打成一片 * 불기2535년(서기1991년) 12월 6일 동리산(桐裏山) 태안사에 주석하고 계셨던 釋 청화(釋 淸華) 큰스님께서 신미년(辛未年) 동안거 결재 중이신 스님들께 설하신 귀중한 소참법문입니다.
선가귀감 스물한번째 게송
공부(工夫)가 만약에, 타성일편(打成一片),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면, 타(打)자는 이거 쳐서, 이렇게 뭐 타격, 타자할 때 打로 지금 직역하면 그렇지만은, 말하자면은 영어의. 악센트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한 조각을 이룬다면, 뭐 이런 뜻이죠. 곧 종금생(縱今生)에 투부득(透不得)이라도, 비록, 설령, 금생에 뚫어 얻지 못하더라도, 공부를 투철하게 해 마치지 못하더라도, 이런 소리죠. 즉 설령 금생에 뚫어 얻지 못하더라도, 뚫지 못하더라도, 안광낙지지시(眼光落地之時)에, 안광(眼光), 눈의 빛깔이, 낙지(落地), 땅에 떨어지는 때에, 죽을 때를 얘기하는 것이지. 임종. 임종 시에.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요, 이 눈의 빛이 떨어진다 그래요. 눈이 흐리멍텅~해지고, 좀 이렇게 평상시의 광채를 잃는다고 그러죠. 그래서 임종을 안광낙지(眼光落地)라. 눈의 광명이 땅에 떨어진다. 그러면 인제 땅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고 하는 거죠. 안광낙지지시(眼光落地之時)에 불위악업소견(不爲惡業所牽)하리라, 악업에 견인 되는 바 되지는 아니 하리라. 악업에 이끌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최소한 삼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소리죠, 공부가 타성일편, 쳐 한 조각을 이룬다면, 일념만 성취하더라도 악업에 이끌리지는 않는다. 적어도 삼악도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말이 되겠죠.
마하 까싸빠 장로의 제자 비구 한 사람이 수행을 열심히 해서 정신상태가 극히 고요하게 일념이 된 상태를 성취하였어요. 일념 공부가 된 것이죠.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자기 숙부가 경영하는 금방을 구경하다가 자기도 그같이 부유하고 화려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모처럼 일이 있어서 어떤 일로 숙부 집엘 갔는데, 숙부가 금은방을 경영하고 있었어요. 가니까 온갖 보석이 번쩍번쩍하고, 막 너무 잘 사는 거예요. 부유하고 화려하게, 갑자기 거기에 마음이 끌렸죠. 그래서 그는 비구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사회로 돌아가서 자기 숙부 집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다음에 질이 나쁜 패거리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마침내 도적떼에 들어가서 도적질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쫓겨났죠. 결국은 관원들에게 붙들려서 손을 등 뒤로 묶인 채로 채찍을 맞으며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었어요. 그때 과거의 스승이었던 마하 까싸빠 장로가, 마하가섭이죠. 가섭 존자가 탁발 차 나왔다가 과거에 제자였던 자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 잠시 묶인 손을 풀어준 다음 일렀습니다. “너는 내가 과거에 가르쳐준 수행법을 아직 잊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너는 그때를 기억해서 몸과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일념으로 네 마음을 집중시켜라.” 일어남 사라짐이죠. 원래 처음에 숨을 들이쉬면 아랫배가 일어나요, 그러면 일어남. 또 숨을 내 쉬면은 아랫배가 들어갑니다. 그러면 사라짐.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일어남 사라짐입니다. 모기가 팔뚝을 물었어요. 좌선하고 있는데, 그러면 가렵죠, 그러면 가려움이 일어남. 이렇게 하고 있으면 가려움이 사라져요. 그러면 가려움이 사라짐.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앉아있는데 옛날에 뭐 어떤 기분 나빴던 일, 기분 좋았던 일이 생각나요. 그러면 잡념이 일어남, 하다보면 또 그 생각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잡념이 사라짐.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일어남 사라짐이예요. 거기에다 일념으로 마음을 집중시켰죠. 그는 스승의 말을 따라 마음을 집중시켰고 마침내 일념이 될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사형집행관 앞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극히 고요한 태도로 앉아있게 되었죠. 그러자 이 사형 집행관이 그걸 특이하게 여겨서 물었고, 결국 왕에게까지 보고가 됐습니다. 그래서 이 왕은 자초지종을 듣고, 특별명령을 내려서 도적을 특별사면을 해서 풀어줬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가서 그 사실을 말씀드렸죠. 그러자 부처님께서 도적에게 광명을 놓으시어 마치 그 앞에 계신 듯 모습을 나투어서 게송을 읊었습니다. 가정, 그 욕망의 숲을 떠나 비구, 그 수행의 숲을 택했으나, 수행의 숲을 벗어나 다시 욕망의 숲으로 되돌아갔다. 모두 보라, 욕망의 자유로부터 다시 욕망의 얽매임으로 돌아간 자를! 이런 설법을 들은 과거의 비구는 망나니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태어나고 죽는 현실을 관찰대상으로 삼아서 일념을 이루었습니다. 몸뚱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일어남이죠. 몸뚱이의 일어남. 그러면 죽는 게 뭐예요? 몸뚱이의 사라짐. 하나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죠. 뭐 태어난다고 기뻐할 것도 없고, 죽는다고 슬퍼할 것도 없는 겁니다. 왜냐? 연기법이예요. 이게 다. 일어남 사라짐. 이거야말로 연기법, 진리죠. 그래서 이런 진리를 깨달아서 수다원과를 성취하는 한편 신통력까지 얻었습니다. 기쁨에 충만해서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부처님께 인사를 올리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라한과를 성취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고향 제 3 집 -. 타성일편(打成一片) [1] http://blog.daum.net/mujuseonwon/5911966
다기망양(多岐亡羊)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 떼를 기르다가 양들이 흩어져서 이리저리 가버리는데 그 양을 잡는데 길이 하나만 있으면 잡기가 쉬울 것인데 길이 너무 많으므로 쉽게 잡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길이 많으면 한편은 좋은데 한편 생각하면 어느 길이 옳은가? 선택(選擇) 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어려움을 겪습니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는 중국의 공자(孔子)님, 맹자(孟子)님 같은 분들이 나온 때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도 역시 어느 정도 문명(文明)이 개명(開明) 되어서 무엇이 옳은가 하는, 정치(政治)는 어떻게 해야 하고, 인간 정신(精神)은 무엇인가 하는, 그런 문제가지고 고민 끝에 가지가지의 그런 유파(流波)가 생겼습니다. 인간(人間)의 본성(本性)만 두고도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이라. '인간의 본성은 착한 것이다.' 그렇게도 말하는가 하면, 또 순자(荀子)는 성악설(性惡說)이라. '인간의 본성은 악(惡)한 것이다. 그런 반대 이론도 있습니다. 우리 부처님 법문(法門)도 우리가 본래(本來) 부처이므로 부처가 되어버리면 쉬울 것인데 우리 중생(衆生)들이 그런 업연(業緣)이 하도 복잡해서 또는 과거 숙세(宿世)로부터 지어 내려온 업장(業障)이 두터워 놓아서 우리가 갑자기 성불(成佛)이 안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문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팔만사천 갈래의 법문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와 같이 참선(參禪)할 때는 마땅히 그런 생각, 이런 생각 다 정리 해 가지고서 자기한테 안 맞은 성불(成佛)의 법(法)이 딱 정립(定立)이 되어버려야 공부가 잘 되어갑니다. 여러 스님 네도 만나보고 또는 우리 재가불자(在家佛子)님들을 만나보았습니다만 그 굉장히 자기 수행법(修行法)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회의(懷疑)를 품습니다. 경(經)에 보면 의심(疑心)이라 하는 것은 의심을 잘하면 좋은데 의심을 잘 못하면 그것이 괜히 큰 망상(妄想)이 됩니다. 의시해본(疑是解本)이요 의시혹본(疑是惑本)이라. 의심(疑心) 이것이 우리 마음을 풀어가는, 마음을 여는 근본(根本)이 될 수도 있지만 미혹(迷惑)을 더하는 근본도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參禪) 공부하시는 분들은 역시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꼭 타성일편이라는 술어(述語)와 개념(槪念)을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 때릴 타(打)자, 이룰 성(成)자, 한 일(一)자, 조각 편(片)자. 이것은 모든 그런 천만(千萬) 갈래의 마음을 하나에 다 모아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안 되면 사실은 참선이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 참선할 때는 타성일편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 물질(物質)이 무엇인가? 그 유주무주(有住無住), 유상무상(有相無相), 모든 그런 존재(存在)가 많은 것인데, 그런 존재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적어도 철학적(哲學的)으로 해결이 안 되면 우리가 공부를 바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참선도 이제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교(敎)를 다 보고서 다시 사상이 딱 통일 되어 가지고서 들어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꼭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자기가 이래저래 생각하는 물질(物質)인가, 정신(精神)인가, 또는 무슨 주의(主義)인가, 자연(自然)인가, 모두 그런 것을 하나의 도리(道理)로 해결을 시켜버려야 합니다. 무문관(無門關)은 무문혜개(無門慧開)선사(禪師)가 공부하는 화두(話頭)법을 48칙으로 꾸민 책입니다. 무문관의 대의는 우리 중생들이 보고, 듣고 아는 모든 것이 다 '무(無)'라 하는 없을 무(無)자, ‘모든 것이 다 허망(虛妄)하다’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는 그 관문(關門)을 지금 우리가 넘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그런 무(無)의 관문(關門)을 뚫고 못 넘어가므로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모두가 없다는 무의 관문은 어째서 있는 것인가?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 그냥 억지로 시설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부처님 법문(法門)이나 도인(道人)들 법문은 모두가 다 사실 그대로 말한 법문입니다. 진실(眞實) 법문(法門)입니다. 이른바 우주(宇宙)의 실상(實相) 그대로 말씀하신 법문(法門)입니다. 따라서 무문관(無門關)도 없지 않은 것을 억지로 방편(方便)으로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없는 것이기에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이 번뇌(煩惱)의 경험으로 해서는 무(無)를 못 느낍니다. 삼독심(三毒心)에 가린 흐리멍덩한 우리 중생의 안목(眼目)으로 해서는 무(無)를 못 느낍니다. 현상(現象)만 보고 현상만 실재(實在)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가 모두가 다 마음뿐이요, 만법유식(萬法有識)이라! 모든 존재(存在)가 - 만법(萬法)이라는 것은 바로 존재를 의미하는 것인데 불법(佛法)의 법(法)보다도 일반(一般) 만유(萬有)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바로 식(識)입니다. 이런 법문(法門)도 깨달은 분상에서 볼 때는 욕계, 색계, 무색계 모두가 다 마음뿐인 것이다. 또는 '일체 존재가 다 식(識) 뿐이다.' 그런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우리 중생들의 눈에는 그렇게 안보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만법이 그때는 유색(有色)이라. 오직 다 물질(物質)로 보입니다. 만법이 다 물질로 보이기 때문에 이제 유물론(唯物論)이 생기고 따라서 공산주의(共産主義)가 생기고 모두 다 그렇지 않습니까. 존재(存在)가 모두가 다 부처님 사상(思想)대로 마음뿐이고 식(識)뿐이다. 이렇게 할 때는 유물론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유물 변증법(辨證法)에 의한 공산주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보는 것은 그와 같이 있다고만 봅니다. 그러기에 지금 사회(社會) 형태를 본다 하더라도 대체로 유물주의(唯物主義)가 판치고 있습니다. 유물주의라는 것은 모두가 다 물질 뿐이라는 주의입니다. 내 몸뚱이도 이대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 그때는 최선(最善)을 다해서 봉사(奉仕)를 해야 쓰겠지요. 자기 몸뚱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권속(眷屬)도 중요하겠지요. 따라서 자기 권속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 희생(犧牲)같은 것은 별로 안중(眼中)에 없습니다. 자기가 소속한 단체(團體)를 위해서는 다른 단체는 배격해야 하는 것이고, 자기 나라를 위해서는 -국수주의(國粹主義)라-. 자기 나라만 제일 지상적(至上的)이라고 하는 그러한 주의를 심봉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보는 이 모든 환경(環境)과 물질(物質)이 '실제로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나 성자(聖者)가 보는 것은 그렇지 않게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에 우리 수행(修行)이나 공부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지금 바로 보고 있지가 않습니다.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보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우리 중생(衆生)이 보는 것은 다 허망(虛妄)하다고 부정(否定)을 했습니다.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이라. 우리 중생의 생리적(生理的)인 눈이나 귀나 코나 입이나 또는 촉각, 즉 우리의 신근(身根)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있지가 않다고 부정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보는 색(色)이나,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감촉 그러한 것도 역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주관(主觀)도 없고 객관적인 환경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거기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판단력(判斷力)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식(認識)이나 판단(判斷)이라 하는 것은 우리 주객(主客)이 합해져서 판단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라는 주관(主觀)이 있고 상대(相對)의 대상(對象)이 있고 해가지고 판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우리 육근(六根), 즉 우리 생리적인 근(根)이나 또는 환경적인 그런 대상이나 또는 거기에서 종합적으로 일어나는 식(識)이 있지 않다는 것을 누누이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반야심경(般若心經)같은 그런 소중한 진리(眞理)를 그때그때 놓쳐버립니다. 우리가 신중불공(神衆佛供) 모실 때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생략해 버립니다. 그러나 신중불공 모실 때는 꼭 반야심경 불공을 해야 합니다. 그것보고 신분(神分) 그럽니다. 귀신 신(神)자, 나눌 분(分)자. 어째서 해야 하는가 하면 신중불공(神衆佛供)이라 하는 이것은 삼마(三魔) 외도(外道), 즉 마귀(魔鬼)나 그런 나쁜 기운(氣運)들을 몰아내고서 또 좋은 선신(善神)을 우리가 청(請)해서 가피(加被)를 받게끔 하는 것입니다. 소원 성취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우리 주변에 삿된 기운들이 있으면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기운들을 다 몰아내고서 우리가 선신들의 가피를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쁜 신(神)들을 물리칠 수 있는 그런 법문이 필요합니다. 사람도 나쁜 사람들은 바른 견해가 있지가 않듯이 나쁜 신(神)도 바른 견해가 없으므로 나쁜 신이 됩니다. 천상(天上) 그러면 그렇게 실증적(實證的)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긍정(肯定)하는 사람들은 없다고 봅니다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 저 밖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意識) 정도가 정화(淨化)가 되어서 욕심(慾心)이나 진심(瞋心)이나 치심(痴心)이나, 즉 삼독심(三毒心)이 차근차근 가벼워지면 바로 이 자리가 저 높은 천상(天上)입니다. 탐욕심(貪慾心)이나 진심(瞋心)이나 어리석은 치심(痴心)이 더 무거워질수록 욕계(欲界)의 밑으로 떨어집니다. 지옥(地獄) 그러면 결국 그런 것이 그야말로 완전히 폐쇄(閉鎖)가 되어서 욕심(慾心)뿐인, 진심(瞋心)뿐인, 치심(痴心)뿐인 그런 세계의 의식(意識)을 갖는 존재(存在)가 이것이 지옥(地獄)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보다 훨씬 삼독심(三毒心)이 희박한 가벼운 맑은 존재(存在)가 이것이 천상(天上)입니다. 그것 역시 욕심(慾心)을 완전히 떠나 버리면 색계(色界)인 것이고, 또 물질(物質)의 관념(觀念)을 떠나버리면 이대로 무색계(無色界)입니다. 이런 삼계(三界)를 떠나버려야 비로소 그때는 참다운 깨달음이 온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신중불공(神衆佛供) 모실 때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우면 나쁜 신(神)들은 그냥 물러갑니다. 모두들 있다고만 생각하므로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중생(衆生)들이 삼독심에 가려진 안목으로 있다고만 생각하므로 이제 나쁜 마음을 품습니다. 그러나 나도 원래 허망(虛妄)한 것이고 너도 허망한 것이고 또는 좋다는 것도 허망한 것이고, 이렇게 허망하다고 귀신(鬼神)들이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를 해코지 할 수가 없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한번 외우면 그냥 옆에 있는 사람만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도 정화(淨化)가 되는 것이고 우리 주변도 정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오염(汚染) 그러면 일산화탄소(一酸化炭素)나 이산화탄소(二酸化炭素)나 아황산(亞黃酸) 가스(Gas) 그런 것만 오염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장 짙은 오염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중생의 악심(惡心)입니다. 탐욕(貪慾)의 마음만 품어도 벌써 그 마음이 우리 분위기(雰圍氣)를 오염(汚染) 시킵니다. 선량(善良)한 사람들은 우리 분위기(雰圍氣)를 그 반대로 정화(淨化)를 시킵니다. 따라서 우리 스님 네가 우리 불자님들이 선방(禪房)에서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공부하시는 분들이 누가 악심(惡心)을 품겠습니까. 그 성불(成佛)하겠다 하는, 모든 상(相)을 떠나서 성불로 지향하는 그 마음이 벌써 우주(宇宙)를 정화시킵니다. 이런데 있어서 진묵대사(震默大師)같은 분이 -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임란(壬亂)때 그냥 나가서 칼을 잡고서 의병장(義兵將)으로 싸웠지만 - 진묵스님은 한발도 나가지 않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전장(戰場)엔 한 번도 안 나가신 분입니다. 요즈음 말로 사회(社會) 참여라, 자기 몸으로 참여하는 것을 주장하는 그런 분들한테는 진묵대사(震默大師)같은 분은 애국자(愛國者)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리 불법(佛法)은 그렇게 옅은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칼을 잡고 안 잡고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몸으로 사회에 나가서 그렇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있던지 간에 그 사람 마음이 그 사람 의식(意識)이 얼마만큼 정화(淨化)가 되었는가 그것이 문제(問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중불공을 모실 때에 반야심경을 외우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쁜 귀신은 못 배겨냅니다.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執着)하고 그래서 나쁜 맘이 생기는 것인데, 그런 것이 모두 허망하다고 풀어버리므로 나쁜 마음이 차근차근 풀어집니다. 내내야 나쁜 귀신도 우리와 똑같이 자성(自性)은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불심(佛心)입니다. 다만 잘못 생각해서 마음이 얽히고설키고 해서 나쁜 귀신이 된 것 뿐 입니다. 그러나 그런 귀신(鬼神)들은 이런 몸뚱이가 없습니다. 유체(幽體)라, 보다 미세(微細)한 몸이기 때문에, 미세한 몸일 때는 말을 잘 알아먹습니다. 자기 몸뚱이가 어떻게 밥을 얼마를 먹여야 하고 칼로리(Calorie)를 얼마를 섭취해야 하고, 이렇게 할 때는 우리가 욕심을 내고 하겠지만 그런 유체라는 것은 미세한 분자 같은 몸이기 때문에 밥이나 그런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따라서 말을 더 잘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그 삿된 아귀(餓鬼)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하면 우리 사람보다 더 잘 알아먹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쁜 신들이 있다가도 반야심경을 외우면 그냥 ‘아! 그렇구나. 그야말로 참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은 분들은 거짓말을 절대로 않는 분인데 그 분이 비었다고 했으니까 정말로 비었구나!’ 느껴가지고 물러갑니다. 물러가면 그냥 또 우리 분위기에 있는 선신(善神)들은 부처님 법문을 제대로 다 알아 듣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모여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신중불공(神衆佛供) 모실 때는 꼭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변의 모든 삿된 것을 물리치고 선신(善神)들의 가호(加護)를 받고서 우리가 원력(願力)을 세우고 축원(祝願)을 해야, 그래야 더 훨씬 효과적으로 되겠지요.
-. 타성일편(打成一片) [2] 여담이 너무 길어 버렸습니다만 아무튼 지금 이 사회를 본다 할지라도 모든 병폐, 어떤 누구나가 이 사회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병은 어떻게 퇴치(退治)할 것인가? 그런 방법적인 문제는 다 모호합니다. 우리 종단(宗團)도 그야말로 지독한 병을 앓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느 분들은 제도(制度)를 바꿔야 하겠다. 별스런 말을 다 하겠지요. 그런 것도 일단은 의의(意義)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자세입니다. 감투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몸뚱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단체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에 착(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있는 바와 같이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내 몸뚱이는 산소(酸素)나 수소(水素)나 탄소(炭素)나 질소(窒素)나 그런 각 원소(元素)가 모여서 인연(因緣) 따라 잠시간 이루어져서 지금 변화(變化)해서 마지않고,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감수(感受)하고 우리가 상상(想像)하고 또는 의혹(疑惑)하고 또는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이른바 불교(佛敎) 말로 하면 수(受)와 상(想)과 행(行)과 식(識)과 이런 것들이 모여서 된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런 것이 잠시간 인연(因緣) 따라서 모여져서 즉 말하자면 우리 존재(存在)가 된 것입니다. 내가 어째서 없는가, 오온개공(五蘊皆空)이란 말은 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잠시간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인연생(因緣生)으로 이루어져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瞬間)도 머물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도 고유(固有)한 것이 없습니다. 변동(變動)해서 마지않는 것이므로 이 몸이 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내 마음이 아프다고 생각하고 좋다고 생각하면 그 마음이 지금 자취가 있습니까. 우리가 감수(感受)하는 것이나 상상(想像)하는 것이나 의혹(疑惑)하는 것이나 분별시비(分別是非)가 자취가 없습니다. 결국은 그것이 없습니다. 내가 기분(氣分) 사납다 하면 그 기분 사나운 마음이 어디가 있습니까.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혜가(慧可) 스님이 달마(達磨) 스님한테 가셔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마음이 불안(不安)합니다' 제 마음을 편안(便安)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달마스님께서 '그대 불안한 마음을 내 놓아 봐라!' 가져 오너라. 불안한 마음, 좋은 마음이 자취가 어디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흔적도 없는 것을 다만 우리 습관성(習慣性) 때문에 우리가 괜스레 슬퍼하고 미워하고 좋아하고 하는 것입니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이와 같이 내 몸뚱이나 내 의식(意識), 관념(觀念) 이것이 다 비었다는 것을, 조견(照見)이라. 비칠 조(照)자, 볼 견(見)자. 비추어 봄으로 해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우리 불법(佛法)이나 다른 종교(宗敎)나 철학(哲學)이나 모두가 다 인생(人生)의 행복(幸福)을 위함입니다. 일체 고난을 해탈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을 제거한다고 생각할 때는 딴 방법이 없습니다. 우선 무명심(無明心)의 극단이 되어있는 '나'라는 존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실재로 우리가 느껴야 합니다. 사실은 빈 것인데 우리가 잘못 보아서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따라서 착후백출(錯嗅百出)이라. 백 가지, 천 가지 그런 허물이 나온단 말입니다. 사실은 검은 것인데 억지로 희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와 똑같이 부처님 지혜(智慧)로 볼 때에 또는 현대 양자(量子) 물리학으로 볼 때는 이 몸뚱이는 물질(物質)이 아니라 텅텅 비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화두(話頭)요, 염불(念佛)이요, 복잡하게 공부 않더라도 사실은 반야심경(般若心經)만 잘 보고 느끼고 한다 하더라도 다 깨닫는 것입니다. 다 비었다고 그래서 차근차근 우리 마음을 비워버리면 그것이 허무(虛無)하니 완전히 빈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완전히 비었다고 하면 내 몸이 이렇게 나오고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나오겠습니까. 완전히 빈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 몸도 나오고 다른 것도 나옵니다. 따라서 우선 우리가 잘못 된 것, 잘못 있다고 생각한 것만 그냥 그것만 비워버리면 정말로 실재적(實在的)인 진여(眞如) 실상(實相)이 나온단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나옵니다. 그러기에 앞서 제가 말씀을 내다 말았습니다만 무문관(無門關)의 허두 제일 칙의 평에 이런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오래 구(久)자. 오래오래 공부를 해서 익혀 나가면 순숙이라. 순전할 순(純)자, 익을 숙(熟)자.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무슨 공부든 간에 오랫동안 우리가 익혀 나가면, 자연내외(自然內外), 안 내(內)자, 바깥 외(外)자, 자연히 내 안이나 밖에나 다시 말하면 정신(精神)이나 물질(物質)이나 모두가 하나로 되어버립니다. 처음부터 화두(話頭)를 든다고 해서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공부하시는 분들은 우선 급해서 '저는 자꾸만 그렇게 망상(妄想)이 나옵니다.' 대체로 다 그럽니다만 망상이 전혀 안 나오면 그때는 도인(道人)이겠지요. 응당 망상이 나오므로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범부(凡夫) 하면 범부와 성자(聖者)의 차이는 어떤 것인고 하면은 범부는 이생성(異生性)이라. 다를 이(異)자, 날 생(生)자, 성품 성(性)자. 이것저것 구분해서 우리가 본단 말입니다. ‘나'라고 구분하고 '너'라고 구분하고, 좋다고 구분하고 나쁘다고 구분합니다. 그것보고 범부의 이생성이라고 합니다. 달리 본단 말입니다. 도인(道人)은 어떻게 볼 것인가. 도인은 이생성의 뿌리를 뽑아버렸습니다. 뽑아서 그런 가짜를 안보고서, 그런 망령(妄靈)되게 안보고서 사실의 본바탕을 봅니다. 사실의 본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모두가 다르지 않고 일여평등(一如平等)이라, 여여(如如)하니 모두가 다 - 여여(如如)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면 일체 모두가 다 진여(眞如)와 같다는 뜻입니다. - 같을 여(如)자 두 자를 써서 여여 아닙니까. 여여란 뜻은 일체 존재가 나나, 너나, 좋은 것이나, 또는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진여와 똑같다는 그런 뜻이 여여입니다. 따라서 성자(聖者)는 모두를 다 여여하니 일여평등한 걸로 보는 것입니다. 범부(凡夫)는 이것저것 구분합니다. 따라서 자기가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나라고 구분하고 너라고 구분하고 그렇게 할 때는 이것은 범부의 이생성(異生性)을 못 여읜 분명한 범부입니다. 또 동시에 탐욕심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 - 어리석은 마음 가운데는 무얼 잘 모르고 판단 잘 못하고 그런 것도 포함되나 어리석은 마음의 가장 기본은 무엇인가 하면은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다르지 않은 것을 천지(天地) 우주(宇宙)가 밝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인데 그렇게 못 보는 것은 모두가 다 이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성자(聖者)가 미처 못되면, 견성오도(見性悟道)해서 불성(佛性)을 증명(證明)해서 성자가 못되면 모두가 다 어리석다고 봐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오래오래 닦아 나가면 그때는 우리가 본래(本來)가 부처가 아니면 되겠습니까만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는데 있어서, 부처님 법문에 보면 내훈외훈(內薰外薰)이라. 안 내(內)자, 훈할 훈(薰)자, 밖 외(外)자, 향풀 훈(薰)자, 무슨 뜻인고 하면 내훈(內薰)이라는 말은 우리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한테 법문을 안 들어도 그때는 저절로 차근차근 불성의 훈기(薰氣)가 배어 나온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 전에 한 40대에 어느 법회에 나가서 서투른 이야기를 좀 했습니다. 그 때 공부를 하신 분이 지옥(地獄)에 한 번 떨어진 지옥(地獄)중생(衆生)들에게는 스승도 없고 할 것인데 지옥 중생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못 빠져 나와서 그 곳에만 있겠습니다. 이렇게 질문을 한단 말입니다. 제가 그 때 답변을 못해서 창피를 당했습니다. 헌데 지옥 중생도 지옥에 가서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나옵니다. 어째 나오는 것인가. 지옥에 있는 지옥 중생도 내내야 본바탕은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불성(佛性)은 어디가 가만히 있는 죽은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의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발랄한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은 생명 자체의 법칙으로 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모든 중생(衆生)을 다 성불(成佛)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주(宇宙)의 중력(重力)인 인력(引力)도 모두가 다 그런 소치입니다. 물리학(物理學)적으로 말하면 중력이요 인력인데, 우리 불교(佛敎)적인 뜻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모든 부처님의 원력(願力)인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다 근본자리로 이끄는 힘입니다. 우리가 법회 때마다 끝에 가서 외우는 사홍서원(四弘誓願)도 원칙은 다 그런 뜻입니다. 모든 중생을 다 해탈(解脫)시킨다. 모든 미혹(迷惑)을 다 끊는다. 모든 법문(法門)을 다 배운다. 완벽한 깨달음을 다 얻는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원래 부처님 성품(性品)이 그런 성질입니다. 우주(宇宙)에 존재해 있는 일체존재(一切存在)의 근본 된 본질(本質)이라는 것이 다 그런 성질(性質)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사 잘 못 살아서, 잘 못 생각해서, 잘 못 행동하고 지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세월이 흐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 자기 불성, 자기한테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이 차근차근 그때는 훈기(薰氣)가 배여 나와서 좋아집니다. 마치 그런 것이 탁수(濁水)를 가만 두면 앙금이 가라앉아서 바닥이 보이는 것과 똑같이 원래는 지옥이라 하더라도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그런 불성이기 때문에 설사 잘 못 살아서, 잘 못 느껴서 지옥으로 갔다 하더라도 누가 옆에 가서 제도(濟度)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절로 부처가 되어서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밖에서 부처님 교법(敎法)이 있어 가지고서 인도(引導)하면 좀 더 쉽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불이라는 것이 내훈외훈(內薰外薰)이라. 자기 안에 스스로 자기 불성이 차근차근 훈기를, 향기로운 성불의 훈기를 내 뿜어서 이제 불성 쪽으로 다가서고, 동시에 모든 성자들, 공자나 예수나 석가나 소크라테스나 모두 그런 성인들의 가르침에는 정도(程道)의 차이가 있고 철저하고 덜 철저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본래 마음자리, 본래 진리(眞理)로 우리를 몰아세우는 법문입니다.
-. 타성일편(打成一片) [3] 따라서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우리는 아직은 다 못되었겠지요. 공부가 순숙이 안 되었으므로. 純熟이라는 것은 공부를 아주 순순하게 해가지고 공부가 익어 나간단 말입니다. 익어 나가면 본래가 부처인지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음이 맑고 몸이 가벼워 옵니다. 공부를 하는데 마음도 무겁고 찌뿌드드하고 몸도 천근만근 항시 그렇게 상쾌하지 못하면 그러면 공부가 잘 안 되는 것이지요. 본래 우리 불성(佛性)은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것이 어떻게 무게가 있겠습니까. 물질(物質)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은 겉만 보므로 물질로 보이는 것이지만 그 바닥에서 볼 때는 물질이 아니라 그때는 그야말로 다 불성 뿐 입니다. 범부와 중생의 차이는 거기에도 있습니다. 일반 중생들은 겉만 보는 것이고, 성자는 본바탕을 봅니다. 본바탕에서 보면 다 마음이고 다 부처고 다 식(識)입니다. 그러나 겉만 보면 마음이 안 보이는 것이므로 우리 중생은 마음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모릅니다. 따라서 공산주의(共産主義)같이 모두 다 그때는 유물론(唯物論)을 부르짖습니다. 지금 공산주의(共産主義)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굉장히 위협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위협스러워서 우리가 여태까지 전전긍긍하다시피 하다가 다행히 러시아를 위시한 서구 공산주의의 붕괴(崩壞)로 인해서 조금은 안심이 되나 지금도 역시 국내나 국외의 공산주의라는 것이 굉장히 위협적인 존재로서 우리한테 핍박이 옵니다. 그런 것은 기초가 어디에가 있는 것인가? 과학적 유물주의라, 모두가 다 물질이라 보는데서 온 것입니다. 모두가 다 물질이라고 보기 때문에 아! 사람들이 서로 물질을 좋아하고 서로 많이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가 적당히 통제(統制)를 시켜야 한다. 사실 공산주의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물질이라는 전제 위에서 그대로 가만두면 그때는 서로 경쟁(競爭)해서 그야말로 아수라(阿修羅)같은 세계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철저한 통제를 해 나가야 만이 그야말로 평등(平等) 사회가 되고 자유(自由)가 되고 한다는 그런 주의(主義) 아닙니까. 그 자본주의(資本主義)는 무엇인가? 자본주의도 똑같이 모두가 물질이라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관능적(官能的) 유물주의라, 그런 통제를 별로 않고서 자유경쟁(自由競爭)에 맡겨 버린단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이쪽 세계나 저쪽 세계나 모두 따지고 보면 모두가 물질이라는 전제 위에서 지금 서 있습니다. 저쪽은 과학적 유물주의요, 또 자유민주주의는 관능적 유물주의입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모순(矛盾)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정(家庭)이나 또는 우리가 이렇게 모여 살아가지만 만약 우리가 물질을 존중하고 물질을 중요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몇 번씩 안 싸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통제가 있고, 청규(淸規)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관념(觀念) 자체가 본래 진리에서 보면 있지도 않지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내 물건이 있고, 네 물건이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안 싸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주의, 공자 주의, 예수 주의는 모두가 다 물질이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 가장 분명하게 말씀한 것이 이제 석가모니(釋迦牟尼)의 가르침 아닙니까. 가장 극명(克明)하게 표현한 것이 그것이 금강경(金剛經), 반야심경(般若心經)입니다.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은 제법(諸法) 실상(實相)자리 모두가 다 부처뿐이다. 천지우주가 다 부처님 세계다. 이런 쪽으로 주로 적극적으로 표현 했지만, 금강경, 반야심경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허망(虛妄)한 것이다. 이것은 부정을 주로해서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못 본 것을 부정을 먼저 시켜버려야지 부정을 못 시켜 버리면 우리 공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라. 모든 법(法)이 다 비어 있는 실상에서 보면 그 때는 색(色)도 없고 소리도 없고 이제 다 없습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모든 법이, 모든 이런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참선(參禪) 공부는 있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이것저것 다 글러버립니다. 단체(團體)를 꾸며보나 가정(家庭)을 꾸며보나 다 그때는 불화스럽고 갈등을 우리가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선 공부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모두가 하나의 오직 하나의 - 둘에 상대되는 하나가 아니라 - 우주(宇宙)가 오직 하나의, 오직 한 성품(性品)의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이렇게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우리가 믿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여태까지 여러 가지 배운 것이나 느낀 것이나 모두가 다 있다는 것만 배웠으니까 그렇게 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되풀이해서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구순숙이라는 말이 그렇게 중요하게 우리한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래오래 두고 두고서 다 비었다, 다 비었다. 내가 없다. 내가 없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자기 암시(暗示)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내가 원래 부처다, 부처다, 이렇게 하다보면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염불(念佛)의 본뜻은 그런데 가 있습니다. 본래 부처인지라 자꾸만 부처님 이름을 외우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결국은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내가 자꾸 나쁘다고 생각하고 부정적(否定的)으로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참말로 마음이 어둡고 나쁘게 되어버립니다. 자기 암시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하기 때문에 화두(話頭)나 주문(呪文)이나 염불(念佛)이나 그런 공부는 모두가 다 원래는 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원래 모든 존재(存在)가 하나의 자리를 우리가 구하는 것입니다. 본래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자리를 구한다 하더라도 본래 하나라고 딱 믿고 구해야지 본래 하나라고 안 믿고서 구하면 항시 괴롭습니다. 백년 묵은 체증도 우리가 그 좋은 사약(瀉藥 : 설사약)을 먹으면 그냥 내려갈 수가 있듯이 우리가 그 있다, 없다 - 있다, 없다는 결국은 있다고 생각하니까 없다는 것도 나오겠습니다만 - 그런 이른바 있다, 없다는 병(病), 그런 병이 중생의 병인데 우리 중생(衆生)은 있다, 없다는 그런 관념을 못 떠나면 우리의 병은 가실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병뿐만 아니라 우리 생리적(生理的)인 병도, 마음도, 몸도 빈 것이기 때문에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우리 관념상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그냥 즉시에 우리 마음에, 몸에 가서 반사(反射)가 옵니다. 참선(參禪)할 때에 우리가 여러모로 우리 젊은 분들이 괴로워도 하고 고생도 하실 것입니다. 가장 큰 괴로움이 어디가 있는가 하면은 근원적인 괴로움은 관념상 자기 관념(觀念)을 해결 못하고 있는데 있습니다. 내가 원래 없는 것인데 원래 없다는 생각이 투철해 버리면, 나도 없고 우리 주변도 모두가 다 우리가 보는 것같이 있지가 않고서 참말로 있는 것은 다 불성(佛性)뿐입니다. 그 전(前)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금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사이가 이렇게 공간적(空間的)으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원소(元素)의 차원(次元)에서만 보더라도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공간에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이 없는 공간이 어디 있습니까. 원소의 차원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나와 남은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있지 않단 말입니다. 더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불성차원, 불성 이것은 어디에는 있고 어디에는 없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宇宙) 자체가 바로 불성(佛性)인 것이고, 우주는 바로 불성뿐입니다. 이렇게 확실히 알아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고 화두도 하고 염불도 하는 것과, 이렇게 모르고서 내가 구하는 것이 무엇일까? 깨닫고 보면 위대한 도인(道人)도 되고 무엇을 많이 알고 하겠지? 암중모색(暗中摸索)으로 우리가 하면 맘이 괴롭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선할 때나 무슨 공부를 할 때나 대신(大信)이라. 큰 믿음을 일으킨다. 큰 신근(信根)이 이른바 믿는 뿌리가 없어 놓으면 바른 공부를 못하는 것입니다. 참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은 우리 믿음입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보통 부처님 도리(道理)를 믿는다고 합니다. 부처님 법(法)의 어떤 점을 믿는 것인가?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고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참선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집니다. 무얼 알아가지고 그런 정도의 상대적(相對的)인 문제 가지고 헤아리면 그런 걸로 해서는 우리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 놓아버려서 모두가 다 텅 빈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가사 우리가 심장병(心臟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빈 것인데 심장병만 따로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내 몸뚱이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하면 비어 있는 것인데, 내 세포(細胞)가 다 비어 있는 것인데 아! 심장병이나 암(癌)이 어디가 있다고 보겠습니까. 그러나 사회(社會)에서 하도 많이 듣고 그렇게 배웠으므로 이제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100%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도 역시 공부를 하다보면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오랫동안 순수(純粹)한 마음으로 익히고 익히다 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비어 옵니다. 어느 누구나가 참선(參禪)을 막 배울 때부터서 그냥 시원스럽고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 깜깜하고 그야말로 목구멍도 깔깔하고 어쩐지 호흡(呼吸)도 잘 안되고, 그러나 오랫동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툭 트여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 전체가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냥 쉽게는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 선근(善根)과 이제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그야말로 자기의 하나의 결단심(決斷心)과 공부하는 방법과 모두가 다 상승(上昇)이 되야겠습니다마는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앞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먼저 우리가 믿음으로 해서 부처님 법을 확실히 믿고서 '모두가 다 비었다' 이른바 반야(般若)의 사상(思想),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우리가 가지고 공부를 해야 그래야 참선(參禪)이 됩니다. 반야(般若)가 없어 놓으면 그때는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구순숙(久久純熟) 자연내외(自然內外)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하나의 공부하는 방법을 가지고서 먼저 확실히 제법공(諸法空) 자리를 믿고 그 공(空)은 다만 공이 아니라 - 공(空)을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허무(虛無)가 되어 버립니다. 공의 알맹이, 공의 자체는 그때는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 일체공덕(一切功德)을 갖춘 진여불성이 내 본성(本性)이다. 이렇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 우리 마음이나 몸에 끼치는 공덕(功德)이 굉장히 큰 것입니다. 묵은 병(病)이 설사 있을 때도 정말로 믿는 정도가 확실히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순식간(瞬息間)에 그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 타성일편(打成一片) [4] 인도(印度)에서 이른바 그 심령요법(心靈療法), 그런 것도 보면 그런 걸로 말씀되어 있습니다. 바라문교(婆羅門敎)나 우리 부처님 가르침이나 모두가 다 허망(虛妄)한 것을 말해 있고, 초기 원시불법(原始佛法)도 역시 사념주관(四念住觀)이란 말입니다. 일체(一切)가 다 괴로운 것이고 모두가 다 무상(無常)한 것이고 이 몸뚱이는 결국은 우리가 잘못 보아서 그렇지 참 더러운 것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그냥 이 몸 이대로 좋다, 이 몸 이대로 귀엽다고 생각하므로 우리가 탐심(貪心)을 내고 하겠지요. 그러나 이 몸 이대로는 귀(貴)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깊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더러운 것만 충만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념주관(四念住觀)도 이 몸이 더럽다는 부정관(不淨觀)입니다. 부정(不淨)이라, 우리가 부정한 것을 좋다고 생각하고 구하려고 생각하므로 그때는 고(苦)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몸은 결국은 과학적(科學的)으로 본다면 무상(無常)한 것이고 무아(無我)입니다. 내 몸뚱이가 무상한 것이고 무아인 것인데 자기 소유(所有)가 어디에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사회의 형태도 마땅히 우리 승가(僧家)에서 하는 그런 생활로 앞으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갑자기 받으라 하면 되겠습니까. 먼저 느끼고서 우리 승가(僧家)부터서 모범(模範)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마음부터서 제도(濟度)해서 자기 마음으로 느끼고 해야지 공산혁명 모양으로 억지로 다 그렇게 공평(公平)하게 분배하려고 하면, 그때는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우리가 이상적인 것은 원래 내 것이 없고 아무 것도 내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도 결국은 내 소유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출가한 수행자(修行者)는 자기 평생 내 소유(所有)는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만약 출가한 수행자가 내 소유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고 내 책도 내 것이고 내 사는 집도 내 것이고 할 때는 그때는 수행자가 아닙니다. 사실이 빈 것이므로 사실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해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딱 비우고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분명히 갖추고 있다. 경(經)에도 보면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확신해 버리면 확신은 즉시에 불퇴위(不退位)라! 공부가 후퇴(後退)가 안 됩니다. 나한테도 석가(釋迦)와 더불어서, 예수와 더불어서 모든 신통(神通)을 다 갖추고 있다. 이른바 명행족(明行足)이라. 이른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내가 갖추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내가 아픈 것이나, 내가 모르는 것이나, 내가 부족한 것이나 우리가 부족하게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계발(啓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衆生) 보고는 금덩어리 짊어지고 빌어먹는 거지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 짊어지고 있고 모두가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무량의 공덕을 갖추고 있어 놓아서 어떠한 물질적(物質的)인 소유(所有)가 자기 것이 아니다 하더라도 우리가 조금도 비관(悲觀)할 필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장에 금방 죽는다 하더라도 손해(損害)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 몸뚱이 자기 것이 아닌데 금방 몸 버리면 금방 다른 몸 받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으면 바로 극락(極樂)으로 가는 것이고, 극락은 진여불성(眞如佛性)과 하나가 되어 버리면 그때는 극락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되나 사업(事業)에 실패(失敗)하나, 자기가 죽으나, 자기 이웃, 가까운 사람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나 어떠한 경우도 슬퍼하고, 손해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중생(衆生)의 있지 않은 상(相)만 바꿔지고 변동(變動)이 있는 것이지 본바탕은 그대로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른바 운문(雲門) 스님 말씀대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매일매일 좋은 날이고 좋은 일이곤 합니다. 가부좌(跏趺坐)를 하실 때는 - 가부좌 하시는 것이 공부하기에 제일 좋은 자세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가부좌 한 이 모습이 정삼각형(正三角形) 모습입니다. 기하학(幾何學)을 배워서 아시겠지만 삼각추(三角錐)가 결국은 제일 안정(安定)된 것 아닙니까. 따라서 이 정삼각형 이 모습이 모든 모습 가운데 제일 안정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모아서 이렇게 하나로 가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 모습이 지혜(智慧)가 가장 발동하기 쉬운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용수보살(龍樹菩薩)도 차가부좌자(此跏趺坐者), 가부좌 이것은 최안온불피급(最安穩不疲及)이라. 가장 편안(便安)하고 피로(疲勞)를 모른단 말입니다. 다리를 양쪽으로 서로 엇갈리게 맞 끼우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다만 이 모습을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여도 무방한 것인데 아무튼 가부좌(跏趺坐) 하는 모습이 최안온불피급(最安穩不疲及)이라, 가장 편안하고 가장 피로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차도급자(此道及者)라, 이런 모습이 지혜(智慧)가 발동하기가 쉬운 것이므로 이제 도(道)가 빨리 통(通)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마왕견기(魔王見其) 기심수포(其心愁怖)라, 도(道)가 빨리 되어 가거니 그대는 마왕(魔王)이 두려워서 접근을 못합니다. 가장 안정되고 가장 지혜가 발동하는 그런 모습이기 때문에 이 모습만 보고도 결국은 마구니가 침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금상첨화(錦上添花)로 그야말로 다시없는 큰 힘이 되어서 무서운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부좌(跏趺坐)를 하실 때는 꼭 단정히 앉아서 허리를 구부리거나 그래 놓으면 역시 상하 호흡(呼吸)이 제대로 잘 안 돌아가는 것입니다. 단정히 앉아야 그래야 이제 호흡이 순탄하게 되고 소화(消化)도 잘 됩니다. 이른바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 맑은 기운이 수승(水昇), 물 수(水)자, 오를 승(昇)자, 맑은 기운인 수기(水氣)가 위로 올라가고 화강(火降)이라, 불 화(火)자, 내릴 강(降)자, 따스운 기운이 아래로 내려간다. 시원한 기운이 위로 올라가고 따스운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야 그래야 이제 우리 생리(生理)의 가장 정상적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 호흡(呼吸)도 차근차근 맑아 옵니다. 또는 그 반대로 호흡 공부를 하다 보면 그렇게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그야말로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 시원스런 기운이 올라가고 더운 기운이 내려갑니다. 그래서 좌선(坐禪)할 때에 자기 몸이 좀 거북한 분이나, 또는 좌선 할 때는 오랫동안 하다 보면 자기 호흡이 무슨 원수 같습니다. 호흡이 원수가 되어서 빡빡하고 방이 좀 덥기나 하고 더구나 콧물도 나오곤 합니다. 그런 때는 물론 적당히 조절하면 좋겠지만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좀 해버리면 그런 것이 대부분 다 물러 갑니다. 부처님 경전(經典) 가운데서 아나파나경(阿那波那經)이라, [아나파나]란 호흡(呼吸)이란 뜻입니다. 입식출식(入息出息)이라. 그런 경이 있을 정도로 호흡만 해서 성불(成佛)하는 법(法)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우리 마음 활동과 호흡은 둘이 아닙니다. 마음이 거칠면 호흡도 거칠고 호흡이 고요해지면 마음도 고요해 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 마음 다스리기가 굉장히 어려운 때는 호흡을 간단하게 겸비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맨 처음에 가부좌(跏趺坐) 해서 막 들어앉아서 산란스러운 마음이 안 가시고 밖에서 보는 것이 자꾸만 걸리고 할 때는 가만히 호흡운동을 합니다. 호흡운동(呼吸運動)할 때도 잘 못하면 도리어 병(病) 나기가 쉬운 것이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어떻게 주의해야 하는가 하면 그것은 표준이 있는 것인데 - 좀 지루하시더라도 호흡 문제나 앉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제가 말씀을 좀 더 드립니다만 - 심장세균(深長細均)이라, 깊을 심(深)자, 호흡을 깊게 하고, 길 장(長)자, 호흡을 길게 하고, 가늘 세(細)자, 가늘게 하고, 고를 균(均)자, 호흡을 고르게 하고, 호흡을 깊고, 길고, 가늘고, 고르게 합니다. 이렇게만 주의하면 호흡에 대해서 병이 안 걸립니다. 그러나 억지로 길게 하려고 하고 억지로 가늘게 하려고 하고 그렇게 치우치면 그때는 호흡 때문에 병이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깊고, 길고, 가늘고, 고르게] 그와 같이 하면 무리가 없도록 까지 길게 하면 좋습니다. 그래서 호흡(呼吸)으로 공부하시는 분들이 아나파나 호흡경(呼吸經)을 보아도 좋으나 그 경은 간단한 것이라 거기에서 깊은 구체적인 시사는 얻기는 좀 곤란스럽고 역시 요가수트라(Yoga-sutra:요가경전)같은 것은 순수 호흡만 가지고서 우리한테 가르치는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그것은 파탄잘리(Patanjali)라는 분이 체계를 세운 것인데 [요가수트라]를 보시면 좋겠고, 이쪽 중국권(中國圈)에서는 혜명경(慧命經)이라, 이것은 화양(華陽) 도인 그분이 낸 것인데 약간 과장이 되어 있어 놓아서 우리가 너무나 거기에 치우치면 곤란스럽겠지만 아무튼 참고가 됩니다. 아무튼 요가수트라 또는 혜명경 또는 부처님께서 하신 아나파나경 그런 경에 가서 호흡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런 경을 설사 모른다 하더라도 심장세균(深長細均), 호흡을 [깊고 길고 가늘고 고르게] 이렇게 하시고, 또 한 가지 주의하실 것은 이른바 유식(留息), 그래서 요가에서는 쿤달(Kundal)이라고 합니다만 우리가 숨을 들어 마시면 이렇게 오랫동안 멈춘단 말입니다. 머무를 유(留)자, 숨쉴 식(息)자, 유식(留息)이라. 멈추는 것인데 숨을 좀 멈추고 있으면 숨이 아랫배로 가서 전신(全身)으로 갑니다. 보통 일반 숨들은 이렇게 가슴까지 가서 횡격막(橫隔膜) 미처 못 가고서 나와 버리기 때문에 전신으로 호흡이 못 갑니다. 다만 흡(吸)을 해서 가만히 멈추고 있으면 그때는 호흡이 전신으로 갑니다. 따라서 오랫동안 멈추면 멈춘 만큼 그때는 더 많이 갑니다. 그러나 억지로 너무 오래 멈추면 그도 역시 부작용이 옵니다. 따라서 앞서 심장세균(深長細均) 모양으로 깊고 길고 가늘고 고르게 이러한 모양으로 처음에 무리가 없도록 숨을 들어 마셔가지고 무리 없도록 까지, 가사 5초나 몇 초나 1분이나 그와 같이 멈춥니다. 그렇게 멈추는데 그런 동작을 차근차근 더해갑니다. 가사 오늘은 5초나 숨을 멈추었으면 내일은 1분이나 그와 같이 해서 차근차근 2분 3분 숨을 멈추는 시간을 늘려갑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는 우리 전신(全身)에 가서 숨이 고루고루 다 삼투(渗透)가 됩니다. 그래 버리면 그때는 몸이 시원해 옵니다. 우리 몸이 거북한 것은 호흡이 제대로, 우리 혈액순환(血液循環)이 제대로 안되어서 그러는 것인데 혈액순환(血液循環)이 왕성하고 우리 호흡이 산소(酸素)를 공급해 준다고 생각할 때, 그 때는 우리 몸이 항시 상쾌하고 가볍단 말입니다. 그래서 드디어는 자기 호흡이 딱 끊어져야 합니다. 호흡이 지식(止息)이라. 이른바 삼매(三昧)에 들려면 자기 호흡 소리도 자기 스스로도 의식을 못하고 정작 호흡이 거의 끊어질 단계가 되어 버려야 그래야 이제 삼매에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머리가 무겁다든가 또는 상기가 온다든가 그런 분들은 억지로 화두(話頭) 하려 말고 억지로 염불(念佛) 하려고 말고서 놓아 버리고 호흡만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호흡을 해가지고서 너무 꾸벅꾸벅 혼침(昏沈)이 온다고 생각할 때는 다시 화두도 챙기고 염불도 하는 것입니다.
-. 타성일편(打成一片) [5] 이와 같이 우리 공부인 들은 그때그때 다만 선행적(先行的)으로 믿음이 '모두가 다 조금도 틈도 없고, 조금도 다른 것이 없는 모든 공덕(功德)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이다.' 이렇게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 버릇이 잘못되어서 안 믿어 온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루 공부하면 한만큼 그때는 차근차근 그에 따른 믿음이 더 깊어 갑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확신(確信)을 한 다음에, 믿음을 확립시켜 가면서, 믿음을 확립 시키려면 자꾸만 우리가 부처님 법문(法門)을 되뇌어야 합니다. 아! 모두가 마음 뿐 인데 내가 잘못보아서 좋다고 보고, 궂다고 보는데, 이와 같이 자꾸만 자기를 타이르고 부처님 법문(法門) 쪽으로 우리를 다스려 갑니다. 가다보면 결국은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도 모두가 빈 것이라는 것이 차근차근 인상(印象)이 박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믿고서 그래 놓고서 자기가 자기한테 맞는 법을 골라서 전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이나 다 좋은 것입니다. 주문(呪文)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법, 도인들 법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우리한테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를 진여불성으로 이끌기 위해서 하신 법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꼭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뱀이 허물을 벗듯이 우리 중생의 허물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언제 벗어도 벗는 것입니다. 게으르면 금생(今生)도 못 벗고 이제 내생(來生)도 못 벗고, 몇 천 생 동안 윤회(輪廻) 바퀴를 돌다가 이제 더욱더 고생을 받고 말겠지요. 기왕에 벗을 바에는 금생에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미가 허물을 못 벗으면 성충(成蟲)이 못 되겠지요. 따라서 우리 인간(人間)도 역시 우리 중생(衆生) 허물을 못 벗으면 내내야 참다운 자기(自己)는 못 되는 것입니다. 가짜 자기, 망령(妄靈)된 자기 때문에 자기도 고생하고 남도 고생을 시킨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바로 믿고서 가부좌(跏趺坐)를 하실 때는 그와 같이 꼭 단정히 앉고 또는 긴장하면 긴장하는 그걸로 해서 마음이 그만큼 장애(障碍)가 되는 것이므로 긴장을 하지 말고 긴장을 다 풀어버리고 결국은 단정히 앉아서 - 단정히 앉아야만 호흡(呼吸)도 잘 되는 것이고 동시에 망념(妄念)도 덜하고, 모양 자체가 벌써 사마외도(邪魔外道)를 물리친단 말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안 되겠습니다만 그렇게 하다 익숙해지면 가부좌(跏趺坐)하는 모습은 며칠 동안 있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 공부하실 때는 꼭 그때그때 포행(布行)을 해서 가급적이면 한 시간 동안 앉으시고 나머지 10분 동안 포행해서 풀어버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저희 같이 나이 먹은 사람들은 귀찮으니까 그냥 앉아 있어 버립니다만 사실은 한 시간씩 앉고서 푸시는 것이 좋습니다. 참선(參禪) 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하십시오. 일본(日本)의 선방(禪房)에서는 의무적으로 포행을 시킵니다. 그러나 자기 공부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때그때 알아서 하시는 것은 좋지만 하여튼 가급적이면 한 시간 하시고서 포행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도록 하시고 자기 눈은 그때그때 관법(觀法)을 주로 하시는 분은 눈을 뜨시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관법을 않고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을 하시는 분들은 감고 뜨시는 것은 알아서 하시지만 원칙은 반폐반개(反閉反開)라, 본 듯 만 듯 하는 것이지요. 어디 보는 것도 아니고 안보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정면(正面) 똑바로 보는 것이 훨씬 더 혼침(昏沈)을 덜 합니다. 고개를 아래로 숙여 버리면 그때는 꾸벅꾸벅 혼침이 더 빨리 옵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시고서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우리가 진여불성 부처님을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볼 수가 없지만 모든 관법(觀法)이나 조문(照文)이나 화두(話頭)나 그런 것은 볼 수 없는 우리 중생을 보게끔 하기 위해서 관법이 있고 화두가 있단 말입니다. 가사 일상관(日想觀)이라, 일상관은 서산(西山)을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보고서 공부하는 그런 관법입니다.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는 것을 자꾸만 생각하고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거기에 따라서 마음이 모아지고 정말로 그때는 해와 같은 광명(光明)이 보인단 말입니다. 광명(光明)이 원래 없으면 보이겠습니까만 사실은 원래 빛이 천지우주(天地宇宙)는 우리 중생이 보는 눈부신 그런 빛이 아닌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빛이 항시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하나의 생명(生命)의 빛이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공부하던지 공부가 사무쳐서 정말로 마음이 딱 모아져서 망상(妄想)이 줄어들면 그때는 그에 따라서 차근차근 빛이 비춰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할 때도 역시 내가 공부해 나가면 아주 그 행복(幸福)스러운 진여불성(眞如佛性)의 빛이 비추어 오는구나. 이렇게 기대하고 하는 공부는 손해가 없습니다. 우리가 없는 허상(虛想)을 생각하면 모르겠지만 실지로 빛이 있는지라 빛을 미리 생각하고 하는 것은 공부에 손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광명관(光明觀)이라 또는 일상관(日想觀)이라는 관법(觀法)이 있습니다. 또는 법계관(法界觀)이라. 법계관은 화엄경(華嚴經) 식인데 법계관은 우주(宇宙)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순수(純粹)한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광명(光明)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하는 것도 이제 공부에 손해가 없는 것인지라 다만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은 근본(根本) 믿음이 '내가 지금 한치 앞의 진여불성 자리를 못 본다 하더라도 일체 존재가 어김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이다.' 이렇게 믿고서 화두(話頭)를 하나 주문(呪文)을 하나 염불(念佛)을 하나 관법(灌法)을 하나 그때는 어떤 공부도 무방한 것입니다. 다만 자기 스스로 마음이 혼침(昏沈)이 올 때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 화두나 염불이나 관법을 애쓰고 하는 것이고, 또는 마음이 좀 들뜨면 가만히 놓아 버리고서 그냥 호흡(呼吸)만 해도 무방하고, 따라서 마음이 혼침이 올 때 일으키는 요령 또는 마음이 들뜰 때 마음을 가라앉히는 요령 그런 것은 자기 스스로 해보시면 짐작이 됩니다. 이렇게 해야 이른바 정(定)과 혜(慧)가 쌍수(雙修)가 됩니다. 우리 진여불성 자리는 원래 지혜(智慧)와 선정(禪定)이 같이 온전히 다 원만히 갖추고 있어 놓아서 우리 공부하는 방법도 역시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지혜와 선정의 공부가 같이 되어가야 그래야 이제 진여불성(眞如佛性)하고 빨리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항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로 해서 모두가 다 허망(虛妄)한 것이고 있는 것은 결국은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이다. 이렇게 비추어 보는 반야(般若)의 지혜(智慧),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산란스럽지않게 하고 진여불성을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마음을 이렇게 이어간단 말입니다. 그 마음을 지속시키는 그것이 이른바 참다운 삼매(三昧)로 우리 마음을 유도(誘導)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이른바 정혜쌍수(定慧雙修)가 됩니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語錄)의 대요가 돈오점수(頓悟漸修)라, 먼저 문득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고서 그 다음에 차근차근 거기에 입각해서 닦아라 하는 것입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나 돈오돈수(頓悟頓修)나 원래 똑 같은 뜻입니다. 해석상의 차이 뿐인 것이지. 그리고 정혜쌍수(定慧雙修)라. 도서(都序)나 화엄경(華嚴經)이나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語錄)이나 모두가 다 대요(大要)가 무엇인가 하면은 돈오점수(頓悟漸修)하고 정혜쌍수(定慧雙修)입니다. 우리가 문득 자기(自己)나 일체존재(一切存在)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부처다. 이렇게 문득 깨달아 놓고서 아직 증명(證明)은 범부(凡夫)이므로 못했겠지요. 그래 놓고서 우리가 힘 따라서 그 자리를 닦아 나아간단 말입니다. 닦아 나가되 정혜쌍수(定慧雙修)라, 모두가 부처라는 그런 반야의 지혜를 놓치지 않고서 그 지혜를 간직하면서 정(定)이라. 정은 선정(禪定)이라는 정(定) 자입니다. 반야의 지혜를 지속시키는 것 보고 정(定) 그럽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제 지관균등(止觀均等)이라, 지(止)와 관(觀)과 어우러지는 것이고 정(定)과 혜(慧)가 같이 어울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같이 되어야 마치 부처님 경전(經典)이나 논장(論藏)에 그런 비유가 '새가 양쪽 날갯죽지가 있어야 잘 날고, 달구지의 바퀴가 양쪽이 있어야 잘 달리듯이 우리 공부도 역시 본래 달구지에 양쪽 바퀴가 있고 새도 본래로 날갯죽지가 두 개 있듯이 우리도 역시 본래불성(本來佛性) 가운데는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와 선정(禪定)이 온전히 갖추어 있어 놓아서 그렇게 거기에 맞게끔 공부를 해야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과 계합(契合)이 잘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하시되 이제 음식(飮食)도, 음식 이것이 우리 공부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너무 말씀이 길어 갑니다만 자주 말씀 드릴 수 없어서 제가 생각 난 김에 말씀 드립니다만 음식을 많이 먹으면 그야말로 참 그런 원수가 없습니다. 공부할 때는 항시 우리 위장(胃腸)이 좀 빈 듯한 그렇게 되어야 혈액순환(血液循環)이 빠르고 몸이 가벼울 것인데, 위(胃)에 가서 무엇이 많이 들어 있어 놓으면 산소(酸素)가 뇌(腦)에서 위장의 음식을 소화(消化) 시키려고 위장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면 결국은 머리도 무겁고 혼침(昏沈)도 오고 그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많이 먹어 놓으면 그때는 의래 식곤증(食困症)이 옵니다. 음식과 우리 공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관계를 잘 모른 사람들은 그냥 아! 기운(氣運) 타가지고 화두(話頭)를 많이 하려면 고기도 먹어야 하고 다른 음식도 많이 먹어야 한다고 그러지마는 그런 분들은 정말로 뜨겁게 생명(生命)을 내 던지고 공부를 해 본 경험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또는 부처님 말씀은, 부처님 계율(戒律)은 모두가 다 우리 중생들의 공부를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거짓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우리 중생을 앞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의 허물을 벗겨서 성자(聖者)의 몸이 되고 성자의 마음이 되게끔 하기 위해서 있는 법문(法門)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적게 먹으라고 했으면 적게 먹어야 합니다. 따라서 될 수록 배가 고플 정도로 잡수시면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공부가 잘 되어 갑니다.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계(戒) 받을 때도 오계(五戒)에는 없지만 사미십계(沙彌十戒)에는 역시 불비시식(不非時食)이라. '때 아닌 때 먹지 말라.' 물론 지금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지만, 모두가 계율(戒律)로 설해도 그냥 잃어버리고 설하시는 분도 지금은 적당히 하면 되겠지 하지만 부처님 경전(經典)에서 하신 말씀은 모두가 다 꼭 우리 중생(衆生)을 성불(成佛)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때 아닌 때라는 것은 결국 오후(午後)는 모두가 때 아닌 때입니다. 때 아닌 때에 먹어 놓으면 무엇이 있는 것인가? 오후에 안 먹어 놓으면 어떠한 공덕이 있는 것인가? 소음(少淫)이라, 음탕(淫蕩)한 마음이 줄어들고, 소수(少睡)라, 잠이 줄어들고, 득일심(得一心)이라, 마음이 하나로 빨리 모아지고, 무하풍(無下風)이라, 몸에 풍이 안생기고, 신득안락(身得安樂)이라, 몸이 안락스럽고, 이것이 다 중후불식유오복(中後不食有五福)으로 부처님 경전에 명문화(明文化) 되어 있습니다. 우리 젊으신 스님 네들은 이성(異性)의 음욕(淫慾) 때문에 항시 괴로움을 받는 것입니다. 혈기(血氣)가 왕성할수록 더욱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 내 음욕을 줄일 것인가? 이런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고기를 많이 안 먹고 기름기 있는 것을 많이 안 먹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그런데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음욕(淫慾) 줄어들고, 욕심(慾心) 줄어들고, 잠 줄어지고 합니다. 우리가 백 근, 이백 근 무거운 짐을 지고 어디를 갈려면 모르겠지만 우리가 공부하려고 생각하면 많은 활력이 필요치를 않습니다. 따라서 갑자기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려면 장애(障碍)가 있을 것입니다만 아무튼 우리들은 그런 줄을 알아야 합니다. 알고서 공부를 해야 그래야 이제 손해가 안 가는 것이고 그래서 백장청규(百丈淸規)에도 역시 조죽중재(朝粥中齋)라, 아침에 죽을 먹고 낮 한 때 재를 먹고 말입니다. 오후(午後)는 안 먹는다는 말입니다. 작업(作業)을 할 때는 우리가 조금 간식(間食)을 먹습니다만 그러나 오후불식(午後不食) 이것이 원칙입니다. 원칙이나, 아! 지금 사람들은 근기(根機)가 약하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 지금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에 비해서 근기가 절대로 약하지 않다고 봅니다. 두뇌(頭腦)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훨씬 더 영리합니다. 지금 장수(長壽)하는 것을 보십시오.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였는데 이제 한국(韓國)도 평균 수명이 70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때에 지금 사람들이 근기가 절대로 약하지가 않습니다. 다만 자기 몸 관리를 너무 과다하게 합니다. 너무 많이 먹고 함부로 합니다. 따라서 어디 가서 공부하던지 간에 우리 불자님들이 금생(今生)에 성불(成佛)하려고 마음먹을 때는 꼭 음식(飮食)은 항시 명심해서 우리가 염두에 두고 부처님 계율(戒律)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겁초(劫初)에 인간(人間)들은 그때는 음식(飮食)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필요가 없는 것인가? 겁초 인간은 몸이 광명(光明)이기 때문에 이런 몸이 아니기 때문에 그때는 음식의 섭취가 필요치가 않단 말입니다. 차근차근 오염(汚染) 되어서 이렇게 각 원소 집합체인 세포(細胞)가 우리 몸을 이루면서부터 이제 에너지 소모가 되므로 보충하기 위해서 음식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도 꼭 필요할 정도로 도인(道人)들이 우리 생리(生理)를 관찰(觀察)해서 계율(戒律)을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법문(法門)에 대해서 어떤 면에 대해서든 생리(生理)나 심리(心理)나 모두 다 전폭적인 시비(是非)를 합리적인 의미를 가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먼저 선오후수(先悟後修), 돈오돈수(頓悟頓修) 말입니다. 먼저 이것저것 모두가 다 타성일편(打成一片) 하나로 모아버려야 그래야 마음이 열어집니다. 우리가 '마음 열어버려라' 하지만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 모르면 마음이 못 열어집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오직 물질(物質)이 아닌, 공간성(空間性)도 시간성(時間性)도 또는 인과율(因果律)도 초월(超越)해 버리면 결국은 다 마음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입니다. 이것뿐만 실상(實相)인 것이고 딴 것은 모두가 다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입니다. 이렇게 느끼시고 공부하시면 종전에 몸이 좀 거북했다 하더라도 정말로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꼭 가볍게 풀릴 것입니다. 설사 우리 집안의 영가(靈駕)가 와서 우리를 침노한다 하더라도 그냥 제도(濟度)가 된단 말입니다. 정말로 영가 몸도 비(空)고 - 분명히 모든 것이 다 빈(空) 것인데 - 확실히 비었다고 믿고 되 뇌이고 공부를 한다면 자기 주변의 영가도 제도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공부에 진일보(進一步)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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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華 嚴 經 원문보기 글쓴이: 화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