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욥기 16장 1절 – 22절) 16: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3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4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5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6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7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8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10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11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12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14 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15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16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18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19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22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갑작스러운 고난을 당한 욥을 위문하러 온 친구들과의 1차 변론(4-14장)이 끝나고, 새롭게 시작된 2차 변론(15-21장)의 첫 포문을 열면서 욥에게 저주가 가득한 질책을 펼친 엘리바스의 변론(15장)에 대해 욥이 답변하는 내용입니다. 욥이 위로가 아닌 충고와 저주를 퍼붓는 친구들의 동정심 없는 모습에 대한 질책과, 이러한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과 처지에 대한 절망감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며, 하나님만이 자신을 변호해주실 수 있는 분임을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욥은 자신이 처한 상황만 해도 감당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위로하러 온 친구들은 욥의 하소연과 탄식을 들어주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욥이 한 말들에 대해서 불경건한 신앙 자세이며 이 모든 것이 욥 자신이 저지른 죄악 때문이라며 회개하라는 집요한 충고의 추궁과 질책만을 일삼았습니다. 이에 대해 피곤함과 절망감을 느낀 욥이 그 친구들을 향하여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16:2)라고 탄식합니다. 욥은 이미 친구들의 집요한 추궁과 질책에 대해서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13:4)고 탄식했습니다. 왜 욥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친구들은, 욥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고 반박하는 것에만 분노해서 2차 변론에서는 아예 욥에 대한 저주와 책망의 강도가 더 강해지게 됩니다. 우리는 욥과 친구들 간의 지루한 논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것이 욥기서에만 나타나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의외로 신앙이 좋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행하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 한국 사회에서 분열과 갈등과 대립을 조성하며 혐오와 증오의 말을 내뱉는 이들이, 다름 아닌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러한 이들을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어떠한 사람들로 경고하고 있습니까? 1. 욥은 무정한 친구들을 어떻게 질책합니까? 욥이 당한 고난과 고통에 대한 관심보다는 고통을 호소하는 그의 탄식에 대한 말꼬리만을 잡고 욥을 강도 있게 비난했던 엘리바스와 친구들을 향해서, 어떤 사람들이라고 탄식합니까?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16:1-2).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은 전혀 새로운 말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욥은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16:2) 곧 “그런 소리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네”(공동번역)라며, 언제까지 자신에게 고통만을 안겨주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반복할 것이냐고 탄식합니다. 그렇다보니 욥은 위문 온 친구들을 가리켜서,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16:2) 곧 “나를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희는 하나같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새번역)라고 비난하며 탄식합니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라는 말은, ‘고통과 불행을 주는 위로자들, 더 큰 아픔과 시련을 주는 위로자들’ 곧 ‘고통만 안겨주며 번뇌케 하는 존재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수아 사람 빌닷”은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8:2)라고 욥을 질책했고,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지혜롭다는 사람이, 어찌하여 열을 올리며 궤변을 말하느냐? 쓸모없는 이야기로 논쟁이나 일삼고, 아무 유익도 없는 말로 다투기만 할 셈이냐?”(15:2-3,새번역)라고 욥을 몰아붙였습니다. 따라서 욥은 그 친구들을 향해서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16:3) 곧 “너희는 이런 헛된 소리를 끝도 없이 계속할 테냐? 무엇에 홀려서, 그렇게 말끝마다 나를 괴롭히느냐?”(새번역)고 절규했습니다. 고통 받는 친구를 위로하기보다 번뇌만을 안겨주는 무익한 논쟁을 언제까지 할 셈이냐는 책망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은 인간 현존의 문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기에, 고통 받는 사람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위로자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문제의 해결자로 나섰다는 것이 그들의 신앙적 교만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는 짧은 지식에 근거한 자기 논리에 빠진 친구들은,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16:3)는 욥의 지적처럼, 자기모순에 빠져서 위로가 아니라 고통만을 가중시키는 완악한 말과 행동을 일삼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욥은 자신과 친구들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어쩌면 자신도 같은 말을 했을 것이라며,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16:4)고 한편으로는 동의합니다. 이것을 새번역에서는 “너희가 내 처지가 되면,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너희에게 마구 말을 퍼부으며, 가엾다는 듯이 머리를 내저을 것이다.”(새번역)라고 했고, 공동번역에서는 “자네들이 내 처지에 있다면, 나도 분명히 자네들과 같은 말을 했을 것일세. 기가 막혀 머리를 저으면서 근사한 말을 늘어놓았을 테지.”(공동번역)라고 했습니다. “머리를 흔들”었다는 표현은, 상대방이 몰락한 것을 즐거워하고 조롱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이 문장은 욥이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을 향한 반문법으로, 내가 너희와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도 너희들처럼 너희를 마음껏 조롱해 주었을 텐데 라는 비아냥거림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최소한 자신은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16:5)고 아쉬워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고통을 당해보니 그러한 말도 결국 상대방의 아픔에 절대적으로 공감할 수 없다보니 “입에 발린 말”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새번역에서 “내가 입을 열어 여러 가지 말로 너희를 격려하며, 입에 발린 말로 너희를 위로하였을 것이다.”(새번역)라는 위로의 한계성으로 표현합니다. 이와 달리 공동번역에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격려하는 말을 했을 테지.”(공동번역)라며, 자신을 비웃었던 친구들의 고통을 즐거워하며 마음껏 조롱했을 것이라는 의미로 표현합니다. 친구들은 위로자로 살았던 욥에게 1차 변론에서 “생각해 보아라. 너도 전에 많은 사람을 가르치기도 하고, 힘없는 자들의 두 팔을 굳세게 붙들어 주기도 했으며, 쓰러지는 이들을 격려하여 일어나게도 하고, 힘이 빠진 이들의 무릎을 굳게 붙들어 주기도 했다. 이제 이 일을 정작 네가 당하니까 너는 짜증스러워하고, 이 일이 정작 네게 닥치니까 낙담하는구나!”(4:3-5,새번역)라고 비웃었습니다. 참으로 위로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거나 쉽지 않다는 것을 지켜보게 됩니다. 2. 하나님을 향한 절망을 어떻게 토로합니까? 어쩌면 욥은 과거에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자신이 했던 말들이, 혹시나 그들에게 상처만 더하는 말들을 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친구들에게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호소하면 나아질까 싶었는데, 상황이 오히려 정반대로 흘러간 것을 탄식합니다. 그래서인지 욥은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16:6)고, 하나님께 고통에 사로잡힌 자신의 절망스런 마음을 토로합니다. 욥은 자기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16:7)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에 대한 고백으로서, 자신이 당하는 시련이 자신의 죄악 때문이 아님을 밝혀주실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호소였습니다. 우리가 욥기서의 사건 배경을 알듯이, 욥의 죄악 때문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욥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었기에,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6:10)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친구들의 비난과 조롱만큼은 견딜 수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겪는 상황을 보면 저들이 그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16:8) 곧 “내게 있는 것이라고는, 피골이 상접한 앙상한 모습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나를 치신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한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지은 죄로 내가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새번역)라고 고백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하셔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시냐고 하는 절망감의 토로를 어떻게 고백합니까?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16:9-10). 친구들이 자신의 아픔을 동정하기보다, 마치 먹잇감을 만난 맹수들처럼 자신을 모욕하며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은 참 견딜 수 없는 절망이라고 고백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만드셔서 친구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신 것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16:11)라는 절망감을 토로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일한다고 할 때 겪어야만 했던 극한 고난을 가리켜서,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4:9-13)라며,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로했습니다. 고난이 반드시 결코 우리의 죄악이나 잘못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욥이 이와 다른 것은, 그가 주님의 사역 때문에 당한 고난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과 그 십자가를 자신도 짊어지고 따른다는 결단이 있었지만, 욥은 갑작스럽게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욥은 이러한 상황을 “내가 평안하더니”(16:12)라고 고백하며, 하루아침에 갑자기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없이 나를 쏨으로,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16:12-13)라고, 자신의 절망스런 상황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자신의 가업과 가정과 육체적 질고에 대한 탄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정신 차릴 틈도 주지 않고 초토화시켰다는 표현입니다. “콩팥들을 꿰뚫고”는 인간의 예민한 마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욥의 마음의 중심을 화살로 꿰뚫어 치명적인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의미로, 극에 달한 욥의 정신적 영적인 고통을 나타냅니다.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는 욥의 창자가 쏟아져 나왔다는 표현으로, 욥의 생명이 치명적인 상태에 처했다는 의미로, 극에 달한 욥의 육체적 고통을 나타냅니다. 계속되는 이러한 시련을 가리켜서 “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16:14)라며, 지금의 고통에서 전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절망감과 두려운 공포감을 토로합니다. 이러한 탄식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적 섭리에 대한 고백적 표현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에 대한 이유와 원인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인한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어떻게 하나님께 토로합니까? 첫째로,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16:15)라며, 욥은 자신이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임을 토로합니다. “굵은 베”는 시신을 싸매거나, 죽은 자를 애도하거나 회개할 때 걸치는 옷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구원과 자녀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온 몸이 욕창으로 뒤덮인 욥의 몸에 덮여있는 “굵은 베”는, 아직 생명이 붙어있기는 했지만 시신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음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16:15)라며, “뿔”은 힘과 권위와 명예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욥이 처한 상황으로 인하여 자신과 집안의 모든 권위와 명예와 자존심이 땅바닥에 떨어졌음을 토로합니다. 셋째로,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16:16)라며, 욥은 자신이 당한 시련과 고통으로 인한 눈물로 얼굴이 부었고, 이제는 모든 기력과 희망을 상실한 “죽음의 그늘” 곧 죽음의 그림자와 절망의 그림자만이 드리워졌다고 토로합니다. 누군가가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따르는 끊임없는 탄식이다’라고 했듯이,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탄식의 연속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단순한 원망이나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을 갈구하는 간절한 우리 마음의 표현 때문이 아닌가요? 3. 하나님을 향한 호소를 어떻게 고백합니까?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를 신뢰했던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극한 절망감을 토로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과 개입을 향한 호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시들도 보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처한 극한 상황에 대해 듣기도 민망한 원망과 저주를 토로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마무리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끝납니다. 탄식 중에 주님의 만져주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감추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 앞에 우리 마음을 토로하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받아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18:2)라고 고백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욥도 자신의 극한 절망감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면서도,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17:17)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엘리바스가 욥이 재앙을 당한 것은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15:20)며, “그의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15:27)다며, 욥이 불의한 재물로 탐욕적인 생활을 했고, 또한 “정말 너야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내던져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뉘우치며 기도하는 일조차도 팽개쳐 버리는구나.”(15:4,새번역)라고 비난했던 것에 대해,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고백의 호소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께서 판단해주실 것을 어떻게 호소합니까? 첫째로,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16:18) 곧 “땅아, 내게 닥쳐온 이 잘못된 일을 숨기지 말아라! 애타게 정의를 찾는 내 부르짖음이 허공에 흩어지게 하지 말아라!”(새번역)고 호소합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고 했던 것처럼, 과거 히브리인들은 무죄하게 살인 당한 자의 피는 하늘에 그 복수를 외치는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욥은 자신이 친구들로부터 당하고 있는 억울함이 증명될 수 있도록 자신의 피를 땅이 흡수하지 말고 남겨두어 자신의 부르짖음이 헛것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둘째로,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16:19)며,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16:20-21)라고 호소합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정죄하며 “조롱”하는 친구들로부터, 자신의 무죄를 밝혀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안 계신다는 것을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욥은 하나님을 “나의 증인”과 “나의 중보자” 곧 “나의 변호인”(새번역)으로 증언합니다.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는, 옳고 그름을 가려 그른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확립하여 선을 세워가기를 원한다는 것으로서, 옳고 그름을 완전하게 판가름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이 스스로 판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욥이 자신의 절망스런 마음을 하나님께 탄식했지만, 그 탄식은 하나님만이 누가 옳고 그른지를 밝혀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었기에 고백할 수 있었던 호소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욥의 호소는 고난 중에도 마지막까지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는 모습이자, 고통 중에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신앙 성숙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흔들림이 없이 자라는 신앙 성숙은 없기 때문입니다. 나침반의 바늘은 늘 북극을 가리키지만, 자세히 보면 미세한 떨림이 계속됩니다. 이것은 항상 북극을 향하는 방향을 잡기 위해서 계속 흔들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욥의 탄식은 불신앙의 절규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신앙의 열망이었습니다. 욥은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16:22)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겪는 육체적 질고로 자신 앞에 “돌아오지 못할 길” 곧 죽음의 길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며 고백합니다. 어쩌면 친구들에게 언제까지 자신을 괴롭힐 것이냐고 하는 하소연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이 끝나기 전에, 자신의 무죄를 밝혀달라는 호소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욥이 고통 받는 자신에게 정죄의 충고만을 쏟아내는 친구들을 향해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16:2)라고 했던 탄식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의외로 신앙이 좋다고 하는 이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누구 말도 들어보고자 하지는 않고 오직 자기 말만 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욥을 위문하러 온 친구들 역시 자신들이 아는 신앙 지식이 전부나 되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 욥을 위로하고자 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했습니다. 왜 야고보 선생이 우리에게 당부하기를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1-2)고 말씀했겠습니까? 위로자의 중요한 자세는, 첫째로 상대의 아픔을 공감하며 고통 받는 그 사람 자체를 이해하고자 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악을 대속하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가리켜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고 증언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둘째로, 위로자의 중요한 자세는 용기와 격려와 희망을 불어넣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라고 증언했겠습니까? 셋째로, 위로자의 중요한 자세는 자신이 마치 고통 받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쓸 데 없는 말들로 그들을 정죄하고 충고하는 이들이 아니라, 조용히 기도하며 함께 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8-9)고 당부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은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기 잘난 체 하기에 바쁜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포용하며 서로에게 위로와 힘과 용기와 소망의 격려를 아끼지 않는 거룩한 성도의 삶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