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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집(耳溪集)
이계집 제27권
묘갈명(墓碣銘)
<번역문>
홍문관 부교리 천일재 홍공 묘갈명 병서 〔弘文館副校理天一齋洪公墓碣銘 幷序〕
공의 휘(諱)는 중현(重鉉)이고 자(字)는 대옥(大玉)이니 바로 우리 풍산(豐山)의 명족(名族)이다. 시조 휘 지경(之慶)이 고려 말엽에 일어나 향공(鄕貢)으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국학 직학(國學直學)을 지냈다. 지경이 휘 간(侃)을 낳으니 간은 도첨의 사인(都僉議舍人)을 지냈고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호는 홍애(洪崖)이다. 여러 대를 전하여 낭장(郎將) 휘 귀(龜)에 이르러 고려의 정국이 혼란한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서 고양(高陽)으로 돌아갔다. 왕조가 바뀌자 여러 대 동안 벼슬하지 않다가 휘 이상(履祥)에 이르러 경술(經術)과 행의(行義)로 목릉(穆陵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이 되니, 세상에서 모당(慕堂) 선생이라 불렀다.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휘 입(雴)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고, 조부 휘 주후(柱後)는 면천 군수(沔川郡守)를 지냈고, 부친 휘 만최(萬最)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된 모친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정랑(正郞) 기한(起漢)의 따님이고, 귀래정(歸來亭) 말주(末舟)의 후손이다. 아들 여덟을 두었으니 공은 그 가운데 넷째이다. 숭릉(崇陵 현종(顯宗)) 경자년(1660, 현종1)에 태어나니, 총명하고 빼어나 보통 아이와 달랐으며 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학업을 시작하자마자 벌써 스스로 힘쓸 줄 알았고, 장성하자 문사(文辭)에 더욱 매진하여 붓을 잡고 글을 쓰면 수천 자를 썼다. 시를 지을 때는 다듬고 기교 부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풍부하고 통창하여 이치가 담겨 있었다. 명릉(明陵 숙종(肅宗)) 갑자년(1684, 숙종1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진년(1688)에 삼일제(三日製)에 장원하고, 기사년(1689)에 증광시(增廣試)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여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분관되었다. 경오년(1690)에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에 배수되고 겨울에 사서(司書)로 승차하였다. 신미년(1691)에 사간원 정언으로 자리를 옮기고 지제교에 선발되었다. 임신년(1692)에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계유년(1693)에 지평으로 자리를 옮기고, 홍문관에 선발되어 들어가 수찬이 되고, 얼마 뒤 외직으로 나가 영유 현령(永柔縣令)이 되었다. 갑술년(1694) 봄에 다시 부교리에 제수되었으나 소명(召命)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마침 조정에 큰 변동이 있자 집권자가 공이 예전에 사간원에 있으면서 조사석(趙師錫)과 남용익(南龍翼)을 멀리 유배 보내는 계청(啓請)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뒤미처 죄를 만들어 경주(慶州)로 유배 보냈다. 영유현의 백성들이 수레를 부여잡고 울부짖으면서 각자 토산물을 바치며 노자(路資)를 부조하였으나 공은 모두 물리쳤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이르기를 “부조에 명분이 있거늘 어찌하여 선의를 막으십니까? 어찌 산음(山陰)의 대전(大錢)을 본받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한 푼 가치도 못 된다.”라고 하였다. 이듬해 용서받고 돌아와 마침내 충주(忠州) 농암산(籠巖山) 아래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첨지공(僉知公)이 서울 집에 있으면서 중풍이 드니 공이 도성으로 들어가 6, 7년 동안 간호하였는데 신사년(1701, 숙종27) 봄에 결국 상을 당하였다. 공은 이미 연로하였으나 상제(喪制)를 지킴에 예법에 어긋남이 없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 여겼다. 탈상하고 다시 향려(鄕廬)로 돌아갔고, 19년 뒤에 의릉(懿陵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다시 수찬을 제수하였다. 당시 집권자가 묵은 유감을 푸느라 다시 이전 일을 문제 삼아 마침내 벼슬을 내려놓았다. 원릉(元陵 영조(英祖))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배수되었다. 을사년(1725)에 사복시 정(司僕寺正),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강릉 부사(江陵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병오년(1726) 3월 26일에 향제(鄕第)에서 졸하고 그해 6월에 집 뒤에 장사 지내고 계유년(1753)에 노은동(老隱洞) 홍곡(洪谷) 임좌(壬坐) 언덕에 이장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드높고 굳세어서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고, 문장에 능하고 음주를 좋아하였다. 활달하게 담론을 펼치면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압도되었고, 다른 사람이 옳지 않은 뜻을 품는 것을 보면 비록 그 사람이 귀하고 권세 있는 사람이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처가(妻家) 사람이 바야흐로 권력을 잡고 국정을 운영하면서 공을 자기편으로 끌어오려 하였지만, 공은 평소 그 사람됨을 싫어하여 아내에게 말하기를 “저 사람은 수명대로 살다 죽으면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장희재(張希載)가 권세에 기대 기세등등하여 일찍이 연회를 마련하여 온 조정의 사람들을 다 부르고 공도 초대하려고 하였는데 공은 가려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또 뒤집히니 공이 은거한 지 오래되어 의론하는 이들이 장차 공을 출사(出仕)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마침 족인(族人)이 집권하여 자신과 친분이 있는 전관(銓官)을 초청하고서 그와 친밀하게 지낼 것을 공에게 권하며 술기운이 돌자 은근한 뜻을 보였는데, 공이 눈을 부릅뜨고 격분하여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가 어찌 너희를 따라 부귀를 흥정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노하여 일어났는데, 공이 이 일로 마침내 앞길이 막혀버렸다. 아! 사대부가 입신하여 처신함에 풍도와 절조를 견지하는 것이 귀하니 저 때를 따라 부침(浮沈)하는 이들은 살펴볼 것도 없다. 공은 조정에서 벼슬한 30년 동안 위풍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고 재능은 세상에 쓰일 만했으니, 만약 타협하지 않고 곧은 성격을 다 없애고 평범하게 행동하며 무리와 함께 나아갔다면 무슨 관직인들 하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홀로 고고하게 조금도 남에게 영합하지 않아 종신토록 배척을 당해도 후회하지 않으니, 참으로 옛날의 사대부라 이를 만하다.
공의 초취(初娶)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병조 정랑 홍도(弘道)의 따님이고 좌찬성 점(點)의 손녀로,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재취(再娶)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사인(士人) 세공(世共)의 따님이니 공보다 나중에 별세하였고 공의 묘소에 합장되었다. 민부인은 2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원보(元輔), 차남은 종보(宗輔)이고 딸들은 이한보(李漢輔),정응두(鄭應斗),정홍제(鄭弘濟)에게 시집갔다. 심부인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진보(縉輔), 차남은 윤보(綸輔), 삼남은 인보(寅輔)이고 딸들은 김학기(金學基)와 이제완(李濟完)에게 시집갔다. 원보는 세 번 장가들었으나 후사가 없어 종보의 아들 충한(忠漢)을 후사로 삼았고 외동딸은 진사 이환(李寏)에게 시집갔다. 종보는 5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충한(忠漢), 차남은 응호(應浩), 삼남은 노보(魯輔)에게 출계(出系)한 당한(戇漢), 사남은 혜보(惠輔)에게 출계한 지호(志浩), 오남은 사호(思浩)이고 딸들은 김양오(金養五),정희중(鄭煕中),이박휴(李璞休)에게 시집갔다. 진보는 아들 둘을 두었으니 주호(籌浩)와 책호(策浩)이다. 윤보는 후사가 없어 책호를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인보는 두 아내에게서 아들 하나씩을 두었으니 장남 차기(次奇)는 나이 열넷에 효도를 다해 목숨을 바쳐 군자가 상(殤)의 경우로 보지 않았고 차남은 석호(奭浩)이다. 이한보는 아들 셋을 두었으니 덕주(德胄),혜주(惠胄),헌주(憲胄)이고 딸들은 정희좌(鄭煕佐)와 권경언(權景彥)에게 시집갔으니 모두 진사이다. 정응두는 외아들 사선(師先)을 두었고 외동딸은 정지각(丁志覺)에게 시집갔다. 정홍제는 아들이 둘이니 동박(東璞)과 동첨(東○)이고 딸 셋은 강세옥(姜世玉),강치근(姜致勤),장윤문(張胤文)에게 시집갔다. 김학기는 계자(繼子) 영흠(永欽)을 두었다. 이제완은 아들 둘을 두었으니 시경(是慶)과 국경(國慶)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선비가 조정에 서는 것은 / 士之立朝
나무가 산에 있는 것과 같으니 / 如木在山
바람이 거세면 쓰러지고 / 風迅則靡
눈발이 세차면 시드네 / 雪虐則殘
높이 솟은 저 송백은 / 欝彼松栢
우뚝이 위로 하늘을 찔러 / 亭亭上干
기대지도 꺾이지도 않아서 / 不倚不挫
그 절조가 홀로 완전하네 / 其節獨完
공은 오직 홀로 우뚝 서서 / 公惟特立
드높은 뜻 따라잡기 어려우니 / 抗志難攀
이십 년 세월 고고히 은거하여 / 廿載高臥
본분에 편안하고 한가하였네 / 素履安閒
분잡한 속류들은 / 紛紛俗曹
남의 눈치나 살피나니 / 視人眉間
누가 썩은 쥐를 때려잡을까 / 誰投腐鼠
얼굴이 붉어지도다 / 有騂其顔
천일대에 / 天一之臺
물결 드높고 차가우니 / 其水高寒
자기 술 자기가 따르고 / 我酒我斟
자기 거문고 자기가 탔네 / 我琴我彈
몸은 흙으로 돌아가나 / 骨兮歸土
기는 깎이지 않으리니 / 氣不可刪
시로 공의 묘갈명 지음에 / 以詩銘公
붓끝에서 파도가 이는 듯하네 / 筆下生瀾
[주-D001] 홍문관 …… 묘갈명 : 이 글은 이계의 일족(一族)인 홍중현(洪重鉉, 1660~1726)에 대한 묘갈명이다. 홍중현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대옥(大玉), 호는 천일재(天一齋)이다. 정언, 수찬, 영유 현령(永柔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주-D002] 향공(鄕貢) : 고려 때 지방의 각 고을에서 유생들을 뽑아 중앙에 올려 보내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응시하게 했는데, 이들을 향공 또는 공사(貢士)라 하였다.[주-D003] 큰 변동 : 폐비 민씨(閔氏)의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한 갑술환국을 가리킨다.
[주-D004] 조사석(趙師錫)과 …… 계청(啓請) : 1689년(숙종15) 2월 18일에 원자(元子)의 명호를 정하는 일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 남용익을 처벌하라는 계청과 1691년(숙종17) 윤7월 17일에 왕세자 책봉일에 경하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은 조사석을 파직하라는 계청을 가리킨다. 《肅宗實錄 15年 2月 18日ㆍ17年 閏7月 17日》
[주-D005] 산음(山陰)의 대전(大錢) : 동한(東漢) 때 회계 태수(會稽太守) 유총(劉寵)이 청렴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고 조정으로 돌아갈 때 산음현(山陰縣)에서 5, 6명의 노인이 각자 100전(錢)을 가지고 와서 노자로 주었는데, 유총은 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워 한 사람마다 대전(大錢) 1전씩만을 받았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주-D006] 처가(妻家) 사람 : 민언량(閔彦良)을 가리키는 듯하다. 홍중현의 아내인 여흥 민씨(驪興閔氏)의 사촌 민언량은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와 가깝게 지내면서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모해하는 음모에 가담하였는데, 후에 그 전모가 드러나 부친인 민종도(閔宗道)와 함께 처형되었다.
[주-D007] 군자가 …… 않았고 : 홍차기의 부친인 홍인보(洪寅輔)는 살옥(殺獄)에 연루되어 홍차기가 태어날 때부터 옥에 갇혀 풀려나지 못했는데, 홍차기가 소년이 된 후 옥바라지를 하고 직접 도성에 달려가 신문고를 두드리고 관리들에게 호소하여 마침내 이 사실이 임금에게 알려져 홍인보가 옥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홍차기는 약한 몸으로 무리를 하며 도성을 왕복하느라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본집 권18 〈홍효자차기전(洪孝子次奇傳)〉에 내용이 상세하다. 상(殤)은 성년이 되지 못하고 일찍 죽은 사람으로, 나이에 따라 상ㆍ중ㆍ하 세 등급으로 나누어 상복을 줄여서 입고 장례 의식도 낮추어서 행한다. 홍차기(洪次奇)가 성년이 되기 전에 요절하였으므로 상복을 줄여서 입고 장례 의식도 낮추어서 행해야 하지만, 의로운 죽음이므로 성년인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말이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노나라와 제(齊)나라가 낭(郎)에서 싸울 때 공숙우인(公叔禺人)이 이웃 마을의 동자인 왕기(汪踦)와 함께 싸움터에 달려가서 싸우다가 함께 죽었다. 노나라 사람들이 동자 왕기를 상(殤)의 예로 장례하지 않고자 해서 공자에게 물었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창과 방패를 잡고서 사직을 보호하였으니, 비록 상의 예로 장례하지 않더라도 옳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戰于郞, 公叔禺人與其隣童汪踦往皆死焉. 魯人欲勿殤重汪踦, 問於仲尼, 仲尼曰, 能執干戈, 以衛社稷 雖欲勿殤也, 不亦可乎.]”라고 하였다.
[주-D008] 누가 …… 붉어지도다 : 원문의 ‘투(投)’는 돌을 던져 쥐를 때려잡는다는 말로, 가의(賈誼)의 〈치안책(治安策)〉에 “돌을 던져 쥐를 잡고자 하나 그릇이 깨질까 꺼린다.[欲投鼠而忌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원문의 ‘성(騂)’은 취기나 수치심 등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형용하는 글자로, 홍중현의 질타에 속류들이 부끄러워한다는 말이다.
[주-D009] 천일대(天一臺) : 홍중현의 호가 천일재(天一齋)이고, 그의 유집인 《천일재유고》(규장각 소장 古3428-662) 1책에 〈천일재상량문(天一齋上樑文)〉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천일재가 있는 높은 언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혹 그곳에 누각의 형태로 천일대가 있었는지는 미상이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이승현 (역) | 2021
<원문>
이계집(耳溪集)
이계집 제27권
묘갈명(墓碣銘)
홍문관 부교리 천일재 홍공 묘갈명 병서 〔弘文館副校理天一齋洪公墓碣銘 幷序〕
弘文館副校理天一齋洪公墓碣銘 幷序
公諱重鉉。字大玉。卽我豐山名閥也。肇祖諱之慶。起麗季。以鄕貢中魁科。官國學直學。生諱侃。官都僉議舍人。以文章名世。號洪崖。數傳至郞將諱龜。見麗政亂。棄官歸高陽。値革代。累世不仕。至諱履祥。以經術行義。爲 穆陵名臣。世稱慕堂先生。是爲公高祖也。曾祖諱雴。黃海道觀察使。祖諱柱後。沔川郡守。考諱萬最。僉知中樞府事。妣贈淑夫人高靈申氏。正郞起漢之女。歸來亭末舟之後也。擧男子八人。公其第四也。以 崇陵庚子生。聰秀異凡兒。不好童子戲。甫入學。已知自力。及長。文辭益進。下筆數千言。詩不喜刻礪尖巧。而贍鬯有理致。以 明陵甲子。中司馬試。戊辰。魁三日製。己巳。增廣直赴。唱名隷承文院。庚午。拜侍講院說書。冬。陞司書。辛未。遷司諫院正言。選知製敎。壬申。除兵曹佐郞。癸酉。移持平。選入弘文館爲修撰。尋出爲永柔縣令。甲戌春。復除副校理。未赴召。會朝著大變。當路者。以公嘗在諫院。參趙師錫,南龍翼遠竄之啓。追成罪。投慶州。縣民攀轅號泣。各贈土物助行。公盡却之。人謂公曰。餽有名。奚遏善意。盍效山陰大錢乎。公笑曰。吾則不直一錢耳。明年宥還。遂卜居于忠州籠巖山下。未幾。僉知公。在京第。患風症。公入城扶護。凡六七年。以辛巳春。竟遭艱。公年已衰。而守制無違禮。人以爲難。喪畢。復歸鄕廬。後十九年。 懿陵御極。復授修撰。時當路者修宿憾。復持前事。遂解官。 元陵甲辰。拜成均司藝。乙巳。除司僕寺正,承文院判校,江陵府使。皆不赴。以丙午三月二十六日。卒于鄕第。以其年六月。葬于家後。癸酉。移葬于老隱洞洪谷壬坐之崗。公爲人魁梧亢厲。不拘小節。能文章。喜飮酒。談論風生。壓倒一座。見人不可意處。雖貴勢。不少饒。婦黨方柄用。欲援引公。公素惡其爲人。語內子曰。彼獲良死幸耳。張希載倚勢鴟張。嘗宴會傾朝廷。意欲致公。而不肯往。未幾世局又變。公屛居久。公議將起之。會族人當路。邀所親銓官。勸與交懽。酒酣致慇懃。公瞪目奮髯曰。士君子寧隨若曹媒富貴耶。其人怒而起。公坐是遂廢。噫。士大夫立身行己。貴以風節自持。彼隨時俯仰者。無足觀矣。公立朝三十年。風稜足以動人。才具可以需世。苟能枿去崖角平步旅進。則何官不可。而獨偃蹇不少周容。終身擯斥而不悔。眞可謂古之士大夫也。公初娶驪興閔氏。兵曹正郞弘道女。左贊成點孫。沒先公。再娶靑松沈氏。士人世共之女。沒後公。葬並祔公。閔夫人擧二子三女。子長元輔。次宗輔。女適李漢輔,鄭應斗,鄭弘濟。沈夫人擧三子二女。長縉輔。次綸輔。次寅輔。女適金學基,李濟完。元輔三娶無嗣。取宗輔子忠漢爲後。一女適進士李寏。宗輔有五子三女。長忠漢。次應浩。次戇漢。出爲魯輔後。次志浩。出爲惠輔後。次思浩。女適金養五,鄭煕中,李璞休。縉輔有二子。籌浩,策浩。綸輔無嗣。取策浩爲後。寅輔前後娶各有一子。長次奇十四。殉於孝。君子勿之殤也。次奭浩。李漢輔有三子。德胄,惠胄,憲胄。女適鄭煕佐,權景彥。皆進士。鄭應斗有一子師先。一女適丁志覺。鄭弘濟二子。東璞,東。三女適姜世玉,姜致勤,張胤文。金學基有繼子永欽。李濟完有二子。是慶,國慶。銘曰。
士之立朝。如木在山。風迅則靡。雪虐則殘。欝彼松栢。亭亭上干。不倚不挫。其節獨完。公惟特立。抗志難攀。廿載高臥。素履安閒。紛紛俗曹。視人眉間。誰投腐鼠。有騂其顔。天一之臺。其水高寒。我酒我斟。我琴我彈。骨兮歸土。氣不可刪。以詩銘公。筆下生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