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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충선왕(忠宣王)
휘(諱)는 장(璋)이고, 자(字)는 중앙(仲昂)이며, 고휘는 원(謜)이고, 몽고의 휘는 익지례보화(益智禮普化)이다.
충렬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이다.
충렬왕 원년인 을해년 9월 정유일에 출생하였다.
성품이 총명하고 굳세며 결단력이 있었다.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폐단을 제가하여 시정에 그런대로 볼 만한 것이 있었으나 부자 사이는 실로 부끄러운 일이 많았다.
오랫동안 상국에 있었는데, 스스로 귀양가는 욕을 당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5년이며, 수는 51세였다.
기유 원년(1309), 원 지대 2년
○ 2월에 왕이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옛날 소금을 전매(專賣)하던 법은 국가의 경비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궁(宮)ㆍ원(院)ㆍ사(寺)ㆍ사(社)와 권세 있는 집들이 사사로이 염분(鹽盆)을 설치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니, 국가의 경비는 무엇으로 넉넉하게 할 것인가.
이제 장차 내고ㆍ상적창(常積倉)ㆍ도염원(都鹽院)ㆍ안국사(安國社)와 여러 궁ㆍ원과, 중앙과 지방의 사ㆍ사가 소유한 염분은 모두 관에서 접수하고, 가격은 은(銀) 1근에 64석(碩), 은 1냥에 4석, 베 1필에 2석으로 하여 이것을 예로 하라. 소금을 사용하는 자들은 모두 의염창(義鹽倉)에 가서 사게 하며, 군ㆍ현의 사람들은 다 본래 관할하는 관사(官司)에서 베를 바치고 소금을 받아가게 하라. 만약 사사로이 염분을 설치하거나 사사로이 서로 매매하는 자가 있으면 엄중하게 치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군ㆍ현으로 하여금 백성을 뽑아서 염호를 삼고 또 염창을 설치하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여러 도에서 소금 값으로 받아들인 베가 1년에 4만 필이나 되었다.
○ (3월) 원 나라의 선정원(宣政院)에서 사람을 보내 와서 배 만드는 것을 독촉하였다. 그때 황태후가 절을 짓고자 하니, 홍복원(洪福源)의 손자인 중희(重喜)와 중경(重慶) 등이 아뢰기를, “백두산에 아름다운 재목이 많습니다. 만약 심양(瀋陽)의 군사 2천 명을 동원해서 벌채하여 압록강으로 흘러내려오게 하고, 고려로 하여금 배로 수송하게 하다면 편리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요양성선사(遼陽省宣使) 유현(劉顯) 등을 보내 와서 배 1백 척을 만들고 쌀 3천 석을 수송하게 하니, 폐해가 말할 수 없었다. 서해ㆍ교주ㆍ양광의 백성들이 더욱 그 해를 입었다.
○ (4월) 정승 최유엄 등이 왕에게 전(箋)을 올려 환국 하기를 청하였으나, 그 당시 황제와 황후와 황태자가 왕을 매우 총애하였기 때문에 왕이 그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술 2년(1310), 원 지대 3년
○ (정월) 왕이 세자에게 전위하려고 은밀히 사람을 시켜서 양학사(楊學士)에게 표문을 짓게 하였는데 곧 호종한 신하들에게 저지되어 중지하였다.
○ 여름 5월에 원 나라 승상(丞相) 탈탈(脫脫)이 사자를 보내와서 고자와 처녀를 요구하였다.
○ (가을 7월) 원 나라에서 왕의 3대를 추증하여 증조를 충헌(忠憲), 조(祖)를 충경(忠敬), 고(考)를 충렬(忠烈)이라 하였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송(宋)ㆍ요(遼)ㆍ금(金) 나라의 정삭을 사용하였으나 대대로 왕의 시호는 모두 종(宗)이라고 일컬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이 표문을 올려 상승왕(上昇王)의 시호를 청하고, 또 고종( 高宗)과 원종(元宗) 두 왕의 시호를 추증할 것을 청하였다.
○ (8월) 왕이 전지를 내리기를, “식목도감은 나라의 중대한 일을 관장한다. 첨의정승ㆍ판삼사사ㆍ밀직사ㆍ첨의찬성사ㆍ삼사우좌사ㆍ첨의평리 이상으로 식목도감의 판사를 삼고, 지밀직 이하로 사(使)를 삼는다. 밀직사는 그 품게를 두 계급 높여 첨의부와 같이 양부(兩府)라고 일컫는다." 하였다. 또 여러 관사(官司)와 주ㆍ군의 칭호를 고쳤다.
○ (9월) 최유엄을 수첨의 정승(守僉議政丞)으로, 김혼(金琿)을 판삼사사로, 유청신(柳淸臣)을 강등하여 첨의찬성사로, 배정(裵挺)ㆍ박의(朴義)ㆍ권보(權溥)ㆍ이호(李瑚)를 모두 찬성사로, 김심(金深)을 밀직사로, 홍선(洪詵)ㆍ김태현(金台鉉)을 삼사우좌사로, 박경량(朴景亮)ㆍ김문연(金文衍)을 첨의평리로, 조서(趙瑞)ㆍ조연(趙璉)을 지밀직사사로, 채우(蔡禑)ㆍ이공보(李公甫)ㆍ권한공(權漢功)을 동지밀직사사로, 박여(朴侶)ㆍ권준(權準)을 밀직부사로,
이대순(李大順)을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으로, 전독만첩고사(全禿萬帖古思)를 영인군(寧仁君)으로, 금역라올탑(金亦刺兀塔)을 낙안군(樂安君)으로, 전살리(全撒里)를 함창군(咸昌君)으로, 이숙(李淑)을 평창군(平昌君)으로, 방신우(方臣祐)를 중모군(中牟君)으로, 박아불화(朴阿不花)를 계양군(桂陽君)으로, 이백첩목아(李伯帖木兒)를 성산군(星山君)으로, 유창록(劉昌祿)을 효령군(孝寧君)으로, 최흔장(崔欣莊)을 금성군(錦城君)으로, 정매살(鄭買撒)을 하동군(河東君)으로, 이신(李信)을 영월군(寧越君)으로, 권고리(權古里)를 봉화군(奉化君)으로,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를 비인군(庇仁君)으로, 이삼진(李三眞)을 회음군(淮陰君)으로 삼았다.
이대순 이하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들어간 고자들인데, 그들의 가계(家系)는 백성이 아니면 천한 노예이다.
국가에서 부형(腐刑 남자는 불알을 까고, 여자는 음부를 유폐(幽閉)시키는 형벌)은 쓰지 않았으나 아직 어린 아기 때에 생식기를 개에게 베어 먹히어 고자로 된 자가 왕왕 있었다.
안평공주(安平公主)가 일찍이 두어 명을 세조에게 바쳤더니 궁중에서 궁중에서 모시고 내탕고(內帒庫)의 출납을 맡게 되어 날로 총애를 받으며, 제조(制詔)를 받들고 사신으로 와서 그의 집안의 부역을 면제하고 친족을 벼슬시켜 지극히 두텁게 은택을 받은 자까지 있었다.
그러므로 잔인하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서로 부러워하고 본받아서 아비가 그 아들을 거세하고 형이 아우를 게세하였으며, 또 강포한 자는 조금이라도 분하고 원통한 일이 있으면 즉시 스스로 거세하였다. 그런 까닭에 수십 연도 안 된 사이에 거세된 무리가 매우 많았다.
원 나라가 성종황제(成宗皇帝) 이래로 정치가 궁중 안방에서 나오자 환자가 정권을 잡게 되어 심한 자는 벼슬이 대사도(大司徒)에 이르렀으며, 그 다음의 자들도 모두 평장정사(平章政事)를 요수(遙授)하였으며, 또 모두 원(院)의 사(使)와, 사(司)의 경(卿)이 되었고, 그들의 아우와 조카들도 역시 조정의 임명을 받아 집과 수레와 의복이 참람하게 경상에 비기게 되었으니, 부귀와 영광이 중국 남방의 내시들이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왕이 주청할 것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먼저 이 무리들에게 부탁하였기 때문에 충렬왕 때에 이미 군(君)으로 봉한 자가 있었다.
이때 왕이 오랫동안 원 나라의 수도에 머물면서 자주 삼궁(三宮 황제ㆍ태후ㆍ황후의 궁)에 출입하였으므로 이 무리들이 그로 인하여 왕과 친근하였으며 또한 청탁도 하곤 하였다.
왕이 이에 그 중에서 가장 가까이하고 총애하는 자를 선택하여 향읍을 봉하여 주고, 그 나머지 무리에게도 다 검교ㆍ첨의ㆍ밀직의 관직을 제수하고, 또 그의 친척들도 순서를 뛰어넘어 제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전선(銓選)하는 법이 크게 무너지게 되었으며, 거세한 지 얼마 안된 자도 역시 본국을 경시하였다.
○ 11월에 재신과 추신이 각 도에 채방사(採訪使)를 보내어 세법을 고쳐 정할 것을 논의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지금 군ㆍ현의 토지가 모두 개간되었으니 마땅히 전지를 측량하고 부세를 증가시켜 국가의 세입을 풍족하게 하여야 된다." 하였다.
재신과 추신들은 자기들이 점유한 전원이 관에 몰입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임자 4년(1312), 원 인종(仁宗) 황경(皇慶) 원년
○ 봄 정월에 원 나라에서 왕에게 귀국을 명하였다.
왕이 가지 않으려고 박경량(朴景亮)을 시켜 권세를 부리는 대신에게 아뢰기를, “이제 바야흐로 농번기이니, 청컨대 추수 때까지 기다리게 해 주소서." 하니, 황제가 그 의사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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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세가
충선왕의 이름은 왕장(王璋)이고 자(字)는 중앙(仲昻)이며 원래 이름은 왕원(王謜), 몽고 이름은 이지르부카[益智禮普化]이다.
충렬왕(忠烈王)의 장자(長子)로 모친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이며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 을해년 9월 정유일에 태어나 3년 정월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충렬왕 9년 2월. 충렬왕이 충청도(忠淸道)로 사냥가려 했다. 당시 왕의 나이 아홉 살이었는데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에 유모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지금 백성이 곤궁하고 또 농사[東作]철인데, 부왕께서는 어찌하여 멀리 사냥을 나가시려 하는지 알 수 없다.”
고 대답했다.
조의순(曹義珣)이 그 말을 알리자 충렬왕은,
“어린 아이가 괴이하도다. 그러나 사냥 날짜가 이미 정해졌으니 그렇게 할 수 없다.”
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공주가 병이 나 결국 충렬왕은 뜻대로 하지 못했다.
또 어떤 사람이 떨어진 베 적삼차림에 땔 나무를 지고 궁궐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사람을 시켜 누구인지 묻게 했다. 그가 장작서(將作署)의 기인(其人)이라고 대답하자, 충선왕은,
“나는 좋은 옷을 입었는데 백성이 저러하니 마음이 편치 않구나.”
하고 슬퍼했다.
또 궁궐의 노비 한 사람이 동네 아이들의 종이 연을 빼앗아 바치자, 왕은 어떻게 얻었는가라고 물었다. 노비가 사실대로 대답하자 왕은,
“남의 것을 빼앗아 나에게 바쳐서 되겠는가?”
라고 꾸짖고는 즉시 돌려주도록 했다.
왕은 늘 행이별감(行李別監) 위선(魏璇)더러,
“기괴하고 요망한 일은 전혀 들을 필요가 없다. 다만 옛 군자의 옳은 일만을 나에게 말해 달라.”
고 이르곤 했다.
염승익(廉承益)이 일찍이 관상보는 사람인 천일(天一)을 데리고 와서 왕의 관상을 보게 했는데 천일은,
“인자한 눈을 가지고 계시니 매와 사냥개를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왕은 곁에 있던 박의(朴義)를 돌아보면서,
“우리 부왕께 늘 매와 개를 놓아 사냥판을 벌이도록 권유해 아부하는 놈이 바로 이 늙은 개다.”
라고 말하니 박의가 부끄러워 얼굴이 벌게지며 물러갔다.
충렬왕 13년 9월. 충렬왕(忠烈王)이 연경(燕京)에 있으면서 왕을 불러 입조하게 했다.
10월. 전라도(全羅道) 왕지별감(王旨別監) 권의(權宜)가 은(銀) 40근과 호피(虎皮) 20장을 왕에게 바치면서 여행비용에 보태 쓰라고 하자 왕은,
“이 물건들은 죄다 백성을 수탈해 원한이 쌓인 것이니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라고 거절한 후 사람을 시켜 모조리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충렬왕 14년 8월. 황제의 생일을 맞아 대전(大殿)에서 벌인 잔치자리에서 송나라 사람이 광대놀이를 하자 충렬왕이 왕을 구경하라고 불렀으나 왕은 사양하고 참석하지 않았는데 당시 왕의 나이 14세였다.
언젠가 내료(內僚) 원혁(元奕)의 무릎에 기대어 한가롭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원혁(元奕)이 왕더러,
“임금은 모든 것을 너무 면밀하게 살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총명함이 지나치시니 사람들을 조금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왕이 안색을 바꾸면서,
“너희 놈들이 나를 어리석고 우둔하게 만든 다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떡 주무르듯 하려느냐?”
라고 꾸짖으니 원혁이 송구해 마지않았다.
충렬왕 15년 5월 임오일. 왕이 전 박사(博士) 강후(康煦)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좌우(左右)에게,
“이 사람이 연두연비(燃頭燃臂)하여 부왕의 병을 낫게 한 자가 아니더냐?”
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왕은 이렇게 말했다.
“무릇 신하된 자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며 절의를 다하는 데 있다. 연두(燃頭)와 연비(燃臂)는 불승들이 하는 일이지 군자가 할 바가 아닌데도 강후는 윗사람에게 아첨하여 감히 예에 어긋난 짓을 했으니 비록 죽은들 무엇이 아까운가?”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다.
충렬왕 17년 9월. 황제가 왕을 특진(特進)·상주국(上柱國)·고려국왕세자(高麗國王世子)로 임명하고 금인(金印)7)을 하사하였다.
충렬왕 18년 7월 병술일. 왕이 원나라에 갔다.
9월. 황제가 자단전(紫檀殿)에서 왕을 접견하고 본국의 일을 묻자 왕이 자세히 대답했다.
10월. 황제가 왕을 침전(寢殿)에 불러들여 무슨 책을 읽었느냐고 묻자 『통감(通鑑)』을 읽었노라고 대답했다. 다시, “역대 제왕 가운데 누가 현명하더냐?”고 물으니, “한나라의 고조(高祖)와 당나라의 태종(太宗)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또, “한고조와 당태종을 짐과 비교하면 어떠한가?”라고 묻자, “나이 어린 제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응대했다. 그러자 황제가 “그렇겠구나. 재상에게 물어보고 오라.”고 일렀다.
충렬왕 21년 8월 무오일. 왕이 원나라에서 귀국하자 황제가 그를 의동삼사(儀同三司)·상주국(上柱國)·고려국왕세자(高麗國王世子)·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로 책봉하고, 양대(兩臺)의 은인(銀印)을 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유시했다.
“그대는 어려서 부모로부터 올바른 교육을 받아 일찍부터 뛰어난 재질[令器]을 나타내었으며, 우리 황실의 외손으로 태어나서 번방의 사람들로부터 한결같은 촉망을 받았다.
선대 황제를 섬기게 되자 그 공손하고 부지런함이 모두 드러났으며 정책 결정에 참여하여 그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그 결과로 큰 은총을 받아 마침내 높은 관작에까지 올랐으니 이제 그 공로를 헤아려 선대를 계승하도록 함으로써 황실의 외척답게 특별히 우대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대는 아들로서 오직 효도하고 신하로서 오직 충성할 것이며, 정해진 규범을 각별히 지키고 자기의 본분[素履]9)에 어긋나지 않음으로써 그대가 받은 영광에 보답하도록 힘쓰라.”
9월 갑신일. 왕이 도첨의사(都僉議司)에서 업무를 보았다.
12월 계묘일. 왕이 원나라에 갔다.
충렬왕 22년 11월 임진일. 왕이 백마 81필(匹)을 황제에게 폐백예물로 바친 후 진왕(晋王) 카마라[甘麻刺])의 딸(계국대장공주)에게 장가들었다.
계사일. 또 백마 81필을 태후(太后)에게 바치니, 태후가 양(羊) 7백 마리와 술 5백 항아리를 내어 왕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는 황제와 태후가 임석했고 제왕(諸王)과 백관들도 모두 참석했다.
갑오일. 백마 81필을 진왕에게 선물한 뒤에 술 3백 항아리와 양 4백 마리로 잔치를 열었다.
충선왕 5년(1313) 계축년 3월 갑인일.
왕이 맏아들인 강릉대군(江陵大君) 왕도(王燾)를 황제에게 알현시키고 왕위를 계승시켜줄 것을 요청하자 황제가 왕도를 왕으로 책봉했다.
당시 원나라 조정에서 왕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려고 하자 왕이 거절할 도리가 없어서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또 조카인 연안군(延安君) 왕호(王暠)를 세자로 삼았다.
왕이 일찍이 심왕(瀋王)에 책봉되었으므로 당시에 심왕(瀋王)이라 일컬어졌다.
○충숙왕(忠肅王) 원년에 황제가 왕에게 분부해 그대로 수도에 머물게 하니, 왕이 거기에 있는 사저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대유(大儒)인 염복(閻復)·요수(姚燧)·조맹부(趙孟頫)·우집(虞集) 등을 초대해 그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탐구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우승상(右丞相) 투루[禿魯]가 파직된 후 황제가 왕을 우승상으로 임명하려 하니 왕이 다음과 같이 굳이 사양했다.
“폐하께서 국왕의 자리를 맡기신 것도 오히려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 한 나머지 아들에게 맡겨달라고 간청해 허락을 얻은 마당에, 하물며 조정의 윗 재상자리(우승상)는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제가 어찌 영화를 탐내 외람되게 그 자리에 올라가 폐하의 영명하심에 누를 끼치오리까? 죽기를 각오하고 사양하나이다.”
이에 황제가 웃으면서 “그대가 권력에 관심이 없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 충숙왕 3년 3월 신해일. 왕이 황제에게 건의해 심왕(瀋王)의 지위를 세자 왕호(王暠)에게 전하고 스스로는 태위왕(太尉王)이라 일컬었다.
○ 충숙왕 7년 9월. 왕이 원나라 수도로 돌아오자 황제가 중서성(中書省)에 지시해 그를 고려로 호송해 안치시키라고 했으나 왕은 지체하면서 즉시 떠나지 않았다.
10월. 황제가 왕을 형부(刑部)에 하옥시켰다가 머리를 깎아 석불사(石佛寺)에 안치했다.
12월 무신일. 황제가 왕을 토번(吐蕃)의 살사길(撒思吉)이라는 지역으로 유배보냈다.
○ 충숙왕 10년 8월. 태정황제(泰定皇帝)가 즉위하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왕을 소환했다.
○ 충숙왕 12년 5월 신유일. 왕이 연저(燕邸)에서 죽으니 재위 기간은 5년이며 향년 51세였다.
충선왕은 성품이 현인을 좋아하고 악인을 미워했으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한 번 보고 들은 일은 끝까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늘 선비들을 데려다가 역사상 국가들의 흥망과 군신의 잘잘못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토론했다. 특히 송나라 시대의 옛 일들에 큰 흥미를 가진 나머지, 자신의 막료를 시켜 『동도사략(東都事略)』을 읽게 하면서 왕단(王旦)·이항(李沆)·부필(富弼)·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구양수(歐陽脩)·사마광(司馬光) 등 명신들의 전기에 이르면 반드시 손을 들어 이마에 댐으로써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정위(丁謂)·채경(蔡京)·장돈(章惇) 등 간신의 전기를 들을 때면 반드시 이를 갈면서 통분해 하곤 했다.
11월. 왕을 덕릉(德陵)에 장사지냈다.
충혜왕(忠惠王) 5년에 원나라에서 충선(忠宣)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공민왕(恭愍王) 6년에는 선효(宣孝)를 덧붙였다.
사신의 논평
충선왕은 세자 시절 원나라 조정에 입시해 요수(姚燧)·조맹부(趙孟頫) 같은 명유들과 교유했으며 간혹 그 나라 정치에 관여해 썩 훌륭한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후 상국의 관직 제도와 겹치는 것을 피해 관직 명칭을 바꾼 것은 제후로서의 법도에 충실한 조치였으며, 전부(田賦)를 올바르게 고치고 염법(鹽法)을 제정한 것은 정치의 요체를 안 행동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자리는 온 백성들이 우러르며 모든 정무가 집중되는 자리라 단 하루라도 비워서는 안되는 것인데도, 왕은 황제의 분부로 복위한 뒤 부녀자들과 내시들의 꾐에 빠져 다섯 해나 연경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이에 나라사람들이 필요한 물자를 대느라 고통을 겪었고 시종하는 신하들은 오랜 객지 생활에 지친 나머지 귀국할 생각만 하면서 마침내 서로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원나라도 또한 그에게 염증을 느껴 두 차례나 귀국을 종용해오자, 왕은 회피할 구실이 없어 아들 왕도(王燾)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또 조카 왕호(王暠)를 세자(世子)로 삼았다. 때문에 부자와 형제 사이에 온갖 시기 질투가 일어나 결국 그 화(禍)가 여러 대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았다.
장래에 대한 계획이 이처럼 불성실했으니 그가 토번(吐蕃)에 유배간 것도 기실 우연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