) 축하연에 갔다. 용정촌으로 돌아온 그는 만취한 일본 병사와 마주쳤다. 시가지에는 일장기가 펄럭였다. 마틴 선교사는 이 같은 학살은 “중국 지린(吉林)성 남부의 간도 모든 지역에 적용된다”며 “촌락은 매일 조직적으로 소각됐고 청년들은 사살됐다”고 적었다.
두 선교사의 조사 내용은 그동안 부분적으로 알려졌지만 당시 일본군이 입수해 일본어로 번역한 전문이 그대로 소개된 건 간도출병사가 처음이다.
제창병원 간호부의 엠마 엠 페르소프 주임도 ‘성서(聖書) 행상인 이근식 및 동촌(同村) 조선인 4명 참살(慘殺)’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10월 29일 이른 아침, 일본 병사 약 40명이 용정촌에서 불과 5리 떨어진 마을에 도착해 성서 행상인 이근식이 이웃집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위 사람을 포박했다.” 이근식은 머리가 거의 잘린 채 땅 속에서 발견됐다.
일제 조선군사령부가 기밀문서인 간도출병사에 부록으로 선교사들의 증언을 남긴 의도는 이어지는 ‘변박(辨駁)자료’에서 알 수 있다. 학살을 무조건 부인하는 변박자료는 “기독교 신도들의 집 혹은 교회라고 칭해지는 것을 불태우긴 했으나, 우리 군의 토벌 행동은 국가의 자위(自衛)상 조선의 치안을 소란시키는 불령자를 응징하는 데 있고…” 등으로 일관한다.
○생존자에게 반성과 청원 강요
“교회 겸 학교 및 가옥 수채가 소각되고 30명 살해됨. 그중 23명은 사살되고 나머지 7명은 각자 집에서 타 죽음.”
푸트 선교사가 일본 도쿄의 신학 박사 올만에게 보낸 편지에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이 패한 뒤 청산리에서 벌어진 학살을 기록했다. 그러나 변박자료는 “패잔병(독립군)이 저항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소각한 것 등으로 고의로 조선민을 괴롭게 하려고 소각한 사실은 없다”고 변명했다. 교회와 학교가 불타고 80명이 사살됐다는 ‘운통자’ 마을 학살에 관해서는 “지점이 명료하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없었다”고만 적었다.
변박자료에서는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주민들에게 오히려 사죄하고 일본군의 주둔을 청원하도록 강요한 일도 드러난다.
“장암동 주민 십여 명은 연이어 서명하여 귀순의 뜻을 표하고, 기존의 마을사람 일동이 이 마음가짐을 가지지 못했음을 사죄했다. … 죽은 자는 그들이 이전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응징이므로 불가피한 것이었고 … 우리 군대의 토벌 행위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변박자료는 주민들이 이 같은 청원서를 냈다고 주장했다.
○ 간도 독립군 6000명 이상
1920년 경신참변 당시 일본군 19사단 보병 75연대가 간도에서 독립군과 양민을 학살하는 모습. 이 부대가 만든 옛 사진첩에 실린 것이다. 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제공
간도출병사는 일본군 시각에서 작성한 일종의 전쟁백서다. 당시 작전 개요, 의도, 전황 등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에서도 기존 자료와 비교, 검토할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을 다수 보여준다.
부록 ‘간도지방 불령선인단체 개황도’에는 일제가 밀정을 통해 파악한 간도지방 독립운동 세력이 병력과 함께 나열돼 있다. 특히 홍범도 장군이 이끌던 ‘대한독립군(도독부)’ 근거지 바로 옆에 ‘무관학교’가 표시된 점이 눈길을 끈다. 김연옥 교수는 “대한독립군이 운영하던 무관학교로 추정할 수 있다”며 “대한독립군이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한 것은 기존에는 몰랐던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동안은 정확히 몰랐던 북로군정서 무관학교 위치도 지도에 표시됐다.
다른 부록인 ‘불령선인 토벌계획 요도’는 1920년 8월 하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전 지도다. 역시 밀정 등에게서 파악한 독립군의 병력과 총기 등 무장 규모가 작전구역별로 상세하게 적혀 있다. 일본군이 파악한 독립군 병력은 모두 6000명 이상이다.
김 교수는 “두 지도를 종합하면 당시 서간도에 있던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이어가기 위해 북간도로 많이 이동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개황도 속 독립운동 단체 설명 (1920년 5월 말 시점) ::
[1] 군정서(軍政署): 대종교(大倧敎)의 교도들을 주체로 하고, 가장 급진적이고 과격한 사상을 가졌으며, 군비(軍備)도 비교적 완비됨. 병력 600명, 소총 800정, 탄약 총 한 자루당 200발, 기관총 2정, 권총 폭탄 약간.
[2] 독립군(도독부·都督府): 구(舊) 폭도파에 속하며 무력으로 한국의 독립을 기도하는 단체로 세력 범위가 가장 넓음. 병력 약 1000명, 소총 1000정, 탄약 총 한 자루당 50∼100발, 기관총 권총 탄약 약간.
[3] 광복단(光復團): 이씨조선(李朝)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며, 공자회 계통과 구학파 계통에 속함. 병력 200명, 소총 150정, 탄약 총 한 자루당 50발.
[4] 신민단(新民團): 성리교(聖理敎) 교도들을 주체로 함.
[5] 의민단(義民團): 천주교 교도들을 주체로 한 것으로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음.
조종엽 기자
“간도출병은 명백한 집단학살” 간도출병사 번역 김연옥 교수
“일제의 간도 출병은 명백한 계획적 제노사이드(집단학살)입니다.”
‘간도출병사’를 번역 출간한 김연옥 육군사관학교 교수(42·사진)는 동아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간도출병사를 읽으면 일본 군부가 외무성과 ‘투 트랙’으로 움직이면서 출병 계획을 입안한 것이 드러난다”면서 “간도학살 역시 군부가 단독 행동으로 현지에서 벌인 게 아니라 일본 정부 차원에서 결정하고 자행한 학살”이라고 말했다.
간도출병사는 1920년 청산리전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작성돼 당시의 실시간 전황(戰況)을 전해주는 1급 자료다. ‘간도출병사’에 기록된 비밀작전 지령을 보면 일본군이 애초부터 한국인 마을을 초토화하려 했다는 걸 시사하는 명령이 드러나 있다. 이들의 토벌 목표는 이른바 ‘불령선인’뿐 아니라 ‘가담하는 세력’ ‘반대되는 자’까지 포함해 뿌리를 뽑는 것이었다.
일례로 자료에 담긴 ‘군 참모본부 작전명령 57호’는 “1. 조선군사령관은 …혼춘 및 간도지방에서 불령선인 및 마적과 그에 가담하는 세력을 초토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육군성 송달 ‘육밀(陸密)’ 제218호도 “불령선인의 무리들을 단순히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불령단으로 보지 말 것. …반대되는 자에 대해서는 철저히 타격을 가해 제국이 받게 될 수도 있는 화근을 근절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은 민간인을 학살했으면서도 독립군에 큰 타격을 가하는 데 실패했다. 간도출병사는 “여러 요인에 의해 그들에게 섬멸적 타격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김 교수는 “독립군이 일본군 대부대를 어떻게 잘 피하면서 신출귀몰 했는지를 드러내는 점 역시 읽는 묘미”라고 말했다. 간도출병사가 청산리전투 당시 일본군 사망자를 11명으로 기록한 것에 대해서는 “일제 측이 사상자 자료를 누락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간도출병사’는 실제 적지 않은 피해가 생긴 봉오동전투의 일본군 사상자 역시 ‘약간 명’으로 쓰기도 했다.
김 교수는 “일본군은 ‘출병’ 당시 국경을 넘어 군사작전을 벌이는 불법성을 희석하고 민간인 학살의 만행을 가리기 위해 일종의 방패막이로 형식적으로나마 중국 측의 ‘양해’를 얻었다”면서 “일본군이 중국과의 공동 토벌이라는 협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애쓴 협상 과정이 간도출병사에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선교사도 살해 위협… “간도참변 본보 취재기자도 피살前 협박 가능성”
피살 방증하는 선교사 증언 나와
간도참변(간도대학살) 당시 일본군은 외부의 현장 조사를 막기 위해 기독교장로회 선교사에게도 “현장에 가면 죽여 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간도출병사’에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1920년 10월 31일 장암동 참변을 조사한 푸트(W R Foote) 선교사는 다른 현장을 조사하러 가기 위해 그해 11월 2일 간도 용정촌에서 병참사령관 쓰쓰이(筒井) 소좌와 만났다. 일본군이 장악한 도로의 통행증을 요청했지만 답변은 이랬다.
“병졸이 귀하에게 하는 행위에 대해 나는 책임질 수 없다. 귀하는 …사살 당할 위해에 접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우리 병졸 중에는 인민의 불량(不良) 계급에 속하는 자도 일부 있으므로…즉, 만에 하나 귀하가 사살 당할 경우에는 많은 문제가 야기되며….”
국제 여론 때문에 일본군이 중요시하는 서양인 선교사에게도 이렇게 대응했으니 조선인 기자에게는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동아일보 창간기자이자 논설기자로 간도참변을 취재하러 떠났다가 현지에서 피살된 장덕준 선생(1892∼1920·건국훈장 독립장·사진)은 더 센 협박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신문은 그의 최후에 관해 “밤중이 되어 …일본군은 말(馬)까지 가지고 다시 와서 가자고 강요하여 하는 수 없이 따라간 것인데 그 후로는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일본군은 장덕준을 미워하고 기피하여 그날 밤 밖으로 유인하여 암살한 것이 틀림없다”고 보도했다.
조종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