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길>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양신이 태극이라면 진공에 합하는 것은 무극이다. 구년면벽은 구세제민의 번거로움마저 버리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최후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位)에 도달한 지인(至人)을 천선(天仙)이라 한다.
1) 결태(結胎)의 위치는 하전과 중궁 중 어느 곳입니까?
2) 대약이 원만해지면 복식과관(服食過關)하여 중단전에 머물러 묘유주천을 해야 도태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중궁에 머무는 도중 백맥이 충화하고 사지가 창달(暢達)하면 급히 눈을 좌에서 우로 36회, 우에서 좌로 24회 굴려서 성명의 기운을 취합하여야 결태가 된다고 합니다.
3) 태아의 모습이 왜 자신과 동일하게 형성됩니까?
4) 호흡(태식)은 어떻게 합니까?
5) 이로환정에 대하여 묻겠습니다. 도태를 이룬후 진양지기(眞陽之?)가 앉은 자리에서 오궁(午宮)을 향하여 뻗쳐오른 후 그 빛이 곳곳으로 뻗어나간다 합니다. 이 때 마음을 자식(子息 : 태아)에게 집중하여 정(定)하고 있으면 홀연히 일점의 진음(眞陰)이 그 속에서 생겨나고 감로(甘露)가 흘러나오며 심지(心地)가 청량해지는 경상이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 경상이 한두번 오게 되면 그 때야 비로서 이로환정할 수 있다고 하는데 위치를 바꿀 때도 단에서 기운이 솟아올라 저절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합니다.
6) 양신이 성숙하여 천문을 열고 대허공계로 나아간다고 합니다. 이때 출신할 시기를 알려주는 경상(景象)으로서 천화란추가 일어난다고 하는데, 천화란추는 하, 중 이전으로부터 양미간으로 진기가 뻗쳐올라 그 빛이 마치 백설(白雪)이 만공(滿空)한 것 같다고 합니다. 이 때는 어떠한지요?
7) 출신 후 수레바퀴와 같은 일륜금광(一輪金光)이 홀연히 허공중에 나타나는데 정념(正念)으로 양신을 그 광중(光中)에 앉히고 진의(眞意)로써 그 금륜(金輪)을 축소시켜 양신 속으로 끌어들인 다음 중궁에 안치하여야만이 금단을 마무리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륜금광을 양신 속에 안치하여야만 기로써 성형(成形)할 수 있다고 합니다.
8) 일월합벽(日月合壁)에 대하여 묻겠습니다. 양신이 정에 들어있을 때에 홀연히 일륜호월(一輪浩月)이 허공 중에 나타나면 이를 마음으로 새겨두고 다시 정(定)하면 어느 때에 홍일(紅日)이 월중(月中)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때에 이것을 진의(眞意)로 끌어들여 갈무리한다고 합니다.
선수련은 흔히 무위법보다는 유위법에 치중하여 연정화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 중요성을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면 언젠가는 끝단추도 바르게 끼울 수 있다는 말로써 비유하고 있다. 그 까닭은 세상의 많은 공부법들이 성(性)에 치우치거나 바르지 못한 기운(음기, 신기)을 닦음으로써 결국은 음신(陰神)에 떨어져 한낱 신령한 귀신을 이루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최초의 진양화를 얻지 못하면 구전환단의 공을 이룰 수 없고, 이 음양일도(陰陽一道)의 길을 가지 못한다면 끝내는 신선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선수련의 승패는 일점의 진양을 얻는 것이고 이 진양이 진음으로 변화하는 이치을 얻는 것이며 그 진음진양이 소약으로, 대약으로, 내단으로 변화하는 것을 얻는데 있다. 따라서 연정화기의 과정이 가장 어렵고도 험난하다고 할 것이다.
만약 무사히 연정화기의 과정을 마쳐 삼성내단을 이룬다면 그 경지가 이미 육신통이요, 견성대각인만큼 나머지 연기화신과 연신환허의 공을 이루지 못함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 매어 쓸 수 없다' 라는 속담이 있듯이 차근차근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는 작업에 충실한다면 언제가는 최후의 길을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위에 제시한 몇 가지 질문들은 고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연기화신, 연신환허에 대한 내용과 해결하지 못한 의문점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고서에 대하여 몇 가지 형태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본인이 직접 쓴 것인가? 만약 직접 쓴 것이 아니라면 스승의 말을 잘못 이해하거나 자신의 이해의 폭에 따라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둘째, 과연 그 스승이나 제자의 수련은 올바른 것인가?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기의 세계는 꿈속에서의 실체감처럼 본인에게는 확실하게 느껴지지만 그 또한 환(幻)이요, 자기착각인 경우가 많다. 혹자는 자신의 소주천이 엄청나게 굵게 돌아간다고 느끼며 또는 뜨거운 물줄기가 올라간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실낱같이 가늘게 형성되어 있으며 온 몸이 뜨겁다는 사람의 몸에서 냉기가 흘러나와 불편을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셋째, 과연 그 스승은 직접 이룬 것인가? 아니면 그 또한 그의 스승이나 책에서 전해들은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측면을 간과할 수가 없다. 요즈음 양신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또 그 스승이 제자에게 능력을 주고 소약이나 대약, 심지어는 양신의 종자도 넣어주며 또 그 종자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몸속에 자기와 똑같은 모습의 양신을 본다고 한다.
누가 누구를 성불케 할 수 있으며 무슨 양신의 종자를 넣어준다는 말인가? 기는 넣어줄 수 있고 귀신은 붙혀줄 수가 있을지언정 대약이나 양신의 공(功)을 남이 이루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설사 소약을 넣어 줄 수 있다고 하여도 그 소약은 이내 흩어져버리고 만다. 마음의 그릇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물을 담아 둘 수가 있겠는가?
구도(求道)란 자기자신의 길이다. 고서나 스승의 가르침은 하나의 이정표에 불과하다. 그 길은 스스로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자기 몸 속의 길을 가는데, 진리의 길을 가는데 무슨 시대적 차이에서 오는 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직 바른 방법과 정성이 있을 뿐이다.
나는 소약이 내 척추 속을 관통할 때에도 그것이 소약인 줄을 알지 못하였으며, 양광삼현이 일어나 인당에 백열등 같이 뚜렷한 허실생백이 생겨날 때에도 양광삼현이란 말조차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 후에 비로서 고서를 통하여 단전에서 치솟은 불길이 단전화치임을 알았고 양쪽 신장이 끓는 것이 양신탕전임을 알았다. 이러한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무위법이란 말 그대로 어떠한 관념이나 방법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으며 그 현상은 자연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연기화신과 연신환허는 무위자연인 것이다.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싣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위에 실린 내용들이 틀린 것도 있고 맡는 것도 있다. 무위로 행하는 것인데 어찌 의식을 가지고 눈알을 돌릴 것이며, 내가 여기 앉아 있는데 어찌 몸 속의 양신이 멀리 달아나겠는가?
과연 여기 있는 나와 달아나는 양신의 관계는 무엇이며, 앉아 있는 자신의 의식과 나가 있는 양신의 의식은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가? 그렇다면 화신불(化神佛)의 의식은 저마다 다른 것인가? 이것은 이미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부증불감이란 말로써 답해주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것의 대답은 필요치 않다. 무의미할뿐더러 새로운 망상을 더해줄 뿐이다.
나는 끝으로 몇가지를 당부하고자 한다.
첫째, 수사는 자신의 몸 속에 타오르고 있는 진양의 힘을 믿어야 한다.
둘째, 성인(聖人)은 절대 평범하다.
셋째, 모든 수련단체나 스승들을 바른 현실생활의 잣대로써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신기한 말을 일삼거나 무슨 비법을 운운하며 신계(神界)를 들먹인다면 이는 외도방문(外道傍門)이다. 많은 사람들이 저 사람은 도사이기 때문에 저런 기이한 행동과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다.
실제로 그러한 신의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 하겠으나, 진정한 법의 차원에서 본다면 삼십삼천의 세계가 모두 허상이다. 오직 허공합도하여 진공묘유을 체득함이 정법공부의 종착역이다. 수사는 이러한 사실을 깊이 참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자기 수행의 길을 정진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