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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
장옥관
건드리면 금세 몸 둥글게 말아 넣는 공벌레처럼
앉기만 하면 굽은 등 한껏 휘어지게 당겨 구석에 기대 앉는 사람이 있다.
숨고 싶다는 걸까 그 삶, 정면이 아닌 이면
축축한 곳에 손 집어넣고 비켜서서 살아온 셈이다
둥근 공처럼 둥글게 무릎깎지 끼면 어떤 발길질에도 충격이 내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까
그 속은 참 캄캄하겠다
썩어 문드러졌겠다 홍어, 수심 수백 미터 아래 어둡게 엎드려 사는 물고기
오직 견딤을 보호색으로 삼는 물고기
삼투압의 짜디짠 짠물이 몸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소금보다 짠 소태 오줌 채워 사는 법을 익혔다
화주를 즐기거나 담배라도 독한 담배
조선간장 한 숟가락 듬뿍, 고춧가루 한 숟가락 듬뿍
도무지 싱거운 맛은 믿을 수 없다는 투다
그러기에 궤양의 위장은 늘 헐어 있다
그 무슨 무시무시한 생활이 짓눌렀을까 홍어, 바닥으로 바닥으로 슬픈 부채처럼 거친 발길 피해 숨어 산다
하지만 가끔 부챗살을 활짝 펼쳐 치솟을 때가 있다
온몸이 지느러미가 되는 순간이다
검은 등짝이 숨긴 희디흰 배때기는 만월처럼 환하게 떠올라 바다의 속셈을 헤아리기도 한다
힘껏 내지르는 한 주먹,
곰삭은 홍어의 내부가 문자로 떠올라 번개처럼 콧등을 때린다 머릿골을 후벼판다
투박한 손바닥이 번쩍! 귀쌈을 올려붙인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의 산호,
그 독한 오줌맛!
----장옥관, [홍어]({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랜덤하우스 2006년) 전문
장옥관 시인은 1955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황금연못}, {바퀴소리를 듣는다}, {하늘 우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를 출간했고, 그리고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장옥관 시인은 “말과 말 사이에 숨을 불어넣고” 싶어하는 시인이며, 그 언어학적인 토대 위에서, ‘설화적 기법’(‘신화적 기법’, 또는 ‘밀교적 기법’)으로 우리 인간들의 ‘삶의 풍경’들을 가장 아름답고 독특하게 미화시켜나간다. 문인수 시인은 1945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85년 {심상}으로 등단한 이후, {뿔}, {홰치는 산}, {동강의 높은 새}, {쉬} 등을 출간했고, 그리고 ‘대구문학상’, ‘김달진 문학상’, ‘노작문학상’, ‘시와시학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문인수 시인은 한 편의아름다운 시에 대한 욕망보다도 그 시쓰기 과정을 더욱 더 좋아하는 시인이며, 따라서 그의 언어는 매우 어눌하고 어색한 문장으로, 그러나 그가 진정한 시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듯이, 자기 자신과 그 이웃들의 삶의 진정성을 담아냄으로써, 더욱 더 만인들의 심금을 울려 나가고 있다. 문인수 시인은 세련되고 정교한 언어와는 거리가 먼 시인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백수건달의 삶’을 그 어눌하고 어색한 문장으로, 그러나 그만큼 아름답고 진솔하게 그려나간다. 장옥관 시인과 문인수 시인은 호형호제하는 선 후배 사이이며, IMF 이후 다같이 명예퇴직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쓰라린 체험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명예퇴직은 일상생활인으로서는 더 이상의 출구가 없었던 막다른 벼랑끝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시인으로서는 더없는 축복이자 영광의 월계관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장옥관 시인과 문인수 시인은 그 실직으로 인하여 다같이 제일급의 시인으로 올라설 수가 있었던 대기만성형의 시인들에 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문인수 시인은 1966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중퇴하고, 1990년부터 1998년까지, 이하석 시인의 주선으로 {영남일보} 교열부 기자로 재직한 것이 그의직장생활의 전부라고 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무남독녀 출신이자 초등학교 선생님인 그의 아내의 내조 덕분으로 그 ‘8할이 넘는 백수건달의 생활’을 전혀, 조금도 기죽지 않고 지탱해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건드리면 금세 몸 둥글게 말아 넣는 공벌레처럼/ 앉기만 하면 굽은 등 한껏 휘어지게 당겨 구석에 기대 앉는 사람이 있다”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주고, “숨고 싶다는 걸까 그 삶, 정면이 아닌 이면/ 축축한 곳에 손 집어넣고 비켜서서 살아온 셈이다”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에 대한 욕망보다도 그 시쓰기의 과정을 더욱 더 사랑하는 문인수 시인은 출가수행 중인 탁발수도승이며, 그 지울 수 없는 백수건달의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 恒心이 없듯이, 떳떳한 생업과 돈주머니가 없으니까, 언제, 어느 때나 “축축한 곳(사타구니)에 손 집어넣고” “숨고 싶다”는 표정만을 지으면서 살아간다. “둥근 공처럼 둥글게 무릎깎지 끼면 어떤 발길질에도 충격이 내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까”라는 시구는 그 ‘백수건달--탁발수도승’의 무서운 견인주에 맞닿아 있는 말이며, 그 모습은 마치,
“많은 사람들은 초췌해진 광대를 차마 볼 수 없다는 연민을 가지고 광대를 멀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광대로 말할 때 모든 사람이 생각하듯 그렇게 초췌한 상태는 아니었고, 그 초췌의 진짜 원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에서 오는 것이었다. 어떠한 소식통도 알 수 없는 일, 즉 단식이란 극히 용이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만은 알고 있었다. 단식한다는 것은 이를 데 없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광대는 이 점을 모든 사람에게 말했으나 믿으려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라고, 프란츠 카프카가 희화화시킨 ‘굶는 광대’의 모습과도 똑같다고 할 수가 있다. 언제, 어느 때나 세상의 한구석에 몸 둥글게 말아넣고 구부려 앉는 사람, 또, 언제, 어느 때나 세상의 정면보다는 이면을 바라보며 숨고 싶어하는 사람, 또, 언제, 어느 때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발길질에도 일제히 대응을 하지 않으며 참고 견디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백수건달의 문인수이며, 탁발수도승의 문인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속은 장옥관 시인이 문인수 시인의 어법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참 캄캄하고 썩어 문드러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홍어는 가오리과의 바닷 물고기이며, “수심 수백 미터 아래 어둡게 엎드려 사는 물고기”이고, “오직 견딤을 보호색으로 삼는 물고기”이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라는 바다(양수) 속에서 열 달을 견뎌야만 이 세상으로 나올 수가 있고, 그 어린 아이는 또다시 2--30년 동안, 아니, 그 오랜 기간동안 ‘홀로서기’의 연습(교육과정)을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만의 세상을 향해서 날아 갈 수가 없다. 삶은 견디는 것이고, 견딤은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연목구어緣木求魚, 즉,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덧없고 부질없는 짓이라고 할 지라도, 그 미친 짓이 진정한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삶은 그 정답이나 비법이 없는 삶이며, 그 어느 누구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서 살아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백수건달, 아니, 그 탁발수도승은 그 미친 짓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삶을 살고, 또, 그리고 아주 행복하게 살아간다. 문인수 시인의 삶의 비법, 즉, 그의 행복론은 그 견딤을 보호색으로, “삼투압의 짜디짠 짠물이 몸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소금보다 짠 소태 오줌 채워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이며, ‘화주’와 ‘독한 담배’와 그리고 맵고 짠 양념들, 예컨대 ‘조선간장’과 ‘고춧가루’를 즐겨드는 것이다. 그 결과, 비록 만성적인 위궤양으로 조금쯤은 고생을 하고 있을지라도, 돈과 명예와 권력 등, 그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돈도 그를 음란하게 하지 못하고, 명예도 그를 유혹하지 못하고, 하늘을 나는 새도 벌벌 떠는 그 어떤 세도가의 절대권력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또, 그리고, 가난도 그의 뜻을 꺾지 못하고, 어떠한 슬픔도 그를 한숨 짓지 못하게 하고, 또, 그리고, 어떤 고통도 그를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한다. 비록, 그의 백수건달, 아니, 그 탁발수도승의 생활이 “그 무슨 무시무시한 생활이 짓눌렀을까 홍어, 바닥으로 바닥으로 슬픈 부채처럼 거친 발길 피해 숨어”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백수건달, 아니, 그탁발수도승의 생활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생활이고, 가장 행복한 생활일 뿐인 것이다. 하늘이 두 쪽이 나고, 모든 부귀영화가 그토록 아름답고 찬란하게 보일지라도,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을 하겠다는 것, 바로 그 장인 정신이 문인수 시인의 삶의 비법이고, 그 행복론이었던 셈이다.
무서운 견인주의----. 이때의 견딤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이다. 또, 그리고, 그 견딤은 절대로 비생산적인 것이 아니며, 그 무엇보다도 더욱 더 높은 생산적인 힘을 자랑하게 된다. “하지만 가끔 부챗살을 활짝 펼쳐 치솟을 때가 있다/ 온몸이 지느러미가 되는 순간이다”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주고, 또한 “검은 등짝이 숨긴 희디흰 배때기는 만월처럼 환하게 떠올라 바다의 속셈을 헤아리기도 한다”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 백수건달, 아니 그 탁발수도승, 아니 그 굶는 광대, 아니 그 홍어는 더 이상 “수심 수백미터 아래 어둡게 엎드려 사는 물고기”만이 아니며, 때로는 그 ‘견딤의 미학’을 토대로 하여, 제일급의 시인으로서 ‘만월처럼“ 아름답게 솟아올라 “바다의 속셈”, 또는 “삶의 진리”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쓸 수가 없지만, 그러나 그 아름다운 시를 쓰려는 과정 자체는 아름다울 수가 있다. 또,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은 견딤 뿐이지만, 그러나 그 견딤의 과정은 더없이 황홀하고 행복할 수가 있다.
장옥관과 문인수, 그들은 다같이 경상도 출신이고, 또한 그들은 다같이 제일급의 시인이 되려는 ‘사악한 욕망’----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욕망을 다 비워냄으로써 제일급의 시인이 되었기 때문이다----을 지녔다. 그들은 다같이 똑같은 한국어라는 자궁 속에서 태어난 일란성 쌍생아들이며, 무서운 원수형제들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장옥관 시인이 함부로 그 예의범절----10년이라는 나이 차이도 잊어버리고----도 잊어버린 채, 문인수 시인의 ‘어투’와 ‘생활습관’과 ‘식성’ 등의 천기를 누설하며 희화화하고 미화시키는 그 작태가 문인수 시인의 마음에 들 리가 없는 것이다. “힘껏 한 주먹”은 문인수 시인이 그 동안 숨기고 있었던 공격본능의 구체적인 발화이며, 어느 덧 제멋대로 ‘문인수라는 홍어무침’을 요리하던 장옥관 시인----또는 그 패거리들에게----에게 “투박한 손바닥”으로 “귀쌈을” 올려 붙이는 어떤 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의 산호”는 홍어가 서식하는 바다 속의 산호일 수도 있고, 그 문인수 시인이 올려붙인 “귀쌈” 때문에 벌겋게 달아오른 장옥관 시인의 얼굴일 수도 있다. 모든 유기체들이 다 그렇듯이 문인수 시인에게도 ‘방어본능’과 ‘공격본능’이 다같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 “건드리면 금세 몸 둥글게 말아 넣는 공벌레처럼”은 심리학적인 ‘퇴행’을 뜻하고, “도무지 싱거운 맛은 믿을 수 없다는 투다/ 그러기에 궤양의 위장은 늘 헐어 있다”는 심리학적인 ‘억압’을 뜻한다. 심리학적인 ‘퇴행’은 프란츠 카프카의 ‘굶는 광대’처럼, 더 이상의 인간다운 삶을 포기한 자의 그것을 뜻하고, 심리학적인 ‘억압’은 그 억압된 욕망 때문에----그 억압된 욕망 때문에 너무나도 백해무익하고 자극적인 식생활의 습관을 갖게 되었듯이-----만성적인 위궤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문인수 시인의 ‘방어본능’은 ‘퇴행’과 ‘억압’ 이외에도 ‘투사’, ‘반동형성’, ‘고착’ 등으로 나타나겠지만, 그러나 그의 ‘공격본능’은 그 방어본능을 넘어서서 ‘상승욕망’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가끔 부챗살을 활짝 펼쳐 치솟을 때가 있다/ 온몸이 지느러미가 되는 순간이다/ 검은 등짝이 숨긴 희디흰 배때기는 만월처럼 환하게 떠올라 바다의 속셈을 헤아리기도 한다”라는 시구가 그것이고, “힘껏 내지르는 한 주먹”, “곰삭은 홍어의 내부가 문자로 떠올라 번개처럼 콧등을 때린다 머릿골을 후벼판다/ 투박한 손바닥이 번쩍! 귀쌈을 올려붙인다”라는 시구가 그것이다. 모든 인간의 욕망은 상승 욕망이고, 그 상승 욕망은 ‘힘에의 의지’, 즉, 그 ‘권력에의 의지’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홍어의 그 상승 욕망----그 홍어를 초월하려는 상승 욕망----이 ‘만월처럼’ 눈 부신 부상을 하게 된 것이고, 그리고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훼방꾼들에게 그 무서운 폭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방어본능만이 있고 공격본능이 없는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갈 수도 없고, 또한 공격본능만이 있고, 방어본능이 없는 인간 역시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그 옛날의 문인수 시인은 마치 한 마리의 홍어처럼, 자기 자신의 방어에만 급급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의 공격본능이 그 악마(대시인이라는 악마}의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인수 시인의 백수건달의 생활, 아니, 그 탁발수도승의 생활, 아니 그 굶는 광대의 생활, 그리고, 또한, 그 홍어의 생활은 소금보다도 더욱 더 짜디 짜고, 그 어떤 오줌보다도 더 독한 지린내(아마도 문인수의 대표작은 [쉬]가 될 것이다.)를 풍긴다. 절대로 문인수 시인의 생활은 우리 대한민국의 어린 아이들이 배워서는 안될 것이며, 만일 그가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 간병인에게 방독마스크를 씌워주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조금만 건드려도 금세 몸 둥글게 말아넣는 공벌레처럼 사는 홍어, 항상 밝은 곳이 아닌, 어두운 구석에 숨어 살며, 그 축축한 곳(사타구니)에 손을 집어넣고 한껏 비켜서서 살아온 홍어, 그 어느 누구의 악담이나 험담도 못들은 척 하고, 또, 그리고, 그 어느 누구의 손가락질과 발길질에도 두 눈 하나 끄떡하지 않고 살아온 홍어, 독한 화주와 독한 담배와 맵고 짠 고춧가루와 조선간장을 더욱 더 좋아하는 홍어, 또, 그리고, 늘 헐어 있는 위궤양때문에 쩔쩔 매면서도 그 ‘견딤의 보호색’으로 소금보다도 더욱 더 짠 소태 오줌을 간직하고 있는 홍어, 아아, 장옥관 시인이여, 이제 그대는 대학교수인 만큼----아니, 문인수 시인의 그 악마의 발톱을 맛보았던 만큼----그 홍어의 만월같은 부상이 제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그 홍어에게 술과 밥도 사주지를 말고, 또, 그리고 그 지린내 나는 ‘홍어무침’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말고, 또, 그리고 가까이 하지도 말아라. 오오, 그 지독한 오줌 냄새----.
오르한 파묵이 그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
“시라즈와 헤라트 화파의 옛 장인들은 신이 원하고 보았던 진짜 말을 그리려면 50년 동안 쉬지 않고 말을 그려야 한다고 했네. 진정한 장인이라면 50년 동안 말을 그리다 장님이 되고, 결국은 그의 손이 그가 그리던 말 그림을 외워 그리지”
라고, 그토록 아름답게 묘사한 바가 있듯이, 장옥관 시인의 [홍어]----‘문인수 시인의 시 [도다리]를 읽고’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는 더 이상의 모델이 필요 없는 눈 먼 장님의 그림(시)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문인수 시인의 초상화라고 할 수가 있다. 장옥관 시인이 문인수 시인이고, 문인수 시인이 장옥관 시인이다. 장옥관 시인은 20년 동안 봉직해오던 회사로부터 명예퇴직을 당한 이후, 더욱 더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진정으로 불멸의 시인이 되기 위하여,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뼈를 깎고 또 깎는 듯한 ‘고통의 지옥훈련과정’을 거쳐 왔던 것처럼 보인다. 우리 {애지}의 ‘장옥관 특집’(2006년 봄호)과 이 ‘명시감상’은 ‘시인 장옥관’에 대한 나의 경의의 표시이며,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 장옥관 시인에게는 또 하나의 ‘불멸의 월계관’이 씌워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나는 장옥관 시인의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행복했고, 또 행복하기만 했었다.
----반경환 {명시감상} 제1권에서