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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회
스님의하루
2022.10.11 정토경전대학 금강경 제5강
“이 세상 그 어떤 공덕보다도 큰 공덕은...”
202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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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서울을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하여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했습니다.
새벽 4시에 서울 서초법당을 출발하여 고속도로 위를 4시간 달려 오전 8시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두북 공동체 대중들은 10월 말에 열리는 INEB(참여불교세계대회)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하루 종일 수련원 곳곳을 정비했습니다. 재래식 화장실에 똥을 모두 퍼서 퇴비장으로 옮기고, 복도와 창문, 창틀, 공양간 등 평소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깨끗이 청소를 했습니다.
스님은 실내에서 업무를 본 후 저녁 8시 정각에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오늘은 정토경전대학 금강경 5강을 생방송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지난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해서 설명한 후 본 강의를 이어갔습니다.
이것이 진리라고 정해진 법이 없다
“오늘은 금강경 제7분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과 제8분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느냐?’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었고, 부처님은 법을 설했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법을 설한 바가 있느냐?’ 하고 묻자 수보리는 자신이 한 생각에 사로잡혔음을 금방 자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기로는 정한 법이 있음이 없음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며, 또한 정한 법이 있음이 없음을 여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바 법은 모두 가히 취할 수 없으며 설할 수 없고, 법이 아니며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체 현성이 다 무위법으로 차별이 있는 까닭입니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지적을 받고 법이라고 정해진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라는 것을 단박에 깨닫고 자신이 가졌던 의심을 탁 놓아버렸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진리다’ 하고 정해진 법(定法)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보리는 ‘이것이 진리다’ 하고 정해진 법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냥 단순하게 ‘없다’라고 쓰면 간단할 텐데 왜 이렇게 말을 복잡하게 할까요? ‘있지 않다’라는 말은 ‘있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라는 뜻이고, ‘없다’라는 말은 ‘아예 없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쉽게 ‘있다’, ‘없다’ 하는 양극단에 빠집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설하신 내용은 ‘있다’, ‘없다’ 하는 양극단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배우는 가장 중요한 문장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입니다. 여기에 번역되어 있는 표현으로는 ‘정한 법이 있음이 없다’라는 문장입니다.
‘이것이 진리라고 정해진 법이 있지 않다는 것이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이다.’
이걸 한문으로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합니다. 무유정법이란 정한 법이 시시때때로 인연을 따라 있기도 하지만 시공간과 인연을 떠난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뜻이에요. 진리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인연을 따라 있으므로 ‘이것이 진리다’ 하고 정해진 진리가 있다고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는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합니다. 반대어로는 정한 법이 있다는 유위법(有爲法)이 있습니다. 용어 해설만으로는 알 듯 모를 듯하죠. (웃음)
쉽게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거울이 하나 있습니다. 거울은 몇 개의 물체를 비출 수 있을까요? 거울은 하나의 물체도 취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거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한대의 물체를 비출 수 있습니다. 이렇게 거울은 두 가지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거울은 물건이 오면 비춥니다. 개가 오면 개가 비치고, 호랑이가 오면 호랑이가 비치고, 개미가 오면 개미가 비치고, 사람이 오면 사람이 비칩니다. 하지만 물체가 지나가 버리면 아무 물체도 비추지 않습니다. 거울은 많은 물체를 비추지만 사실 하나도 취하지는 않습니다. 인연을 따라 일어나고, 인연을 따라 사라집니다. 이 법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앞에 오면 비추고, 가면 사라지고, 인연이 모이면 형성되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집니다.
저의 즉문즉설은 여기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정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스님이 이 질문에는 이렇게 말하고, 저 질문에는 저렇게 말하네’ 하면서 즉문즉설 수백 편을 연구해서 정해진 법칙을 찾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스님이 100개, 1000개의 방법을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한 개의 방법도 없는 거예요. 거울처럼 물체가 오면 비추고, 가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볼게요. 어떤 사람이 서울로 가는 방향을 물었어요.
‘서울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됩니까?’
이때 서울로 가는 방향은 북쪽이라거나 남쪽이라거나 동쪽이라거나 서쪽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서울로 가는 방향을 말할 수 없다는 게 서울로 가는 방향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서울로 가는 방향은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말일까요? 그런 뜻도 아니에요. 서울로 가는 방향을 정할 수 없다는 말은 길이 없다는 뜻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만약 인천에 사는 사람이 서울로 가는 방향을 물으면 ‘동쪽으로 가세요’ 하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구체적인 시공간이 정해지면 그에 맞게 방향이 정해지는 겁니다.
‘서울 가는 방향을 물으니까 동쪽으로 가라고 하네. 나도 동쪽으로 가면 되겠구나.’
모든 사람이 이렇게 받아들이면 올바른 걸까요? 아닙니다. 이 사람은 수원에 사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북쪽으로 가라’ 하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그 말을 듣고 ‘저 사람한테는 동쪽으로 가라고 하고, 나한테는 북쪽으로 가라고 하는 걸 보니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네’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강릉에 사는 사람이 서울로 가는 방향을 물었어요. 그러면 ‘부처님이 방금 동쪽으로 가라고 했으니까 너도 동쪽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하고 대답하기 쉬운데, 강릉 사람은 서울로 가려면 서쪽으로 가야 합니다. 동쪽으로 가면 바다를 만납니다. (웃음)
이처럼 서울 가는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체적인 방향이 정해질까요? 인연을 따라 정해집니다. 묻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동쪽이 되기도 하고, 서쪽이 되기도 하고, 북쪽이 되기도 하고, 남쪽이 되기도 하는 거예요. 이것이 무유정법입니다.
이 세상 어떤 공덕보다도 큰 공덕은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세계에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 덕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이 복덕성이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내지 사구게 등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일러주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리라.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은 불법이 아니니라.”
이 구절은 어떤 정해진 법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쳐서 자신의 괴로움이 없도록 하고, 다른 사람들도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해주는 것이 가장 큰 공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경전을 항상 지니고 읽고 외우고 이것을 타인에게 전해서 그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전법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 경을 잘못 읽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돈이나 재물을 보시해서 공덕을 쌓을 필요가 없네. 이 경만 달달달 외우면 엄청나게 공덕이 많다고 하네. 금강경을 인쇄해서 남한테 나눠주는 공덕이 더 크네.’
그러면 이 경의 가르침과는 십만 팔천리 떨어져 버립니다. 여기서 ‘수지 독송’하라는 건 그냥 외우면 복 받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인 줄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상을 상이 아닌 줄 깨달아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내 눈에 그렇게 보이고 내 귀에 그렇게 들리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본 것, 들은 것에 집착을 하죠. 집착하지 않으면 괴롭지 않습니다.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세상 어떤 공덕보다도 더 큽니다. 굳이 공덕이라 할 것도 없지만 공덕이라고 한다면 말이죠. 더 이해하기 쉽도록 중국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내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불교가 처음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지고 몇 백 년 동안 확산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문화가 달랐기 때문이에요. 그러다가 500년경인 6세기에 들어서 중국에 불교가 많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당시 인도는 불교가 쇠퇴하고 있었는데 중국에는 불교가 흥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때 중국은 남북조 시대였어요. 남조에는 6개의 나라가 있었다 해서 육조시대라고도 합니다. 그 가운데 양나라가 있었는데 양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혀서 제국으로 만든 사람이 무제예요. 양 무제가 불법에 귀의하면서 국가적으로 불교를 엄청나게 옹호했습니다. 경전을 많이 번역해서 배포하고 절을 많이 짓고 탑을 세웠습니다. 승려도 많이 양성했어요. 당시 양나라 스님들은 양 무제를 ‘중국의 전륜성왕, 중국의 아소카왕’이라고 칭송했습니다. 당시 중국 불교는 불사하고 공덕을 쌓는 불교였습니다. 인도에서 달마대사라는 분이 동쪽 중국 양나라에 불법이 엄청나게 융성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달마대사는 당시 양나라 땅인 중국 남쪽 광주로 가보았습니다. 대사가 도착하자 양 무제가 인도에서 고승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왕궁으로 달마대사를 초대했어요. 양 무제가 달마대사를 궁중으로 초대해서 차를 마시며 대담을 하는 중에 자신이 한 일을 설명했습니다.
‘법화경을 보면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바닷가 모래밭에 부처님 형상을 그리거나 모래로 탑을 쌓아도 공덕이 크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왕위에 오른 뒤에 수백 개의 절과 탑을 세웠고, 수 천 명의 스님을 양성했으며, 수 만권의 경전을 번역하고 인쇄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불사를 한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황제가 이렇게 물었으면 ‘공덕이 한량없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달마대사는 이렇게 답했어요.
‘공덕이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공덕이 없다고 했을까요? 이렇게 지은 공덕은 인연과보로 언젠가는 사라지는 유루복(有漏福)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공덕은 깨달음의 지혜로 얻는 다함이 없는 무루복(無漏福)이에요. 달마대사는 모양과 형상에 집착한 불사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양 무제는 화가 났어요. 자신은 불교에 엄청난 지원을 했는데 공덕이랄 게 없다고 하니까요. 양 무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냐?’
그러자 달마대사는 이렇게 말했어요.
‘모르겠습니다.(不識 불식)’
우리말로 ‘모르겠다’라고 번역하지만 ‘생각으로 헤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양 무제가 화가 나서 대사를 죽이려고 칼을 빼 들었어요. 참 재미있지 않아요? 불교를 엄청나게 숭상한다는 사람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스님을 죽이겠다고 칼을 빼든 거잖아요. 대신들은 외국의 고승을 해치면 황제의 명예에 흠이 된다며 겨우 황제를 말렸습니다. 달마대사는 양 무제를 만나고 ‘이곳에는 불법이 없구나!’라고 탄식하며 양자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버렸어요. 그리고 북위에 소림사라는 절에 앉아서 9년을 침묵했습니다. 늘 벽만 보고 있었다고 해서 면벽 9년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침묵하고 있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달마대사를 찾아왔습니다. ‘달마 권법을 가르쳐 달라’, ‘범어를 가르쳐 달라’, ‘경전을 가르쳐 달라’ 했습니다. 전부 다 얻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뿐이었어요. 그러나 이 법은 구하려야 구할 수 없고 얻으려야 얻을 수 없습니다. 달마대사가 9년 동안 침묵하고 있으니까 얻으려고 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버렸어요. 그런데 한 승려는 말없이 9년 동안 같이 살기만 했어요. 어느 날 대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너는 왜 왔느냐? 무엇을 얻으러 온 것이냐?’
‘저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도를 얻으러 왔습니다.’
표현은 얻으러 왔다고 했지만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법을 얻으러 왔다는 거예요. 대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네 마음이 어떠한데?’
‘제 마음이 심히 불안합니다’
‘그래, 그럼 불안한 마음을 이리 내놔라. 내가 편안하게 해 줄게.’
이제 그 불안한 마음을 내놓기만 하면 해결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불안한 마음을 찾으려면 책을 뒤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인도를 갔다 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마음을 살펴야 하는 거죠. 한참 뒤에 승려가 말했습니다.
‘내놓으려야 내놓을 게 없습니다.’
‘내 이미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도다.’
대사가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 걸까요? 자기 마음을 살펴서 마음이랄 게 없는 줄을 이미 알아버린 거예요. 이미 편안해진 겁니다. 이것이 선입니다. 그래서 달마를 중국 선의 제1조라 하고 이 승려는 제2조인 혜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리에 치우친 지식 불교를 비판하며 선불교가 등장한 과정이에요. 양 무제는 형상에 집착해 백성의 피땀을 짜서 절을 짓고는 자신의 공덕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아직 ‘나다’ ‘내 것이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형상에 매몰된 도리죠.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내지 사구게 등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일러주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리라.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은 불법이 아니니라.”
이 구절은 모든 부처님이 깨달으신 최상의 법이 다 ‘무유정법’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불법이다’ 하면 곧 불법이 아니에요. 그래서 노자는 ‘이것이 도다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얘기죠. 또 어떻게 보면 너무나 심오한 말씀입니다. 이 법을 만나기 전 우리는 그저 꿈속에서 복을 구하고 있었던 거예요. 꿈속에서 돈을 얻었다고 좋아하고 꿈속에서 돈을 잃었다고 울다가 눈을 번쩍 뜨니 ‘꿈이구나!’ 하고 꿈을 깰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강의를 하고 이번 주 수행 연습 과제를 이야기한 후 생방송 수업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교실별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마음 나누기를 이어가고, 스님은 방송실을 나왔습니다. 운동장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상임 천일준비위원회와 화상으로 회의를 하고, 수행법회 생방송을 한 후, 오후에는 두북 수련원을 찾아온 손님들과 시간을 보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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