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사람들의 장날은 조그만 배들이 대선단을 이뤄 장터로 이동하면서 날이 밝곤 하였다.
▲ 60년대 섬마을 해안가 주변- 다양한 배들이 즐비해 있다.<1961.7.13>
▼ 고금도 약산도 등의 많은 섬사람들이 마랑나루터에 내려
파래, 미역. 오징어 등 해산물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마랑 장터로 향하였다.
▲ 장터로 나가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이용해야 했다.
“우리 섬마을이 좋아요”
1981년, 당시 충남 보령군 오천면 추도에는
5가구, 78명이 살았고, 이웃 소도에는 17가구 97명의 주민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 광명국민학교 추도 분교에는 4학급 35명의 어린이에
4명의 교사가 전부였다.
이웃 소도의 어린이들도 거룻배를 이용하여 이 학교로 통학하였다.
영세어업과 밭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곳의 어린이들도 틈나는 대로 가정의 부업을 돕고 있기는 여느 섬과 같았다.
섬마을 아이들은 “바지락을 주워서 대천에 갖다 팔아요.
엄마랑 함께 약초를 캐고 바지락을 줍느라고 매일 늦게 집에 가요.”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일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기 때문에 이상성격으로 빗나가는 문제아동은 없었다.
반대로 대자연과 호흡을 함께하고 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하나같이 순박한 삶을 보냈다.
▲ 조개를 다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망을 지키고 있다. <1961.8.4>
파도에 갇힌 문명의 소외지대, 섬
1969년, 풍도는 지도책 위에서는 화려하지만 한숨이 나오게 가난한 섬이었다.
호당 3만원(1969년 당시) 꼴쯤 따 들이는 굴 이외에
수입이라곤 아낙네들이 품팔이로 자갈을 모아 배에 실어주는 일 뿐이었다.
어장도, 배도 없이 10월~1월까지 섬 주민들은 도이도(島)로 날아가 굴을 땄다.
이때는 젖먹이도 같이 따라 갔다.
육지에서 소외된 섬, 아니 정부 고위당국자들의
눈에 띄지 않는 탓이었는지 정부의 대담한 투자나 개발계획이 별로 없었다.
▲ 아낙들이 채취한 자갈을 배에 싣고 있다.<1969.8.4>
▲ 엄마 따라 일터로 나온 아이들-젖먹이도 누나 등에 업혀 따라 나왔다.
남해 도서지방 식수난 심각
1975년 1월, 31년만의 겨울가뭄으로 남해안 도서(島嶼)민들이 식수난을 겪었다.
통영군관내 60개 유인도 중 한산면 소매물도 등 27개 섬의 우물이
3개월째 말라 어민들은 생업인 어업을 팽개치고
이 섬 저 섬으로 물을 구하러 나서야만 했다.
또한 군에선 어업지도선 등 4척의 선박으로 이들 27개 섬에 급수작전을 벌였다.
▲ 식수난을 겪는 섬마을 사람들 - 물을 배급 받기위해 물통을 들고 나와 있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